연보

Paik Nak-chung

백낙청
2002년

『정전』 영역의 공로로 원불교 교단에서 공산(空山)이라는 법호를 받음.

2001년

원불교 교전영역사업의 첫 성과로 『정전』의 새 영역본이 출간됨(『대종경』 번역작업을 계속 진행키로 함). 『흔들리는 분단체제』 일역본(『朝鮮半島統一論-搖らぐ分斷体制』)이 토오꾜오의 쿠레인(クレイン)출판사에서 간행됨. 제5회 만해상 실천상 수상.

2000년

10월 시민방송 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음.

1998년

6월 『흔들리는 분단체제』(창작과비평사) 출간. 12월 미국 뉴욕주립 빙엄튼대 페르낭 브로델 쎈터 주최 학술대회에서 주제발표(이때의 발표문을 손질하여 「한반도에서의 식민성 문제와 근대 한국의 이중과제」라는 제목으로 『창작과비평』 1999년 가을호에 수록했으며 영문으로는 2000년에 영국의 Interventions 2권 2호에 발표됨).

1997년

사돈 석여(石如) 성대경(成大慶) 교수가 청사(晴蓑)라는 아호를 지어줌.

1996년

2월 계간 『창작과비평』 창간 30주년 기념호 발행 및 축하연 개최. 3월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취임(이후 작가회의가 사단법인이 됨에 따라 초대 이사장으로 1998년 3월까지 재임). 4월 『창작과비평』 창간 3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새로운 전지구적 문명을 향하여: 민중과 민족·지역운동들의 역할’ 개최하고 기조발제문 발표.

1991년

평론선집 『현대문학을 보는 시각』(솔) 간행.

1989년

3월에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추진한 남북작가회담 문제로 경찰에 연행되었다가 불구속 입건(고은 단장은 구속), 출국이 정지됨. 문익환 목사 방북사건 관련 혐의로 국가안전기획부에 연행되고 가택수색을 받았으나 무혐의로 풀려남.

1988년

『창작과비평』이 복간되면서 다시 편집인이 되고 창작과비평사도 제 이름을 되찾음(대표 김윤수).

1987년

6월항쟁을 앞두고 『창비 1987』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무크지를 엮어냄(출간 직전에 6·29선언이 나옴으로써 당국의 제재 위험을 면했음). 9월에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민족문학작가회의로 개편되면서 고은 시인과 더불어 부회장이 됨(회장 김정한).

1986년

창작과비평사가 ‘창작사’라는 명의로 복구.

1985년

제3평론집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2』 간행. 계간지를 무단 복간했다는 구실로 문화공보부 당국은 출판사의 등록을 취소. 이에 대한 국내외의 항의와 당국을 상대로 한 김윤수 대표의 끈질긴 교섭이 이듬해까지 계속됨.

1980년

사면·복권과 함께 3월에 서울대 인문대 부교수로 복귀. 『창작과비평』 봄호에 서남동·송건호·강만길과 좌담을 했으나 계엄검열단에 의해 전문 삭제됨. 5·17 이후 7월에 계엄사에 연행되었다가 풀려났으나 『창작과비평』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결정으로 폐간됨.

1979년

2학기를 맞으며 해직교수협의회의 성명을 발표하고 관악경찰서에 10일간 구금되어 조사받음. 제2평론집 『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를 시인사에서 간행. 10·26 직후 계엄법 위반 혐의로 종로서, 중부서 등에 구금되었다가 석방됨.

1978년

첫 평론집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출간. 『8억인과의 대화』 사건 재판이 이 해 내내 진행되어 1심에서 징역 1년이 선고되었다가 2심에서 집행유예를 받고 이듬해 대법원에서 확정됨(리영희 교수는 실형 복역).

1977년

리영희 편역 『8억인과의 대화』의 발행자로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연행되었다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입건, 뒤이어 불구속 기소됨(리영희 교수는 구속). 연말에 창작과비평사 대표직에서 물러나 편집위원으로 남음.

1976년

창작과비평사 대표 취임. 이 기간에 창작과비평사는 영인본 간행, 창비아동문고 출범 등 활동범위의 적잖은 확대를 이루었으나 거듭되는 탄압과 관리부실 등으로 재정난에 시달림.

1975년

긴급조치 9호로 『창작과비평』 봄호 회수됨. 여름호도 리영희의 「베트남전쟁 3」 게재 이유로 판매금지됨. 창작과비평사에서 간행한 『신동엽전집』 관계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됨.

1974년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개헌청원지지 문인61인선언’에 참여. 이후 중앙정보부의 조사를 받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발기선언에 참가하고 뒤이어 민주회복국민선언에 서명. 후자의 일로 문교부에 의해 징계파면됨.

1972년

D. H. 로런스에 관한 박사논문 제출 뒤 귀국하여 서울대 조교수로 복직. 『창작과비평』 편집인으로도 복귀하여 그동안 창비를 맡아 고군분투하던 염무웅과 합력함. 12월에 박사학위를 받음.

1969년

중단했던 박사과정을 마치기 위해 8월에 도미. 이를 계기로 『창작과비평』은 67년말 이래 발행을 맡아주던 일조각으로부터 독립함(발행인 신 동문, 편집장 염무웅).

1968년

『사상계』에서 작가 선우휘와 대담. 마지막 2년간 선배로 따르며 가깝게 지내던 김수영 시인의 타계를 맞아 『한국일보』에 추도문을 쓰고 『현대 문학』에 「김수영의 시세계」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