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칼럼

[2002년] 밝아올 세상, 밝아진 한반도

제목을 보고 이 글이 상투적인 신년 덕담 수준을 넘어 일종의 개그가 아닐지 의심하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 의도는 어디까지나 현실을 냉철히 바라보면서 우리 삶을 진지하게 성찰해보려는 것이다.

‘어두운 세상, 썩어빠진 한국’이라 제목을 달아도 전혀 안 맞는 건 물론 아니다. 오히려 지식인답게 현실을 직시했다는 칭찬을 듣기가 더 쉬울 듯싶다. 그러나 이 나라 지식인들은 ‘어둠’을 고발하는 데 너무 익숙해졌다는 생각도 든다. 식민지시대와 분단시대를 살아오면서 고발과 저항의 임무가 무엇보다 절실했는데, 이제 민주화가 어느정도 진행되어 저항에 따른 위험부담은 줄고 새로운 사회 건설이라는 좀더 복잡한 책임이 주어진 마당에, 규탄과 경고의 목청을 높이는 일이야말로 지식인에게 그중 편하고 ‘남는 장사’가 되어버린 듯도 싶은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이 밝아올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걸 한번 제대로 탐구하는 일이 오히려 절실하다. 지금 세상이 크게 어지럽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9·11 테러사태와 뒤이은 보복전쟁을 겪은 2001년의 세계는 어둡고 괴로운 세상이었음이 분명하다.

한편 미국이라는 나라를 떠나서 생각하면 우리가 사는 세계가 9월 11일을 기해서 갑자기 어둡고 무시무시해진 것은 아니다. 전쟁과 폭력사태, 기근이나 질병으로 인한 대대적인 인명손실은 지구촌 곳곳에서 너무나 흔했으며, 실제로 동서냉전이 끝난 후의 지난 십여년 사이에 더욱 흔해졌던 터이다. 그리고 테러에 대한 보복전쟁 이전에도 미국이 이런 혼란에 직접간접으로 연루된 일 또한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니까 미국민은 9·11을 당해 싸다고 단정하려는 건 아니다. 여객기 속에서 또는 대형 건물 안에서 멋모르고 희생된 수많은 인명을 두고 희희낙락할 일은 더욱이나 아니다. 다만 대다수 미국인들에게 한껏 승리감을 안겨주었던 냉전의 종식과 사회주의진영의 붕괴가 실은 천하대란기(天下大亂期)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는 인식을 갖추자는 것이며, 9·11을 계기로 이제는 미국 본토조차 예외가 아님이 확인되었다는 시각을 갖자는 것이다.

이런 시각이 아니라면 ‘밝아올 세상’은 훨씬 허망한 이야기가 된다. 9·11 이전의 세계가 그다지 어두운 세상이 아니었다고 할 때, 그 상태를 일단 회복하는 것이 밝음에 이르는 첫걸음일 터인데, 그리 될 가망은 거의 없어 보이는 것이다. 전쟁이 다른 나라로 곧바로 확대될지 어떨지는 두고볼 일이지만, 미국 정부나 대다수 국민이 사태의 뿌리를 냉정하게 살펴서 지혜로운 대책을 내놓을 가능성은 당분간 없을 듯하다. 오히려 1950년대초의 매카시즘 열풍에 맞먹는 광적인 애국주의가 미국사회를 휩쓸고 있으며, 이미 정책과 제도의 차원에서 반민주적이고 반평화적인 장치가 자리잡은 것들도 있다. 그렇다고 이런 장치들이 미국민이든 그 누구든 각종 테러로부터의 안전을 결코 보장해줄 수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이 지금보다 밝아지려면, 세상의 어둠이 극에 달했을 때 나타날 반전의 가능성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과연 이것이 가능하며,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할까? 이에 대한 해답이 물론 내게는 없다. 다만, 세상이 어둡다고 말할 때 실제로 얼마나 어두운지를 제대로 말해야 옳다는 것이며, 동시에 이런 어둠이 계속될 위험을 ‘경고’하고 ‘고발’하는 것만으로는 오히려 어둠의 지배를 지속시키는 데 이바지할 수도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세계 속에서 한반도는 이미 밝아졌다는 주장은 또 무엇인가? 한때 눈부시던 남북화해의 꿈은 테러사태와 전쟁의 여파도 가세하여 희미해졌고, 국내에서는 어지러운 정국과 불안한 민생, 사회 곳곳에 퍼진 불신과 문학 예술 교육의 영역까지 휩쓰는 상업주의의 위세 등, 밝음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상황에서 새해를 맞고 있다.

문제는 밝음을 가늠하는 기준이다. 그리고 이제까지의 ‘밝아짐’이 ‘세상의 밝아옴’으로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먼저, 오늘의 한반도가 아프가니스탄이나 팔레스타인보다 밝은 곳임은 더말할 나위 없다. 하지만 이라크나 소말리아가 미국의 추가공격대상으로 북한보다 우선순위가 높다거나, 한국의 경제상황이 채무상환중단을 선언한 아르헨티나보다 낫다는 식으로, 우리보다 못한 나라들을 꼽으면서 위안을 찾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주목할 점은, 북한이 이라크보다 안전해지고 남한경제가 제2의 구제금융사태로 치닫고 있지 않는 오늘의 현실이 결코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민주화와 경제건설, 남북화해를 위한 수많은 국민과 민족성원들의 벅찬 노력의 결과인 것이다.

실제로 2000년의 6·15 공동선언과 그에 따른 화해조치들이 없었다면 북한은 아프가니스탄에 버금가는 ‘테러지원국’으로 지목되었을 것이다. 또한 6·15에 앞선 국내의 민주화과정이 아니었다면 남한정권 자체가 한반도의 긴장을 소망하기 십상이었을 터이며, 전투부대 해외파견에 대한 미국의 요구가 있을 경우 이를 뿌리칠 의지나 실력이 훨씬 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의 전쟁위기는 IMF사태 이후 급속히 해외의존도가 높아진 한국경제에 치명타가 되었을 게 뻔하다.

2001년 중 남북관계의 ‘답보’라는 것도 실은 원근법을 제대로 맞춰서 가늠할 필요가 있다. 2000년도의 화려한 성과들에 비하면 답보 또는 후퇴도 없지 않았지만, 6·15선언의 유효성을 남북 모두가 강조하고 있음은 물론, 공식적인 남북접촉에서부터 민간차원의 수많은 교류에 이르기까지 6·15 이전과는 판이한 분위기에서 많은 일들이 진행되었다. 특히 평양에서 열린 8·15 민족대축전은 사회 일각에서의 역풍과 일부 참석자들의 구속 등 후유증을 남겼지만, 분단 이후 최대규모의 민간차원 접촉으로서 두고두고 은근한 위력을 발휘하리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작금의 한반도 상황을 평가하는 또하나의 잣대는 우리가 과연 어떤 통일을 원하며 이를 위해 어떤 통일과정이 필요하냐는 것이다. 양측의 지도자들이 결단할 사항을 결단하고 영도할 대목에서 영도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민중의 역량이 제대로 투입될 겨를도 없이 자기들끼리의 신속한 담합을 이루어내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그야말로 ‘분단없는 분단체제’로 가는 첩경일 터이다. 실제로 2001년은 남북의 정부간 관계가 ‘답보’하는 상황에서 분단체제를 우리 힘으로 극복할 수밖에 없다는 민간측의 깨우침이 급속히 확산된 한 해였다. 평화운동이자 남한사회의 자체개혁운동을 겸하는 분단체제극복운동이 답보했던 시기가 아닌 것이다.

우리가 새해에도 이 흐름을 이어갈 수만 있다면 한반도는 전쟁지역보다 안전하고 극빈국보다 넉넉한 정도가 아니라, 심지어 미국보다도 밝고 희망찬 지역이 될 것이다. 실제로 오사마 빈 라덴의 생존여부와 관계없이 2002년 이후 미국의 안전도는 높이 평가하기 힘들다. 항공안전등급만 하더라도, 나 자신 비행기를 탄다면 한때 2등급 판정을 받았던 한국 비행기를 타지 미국국적기를 탈 생각은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세계체제의 실상에 대한 인식에서조차 미국의 언론계와 지식계는–일부 소중한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수구언론과 저질 상업주의가 판을 치는 한국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본다. 그런데도 언론을 개혁하려는 운동 같은 것은 한국보다 훨씬 미약한 실정이다. 우리가 항상 ‘선진국’을 표준으로 삼고서 그만 못한 우리 현실을 고발하고 개탄하는 타성에서 벗어나, 분단체제극복의 과정에 맞춘 개혁운동을 펼쳐나간다면 인권과 민주주의, 사회의 다양성과 인간적 포용성의 면에서도 미국이나 일본이 못 만드는 새로운 인류문화의 한 모범을 만들어내지 말라는 법도 없는 것이다.

20세기에 비해 눈에 띄게 밝아진 21세기의 한반도가 세상 전체의 밝아옴을 위해 자기 몫을 해내는 새해를 기원해본다.

 

(창비 웹매거진 20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