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칼럼

[2004년] 자력을 길러서 타력을 얻고자

여러모로 새 출발을 다짐한 해

올해는 새해 인사를 겸해 창비 이야기를 주로 할까 합니다. 지난 2003년이 창비로서 특별히 뜻깊은 해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새해를 맞아 창비가 다짐하는 이런저런 일들이 나랏일과 세상일에도 해당되는 바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지요.

아시다시피 창작과비평사는 지난 6월 말에 파주 출판도시에 새 사옥을 짓고 이사했습니다. 1966년 계간 『창작과비평』지 창간 이래 실로 37년 만에 자기 집을 갖게 된 것이지요.

입주식은 가을로 미루었다가 9월 26일에 성대하게 치렀고 이날을 계기로 회사 이름을 많은 사람의 입에 익은 ‘창비’로 바꾸기도 했습니다. 여러모로 새 출발을 다짐한 거지요.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교하(交河)면에다 문발(文發)리의 심학(尋鶴)산 기슭이라는 자리가 지닌 겹겹의 상징성에 대해서는 최원식 주간이 이 지면을 통해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 건축가 김석철 선생의 회심의 작품인 새 사옥은 심학산 끝자락을 우리 것으로 품어 안듯이 설계되어 아름다우면서도 일하는 사람들에게 편안하고 쾌적합니다. 최근에는 행정자치부, 산업자원부, 중소기업청, 매일경제신문이 공동 주관하는 ‘2003년 지식오피스’ 중소기업부문 우수상을 받기도 했지요.

출판도시가 건설됨으로써 서울 시내에서는 꿈도 꾸기 어려운 사옥을 장만한 것이 창비만은 아니겠지만, 저 자신이나 창비 식구들의 감회가 남다른 것도 사실입니다. 저로서는 무엇보다 힘든 세월을 함께해주신 여러 어른과 벗들, 수많은 독자들께 고마운 마음이 앞섭니다.

한결같되 날로 새롭게

동시에 이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창비가 이제 형편이 좀 폈다고 여기에 안주한다면 그야말로 배은이요 배신일 터이고, 다른 한편 ‘한결같되 날로 새롭게’ 자기 몫을 해나간다면 우리의 파란 많은 현대사에서 이만큼의 힘을 비축한 경우도 드물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폐간기간을 포함해 40년 가까운 역사와 무크지 형태의 변칙발행을 포함해 120호가 넘는 통권호수를 자랑하며 정기구독자만도 1만명에 육박하는 계간지의 존재는 우리 사회에서 독보적임은 물론, 외국의 지식인들도 들을 때마다 부러움을 금치 못하는 ‘한국적 현상’입니다. 단행본 출판도 1974년 출범 이래 오랫동안 고전의 연속이었습니다만 근년에는 양서간행과 기업의 사업성을 조화시키는 데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앞으로 더욱 질높은 단행본과 정기간행물을 만들어갈 물질적 기반이 제법 형성된 셈입니다.

게다가 한층 소중한 것은 계간지의 편집위원ㆍ자문위원을 비롯하여 창비의 작업에 직접간접으로 이바지하는 지식집단의 존재입니다. 정말 이만한 인력이 이만큼 화한 기운으로 뭉치기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자만을 경계한답시고 이 소중한 성취를 제대로 인식하지 않는 것은 도리어 책임회피가 될 것입니다. 그 성취야말로 ‘권력화’라는 비판에도 과민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생명 자체가 힘일진대 오히려 한껏 힘을 길러 보람있게 쓰는 것이 잘 사는 일일 테지요. 다만 가진 힘에 안주하거나 함부로 쓰는 것을 삼갈 일입니다.

안주와 남용–곧 나쁜 의미의 권력화지요–을 막는 길은 간단없는 공부와 훈련뿐일 것입니다. 그래서 창비 편집진은 지난 가을부터 편집위원과 자문위원들이 더러는 외부인사도 모시고 진행하는 월례 공부모임을 시작한 바도 있지요. 아직 시작에 불과합니다만 꾸준히 적공을 하면 여러 방면으로 그 위력이 나타나리라 믿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지난 봄에 교수직에서 은퇴하면서 창비와 더불어 보낼 시간이 조금 늘어났습니다. (많이 늘어났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사정이 있지요.) 어쨌든 시간이 더 생겼다고 이제 와서 실무에 다시 끼어드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될 터이고, 창비가 공부하는 집단이 되게끔 거드는 것이 저의 몫이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후배로부터 골치아픈 늙은이라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공부에 관한 한 군기반장 역할도 마다 않으려 하며, 그러려면 자연 다른 일에는 젊은이들만 못하더라도 배우는 일에만은 뒤지지 말아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하고 있지요.

자력 있는 곳에 타력도 따라주는 법

세상에 가득한 큰일들을 생각할 때 창비의 발전이나 다짐이 무에 그리 대단하냐고 반문할 분도 계시겠지요. 그러나 창비에 뭉친 기운이 그 자체로 귀한 것이라면 이를 대수롭지 않게 보는 것도 옳지 않으려니와, 더 중요한 점은 무릇 세상의 큰일들이 결국은 이런 작은 노력들의 축적으로 이룩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자력(自力)을 기른다고 만사가 해결되는 것은 물론 아니지요. 큰 사업에는 자력과 타력(他力)의 조화가 필요하며, 타력의 몫이 오히려 크기가 십상입니다. 창비의 역사가 그랬습니다. 직접 일을 꾸려온 사람들이 나름대로 정성을 다했습니다만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들의 공덕이 어려운 고비마다 창비를 지켜주고 키웠던 것이며, 여기에는 스스로 죄업을 지으면서 남에게 단련과 성장의 계기를 제공한 압제자들의 공헌도 가세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력으로 문제를 풀어가려는 의지가 없었다면 타력의 보우(保佑)도 없었을 게 분명합니다.

2004년 한국과 세계의 여러 난제들을 내다보면서도 그 점을 상기합니다. 나랏일을 보건대 초강대국의 간섭과 훼방이 날로 더 기승을 부리고, 초강대국조차 어찌 못하는 자본의 논리는 도처에서 생명의 논리를 압도하고 있으며 ‘민족공조’를 표방하는 북녘 정권의 그 나름으로 막대한 힘 또한 우리가 주체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자력은 아닙니다. 그러나 창비를 포함한 이 사회의 구석구석에서 먼저 자력을 기르려는 착실한 공부가 진행되지 않는다면 타력이 가세한 해결도 없을 것입니다. 반면에 자력 있는 곳에 타력도 따라주는 일, 그것은 우연한 행운이라기보다 세상의 이치에 가까운 게 아닐까요?
새해 여러분의 건강을 빌며 많은 자력을 길러 창비에도 나눠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창비 웹매거진 20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