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칼럼

[2001년] 2001년 새해를 맞아

창비를 아껴주시는 나라 안팎의 수많은 독자와 벗님들 안녕하신지요? 2001년 새해를 맞아 감사와 축복의 인사를 올립니다. 아무쪼록 새해에 모두들 건강하시고 복을 많이 누리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인사드리는 순간, 현실은 새해라고 해서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며 숙연해지기도 합니다. 누구 탓이든 이 세상에는 건강을 잃어 고통받는 이, 경제난국을 맞아 억울하고 서러운 날을 보내는 이, 참혹한 사고의 상처가 아물 줄 모르는 이들이 지난해에도 많았고 새해에도 없을 수가 없을 테지요.

그렇더라도 새해의 덕담이 빈말일 필요는 없습니다. 정성 모아 비는 마음이 헛되지만은 않을 것이고요. 감사하고 축복하는 가운데 우선 나 자신의 기운이 새로워지며, 이렇게 새로워진 기운들이 모이고 뭉칠 때 뜻밖의 위력을 나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진짜 21세기의 첫날이 되는 2001년 1월 1일 아침, 복된 새해와 밝은 새세상을 우리 함께 기원하십시다.

실제로 한반도에는 새로운 기운이 감돌고 있다는 것이 저의 소신입니다. 몇해 전부터 그런 생각이어서, 1998년에 펴낸 책에 ‘흔들리는 분단체제’라는 제목을 달기도 했었지요. 지난 6월의 남북공동선언과 그후의 사태진전은 저의 이런 생각을 신념으로 굳혀주었습니다.

물론 정상회담이나 흩어진 가족들의 만남 같은 대사건의 감격조차 얼마 안 가 잊혀질 만큼 우리 사회의 혼란과 좌절도 극심했습니다. 그러나 감격에 들떴던 기분을 가라앉히는 정도가 아니라 사건의 의의조차 망각한다고 하면 그건 잘하는 짓이 아니지요. ‘편집인의 글’을 쓰면서도 밝히곤 했습니다만 저는 요즘 남한사회의 혼란이 우리를 수십년간 옥죄던 분단체제가 결정적으로 기우뚱거리게 된 결과라고 믿고 있는데, 너무 쉽게 감격했다가 너무 일찍 좌절하는 것도 분단체제의 존재를 잊고 살아온 타성 때문인지 몰라요.

그래서 저는 한반도의 새 기운을 말할 때, 사회과학적 엄밀성을 표방한다는 분들이 어설픈 낙관론이라고 비판하더라도 크게 신경쓰지 않습니다. 한반도의 현실이 2000년 한 해가 입증한 것만큼 역동적이고 가변적임을 설명해준, 아니 지금이라도 설명해주는 사회과학자가 과연 몇이나 되는가요? 남북관계의 극적인 변화말고 남한 내의 ‘혼란상’만 보더라도, 수만명 의사들이 반정부투쟁에 행동으로 나서고 수천명의 은행직원들이 일주일씩 농성투쟁을 벌이는 일은 지금 이땅에서나 볼 수 있는 세계적인 진풍경입니다. 그 동기가 무엇이고 성과가 어떠했든지간에 말이지요.

이런 새 기운이 한반도에만 국한될 리도 없습니다. 세계체제가 온통 격동과 혼란과 그에 따른 극단적 가변성(可變性)의 시기로 접어든 가운데 한반도에서는 그 조짐이 더욱 극적으로, 게다가 실은 더욱 복되게 드러나고 있을 뿐이지요. 바로 이런 새 기운을 억누르려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최대의 무기가 기존체제와 그 경쟁논리 외에 ‘대안이 없다’는 논리지요. (영어로 ‘There is no alternative’라고 하면서 이것이 무슨 정리[定理]라도 되는 듯 TINA라는 약어를 만들어 쓰기까지 합니다.) 21세기는 이 논리가 무너지는 시대가 될 것이며, 2001년은 우리의 주체적 실천으로 그 논리를 무너뜨리는 작업이 적어도 한반도에서는 본격화되는 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난해 창비 자유게시판을 포함한 우리 사회의 뜨거운 화제가 된 ‘문화권력’ 논의도 이런 큰 움직임 속에서 봐야 하리라고 믿어요. 그러지 않을 경우 논의의 흐름에서 염려스러운 바가 적지 않을 테고, 창비의 입장에서는 섭섭한 대목도 있을 법하지요. 수많은 사람들의 오랜 정성이 모여 이 사회에서 그나마 약간의 힘을 겨우겨우 쌓아놓자 곧바로 ‘권력’이니까 해체하라는 다그침이 들려오는 형국이니까요. 게다가 별로 가당치도 않게 ‘3대 계간지’니 뭐니 하고 묶이면서 그중에서도 최대의 표적으로 선정되는 일마저 없지 않았거든요.

그러나 이런 시달림 또한, 80년대 급진적인 소장세대의 공세가 그러했듯이, 시대정신(좀 낡은 표현이긴 하지요!)이랄까, 여하튼 어떤 큰 기운의 작용이라는 게 저의 인식입니다. 창비로서는 혹은 자기반성의 계기로 삼으며, 혹은 좀더 정교한 설득의 논리를 펼치고, 혹은 그냥 한 세월 더 지나기를 기다리면서 이겨내야 할 현실입니다.

자기반성을 위해서든 설득을 위해서든 ‘권력’이라는 낱말을 한번 되새겨볼 필요는 있겠지요. 요즘의 권력론은 서양인의 담론을 빌려오는 수가 많은데 이때 영어의 power나 불어의 le pouvoir라는 낱말을 ‘권력’으로 옮기는 것부터가 문제가 아닌가 싶어요. 우리말로는 ‘권세 권(權)’자가 들어가면 거의 자동적으로 어떤 특권적인 자리를 차지하거나 권세를 잡음으로써 생기는 특별한 힘을 연상하기 쉬우니까요.

물론 미셸 푸꼬를 포함한 현대의 많은 ‘권력’비판론자들이 좁은 의미의 권력뿐 아니라 거의 모든 종류의 힘 내지 권능을 해체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 같기는 해요. 저는 이런 담론으로는 ‘권력의 비판자이기보다 권력의 기록자’(에드워드 싸이드가 푸꼬를 두고 했던 말)에 그칠 위험이 크다고 보는데, 아무튼 우리 동양의 오랜 사고방식과는 많이 다른 거지요. 우리는 권좌에 오르기보다 옳은 길을 걸음으로써 저절로 얻는 힘을 ‘덕’이라 했고, 이런 힘이 개인의 내공으로만 끝나지 않고 사회적인 세력이 될 수 있음을 ‘덕불고 필유린(德不孤必有隣)’―덕은 외롭지 않으니 반드시 이웃이 있다라는 말로 표현해왔던 겁니다.

그들 나름으로 쌓아서 행사하는 힘을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비판할 적에, 첫째는 어떤 개념이 동원되고 있는지 스스로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며, 둘째로는 가급적 우리 어법과 사고방식에 친숙한 표현을 썼으면 하는 거지요.

창비로 말하면 지난해 문화권력 논의의 큰 쟁점들이었던 언론개혁 문제라든가 학자적 양심의 문제, 작가적 양식의 문제에서 결코 부당한 권력의 편에 선 일이 없음을 확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나침을 경계해서 우리 나름의 중도를 택한 것은 잘한 짓이겠지만, 힘이 모자라서 할 일을 미처 못했다거나 심지어 ‘덕불고 필유린’의 진리를 불신하여 몸을 너무 사린 경우는 반성해 마땅하지요. 곧잘 쓰이는 빈말로서가 아니라 원래의 말뜻 그대로 ‘부덕의 소치’인 것입니다.

이 글은 제가 달마다 자유게시판에 쓰는 연속물의 하나입니다만, 이번에는 게시판뿐 아니라 디지털창비 이용자 전원에게 보내는 신년인사를 겸하도록 해달라는 회사 측의 요구에 따른 것이기에, 좀더 구체적이고 솔직한 논의는 다른 기회로 미룹니다. 대신, 새해에 창비가 벌이는 몇가지 쇄신의 움직임을 전하도록 하지요.

먼저 편집진의 보강입니다. 그동안 자문위원이던 유재건, 한기욱 두분이 새해부터 편집위원으로 활약하게 됐고, 자문위원회에는 소광섭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와 시인 나희덕씨, 중국현대문학 전공자 이욱연 교수(영동대)가 새로 합류합니다. 인원보강과 함께 편집진 내부의 협동체계를 강화하는 방안을 구상중이고요. 계간지 봄호 지면에서도 변화의 기미가 조금은 엿보이기를 바랍니다.

경영과 관리 면에서는 평사원 출신의 40대 사장이 재작년에 취임한 이래 많은 내부 정비와 쇄신을 단행해왔지요. 새해에는 더욱 알찬 회사로 다져나갈 것이 기대됩니다. 고세현 사장이 생각하는 ‘알찬 회사’란, 물론 이윤을 남겨야 되지만 덮어놓고 이윤을 많이 남기려 들기보다는 창비가 본디 구실을 해내자면 언제든지 닥칠 것을 각오해야 하는 역풍에 덜 흔들리고 견딜 단단한 사업체라는 뜻인 걸로 압니다. 편집진의 다짐과도 일치하는 발상이지요.

끝으로 네티즌 여러분이 특별한 관심을 가지실 한가지를 말씀드리면, 창비 홈페이지의 확대 강화도 곧 실행에 옮겨질 겁니다. 작년에 이미 ‘기획부’를 신설하여 인터넷 관련 업무를 관장케 했고 전문인력도 영입했는데, 올해는 그 열매가 맺기 시작할 모양이에요. ‘창비 웹진’(가칭) 같은 것도 준비중이랍니다. 얼마나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할는지는 두고봐야겠습니다만, 저로서는 이를 통해 IMF 때 부득이 중단했던 ‘창비문화’의 공백을 메워줌은 물론, 올해부터 열리는 ‘다채널 쌍방향성’의 위성방송시대에 민중들이 최대한으로 참여할 수 있는 예비훈련을 겸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난 반년간 자유게시판을 출입하면서 저 자신 참으로 공부가 많이 되었습니다. 게시판의 분위기가 점점 좋아져서 이제는 생각있는 네티즌이면 누구나 자주 들러봄직한 싸이트로 자리잡힌 것이 무엇보다 뿌듯한 일이고요, 창비 게시판만 아니라 다른 어떤 통제 안된 만남의 공간이라도, 우리가 신심을 갖고 정성을 쏟으면 앞으로 더욱더 훌륭한 대화의 터전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도 생깁니다. 그동안 바쁜 시간 쪼개가며 성의있는 글을 올려주신 많은 분들께 우선 감사할 일이지만, 서두에 말씀드린 우리 시대의 새 기운과도 무관한 일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다시 한번 여러분의 건강하고 보람찬 2001년과 21세기를 기원하며 이만 줄입니다.

 

2001년 1월 1일 백낙청 드림
(수록지면: 디지털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