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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1

사실은 몇해 전 「민족문학의 현단계」라는 글을 발표하던 때부터 첫 평론집을 낼 생각이 있었다. 얼마 안 가 그 글이 실린 잡지마저 거두어들여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지만, 평론집의 제목도 ‘민족문학의 현단계’로 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내용에 걸맞은 제목이라서보다, 평론가는 그 직접적 소재를 어디서 구하든간에 결국 우리 문학과 역사의 ‘현단계’에 대해 발언해야 하고 우리의 경우 그것은 ‘민족’의 문제에 초점이 맞춰져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세월은 여전히 3년 전의 그 빈약한 발언조차 용납하지 않고 있고, 나로서는 새로이 써낸 것도 별로 많지 않은 터에 용납 안될 글이라고 빼가면서까지 책을 낼 것이 무엇이랴 싶어 그사이 몇분의 따뜻한 권유도 마다해왔다. 그러다가 이제 느닷없이 제목만 더 거창해진 평론집을 내는 것은 무엇보다도 나 자신의 새출발을 다짐하는 뜻에서다. 최근 들어 신변의 힘겨운 일들이 얼마간 정돈되었기에, 그간에 쓴 글에 대해서도 미흡한 대로 일단의 정리를 해냄으로써 앞으로 좀더 공부다운 공부를 하고 글다운 글을 쓸 자세를 가다듬어보고 싶었다.

다섯 부분으로 나뉜 이 책 중 제2부의 세 편과 「민족문학의 현단계」를 합치면 근년의 나의 문학적 입장이 대충 드러나는 셈이다. 제1부는 말하자면 그 준비과정이며, 제3부와 4부에는 그동안 쓴 비교적 짧은 글들을 각기 연대순으로 간추렸다. 마지막 부분의 긴 글은 그것이 『창작과비평』 창간호의 권두논문이므로 꼭 실어야 한다는 주위의 설득이 없었더라면 나로서는 뺐을 것이다. 십수년 전 자기의 무지와 허세를 새삼스레 광고한다는 것은 그리 달가운 일이 못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 자체의 됨됨이를 떠나서 본다면, 뒤이어 여러 사람과의 소중한 만남과 고마운 깨우침 들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냥 내버리고 싶은 생각만은 아니다. 독자들도 애정에 다름아닌 엄정한 비판의 눈으로 읽어주기를 바라면서 다시 내놓거니와, 사실인즉 그보다는 좀 낫다고 자부하는 딴 글들에 대해서도 그 이상의 말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누구나 자기만의 특출한 안목이나 식견을 내세워서는 오래 지탱할 길이 없겠지만, 특히 남의 작품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이 본업인 평론가로서는 작가를 포함한 모든 독자들과 주고받는 애정에 의지할 필요가 더욱 절실한 것이다.

이 책이 나오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이번에 창작과비평사의 어려운 살림을 떠맡은 염무웅 형의 결단과 권면에 의한 것이다. 교정 및 제작 과정에서는 그동안 창비사 편집부의 온갖 궂은 일들을 도맡아온 정해렴 형의 수고가 특히 많았다. 또한, 여기 실린 글들이 씌어진 지난 십여년간, 그나마의 활동과 성장이 가능했던 것이 몇몇 벗들의 뜨거운 보살핌과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수많은 분들의 음덕에 힘입은 바 컸음을 기억하면서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하고자 한다.

1978년 3월 1일
지은이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