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칼럼

[2006년] 6·15시대의 대한민국

2005년도 꽤나 어수선한 분위기로 넘어갔지만 오랜만에 이룩된 남북관계의 큰 진전이 뜻깊었던 해로 남을 것이다. 분단시대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6·15공동선언이 그 5주년을 계기로 확실하게 힘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6·15공동선언은 그 사이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 2005년의 성취가 컸다고 해서 평화와 통일의 길이 마냥 순탄해진 것은 아니다. 6자회담의 일차적 성과인 9.19공동성명 이후 북미관계는 다시 삐걱거리는 상황이며, 한국사회는 연말의 엄청난 폭설피해를 차치하고도 온갖 혼란에 휩싸인 채 새해를 맞았다. 바야흐로 대한민국은 한바탕 자체정비를 않고는 지탱해가기 힘들겠다는 느낌이다.

전세계의 조명에 노출된 가운데 온 나라가 들끓었던 황우석 교수 사건만 해도 그렇다. 이것이 어찌 욕심이 넘치고 진실성이 부족한 몇몇 연구자만의 문제겠는가. 청와대를 비롯한 정부의 유관부서들, 정치권과 언론, 학계와 일반시민들의 갖가지 타성과 문제점이 이 기회에 드러난 것을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그나마 진실규명과 자기반성의 실마리가 우리 내부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용기를 얻고, 역설적이지만 이런 규모의 국제 사기사건이 아무 데서나 일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추가적 위안으로 삼으면서, 드러난 모든 문제를 바로잡을 전면적 개혁에 매진할 필요가 절실하다.

개혁운동의 자기개혁을 포함하는 총체적 개혁을

황우석 사건만큼 주목을 끌지는 못했지만, 지난 12월 21일 서울고등법원이 계속진행을 판결한 새만금 문제도 비슷한 예이다. 1심 재판부가 수질오염의 개연성, 농지조성의 무모함 등을 모처럼 진지하게 검토하여 내린 결정을 상급심이 낡은 논리를 총동원하여 뒤집은 것인데, 이 또한 일부 법관이나 한국 사법부의 문제일 수만은 없다. 환경의 재앙일뿐더러 경제성도 없는 초대형 간척사업을 애당초 정략적으로 추진한 정치지도자들로부터 이제는 그게 환상이요 정략이었음을 알아차리고도 아무런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현 정권의 수뇌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간척사업에 걸린 자신들의 단기적 이해관계를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세력들과 이들의 책동을 방조해온 학계·언론계·종교계의 수많은 인사들을 포함하여, 새만금문제는 이 사회에 총체적인 개혁이 필요함을 일깨워주는 또하나의 사례이다.

그나마 환경운동의 강력한 문제제기로 이만큼의 공론화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새만금 간척사업을 반대해온 한 사람으로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총체적 개혁’에는 반대운동의 자기개혁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소중한 자연환경을 보존하고 무모한 개발을 막아야 한다는 명분이야 나무랄 데 없지만, 원상보존 외에는 어떤 대안도 거부한 채 대의명분만 부르짖는 것이 과연 새만금 갯벌의 무수한 생령을 위하는 길이었는가? 비록 오도된 민심일지라도 남들과 대등하게 잘살아보겠다는 지역주민들의 염원마저 백안시하는 것이 진정한 생명존중의 자세였는가?

부안 갯가에서 서울 시청광장까지 네 분 성직자가 수행한 삼보일배 순례가 단지 물막이공사 반대를 더 하려하게 제기하는 수단만은 아니었을 터이다. 우리 마음속의 온갖 독심(毒心)을 참회하고 씻어내자는 호소였다고 믿는다. 물론 우리들 모두가 알게모르게 젖어든 개발지상주의가 일차적인 참회대상이었지만, 환경운동가들이 곧잘 빠져드는 독선이나 오만도 예외일 수 없을 터이다. 그리고 이 교훈이 딱히 환경운동에만 국한될 이유도 없다.

아무튼 새만금에서 방조제 완공과 그로 인한 뭇 생명의 죽음이 눈앞에 다가온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개인적·집단적 삶에 전면적인 쇄신을 이룩할 때이다. 그런데 쇄신은 어느 시기에나 필요한 것이지만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전면적인 개혁이 남달리 요구되는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바로 ‘6·15시대’라는 역사적 국면 때문인 것이다.

2000년 6월의 감격과 거의 동시에 의료대란 등 한국사회의 각종 내부갈등이 폭발한 것은 남북대결 상태에서 꾹꾹 눌러놨던 분단체제의 뚜껑이 열렸던 탓이며, 6·15공동선언이 제시한 한반도 특유의 통일과정이 빈말이 아님을 실감한 올해 하반기에 이른바 남남갈등이 전에 없이 고조되었다는 사실도 6·15시대가 격변기임을 확인해주는 사항이다. 고착된 분단구조에 적응하여 유지되던 온갖 사고와 감정, 관행과 제도 들이 바뀔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6·15시대의 참 진보는 ‘변혁적 중도주의’

나는 6·15시대를 ‘분단체제의 해체기’로 규정하기도 했지만, 굳이 ‘분단체제’라는 복잡한 개념을 동원하지 않고 말한다면 ‘남북의 점진적 통합과정과 연계된 총체적 개혁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것이 기존의 여러 개혁 내지 변혁 담론과 어떤 차이를 지니는가?

먼저, ‘남북의 점진적 통합과정’을 결정적인 변수로 포함시키지 않는 온갖 진보담론과의 차별성이 부각된다. 민중권력을 주창하고 양극화를 비판하는 훌륭한 말들이 아무리 쏟아져도 한반도의 통일문제를 외면하거나 경시하는 대응책에 머무는 한 참된 진보와는 거리가 멀게 마련이다. 아니, 자칫하면 사람들을 분단체제에 길들이는 작용에 가세하기 쉽다.

반면에 대한민국의 상대적 독자성과 이에 근거한 국내 개혁과제들의 절실성을 무시한 채 온갖 문제를 국내외 ‘반통일세력’의 책동으로 간주하는 통일지상주의 역시 실질적인 진보를 이룩하지 못한다. 한반도의 분단구조는 참으로 뿌리깊고 복합적인 것이어서, 이 현실을 통찰하며 필요한 개혁작업을 도처에서 진행하지 않을 때 통일주장마저 분단체제의 재생산에 복무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진보’의 개념이 혼란스러운 것은 분단 한반도가 기존 교과서의 ‘진보’ 잣대가 그대로 통할 수 없는 특이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른바 진보진영에서는 여전히 80년대 급진운동권의 NL(민족해방파) 대 PD(민중민주파) 논쟁에서와 같은 상반된 두 개의 단순논리가 각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 이들 양자의 급진성과 비현실성을 거부하고 ‘현실적’인 대안제시에 주력한다는 이른바 온건개혁세력은 ‘총체적 개혁’에 미달하는 부분적인 변화, 흔히는 자신의 기득권을 덮어둔 편의적인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그 또한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남북의 점진적 통합과정과 연계된 총체적 개혁’의 성공은 이들 3자의 슬기로운 결합을 요구한다. 2자의 결합도 난망인데 어떻게 3자씩이나 결합하느냐고 할지 모르나, 3자가 원만하게 합칠 때만 2자의 결합이 가능해지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가령 NL과 PD의 오랜 갈등은 분단체제의 변혁이라는 대의를 위해 온건개혁세력하고도 손잡는 3자연대 속에서만 조정될 수 있으며, 중산층 민주주의와 민중적 민주주의 간의 절충은 남북의 점진적 통합에 적극 참여하는 진정한 ‘민족대단결’의 일부가 될 때 비로소 진정한 ‘중도(中道)’에 이를 수 있다.

‘변혁적 중도주의’라 부름직한 이러한 결합이야말로 오늘의 대한민국에 필요한 참된 진보노선이다. 한반도 주민들에게 닥친 최대의 변혁과제가 분단체제의 극복이기 때문인데, 이 변혁이 전쟁이나 다른 어떤 급격한 방식을 통해서는 안되며 광범위한 대중이 참여하는 점진적 과정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중도주의’ 노선이 불가피해지는 한편, 기존의 잣대에 따른 ‘좌’와 ‘우’ 사이의 중간지점을 찾는 것이 아니라 분단체제극복을 겨냥한 합작이라는 점에서 ‘변혁적’인 중도주의인 것이다.

40주년을 맞은 창비의 다짐

올해 1월에 계간지 창간 40주년을 맞이하는 창비는 이러한 인식을 갖고 대대적인 자기쇄신을 다짐하고 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도, 변화의 흐름을 읽어내는 열린 마음과 밝은 눈을 연마하며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려는 헌신성, 그런 의미에서의 ‘운동성’을 강화하는 일이 필요하다. 창비 사업에 종사하는 각자가 한반도의 일대 변혁에 걸맞게 자신을 바꾸면서 대한민국을 총체적으로 개혁하는 작업에 동참할 때인 것이다. 40년 전 창간시절의 초심을 되새기면서 독자 여러분의 변함없는 애정과 성원을 부탁드린다.

 

백낙청 / 계간 <창작과비평> 편집인, 6·15민족공동위 남측 상임대표

(창비 웹매거진 20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