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칼럼

[2003년] 희망의 승리를 이어가자

공포의 세계, 희망의 한반도

“희망이 공포를 무찔렀다.” 브라질 노동당의 룰라 후보가 지난 10월 28일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직후에 한 말이다. 다음 달 미국의 중간선거는 부시와 공화당의 승리로 끝났다. 그때 미국의 한 학자는 룰라의 이 말을 받아, “공포가 희망을 무찔렀다”라고 썼다.(Immanuel Wallerstein, “Bush: Fear Conquered Hope”)

세계 전체로 보면 2002년은 희망보다 공포가 득세한 시기였다. 브라질 등 몇곳의 예외가 있었지만 크게 보면 공포심이 전쟁과 테러 주창자들의 목소리를 한껏 키워준 한해였고, 빈곤과 질병의 위협 또한 줄어들기는커녕 선진국에서조차 오히려 늘어나는 경향이었다.

한반도는 어떤가? 적어도 남쪽의 경우 2002년은 희망이 확실한 승리를 거둔 지대라 말해도 무리가 없지 싶다.

부시의 ‘악의 축’ 발언이 전해진 연초의 분위기는 오히려 공포에 가까웠다. 그러나 일부 수구적 언론과 정치인들을 뺀 대다수 국민이 부시 발언을 비판했고 미국의 강경책도 얼마간 주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남북간의 교류와 협력은 서해교전 같은 대형사고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진전을 보았다. 비록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방문단 교환의 양과 질이 크게 향상했으며 이산가족의 만남도 다시 활발해졌다. 드디어는 군사분계선을 관통하는 지뢰제거와 도로연결 작업이 진행되어 경의선 철로 및 금강산 육로 개통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그사이 남한은 월드컵 기간의 범국민적 약진에 이어 부산 아시안게임도 성공적으로 치러냄으로써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졌음은 물론, 이렇게 형성된 국민들의 자신감이 분단체제하의 안정이 아니라 남북을 아우르는 ‘코리아’의 꿈으로 이어지면서 희망의 세력을 키워갔다. 12월 대통령선거의 결과는 이렇게 자라온 희망이 드디어 국내정치의 현실에서도 공포심을 이겨낸 극적인 사건이었다.

물론 이는 한반도의 절반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며 나머지 절반의 현실마저 이런 밝음을 보여줬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남북교류의 진전 자체가 북의 내부에 커다란 변화가 진행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알려진 것만 해도 배급제 폐지 등 일련의 ‘관리개선조치’와 각종 특구의 설치 같은 획기적인 내용이 많다. 역사적인 북일 정상회담의 후속과정이 난관에 처해 있고 북미관계는 최근에 더욱 험악해진 실정이지만, 2002년의 한반도가 세계에서 예외적으로 밝은 지역이 되는 데에 북 나름의 기여가 있었던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동아시아의 밝음과 한반도의 중심성

이제까지는 그랬다 치더라도, 세계 전체가 점점 더 험해지는데 유독 한반도만의 밝음이 내내 유지될 수 있을까? 원칙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봐야 옳다. 한반도 홀로만의 밝음이라면 아무래도 한시적인 것이요 결국은 세계를 뒤덮은 어둠에 묻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브라질의 예를 들었듯이 한반도가 ‘예외적’이라 해도 문자 그대로 ‘나 홀로’의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멀리 남미까지 갈 것 없이, 바로 동아시아 전체가 9·11 이후의 세계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번영하는 지역으로 부각되고 있다. 일본이 경제침체와 정치적 표류를 계속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세계에서 드물게 부유하고 안정된 나라임이 분명하며, 중국과 한국은 세계경제의 불황 속에서 각기 1, 2위의 성장률을 자랑하는 형세다. 뿐만 아니라 절반은 유럽국가인 러시아, 아직도 세계무대에 온전히 등장 못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전에는 동아시아보다 소련·동구권에 가깝던 몽골, 새로이 세계시장에 참여한 베트남 등을 아우르는 역내 국가들의 상호교류가 급속히 증대해가는 지역이 이 지역이기도 하다. 그 가운데서 한반도가 변화와 희망의 촛점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 중에서도 중국의 동해안 일대와 일본을 포함하는 동북아시아가 특히 중요한데, 바로 그 동북아의 지리적 중심에 한반도가 놓여 있다. 이런 지정학적 위치는 지난날에 열강의 침략을 초래하는 빌미가 되었지만, 오늘에는 한반도를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지역의 물류 중심지로 만들고 있다. 실제로 동북아 거점공항을 향한 인천국제공항의 순조로운 출범과 부산, 광양 등 세계적 규모 항만의 존재에다 남북한의 연결철로가 중국과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으로까지 이어지는 상황마저 가세한다면, 한반도는 그런 물류중심지로서의 기반을 완비하는 셈이다.

물류에서만 아니고 정신의 흐름에서도 한국은 이미 동아시아의 부러움을 사는 개혁선도국으로 떠올랐다. 이 개혁의 물결이 성공적인 분단체제극복 사업으로 연결된다면 한반도가 전세계의 도덕적 중심에 서게 될 것이다. 반면에 원활해진 물류에 힘입어 한반도와 중국 전체가 기존의 패러다임에 의한 경제성장에 매진할 경우, 동북아뿐 아니라 전세계가 환경파괴의 재앙을 맞을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단순한 ‘분단극복’이 아니라 분단시대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분단체제극복’을 거듭 강조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2003년 벽두의 위기를 넘어

한반도의 밝은 전망에 결정적으로 먹구름을 드리우는 것이 북핵 문제를 둘러싼 2003년 벽두의 위기상황이다. 최악의 경우에 미국의 강경일변도 노선과 북의 무절제한 벼랑끝전술이 한반도를 다시 불바다로 만들고 동북아와 세계 경제를 파국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최악의 씨나리오’를 감안은 하되 공포에 정복당하지 말아야 한다. 실제로 한국의 대통령선거에서 국민들이 공포를 뿌리치고 희망과 자주를 선택함으로써 원래의 ‘최악의 씨나리오’ 중에서 핵심요소 하나가 제거된 형국이다. 이제 미국이 섣부른 군사행동을 취하면서 한국정부의 동조를 얻어낼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북측 또한 외교적 모험을 하되 남쪽 대중의 주체적 판단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염려를 거둘 수 없는 것은 아직껏 한국의 역량에 엄연한 한계가 있어서만이 아니라, 북미 두 당사자 모두가 정상적인 상태라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미국으로 말하면 그동안 우리에게는―아니,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정상(正常)’의 표준처럼 인식되어왔다. 그것이 본디 정확한 인식이었는지 어땠는지를 떠나서, 9.11 이후의 미국이 그전의 미국이 아닌 것만은 사실이다. 우리가 미국을 걱정해주면 마치 쥐가 고양이 걱정해주는 것 같다고 웃을 사람도 있겠으나, 미국이야말로 세계인의 보살핌을 요하는 딱한 상태임을 인식하면서 지혜롭게 대응하고 대비해야 할 싯점인 것이다.

북의 경우는 원래 분단체제의 일부로서 남북이 모두 정상국가와 거리가 있게 마련이지만, 남쪽의 국가기구가 지난 십여년간 민주화를 겪으면서 그 비정상성을 많이 털어낸 반면, 북측은 안팎으로 체제존속이 위협받는 가운데 국가기구의 개혁이 부진했던 셈이다. 이에 따른 온갖 문제들은 분단체제극복의 과정에서 냉정한 분석이 필요하리라 본다.

하지만 북핵문제의 해결방안 자체만을 본다면, 문서를 통한 상호불가침 보장과 핵개발포기를 동시에 타결하자는 제안이, 평화적으로 해결하겠지만 해결이 되기 전에는 대화를 않겠다는 자세보다 합리적인 것이라 생각된다. 이른바 벼랑끝전술도, 그것이 한국을 따돌리고 미국하고만 거래한다는 통미봉남(通美封南) 노선의 부활이라면 용납할 수 없지만, 미국의 역할이 압도적인 상황에서 미국정책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필사적인 모험으로 이해 못할 바 아니다. 다만 벼랑 너머로의 실족 가능성을 배제해도 좋을 만한 현실은 아니라는 냉철한 인식이 필요한 것이다.

실제로 ‘최악의 씨나리오’보다 나은 대안들이 미국의 정치인과 연구자들에서부터 유럽, 러시아, 중국 등의 민·관에 이르기까지 벌써 여러개 나와 있다. 따라서 이미 만만찮은 경제력과 군사력을 지닌 한국이 국민적 자신감을 바탕으로 일정한 정치적 자주력마저 발휘한다면, 최악을 피할 확률은 높다고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이 북미 어느 쪽에도 휘둘리지 않으면서 양쪽 모두와 대화가 통하는 상대로 남아 있어야 할 것이며, 특히 경제제재를 구실로 남북간에 합의된 협력마저 중단시키려는 외세의 요구에 결연히 항거해야 할 것이다. 2003년의 한반도는 또 한번 희망이 공포를 무찌르는 현장이 되어야 한다.

물론 그것이 희망의 최종 승리는 아닐 것이다. 분단체제의 극복이란 본질상 위험을 수반하는 지속적인 과정이며, 더구나 세계체제가 당분간 더욱 혼란스럽고 위태로워지는 위기국면 속에서 진행되어야 할 과정이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든 브라질에서든 또다른 어느 곳에서든 공포의 현실성을 직시하면서 희망의 승리를 일궈내는 경험이 축적될 때―그리고 이런 축적을 통해서만―돈보다 사람이 주인노릇 하는 새세상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창비 웹매거진 20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