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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록] ‘창비’ 10년: 회고와 반성

창간 10주년 기념 좌담회

신동문(시인, 『창작과비평』 전 발행인)

이호철(소설가)

신경림(시인)

염무웅(문학평론가)

백낙청(평론가, 『창작과비평』 발행인)

1976년 1월 30일

*이 좌담은 『창작과비평』 1976년 봄호에 수록된 것이다.
 
백낙청 바쁘신데 이렇게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창작과비평』이 이번호로 창간 10주년 기념호가 됩니다. 실제로 창간호가 나온 날짜는 1966년 1월 15일로 벌써 10년 하고도 보름 정도가 되었습니다만, 잡지로서는 이번 봄호가 제11권 제1호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축도 할 겸, 지나간 일들을 되돌아보며 앞날을 설계할 겸해서, 이런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우선, 얼마 전까지 창작과비평사의 대표로서 저희 ‘창비’를 이끌어주신 신동문(辛東門) 선생을 모셨고, 아울러 창간호 집필자 가운데서 작가 이호철(李浩哲) 선생, 또 본사가 제정한 만해문학상 제1회 수상자인 시인 신경림(申庚林) 선생, 그리고 그동안 저와 함께 편집에 관여해온 평론가 염무웅(廉武雄) 선생이 나와주셨습니다.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주로 저희 잡지 『창작과비평』이 지난 10년간 걸어온 길을 돌이켜보면서 자기반성과 비판을 겸한 말씀들을 들려주셨으면 하고, 그러는 가운데 자연 우리 문학 전반에 걸쳐서도 유익한 말씀들이 나오리라고 믿습니다. 모두들 격의 없는 사이니만큼 정식 좌담회라기보다 일종의 방담이랄까, 자유롭게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먼저 창간호에 집필해주셨던 이선생님께서 당시의 일에 대해 생각나시는 대로 말씀해주시지요.

[사진 설명] 왼쪽부터 염무웅 신동문 백낙청 이호철 신경림

창간 때는 엉뚱하다는 생각도

이호철 우선 창비가 10주년이 되었다는 것이 참 감개무량하고, 벌써 10년이 지났는가 하고 새삼 지난 10년간을 돌이켜보게 됩니다. 지금 기억하건대 65년 가을쯤으로 짐작됩니다. 백선생이 문학잡지를 계간지로 할 의향을 제게 비친 일이 있었지요. 그때 제가 혼자 생각하기를, 솔직한 이야기가, 백선생이 그 당시 아직 한국문단에 자상하게 익숙해 있는 분도 아니고 또 제가 그때 알기로는 외국에서 돌아온 지도 얼마 안된 때였고, 그래서 조금 엉뚱하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지요. 그런데 그때 몇 번 만나서 제목 같은 것도 의논하고…… 제목은 그때 어느 중국집에서 만났을 때 백선생이 『창작과비평』이 어떻겠느냐는 말을 했던 것 같은데, 명동 어느 중국집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후 창간 준비를 하면서 저한테도 소설을 청탁했지요. 거듭 이야깁니다만, 그때 백선생이 문학지를 하겠다는 데 대해 반신반의하면서도 어느 한 모서리, 퍽 좋은 잡지가 나올 것 같다는 기대도 없지 않았어요. 그런데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금 기억납니다만 백선생 댁에서 백선생이 창간호에 발표하신 평론을 원고로 읽을 기회가 있었지요. 그런데 본인을 옆에 앉혀놓고 이런 말을 하기는 무엇합니다만 그 글을 읽고 비로소 이건 역시 수월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이런 느낌을 가졌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그후 10년 동안을 지나며 여러가지 일이 있었습니다만 새삼 돌아보건대 그때 그렇게 느꼈던 저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했고 한국문단에 기여한 바도 유형무형으로 크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백낙청 이선생님께서 과분한 말씀을 해주셨는데, 제 스스로 생각해봐도 창간 때 어설픈 점이 많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당시 제가 한국문단이나 사회에 대해 너무나 몰랐고, 또 이선생께서 반신반의하셨다고 하지만 저로서도 그후에 일어난 여러가지 어려움들을 그때 예견했다면 과연 창간을 결행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철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면이 많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잡지가 온갖 시련을 이겨내며 오늘까지 견뎌온 것은 창간 당시에 이선생님을 비롯하여 문단 안팎의 여러분들이 도와주셨고, 그후에 얼마 안되어 염무웅 선생 같은 분이 편집에 참여하셨고, 그밖에 여기 계신 신동문 선생이나 신경림 선생 이외에도 수많은 분들이 도움을 아끼지 않으신 덕분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신동문 선생님께서는 그 당시에 저희와 가깝게 지내시며 여러모로 도와는 주셨지만 선생님 자신이 딴 잡지를 하나 준비하고 계셨지요?

신동문 네. 원응서(元應瑞)씨가 하시던 『문학(文學)』이라는 잡진데, 제가 근무하던 신구문화사(新丘文化社)에서 인수하여 속간할 계획이었지요. 그래서 만나기는 자주 만나면서도 직접 창간 당시에 참여를 못했고, 그후에도 별 도움을 못 드렸습니다만, 백선생이 외국에 나가는 바람에 일시적으로 위임을 맡았던 건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백선생 사정이 외국에 나가지 않아도 될 형편이어서 줄곧 이 잡지를 맡아왔더라면 10주년을 맞은 오늘날 이 잡지가 좀더 발전을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 이유는 제가 그걸 맡았다고 하지만 그때도 염무웅 선생이 실무진으로서 그 일을 하다시피 한 것이고 또 염선생이 실무를 안 보고 나 혼자서 그걸 맡았다고 한다면 여러가지 차질이 많이 생겼을 겁니다. 솔직히 얘기해서 가령 결권(缺卷)이 됐더라도 더 됐을 것이고……(웃음) 그 당시의 애로를 모두 다 이야기하자면 특정인의 이름이 나오니까 그만두기로 하고, 여하간 염형이 뒤에서 적극적으로 채찍질을 해주니까 그런대로 견뎌냈던 거지요. 그런데 이제 10년이 됐다 하니 먼저 생각나는 점은, 우리나라에서 문학잡지를 했다고 하면 평균적인 수명이 10년은 고사하고 2년 아니면 3년입니다. 물론 안 그런 잡지도 있지만 그 많이 생겼던 잡지들의 대부분이 길어야 2년 아니면 3년이에요. 또 우리나라 실정에서는 당연한 것 같아요. 그래서 백선생이 처음에 창간하실 때 아까 이선생도 좀 엉뚱한 것 같다고 생각하셨다는데, 나도 과연 얼마나 갈 건가, 이렇게 생각했는데 10년이 됐단 말이에요. 그러면서 그 10년 동안 우리나라 문단에 『창작과비평』이 끼친 영향이라는 게 10년이라는 세월보다도 더 뭔가 막중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들이 하던 잡지를 가지고 자화자찬을 해서 안됐는데(웃음) 지금 10주년이 돼서 우리들이 여기 모여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참말로 감개무량합니다.

백낙청 제가 줄곧 잡지 일을 보아왔으면 더 발전했으리라는 것은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고 봅니다만, 염형이 아니었더라면 결권이 쏟아져 나왔으리라는 말씀은 정말인가요?(웃음) 한데 거기에 대한 염선생의 답변을 듣기 전에 신(辛)선생님이 ‘창비’ 발행인이 되시기 이전에 있었던 ‘창비’ 발행의 역사 비슷한 것을 대강 짚고 넘어가기로 하지요. 이 『창작과비평』이라는 잡지가 오늘까지 자라오는 동안 무수한 사람들의 신세를 졌습니다. 딱히 표가 안 나게 도와주신 분들은 새삼 말할 것도 없고 발행업무의 문제에서부터 여러 군데 폐를 끼쳤지요. 우선 창간할 때, 우리가 회사를 차릴 돈이 있습니까, 능력이 있습니까, 어찌어찌 아는 분들의 소개를 받아 당시 문우출판사(文友出版社)의 오영근(吳永斤) 사장께 발행책임을 의탁했었지요. 사무실이 처음에 공평동에 있다가 나중에 충정로 쪽으로 옮겼지요. 그러다가 한 2년 후 문우출판사에 사정이 생겨 통권 8호 때부터 일조각(一潮閣) 한만년(韓萬年) 사장의 신세를 졌지요. 거기서 다시 2년가량 있다가 제가 잠시 외국에 나가면서, 그때 편집에 관여하던 가까운 사람들의 의견이, 이 잡지가 어느 한 개인의 거취와 관련 없이 앞으로 계속 커나가야겠다는 뜻에서 차제에 독립을 시켜보자고 해서, 그때 비로소 창작과비평사를 발족시켰고 신(辛)선생이 대표가 되셨지요. 그러니까 『창작과비평』지의 역사보다 창작과비평사의 역사는 짧은 셈입니다. 그리고 그때 독립이 됐다고는 하지만 신선생께서 관여하고 계시던 신구문화사 이종익(李鍾翊) 회장의 도움을 음양으로 받았지요. 이래저래 도와주신 분들에게 폐도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저희로서는 보따리장사에 더부살이하는 신세가 고달플 때도 많았지요. 창비사가 따로 사무실을 차린 지는 이제 1년도 채 안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염형이 신동문 선생님과 함께 일하신 것이 우리가 신구문화사와 인연을 맺으면서부터지요?

염무웅 그렇지요. ‘창비’ 일로 말하면 그때부터고, 신구문화사에 함께 일한 것은 그보다 몇 해 전이지요.
 
한때 원고료 미루기 합동작전

이호철 그러니까 그게 통권 15호 때군요.

염무웅 네. 신(辛)선생님과 함께 ‘창비’ 일을 보게 된 것은 15호가 나오던 69년 가을이지요. 아무튼 ‘창비’로서는 백선생이 안 계시던 3년 동안이 가장 어려웠던 때였던 것이 사실일 겁니다. 원래 계간지가 10주년 기념호가 되면 통권 41호가 되어야 하는데 이번호가 39호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동안 두 번 결간이 된 셈이지요. 15호가 합병호로 나왔고 22호와 23호 사이에, 그때 71년인가 어느 겨울호에 또 결간을 했어요. 말하자면 그때 결간을 낼 수밖에 없을 만큼 어려운 사정이었는데, 그 첫째 이유는 ‘창비’를 경제적으로 뒷받침해보겠다는 분의 예상 이상으로 결손이 많았어요. 그래서 계속 투자할 수도 없고, 그러다 보니 원고료를 제때에 못 지불하거나 심지어 몇 달씩 밀리는 수도 있었고 신문에 광고 한번 못 냈지요. 그런 가운데서 얼마간이라도 마음에 흡족한 편집을 하는 것은 정말 힘이 들었습니다. 그야말로 무언가 셋방살이하는 기분 같은 것이 있었지요. 한편으로는 저로서 조금 자부한다 할까 하는 것은, ‘창비’ 창간 때부터 14호까지 어느정도 잡혀진 성격을 보다 우리 현실에 토착화한다 할까 뿌리내리는 어떤 과정도 그동안에 이루어지지 않았나 하는 느낌도 있어요. 가령 능력 있는 필자들을 새로 발굴해서 인간적으로 가까워졌고 이분들과의 격의 없는 대화를 통해 문제점을 발견하여 그것이 글로서 나타나도록 노력했습니다. 미숙한 대로 무언가 이 현실의 문제를 잡지의 내용과 연결시키려는 노력이 있었고, 그것이 그동안 백선생이 해오시던 것과 결부되어 백선생이 귀국한 25호 때 이후 오늘날 그래도 어느정도 하나의 성격으로 잡혀질 수 있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밖에 저로서 제일 힘들었던 때의 여러가지 에피쏘드가 있지요.

백낙청 한두 가지만 공개하실 수 없을까요.(웃음)

염무웅 제일 곤란했던 것이 원고료예요. 제작은 그런대로 신구에서 맡아주었지만. 원고료는, 신동문 선생님이 여기 계시지만, 저는 신선생님한테 미루고 신선생님은 사무실에 잘 안 계시고 이런 식으로 일종의 전술을 가지고 버티는 수밖에 없었는데(웃음) 원고를 주신 필자들께는 죄송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견딜 수밖에 없었어요. 만약에……

이호철 만약에 두 분이 없었더라면 꼼짝없이……(웃음)

염무웅 그렇지요. 누구든지 혼자로는 당할 수 없는 곤경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원고료를 잘 못 주니까 자연히 원고 청탁할 염치도 없었고 그러자니 결국 원고 받기가 대단히 힘이 들었지요. 언젠가 한두 번은 어느 사업하는 선배-이름을 대면 여기 계신 분들은 모두 잘 아는 분입니다만-에게 가서 몇십만원 뜯어다가 고료를 지불한 적도 있었지요.

신동문 그때 참 염형이 수고 많았지요.

백낙청 요즘은 원고료를 못 줘서 그때처럼 몇 사람이 짜고 합동작전을 벌이는 일은 안 생기지만 원고료 문제는 아직도 심각한 문제지요. 그 이야기는 나중에 좀더 하기로 하고, 염형 말씀대로 그때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으셨다는 것은 외국에 있으면서도 어느정도 짐작할 만했고, 그러면서도 거기서 잡지를 받아 볼 때마다 그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감사하고 마음 든든하고 또 일변으로는 멀리 나와 있는 것이 죄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때 훌륭한 작품들을 대하면서 감동을 느낀 일이 여러 번 있는데, 예를 들어서 ‘창비’에 데뷔한 작가는 아니나 황석영(黃晳暎)의 「객지(客地)」가 그때 나왔고……

염무웅 네, 그때 백선생이 「객지」 읽으신 감동을 편지로 써 보내셨던 생각이 납니다.

백낙청 네, 이문구(李文求)의 「장한몽(長恨夢)」 같은 것도 나왔고, 그리고 저로서는 그저 한두 편의 시를 통해 이름이나 겨우 알고 있던 시인 신경림씨의 작품 다섯 편이 ‘창비’에 처음 나왔을 때는 흥분하다시피 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자리에 신경림 선생이 나와서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창비’가 특히 어려웠던 기간에 이루어놓았다고 자부할 만한 그런 일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합니다.

신경림 제가 ‘창비’하고 처음 인연을 맺었을 때 아마 ‘창비’가 한참 어려울 때였지요. 그런데 ‘창비’에 시를 싣고 나니까 내 생각에도 궁합이 딱 맞았다 하는 기분이 들고 이제는 여기에만 시를 실어도 별로 유감이 없겠다는 기분이 들더군요.

신동문 지금 그 말씀을 하시는데 그게 다 묘한 거예요. 내가 염형과 함께 편집을 한다고 하면서도 염형한테 일단 맡긴 이상 나는 누구에게 원고청탁을 안했었지요, 의식적으로 안한 면이 있었어요. 내가 이걸 실읍시다, 한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길에서 신형을 오랜만에 만났어요.

신경림 유종호(柳宗鎬)씨하고 같이 만났었지요.

신동문 그랬지요. 그때 신형이 한동안 시골 내려가 계셨던 때문인지 여하간 시를 한동안 발표 안하셨던 때란 말이에요. 그런데 문득 시를 달라고 싶은 생각이 났어요. 내가 생각하기에도 웬만하면 안 그러는데, 하면서도, 시를 주십시오, 한 댓 편을 주셔야 합니다, 그랬어요. 그랬더니 또, 당시에 작품발표를 별로 안하시던 신형이 반가워하면서 쾌락을 해요.

이호철 역시 충청도끼리……(웃음)

신동문 충청도끼리라 그런 건 아니야……(웃음)

백낙청 지연이 아니면 궁합이었겠지요.(웃음)

신동문 하여튼 선뜻 대답도 그렇게 나왔고, 그래서 다음날 염형한테 보고를 했지. 그런데 사실 그때 나온 시가 참 좋았지 않았어요? 「눈길」이라는 것을 비롯해서……
 

외래지향성의 청산

이호철 그것이 18호가 되더군요. 이번에 제가 좌담회가 있다는 말을 듣고 한번 전부를 대강 훑어보았는데, 아까도 염선생이 얘기했지만 15호가 위기였겠다는 게 금방 눈에 뜨이더군요. 우선 15호가 합병호로 나왔고 16호가 부피가 얇아졌더군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보니까 역시 15호가 하나의 분수령이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 앞의 14호까지를 전기라고 한다면, 그때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은 김수영(金洙暎)·방영웅(方榮雄) 이런 분들이에요. 좀 우스운 얘기지만 그 뭐랄까, ‘김수영 붐’ 같은 것이 있지 않았어요? 또 평론으로 보면 정명환(鄭明煥)·유종호·김우창(金禹昌), 이를테면 대학 강단 쪽의 비평이 많이 보이고 모더니즘 취향 같은 것이 강하게 풍기더군요. 그런데 16호가 우연하게도 신동엽(申東曄) 유고(遺稿) 특집이더군요. 그때가 아마 원고료 사정 등이 가장 어려웠던 때 같아요. 그런데도 이건 굉장히 암시적 사실인데, 16호 이후 대개 26호까지, 그러니까 연대로 치면 69년 말부터 72년까지가 돼요. 이 사이에 쏟아져 나온 작품이 이문구의 「장한몽」, 황석영의 「객지」 「한씨연대기(韓氏年代記)」, 송영(宋榮)의 「선생(先生)과 황태자(皇太子)」 「중앙선 기차(中央線汽車)」, 신상웅(辛相雄)의 「심야(深夜)의 정담(鼎談)」, 또 18호에 신경림의 시-이렇게 보면 원고료니 뭐니 하지만 실상은 어려운 시절에 좋은 작품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더구만요. 그런데 그것이 문학적으로는 처음의 모더니즘 취향 같은 게 역시 조금 물러가면서 아까 염형이 이야기한 토착적인 어떤 터를 잡기 시작하지 않았는가, 그러면서 ‘창비’의 한국문학에 대한 기여도라는 것이 굉장히 부피있게 가라앉기 시작하지 않았는가 보여져요. 그런데 그것이 우연하게도 70년에서 72년 사이의 우리나라 전체 정세하고도 조응되는 면이 보이더구만요.

백낙청 그렇지요. 그 무렵이 말하자면 60년대 말기에 가서 우리 문학이나 지식인층이 위축될 수 있는 요인이 많이 생겼었는데 어떻게 그 고비를 넘기면서 우리 사회의 어떤 저력 같은 것이……

염무웅 69년에 3선 개헌, 71년에 대통령선거가 있었고……

이호철 72년엔 남북적십자회담과 7·4공동성명이 있었고……

백낙청 하여간 전체적으로 여러가지로 발랄한 데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요. 그리고 『창작과비평』으로 볼 때에도 이선생님이 옳게 지적해주신 것 같습니다. 창간호에 썼던 제 글을 아까 칭찬해주셨지만, 저로서는 그 글의 글로서의 미숙성을 차치하고도, 입장 자체에 우리 현실에 밀착하지 못하고 나쁜 의미의 대학강단비평적인 데가 많았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우리 문단의 현실도피적인 순수주의를 비판하고 그것이 실제로는 비정치적이라기보다 오히려 고도의 정치성을 띠고 있음을 지적한 주장 같은 것은 오늘날까지도 일관된 생각입니다만, 그런 주장에 수반되어야 할 현실감각이나 자세가 아쉬웠다고 봅니다. 또 사소하다면 사소한 문제지만 당시 ‘창비’의, 말하자면 어중간한 성격을 잘 말해주는 또 한 가지 사실을 이야기해보지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저희 창간호가 나온 것이 66년 1월인데 그 호가 ‘66년 봄호’가 아닌 ‘66년 겨울호’로 되어 있어요. 사실은 65년 겨울에 내려다가 늦어져서 해를 넘기게 되었는데 우리 관습으로는 1월 1일만 되어도 무조건 신춘(新春)이 아닙니까. 그런 것을 그냥 ‘겨울호’로 냈던 데는 매 권(卷)의 첫 호를 곧잘 ‘겨울호’로 내곤 하는 서양의 관례가 작용했던 것 같아요. 이듬해 제2권 제1호를 낼 때에야 뒤늦게 전비(前非)를 뉘우치고(웃음) ‘1967년 봄호’로 했지요. 그때도 애로가 많아서 발간일자가 늦춰지던 판이라 시간도 벌 겸해서였지요. 이런 것도 말하자면 ‘창비’가 점차적으로 당초의 외래지향적(外來指向的) 취향 같은 것을 청산해온 한 가지 증좌가 될 듯한데, 이러한 토착화 과정이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역시 이선생이나 염선생 말씀대로 70년대 초기였다고 봅니다. 김수영씨의 비중이 줄어든 것은 물론 그분이 68년에 돌아가셨기 때문이지만요. 여하간 지금 제 판단으로는 ‘창비’의 전반적인 변모가 올바른 방향으로의 성장이었다고 봅니다.

 
‘섹트’라는 말이 있는데……

하지만 이렇게 자화자찬만 할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우리가 성장이라든가 업적이라고 말해온 과정의 다른 일면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예를 들어서 아까 염형이 자부심을 느끼는 일의 하나로서, 뜻이 맞는 문인들을 찾아내어 좋은 작품을 실을 뿐 아니라 인간적인 유대도 두터이 해온 점을 드셨는데, 이것을 뒤집어 생각해보면 지나치게 몇몇 사람들만이 일종의 섹트(分派)를 이루고 있다는 말을 듣는 원인도 되었지요.

신경림 네. 그런 말들을 많이 하지요.

백낙청 그런데 악의적으로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겠지만 반드시 다 그렇다고도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물론 ‘창비’에 글을 많이 쓰는 문인들이 우리들 편집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좋은 글을 쓰신다고 믿어지기 때문에 자연히 많은 지면을 제공하게 된 것이긴 하지요. 그러나 우리가 훌륭한 시인이나 작가들에게 빠짐없이 지면을 드려오지도 못했거니와 ‘창비’에서 많은 지면을 제공한 문인들이 반드시 최고 수준의 작품만을 쓴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兒트의식’이란 말이 나오는 것도 당연한 것이고 이 점은 우리가 반성하고 시정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데요.

염무웅 물론 당연하겠지요. 그런데 그렇게 되는 과정이 아무 이유 없이 그렇게 된 것은 아닐 겁니다.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문제는 ‘창비’가 계간으로 나온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과거에는 부피가 별로 두툼하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월간 문예지에 비하면 소화할 수 있는 작품의 절대량이 대단히 부족합니다. 따라서 엄격하게 골라서 싣는 것이 우리 같은 잡지로서는 불가피한데, 이렇게 선별해서 싣는 것 자체가 우리나라 잡지 풍토에서는 아마 새로운 것이었을 겁니다. 보통 문예지의 경우 기성작가에게는 청탁을 했으면 거의 무조건 실었고 작가가 청탁 없이 작품을 들고 오는 경우에도 시일이 걸리기는 했겠지만 대체로 실어주는 것이 관례입니다. 읽고 나서 필자에게 되돌려준다거나 수정을 부탁하는 일은 별로 없을 겁니다. 물론 법 같은 데 걸리지 않을까 해서 그러는 수는 간혹 있지만요. 아무튼 그렇게 하는 동안에 저 잡지는 아무 글이나 싣는 게 아니고 자기 취향에 맞아야 싣는다, 그런 느낌을 준 게 있을 것이고요. 따라서 이런 점들이 우리 문단 풍토에서는 상당한 저항감을 줬을 겁니다. 또 한 가지는 원고를 쉽게 얻을 수 있는 이에게 청탁을 하게 마련인데, 그런 일종의 안일성이 있었던 것도 자인할 수밖에 없지요. 그리고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처럼 같은 값이면 ‘창비’ 출신의 문인이라거나 자주 만나서 뜻이 통한다 싶은 분에게 자주 청탁하게 된 면도 분명히 있지요. 이렇게 생각해보면 남들이 흔히 폐쇄적이다, 똘똘 뭉쳐가지고 독선적이다, 이런 소리를 하는데 우리한테 당연히 그런 소리를 들을 만한 극복해야 할 면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대로 밀고 나가야 할 면이 있지 않은가 합니다. 섹트 자체는 물론 철저히 극복하고 지양해야겠지만 무성격의 잡지가 될 수야 없겠지요. 요는 하나의 잡지로서 일정한 성격이랄까 방향이랄까 하는 것을 지킨다는 면과 정실이나 파벌에 흐르지 않고 범문단적인 자세를 지향한다는 면이 어떻게 제한된 지면 속에 양립할 수 있겠느냐가 과제입니다. 제 개인으로서는 이 과제를 위해서 너무나 게을렀다는 자책과 반성이 아울러 드는군요.

신경림 그러나 ‘창비’의 어떤 성격 같은 것이 생긴 것도 ‘兒트’라는 비난을 각오하고 했기 때문에 된 것이 아니겠어요?

이호철 그렇죠. 지난 10년 동안 발간된 ‘창비’ 전체를 볼 때에는 兒트니 뭐니 운운할 여지가 거의 없어요. 그런 게 얘기되는 것은, 솔직히 말해서 우리나라 작가·시인들이 한 1300명 되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이건 계간지고. 1300명을 고루 수용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지요. 그러니까 그 이야기는 저는 이렇게 보는데요. 편집 자체에서 그런 문제가 나오기보다는 오히려 대인관계라거나 창비를 하시는 분들의 어떤 대(對) 문단 일상관계에서 그런 것이 빚어지지 않았나 합니다.

염무웅 틀림없이 그런 면도 있을 겁니다. 글을 안 쓰는 사람이 잡지를 했다면 그런 소리가 훨씬 덜 나오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백선생이나 저나 평론을 쓰면서 잡지 편집도 하는데, 그 평론의 성격과 이 잡지의 편집방향이 동일시되는 경우가 많지요.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양자가 중복이 되는 것이지만……

이호철 그래서 솔직한 얘기가 백선생의 「시민문학론」이라는 평론이 그때 문단에서 꽤 논의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게 14호더군요. 그걸 쓰고 나서 백선생은 외국에 가고, 그후에 좋은 작품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는데 실상 ‘창비’는 처음부터 무언가 일관되게 간 것 같아요. 그 일관성은, 흔히 얘기되는 兒트의식 같은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일관성이지요.

신경림 그것이 일찍부터 보인 것이 또 백형이 쓴 「역사소설과 역사의식」인가 하는 글이었지요. 7혼가 8호에 나왔는데……

이호철 5호지요.

신경림 거기에서 이미 ‘창비’의 방향이 어느정도 나타났던 것 같아요. 가령 여기서 강조된 역사의식·사회의식 같은 것이 곧바로 ‘창비’의 성격의 어느 일면으로 느껴진 게 사실이었지요.

이호철 ‘창비’의 성격을 말한다면 역시 무엇보다도 비평을 통해 만든 것인데, 전부 여기 앉으신 분들 이야기라서 무엇합니다만, 백선생의 네댓 편하고 염선생의 「농민문학론」인가요? 또 신경림 선생이 처음에 「농촌현실과 농민문학」을 쓰고 그 다음에 「문학과 민중」이던가요?

신경림 염형이 농촌문학 관계를 쓴 것이 18호인가 그렇지요. 그때 ‘창비’가 마침 무슨 농촌문학 특집같이 되었었지요.

염무웅 시대에 뒤떨어진 면이 좀 있었지요.(웃음)

백낙청 그런데 이거 아무리 자기비판을 하자고 시작을 해도 자꾸 자화자찬으로 끝맺고 마는군요.(웃음)

신경림 여하간 폭을 더 넓힐 필요는 있겠지요. 독자들에게 너무 낯익은 얼굴들만 내밀며 식상하게 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손해가 아니겠어요?

염무웅 거듭되는 얘깁니다만 편집하는 저희들이 게을러서 마땅히 발굴해야 할 사람들을 발굴하고 실었어야 할 사람들을 못 실은 예가 많았지요. 잡지 편집자로뿐 아니라 한 사람의 문학평론가라고 자칭하는 입장에서도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백낙청 그렇지요. 그러니까 이른바 ‘폐쇄성’이라는 데에는 우선 여러분이 말씀하신 대로 불가피한 애로에서 나오는 것이 있지요. 염형이 실무를 맡고 있을 때 특히 어려움이 많았다고 하지만 여러가지 어려운 사정이란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는 형편이니까 자연히 우리가 하고 싶은 만큼 폭넓게 활동을 못하는 그런 면이 있고, 또 한 가지는 그것을 폐쇄성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잡지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자기 나름의 성격이나 주관 또는 수준으로서 우리가 포기해야 할 것이 아니라고 하는 그런 면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것저것 모두 감안하고도, 그동안에 『창작과비평』을 여러 해 해오는 동안 어떤 문인들은 ‘창비’와 관계없이 훌륭한 활동을 하다가 뒤늦게 ‘창비’에 실린 분이 있고 아직도 우리가 몰라서 못 싣고 있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는데, 이렇게 소홀해지게 되는 데에 일종의-의도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말이지요-섹트의식 같은 것이 작용하지 않았다고만은 못할 것 같아요. 저로서는 이제까지의 10년을 넘기고 다음 10년을 내다본다 할 때, 이런 소홀한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일 중의 하나가 아닌가 합니다. ‘창비’의 영향력 같은 것이 커지고 우리가 싣는 유능한 작가들의 수가 많으면 많아질수록 여기서 부당하게 외면당하는 작가에게 가는 피해는 그만큼 커질 테니까요.

신동문 그 문제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과거에 우리가 그런 사실을 잘 몰랐더라도 폐쇄적이다라는 소리가 들린다면 무언가 그런 면이 있으니까 그런 걸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전에는 가령 염선생이나 백선생이 편집 일을 보았다 하더라도 거기에 전념을 한 것이 아니고 직장을 갖고 있으면서 여가에 했지 않아요? 그러니까 자연히 원고청탁이나 필자에 대한 검토가 그 일에 전임하는 사람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런데 지금 같은 경우에는 백선생이 24시간을 거기에……(웃음)

이호철 24시간까지야 아니겠지요.(웃음)

신동문 적어도 교직에 복귀하기까지는 아무래도 이 일에 전념할 테니까 그런 문제는 상당히 시정되지 않을까 싶어요.

 
아직도 산적한 애로사항들

백낙청 신선생님께서 상당히 낙관적으로 말씀하셨는데(웃음) 이제까지의 애로사항들이 앞으로도 어느정도 지속될 것이 분명하고, 또 애초에는 없던 새로운 난관들이 대두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선 시간이나 인력의 문제를 말씀하셨지만, 제가 요즘 ‘창비’ 일에 전보다 많은 시간을 들이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 『창작과비평』이라는 잡지는 창간 때부터 오늘날까지 편집 전문가라 할 사람이 한번도 전담해본 적이 없는 잡지입니다. 그러니까 자연 편집체재도 엉성한 데가 많고 실수도 많이 저질렀는데, 여하간 전임 편집장 없이 마흔 권 가까이를 냈다는 사실 자체가 어떻게 보면 기적 같기도 해요. 그리고 이 문제는 아직도 해결이 안되고 있어요. 조속한 시일 내에 어떻게 해결하려고는 합니다만. 출판부까지 생겨서 업무량은 거의 살인적이지요. 특히 투고원고 문제 같은 것은 투고해주시는 분에게 미안할 때가 많습니다. 기성작가 가운데도 원고를 보내주시는 분들이 계시거니와 신인응모작품도 많이 들어옵니다. 이것을 읽어낸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에요. 보내주신 분들로서는 그야말로 피와 땀의 결정인데 저희들은 그것만 읽고 있을 수는 없고 틈나는 대로 보는데 또 아무렇게나 보아 넘기는 건 무의미하지 않겠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 원고더미가 쌓이고, 본의 아니게 소홀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 좌담회 자리를 빌려서라도 투고자 여러분들께 사과의 말씀을 드리고 양해를 구하고자 합니다.

또 한 가지 지속되는 애로사항은 뭐니뭐니해도 재정적인 것이지요. 그동안 여러 독자들이 성원을 해주신 덕에 ‘창비’가 사업적으로도 많이 성장했습니다. 잡지 부수도 많이 늘었고 출판부의 간행물들도 아마 저희 같은 소자본과 인력부족에 시달리는 출판사로서는 예외적이랄 정도로 독서계에 어떤 흔적을 남기고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반면에 사업이 불어날수록 원가도 늘어나지요. 물가상승으로 인한 괴로움은 국민 누구나가 겪는 바지만 저희는 또 조금 부수가 늘어날 때마다 거의 무모할 정도로 지면을 늘이는 등, 자진해서 원가를 올려오지 않았어요? 꼭 망하기로 작심하고 장사하는 놈들 같다는 말도 자주 들었어요. 하지만 저희 독자들이 고마운 것은 어려운 고비마다 저희들에 대한 성원이 거의 피부로 느껴질 수 있었어요. 특히 작년 여름에 저희 잡지 여름호를 위시한 몇 개의 간행물이 당국에 의해 판매금지 당했을 때는 격려의 전화도 많이 받았고 가을호에는 부수가 월등히 늘어나기도 했지요. 그러나 아직까지 사업으로서는 형편없는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고 신선생님이나 저나 뭐 기업인으로서 입지전적인 인물은 못 되는 것 같아요.(웃음) 원고료 문제만 해도 계속 애를 먹고 있어요. 저희로서는 이제까지 큰 재벌신문사가 경영하는 종합지의 수준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았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지금 문예진흥원에서 다른 월간 문예지에 대해서는 고료조로 지원금이 나오지 않습니까? 요즘 매달 50만원씩인가요? 그래서 전통 있는 어떤 문예지의 경우, 그 회사 자체가 지불하는 원고료는 우리의 반 정도밖에 안되는데도 결과적으로 필자에게 지급되는 금액은 우리를 훨씬 앞지르게 되지요. 그런데 작가라는 분들이 대개는 궁한 분들이고 원고료에 생계를 의탁하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은데 우리가 진흥원에서 돈을 못 받으니 좀 싸게 써주시오 하기도 미안한 일이고 그게 잘 안 통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런데 문예진흥원 이야기가 났으니 말이지만 신선생님이 발행인으로 계실 때 우리도 잠깐 지원금을 받은 일이 있기는 있지요.

염무웅 74년에 1년 받았던가요?

신동문 1년이 아니고 사실은 반년이었지요. 74년 여름엔가 주겠다는 방침이 정해졌다가 74년 후반기 몫으로 두 차례에 걸쳐 도합 30만원을 받았지요. 그러니까 한 호 내는 데 15만원씩을 받은 겁니다.

백낙청 그러다가 75년도에 들어서서 진흥원에 계시는 어느 간부가 전화를 해서 새해부터는 한 호에 20만원씩으로 올려주겠다고 그랬어요. 한데 사무절차 관계로 지급은 좀 늦어진다기에 75년 봄호를 만들면서 저희는 진흥원에서 돈이 더 나올 것으로 생각해서 자사고료도 좀 올리고 보조금도 가산해서 필자들에게 원고료를 미리 지급했지요. 그랬더니 그 호가 나오고 얼마 안되어 공문이 오기를 계간지에는 75년도부터 지원금 지급을 중단하기로 했다는군요. 공문에는 별다른 설명도 없었는데 일부 신문지상에 나온 걸로는 “계간지들은 동인지적 성격이 너무 짙어서” 지원 대상으로 부적합하다고 결정했답니다. 물론 ‘창비’가 계간지로서의 제약성은 있지만 75년 현재의 『창작과비평』을 과연 ‘동인지적’이라고 볼 수 있을지, 예컨대 같은 진흥원 기금을 받는 시 전문지들보다 더 ‘동인지’에 가깝달지는 의문이었어요. 하지만 뭐 우리가 진흥원에다 돈을 맡겨놓은 것도 아니니까 가서 내놓으라고 따질 건덕지도 없었지요. 그런데 이미 원고료가 지급된 필자들께는, 사실 지난번에 드린 돈 중에 얼마는 진흥원에서 보조금으로 나올 것을 저희가 대불했던 것이니 좀 돌려주십시오, 그럴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또 모든 물가가 다 오르는 판에 한번 올린 원고료를 다시 내릴 수도 없고요. 그나마 15만원씩밖에 안 받았으니 피해가 거기서 그쳤고, 또 언제든지 일방적으로 끊어질 수 있는 보조금이라면 진작 끊어진 것이 속 편한 면도 있어요.

 
‘민중’은 불온단어인가

애로사항에 관한 이야기가 길어집니다만 한 가지만 더 말하고 넘어갈까 합니다. ‘창비’를 두고 폐쇄적이다 하는 비난이 있다는 이야기는 아까도 했는데 그 말에는 얼마간의 근거도 있다고 보았고 또 그것이 근거없는 주장이라 해도 폐쇄성이라는 것 자체가 무슨 형사상의 범죄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겠는데, 요즘 들어 『창작과비평』지에 대한 일부의 비난이나 공격은 그런 선에서 멈추지 않고 꽤 살벌해진 느낌도 없지 않습니다. 이건 완전히 불온집단이고 처단되어야 한다는 투로 나오는 이도 있는 모양이에요. 다른 분들은 그 점을 어떻게 보셨는지요?

신경림 글쎄요. 예를 들어 ‘민중’이라는 말을 가지고 불온시하고 민중을 찾는 저의가 무어냐고 윽박지르기도 하는데 그건 참 대처하기가 곤란한 것 같더군요.

이호철 그런데 그것이 아까 이야기한, ‘창비’는 폐쇄적이다, 하는 것과 감정적으로 일맥상통하는 바도 있는 것 같아요. 또 한편으로는 ‘창비’가 이때까지 10년 동안에, 솔직하게 얘기해서 우리 문단의 중요 이슈들을 주도적으로 부각시켜왔다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15호에서 30호쯤에 오는 동안 두드러지게 문단에 터를 잡아온 것 같은데, 이러한 기여에 대해 요즘 와서 일부에서 심지어는 불온하다는 정도로까지 이야기되는 것이 더러 신문지상에도 보인 듯한데, 불쾌하기 짝이 없더군요. 불쾌하다는 것은 ‘창비’를 지금 남북관계라든지 우리나라가 당장 처해 있는 상황에 직선적으로 연결시켜서 심지어 반공전선에 저해가 된다는 식의 발상이 비치기도 하는데, 실상 ‘창비’ 창간호부터 이제까지 전체를 다시 부감(俯瞰)해볼 때 비평도 그렇고 또 학문적인 기여도 그렇고 그밖에 소설, 시, 전체를 통틀어도 역시 어떤 포괄적인 우리나라 상황을 염두에 둔 시선이고 우리 자신의 주체적인 것을 추구하는 문학 본래의 어떤 노력이지, 딱히 정치적인 어떤 목표에 매달렸달까 그런 글은 전체를 통해 전혀 보이질 않습니다. 실상 ‘창비’가 문학을 정치에 예속시킨다니 하는 말은 ‘창비’를 정말 차근차근히 읽어낸 사람들의 생각은 아닌 것 같아요.

염무웅 물론 ‘창비’에 실린 소설들을 읽어보면 골프를 치고 자가용 타고 다니는 그런 사람들의 얘기를 쓴 것보다는 역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문제를 다룬 소설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요. 하지만 이것을 곧장 어떤 정치적인 의미와 결부시키는 것은 대단히 피상적이고 편협한 발상입니다. 실상 좋은 문학이랄까 진짜 문학이라는 것이 그런 사람들의 문제를 직접 다루거나 적어도 그런 사람들이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의식이 없이 씌어질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면 무조건 이건 ‘창비식’이다, ‘현실참여적’이다, 하는 말을 듣게 되는 수도 적지 않은데, 창비를 좋게 생각하는 쪽에서든 나쁘게 생각하는 쪽에서든 이것 역시 일종의 오해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호철 그런데 ‘창비’에 반정부적인 글이 많다는 말도 더러 하는데, 우선 ‘반정부적’인 것과 ‘반국가적’인 것을 혼동해서도 안되겠지만 ‘창비’에 나온 글들이 과연 반정부적이냐 하는 것도 좀 달리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지요. 문학이 다루어야 할 소재라든지 그 다루는 방법이란 굉장히 여지가 많고 넓은 겁니다. 그런데 ‘창비’에 나온 소설들 중에는 우연히도 「장한몽」이라든지 「객지」, 「심야의 정담」, 또 단편으로 천승세(千勝世)의 「보리밭」 같은 것이 우리나라의 비교적 어두운 면을 성공적으로 작품화하고 사회의 어떤 부조리를 심도있게 척결하고 있어요. 또 우리 사회에서 그런 소설들이 좋을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지요. 주간지 기사와의 연장선상에서 만드는 흔한 소설들이 좋을 까닭이 없는 거구요. 그런데 요즘 정부에서도 부조리 척결에 대해 매우 신경을 쓰는 모양입니다만 어떤 의미에서 ‘창비’에 이제까지 나온 소설들을 다 훑어보면 우리나라 부조리의 근원적인 정체가 무엇이냐 하는 데 대한 일종의 해답이 나올 수도 있는 문제고, 그런 면에 정면으로 대응해서 어떤 좋은 정책도 나올 수 있지 않느냐, 좀 이렇게 따뜻한 시선으로(웃음) 보아줄 수가 없겠느냐는 겁니다.

백낙청 참 좋은 말씀이십니다.(웃음) 여하간 소설 같은 데서 특권층의 이야기보다 가난한 민중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 것은 사실이고 평론에서 ‘민중’이라는 단어가 들먹여진 것도 사실이지요. 그런데 아까 신경림 선생께서 ‘민중’이라는 단어 자체를 불온시하는 데 대해 어떻게 대처할지 곤란하다고 하셨는데, 좀 달리 생각해보면 전혀 곤란할 것이 없다고도 말할 수 있어요. 우선, 그런 공격이 나오면 요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신변의 위협마저 안 느껴지는 건 아니지만 거기에는 도대체 대처하고 말고가 없으니 오히려 간단하다면 간단하지요. 그 문제에 관한 한 도대체 우리네야 이러라면 이러고 저러자면 저러는 재주밖에 없는 사람들이니까 아예 ‘대처’를 안하는 걸로 버티는 거예요. 말하자면 무재주가 상팔자라는 거겠지요. 그밖에 ‘민중’이라는 낱말 자체를 불온시하는 것이 틀렸다는 것을 말로 따져대는 거야 세상에 그것처럼 쉬운 게 어디 있습니까. 다른 건 다 제쳐놓고, 우리나라 국립경찰의 모토가 ‘민중의 지팡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표어를 만든 우리 정부가 친공적(親共的)이거나 용공적(容共的)이란 말입니까, 아니면 정부의 다른 기관은 다 안 그런데 유독 우리 경찰만 불온사상에 젖어 있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우스운 이야기지요. ‘민중’이란 말의 정의를 정확히 어떻게 내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여하간 어떤 특별한 지배적인 위치에 있지 않은 대다수의 국민을 말하는 것 아닙니까? 옛날 말로 하면 ‘백성’인데, 우리가 ‘백성’이란 말을 특별히 기피하려는 건 아니지만 ‘백성’이라고 하면 봉건적인 냄새가 나지요. 현대 민주국가의 감각에는 역시 좀 맞지 않아요. 그리고 ‘민중’과 비슷한 말로 또 ‘인민’이란 말이 있습니다. 저쪽에서 잘 쓰는 말이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민중’이란 곧 ‘인민’이란 말이 아니겠느냐고 은근히 위협적으로 비치기도 하고, 개중에는 이걸로 무슨 결정타나 날렸다는 듯이 득의양양하는 이들도 있는 모양이에요. 하지만 우리가 ‘인민’이란 말을 안 쓰는 것은 부당한 오해를 사기 싫어서 그런 거지 ‘인민’이란 말 자체가 나쁜 건 없다고 봐요. 실제로 링컨 대통령의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이란 구절은 요즘도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로 번역되곤 합니다. ‘인민’이란 말 자체는 실상 옛날부터 있었던 것이고요. 이런 건 너무나 명명백백한 이야기라서 길게 말하면 이쪽이 오히려 구구해질 뿐입니다.

‘민중’이란 단어도 이렇게 떳떳한 것이거니와 문학인으로서 민중의 복지를 주장하고 그들에게 가해지는 부조리를 비판하는 것 역시 너무나 당연하고 떳떳한 일이지요. 요즘은 ‘민족문학’을 하라고 정부에서 돈까지 주는데 도대체 민족구성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민중을 빼고서 민족을 이야기하고 민족문학을 한다는 것이 될 법이나 합니까. 도대체 무얼 하자는 건지 알 수 없군요. 다 아시다시피 민족주의라는 구호가 자칫 잘못 쓰이면 그것이 그 민족에게도 해롭고 주위의 다른 민족이나 국가에게 막대한 해를 끼칠 수 있는 거지요. 이런 일이 대개 어떤 경우에 일어나느냐 하면 실제로는 민족을 구성하는 대다수 사람들의 이익에 대해서는 생각 안하고 말로만 민족, 민족 하면서 민족주의라는 구호를 일종의 편법으로 삼을 때 그런 결과가 생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민족주의, 민족문화, 민족문학, 이런 것에 따르는 위험을 미리 막기 위해서라도 민중의 문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관심과 끊임없는 토의가 있어야 하리라고 믿습니다. 이것 역시 너무나 분명해서 새삼 이야기하기가 구차스러울 정돕니다. 그리고 ‘민중’이란 말 자체를 불온시하는 발상에 대처하기가 진짜 곤란한 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즉 그런 발상이 말도 안된다는 걸 지적하는 건 간단한 일이에요. 하지만 우리가 문학을 하면서, 앞뒤가 맞는 말을 하는 것만이 장기일 수는 없어요. 남이 틀린 말 했을 때 틀렸다고 따져주는 것만이 다 잘하는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옳은 주장을 하고 옳게 변명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편으로 문인으로서 한국문단의 명예랄까, 문학하는 사람의 품위와 격조 같은 것을 지킬 의무가 우리들 누구에게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누가, 당신 ‘민중’ 운운하는 것이 수상하지 않냐고 했다고 해서, 대뜸 나서서 그럼 내가 ××주의자란 말이냐, 나하고 같은 말을 한 아무개도 잡아넣지 그러냐, 어쩌고 하며 반론을 전개한다는 것은 나 자신으로서도 구차스러운 건 물론이지만 이건 후세의 독자들이 볼 때 우리 시대의 문단 전체가 무슨 꼴이 됩니까. 애초에 그런 말을 한 사람도 한 사람이지만 그랬다고 해서……

신경림 발끈해서…(웃음)

백낙청 네. 발끈해서든 오싹해서든 마구 나설 수는 없는 거지요. 차라리 욕 한번 더 먹고 매 한 대 더 맞더라도 선비의 체통은 지켜야지 않아요? 이런 자리니까 여담 비슷이 하고 넘어갑니다만, 사실 옳은 이론이라도 문인다운 품위를 지키며 개진하는 것이 어렵다면 어려운 일입니다.

 
본심에서 우러나온 민중문학이라야

그러나 정말 어려운 건 이런 것인 듯합니다. 우리가 민중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지요. 민중을 이야기하다가 좀 손해보는 것도 비교적 쉬운 일일 수가 있지요. 그러나 진정으로 민중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실제로 하고 나아가서는 민중과 호흡을 같이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이라 봅니다. 우리나라의 형편상 국민 대다수가 지금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여러가지 특전을 향유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여기 우리들처럼 상당한 교육을 받았다든가, 우리가 즐겨하는 문학에 종사할 수 있다든가, 최소한의 생계가 보장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우리가 이야기하는 민중과는 어느정도의 거리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대다수 민중이 못 누린 혜택은 혜택대로 충분히 활용하면서, 민중과 호흡을 같이한다는 것-이것은 참 어려운 일인 듯해요. 이건 평론의 경우도 그렇고 또 소설에서도 마찬가지겠지요. 아까 우리가 ‘창비’에 실린 소설이 특권층보다는 민중을 다룬 게 많다고 말했지만,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을 소재로 삼았다고 해서 그 소설이 곧 건강한 민중의식을 대변한다거나 민중을 위하는 소설이 된다는 보장은 없거든요. 그런데 ‘창비’에 나온 소설들을 보면 민중의 문제를 거론만 하고 실제로 진정한 민중문학이나 민족문학이 되지 못한 작품들도 많이 나왔던 것 같아요. 이런 데 대해서는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신경림 나도 그런 걸 평소에 좀 느꼈는데, 어떤 비판적인 입장을 취할 때 반드시 가난한 이야기만 내세우는 것이 옳은 태도는 아닌 것 같아요. 현실을 분명히 파악하는 데 있어서도 꼭 가난한 이야기만 내세워서 되는 건 아니거든요. 너무 빤한 가난 타령만 나오니까 지루한 인상도 주고 너무 평면적이란 인상도 주고요. 특히 최근의 소설에서 그런 인상을 많이 받았어요.

백낙청 그것은 작가의 역량과도 관계가 있겠지요. 가난을 정확하게 이야기해주면서도 그것이 뭉클하고 감동적인 것이 되어야 하는데요, 그러잖아도 가난하게 사는 것도 지겨워 죽겠는데 이 지겨운 이야기를 또 들어야 되나 하는 생각을 독자에게 준다면 문학으로서도 실패고 또 민중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도 없겠지요.

이호철 소설 쪽을 공격하니까 시도 좀 공격해야겠군.(웃음) 저도 요즘 ‘창비’의 시들을 보면 대개 이 ‘창비’라는 잡지를 너무 의식하고 쓴 시가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아요. 30호 뒤에 가서 더 그런 현상이 고조되고 있는 듯합니다.

신경림 비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너무 ‘목소리만 높다’고 하는데 그것도 일리는 있는 말 같아요. 너무 목소리만 높다 보니까 대상에 대한 정확한 파악에도, 언어에 대한 세심한 배려에도 소홀해집니다. 너무 거칠고 답답한 시가 많이 눈에 띄어요. 또 ‘창비’에 실리는 시들이 너무 비슷해지는 경향도 눈에 뜨입니다.

이호철 그 점은 역시 비평가 몇 분들의 너무 고압적인 일면과도 관련이 있는 듯해요. 시인들이 보기에, 그 비평들은 좋고 하지만, 무언지 자기 내부에 민중의식의 본래적인 성격 같은 것이 제대로 다져져 있지 않을 때, 그런 현상이 생기지 않나 싶어요. 한데 소설에서는 도리어 작가 자신이 막말로 무지렁이처럼 굴러다니는 사람들의 소설처럼 보이더군요. 그러니까 재기(才氣)나 얄팍한 재주보다도 자기 사는 사정을 그대로 쓰되 자기 사는 것이 원래가 민중생활에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사정 이야기만 그대로 쓰더라도 민중의 그것과 호흡이 맞아지는 경우지요.

백낙청 이건 시와 소설 간에 싸움이 붙은 것 같은데(웃음) 신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신동문 솔직히 얘기해서 작품들을 너무 안 읽으니까 지금 같은 화제일 경우에 당황하게 되는군요. 그보다 아까 이야기한 민중의 문제를 외면한 민족문학이 있을 수 없다는 대전제로 돌아가서, 이런 전제를 갖고서 문학을 하는데 당국이면 당국에서 좀 의아한 눈으로 보더라도 이것이 뭐 한심스럽다고 할 것도 없는 거라고 봐요. 한심스럽고 뭐고가 없는 거라. 문학을 안하면 모르고 또 가짜로 무슨 흉내를 내는 거면 몰라도 문학을 한다고 나선 이상 당국에서 좀 어떻게 생각하든 그런 건 괘념치 말고 해야 하는 거지요. 그런데 정말 무서운 건, 당국이야 국외자로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거지만, 같이 문학을 한다는, 소위 문학권 내에 있다는 사람들이 당국보다도 더 무지몽매하게 욕을 하고 또 몰아대며 나오는 건, 이건 정말 한심스러운 거지.(웃음) 어느 체제 어느 국가에서건 현실과 사회를 냉철하게 비판하고 창작하는 사람들과 당국 간에는, 어느 체제건간에, 이데올로기적으로 다르더라도 말이에요, 어느정도는 갈등도 있고 마찰도 있는 거니까 그런 건 그러려니 해야지요.

그런데 민중을 강조한다고 불온분자로 모는 문인들의 존재가 가공(可恐)하다고 했지만 또 하나 문제되는 건, 우리들 잡지에 주는 시 중에서-소설은 별로 모르니까 시만 이야기하는데-분명히 『창작과비평』을 의식하고 쓰는 시가 있다는 것은 자주 느끼는데 사실 이것도 내가 봐서는 똑같은 사람들이에요. 교(巧)하기는 똑같은 거라. 그런데 쓰는 사람은 또 그런다 하고 사실은 우리가 그걸 식별해내야 돼요.

염무웅 하나의 잡지로서나 평론 쓰는 개인으로서나 글 쓰는 사람들한테 어떤 강박관념 비슷한 부담감을 주는 것은 좋지가 않겠지요. 또 그렇게 해서 씌어진 글이 정말 좋은 글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고 어쩌다가 괜찮게 씌어졌더라도 결국에는 그런 성격이나 수준을 지탱하지 못하고 말겠지요. 쓰는 사람 자신이 자기의 본심에 따라서 자유롭게 쓴 결과가 현실의 문제에 대해서도 올바른 얘기를 할 수가 있어야 할 겁니다. 꼭 ‘창비’에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지만, 문필가들이 편집자나 출판업자의 눈치를 살피고 비위를 맞추는 폐단은 반드시 극복돼야지요.

백낙청 ‘창비’를 의식하고 글을 쓰는 문인들이 ‘창비’를 헐뜯는 사람 못지않게 나쁘다는 말씀을 신동문 선생님께서 하셨는데 적어도 편집자로서 대처하기에는 전자의 경우가 더 어려운 면이 있어요. 실생활에서도 나를 욕하는 사람보다 내게 솔깃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게 더 약하게 마련이지 않아요? 실상 ‘창비’가 불온하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들어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요. 요즘 일부에서처럼 드러내놓고 그러지 않았다뿐이지 창간하고 얼마 안돼서부터 ‘참여파’니 ‘사회과학파’니 하면서 이상한 눈초리를 많이 보내왔지요. 그래서 저 개인으로서는 거의 면역이 되다시피 됐고 또 겪으면서 보니까 이런 일도 어떤 기복 같은 게 있더군요. 한참 욕하던 사람이 결국 그만두기도 하고 사회 전체의 분위기가 그런 게 잘 안 먹혀들게 되기도 하고, 그래서 말하자면 밀물이 들었다가 썰물이 나갔다가 하는 정도로 느껴지기도 해요. 물론 그 통에 밀어닥치는 파도에 못 이겨 쓰러진다면 불행한 일이고 그래서야 안되겠지만, 마음으로는 또 한 풍파가 이느니 하고 있는 거지요.

신경림 민족문학에 관해서 한마디만 더하고 넘어가지요. 요즈음 보니까 민족문학이라고 하면 자기 민족의 잘난 점만 칭찬하고 미화하는 문학을 민족문학이라고 하는 것 같더군요. 그런데 그것은 커다란 문제예요. 잘못하면 국수주의로 떨어질 우려도 있고 또 문학 자체가 될 수도 없고요.

백낙청 네. 말이 났으니까 말이지만 국민총화라는 데도 그런 문제점이 제기될 수 있을 듯합니다. 덮어놓고 우리 국민이 총화가 되어 있고 단결이 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게 곧 국민총화일 수는 없지 않아요? 엊그제 신문인가를 보니까, 여의도 광장에서 궐기대회를 하는 것으로 국민총화가 되는 게 아니다라는 말이 우리 정부의 최고위층에서도 나왔더군요.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국민총화를 이루려면 우선 국민들 사이에 있는 문제점들을 정확히 인식하고 부각시켜서 슬기롭게 해결해나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문제점들을 지적하는 것이 오히려 국민총화가 안된 원인인 것처럼 보는 것은 본말(本末)이 뒤바뀐 거지요. 물론 어떤 정략적인 의도에서 사실을 왜곡 선전하는 것은 배격해야겠지만 이런 선전은 적어도 우리 문학하는 사람들로서는 진짜 문학을 하는 이상 애초부터 배격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민족문학이 자기 민족이 안은 내부적인 모순이나 부조리를 정직하게 인식하는 데서 문학 자체로서도 살고 민족을 위하는 길도 된다는 것과 마찬가지 논리지요.

 
‘70년대 작가’론의 반성

이호철 동감입니다. 요즘 ‘민족문학’의 이름으로 작품들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기도 하는데, 민족문학이란 것을 제대로 인식하고 쓴 작품들이 나와주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이야기를 좀 바꿔서 요즘 작가들, 특히 젊은 작가들의 어떤 경향에 대해서도 한마디 해보지요. 저 자신부터도 한 20년간 문학생활을 하면서 공(功)보다는 과(過) 쪽이 많은 사람이니까 이런 얘기를 할 자격이 못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60년대’‘70년대’ 이런 식으로 이야기될 때 60년대가 김승옥(金承鈺)으로 대표되는 어떤 새로운 감각을 말하는 경우 그것은 납득이 되는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후에 70년대에 들어와서 아까도 말했듯이 이문구, 황석영, 신상웅 등 젊은 작가들의 역작들이 나왔지요. 하지만 요즘 ‘70년대 작가’라고 하면 이런 작가들이 아니라 최근 한참 신문연재를 도맡다시피 하고 있는 일군의 신예작가들을 가리키는 경향이 있는데 이분들이, 최근 어느 비평가도 말했지만, ‘여자’라는 말을 빼고는 소설 제목이 안되는 것 같은 풍조를 낳고 있어요. 그렇게 야하게 이야기될 정도로 되어 있단 말이지요. 제 생각에는 이런 면이 있는 것 같아요. 민중의식이나 민족의식 같은 게 튼튼한 체질로 되어 있지 못하고 의식으로만 빌려서 있는 그런 작가들이 조금 돈하고 수지맞는 그런 판이 되어버리면 금방 거기에 쏠리지 않는가 하는 겁니다. ‘창비’를 통해 떠오른 작가들도 요즘 그런 면이 좀 보이더군요. 그런데 대체로 작가가 불운할 때는 생활상의 울분 같은 것이 겹쳐가지고 좀 의식이 있는 작품을 쓰다가 조금 수지맞을 단계가 되면 금방 달라지는 수가 있는 건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지만 70년대에 와서 특히 문제인 것 같아요. 이름까지 박아서 말한다면 최인호(崔仁浩) 이후의 이런 붐이 내가 보기에는 매우 불건강한 현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70년대로 일컬어지는 일군의 작가들이 좀더 본래의 문학의식을 튼튼하게 돌이켜야 하지 않는가 합니다.

염무웅 그런데 그것이 문학에 있어서만은 아니고 사회가 전반적으로 그렇지 않습니까? 텔레비전이라는 게 나와가지고 그게 굉장히 많이 보급이 됐더군요. 시골을 다녀보면 구석구석까지 들어가 있는 게 눈에 띄어요. 그래서 저 어려서만 하더라도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유행가를 거의 몰랐는데 지금은 시골 애들까지 전부 일상적으로 부르는 노래가 학교 노래가 아닌 유행가고, 또 주간지가 많이 나오고, 이런 소비문화, 저질의 대중문화가 판을 치고 있는데, 말하자면 그런 것에 문학이 영합하고 있는 셈이지요. 그런데 한 가지 문제는 우리나라 현실이 그런 정도의 소비문화를 만들어낼 만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런 소비문화가 나오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 자체가 굉장히 불건전한 것이고요.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요즘 장발단속이니 뭐니 해서 그런 것에 대한 정부로서의 억제작용도 있거든요. 그래서 대중적인 소비문화가 상당히 묘한 위치에 있는 것 같아요.

백낙청 퇴폐적인 소비문화에 대한 정부의 단속은 너무나 지엽적이고 다분히 신경질적인 데가 없지 않다는 느낌이 듭니다. 장발단속 같은 것은 권위주의가 소비문화를 억누르는 대표적인 예처럼 보이지만 작금의 대세는 역시 소비주의·상업주의 쪽으로 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우리 사회나 문단에서 권위주의가 문제가 되고 있지만 사실 본래적인 권위주의가 못 되는 게 아닐까요? 소비문화 내지는 상업주의에 편승한 권위주의라고 봅니다. 동시에 아까 염형이 지적하셨듯이 우리 사회에는 이 정도의 난숙한 소비문화가 생길 만한 객관적인 이유가 없기 때문에 상업주의나 소비문화가 권위주의를 조장해서, 권위주의를 하나의 편법으로 써서 스스로의 터를 잡으려고 하는 그런 현상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선생께서 말씀하신 요즘 ‘70년대 작가 붐’ 같은 것도 이런 문맥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최근에 젊은 작가들이 도하 각 신문의 연재소설을 거의 휩쓸다시피 하고 있는데 이것은 웬만한 중견작가도 신문연재에 발붙이지 못하던 때에 비하면 일종의 진보라고도 할 수 있어요. 아마 이선생께서 『서울은 만원이다』를 처음 연재하실 때만 해도 그것이 파격적인 처사로 보였었지요. 하지만 오늘날 신진작가들의 대거 기용은 새로운 문학 가치가 낡은 권위주의를 진정으로 극복한 것이라기보다 현재 우리나라의 권위주의라는 것이 역시 상업주의보다는 약하다는 단적인 증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물론 70년대 작가로 불리는 사람들이 다 똑같은 건 아니지요. 또 바로 그렇기 때문에 ‘70년대 작가’라는 레이블이 비평용어로서는 무의미하다는 겁니다. 그것은 별 내용이 없는 비평이나 조장하고 상업적인 저널리즘에 장사할 꺼리나 마련해주는 것 같아요. ‘60년대’ 운운할 때도 다분히 그랬고요. 이런 문제에 대해 저희 ‘창비’도 전혀 책임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아무런 내용 없는 세대론에서는 비교적 초연해왔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다 보니 또 한번 자화자찬을 하고 말았군요.(웃음) 이제 시간도 많이 지나고 했으니 ‘창비’의 앞날을 위해서 좀더 따끔한 충고와 구체적인 제언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앞으로의 ‘창비’를 이렇게……

이호철 칭찬은 그만 하라고 하시는데 이런 말을 해서 이젠 미안하기까지 하지만(웃음) 솔직한 이야기가 저는 ‘창비’를 받아 볼 때 시나 소설보다도 좁은 의미의 문학이 아닌 다른 학술적인 것, 이론적인 작업에 더 먼저 눈이 쏠리곤 해요. 국학 관계의 글이라든가, 심우성(沈雨晟)씨의 민속 관계 작업이라든가, 리영희(李泳禧)씨의 어떤 글들, 간혹 실리는 알찬 경제평론-이런 것이야말로 ‘창비’만이 해낼 수 있었던 일이 아닌가 해요. 앞으로도 이 면에는 더욱 힘을 기울여주셨으면 하고……

백낙청 ‘창작과비평’이라는 제목의 ‘비평’에 해당하는 이론적인 작업은 앞으로도 계속할 생각입니다.

염무웅 일반 독자들 가운데도 이선생님과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이가 많은 것 같아요. 출판부에서 낸 ‘창비신서’ 중에서도 물론 소설집이 잘 팔리는 것도 있지만 비소설에 해당하는 『전환시대의 논리』나 『민족지성의 탐구』,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이런 것들이 한결같이 잘 나가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이호철 그런 면에서 저는 작가들에게도 너무 소비주의적인 도시생활에 집착하는 경향을 극복하는 한 방향으로서, 최근 박태순(朴泰洵), 황석영 등의 작가들이 써낸 르뽀르따주 같은 것을 쓸 기회가 많아졌으면 합니다. 작가들이 여간 마음먹지 않고는 지방이나 또 민중으로 얘기되는 생활과 접해볼 기회가 실상 별로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 아니겠습니까. 저만 해도 그렇습니다만. 근본적으로 어떤 폭넓은 생활이 없다는 게 치명적인 것 같아요. 그런 것을 극복하는 길의 하나로 작가들이 자의건 반 타의건 간에 좀 생활의 현장에 가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으면 도움이 되겠고, 그래서 ‘창비’에서도 르뽀르따주 쪽으로 좀더 힘을 기울이고 특히 신진작가들에게 그런 기회를 주셨으면 좋겠군요.

백낙청 좋은 말씀입니다. 물론 현장에 나가보는 것과 현장에 사는 것은 또다른 문제겠습니다만 여하간 그런 기회를 만들어보는 것이 작가에게도 도움이 되고 독자들에게도 흥미있게 읽히겠지요.

염무웅 사실 독자들의 흥미라는 면을 ‘창비’가 너무 소홀히해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말을 하는 저 자신은 소위 반관반민(半官半民)이라는 말이 생각나는 애매한 위치에 있는 꼴입니다만.(웃음) 아까 이야기한 소비문화와는 다른 의미에서 좀더 대중적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창비’가 ‘고급 잡지’다 하는 말을 많이 듣고 실제로 고등학생 정도가 읽기에는 곤란한 점이 많지 않아요? 너무 어려운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좀더 많은 독자들이 읽을 수 있는 잡지가 됐으면 해요. 그런데 그 하나의 시도로서 한글전용을 하고 한자를 괄호 속에 넣는 것도 해보는데, 어쩐지 그게 대단히 미흡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오히려 글 자체가 쉬워져야 할 것 같아요. 아무튼 연구의 과제인 것 같습니다.

백낙청 글 자체가 쉬워지는 것이 물론 중요하지요. 그러나 그거야말로 어려운 일 아닙니까? 내용이 있는 글을 쉽게 쓴다는 것은 필자 스스로가 어떤 중요한 문제를 완전히 장악해서 선명하게 투시해야 가능한 거니까요. 한자의 문제는, 잡지에서는 되도록 한자를 줄이되 필자의 취향을 존중하는 쪽으로 하고, 단행본은 지금 출판계의 추세가 거의 한글전용에 한자를 괄호 속에 넣는 쪽으로 가고 있지 않아요? 우리는 뭐 교조적인 한글전용주의자는 아니지만 가로쓰기, 한자 줄이기 등에 비교적 선도적인 역할을 해온 잡진데 이제 와서 출판계의 대세가 된 한글전용을 구태여 마다할 건 없을 듯합니다. 그밖에 편집체재 같은 것에서 좀더 독자에게 친절해질 소지가 많지요. 예를 들어서, 잡지에 공연히 사진이니 삽화니 많이 넣어서 어수선하게 만들 필요는 없지만 내용에 비춰서 꼭 사진을 써야 하는 데에도 안 쓴 일이 많아요. 그건 물론 비용 문제가 있는데, 사실은 비용보다도 일을 간편하게 하기 위해서 그런 면이 많았지요.

신경림 마산 수출공단 르뽀 같은 건 사진이 들어갔어야지요.

염무웅 그밖에 ‘창비’가 이렇게 됐으면 하는 소망을 말한다면 언젠가 ‘창비’가 월간이 됐으면 싶어요. 그래야만 폭도 더 넓어지고 기왕에 잡지로서 가져야 할 영향력 같은 것도 더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이제까지 출판부 이야기는 별로 많이 못했는데, 계간지로서 월간지를 못 따라가는 면을 출판부를 통해 보완하도록 잘 이용했으면 합니다.

신동문 염형이 장차는 월간지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그건 나중에 사세(社勢)가 그렇게 되면 해볼 수도 있겠지만 또 ‘창비’가 계간이니까 그 성격과 수준을 유지하는 면도 있지 않아요? 그래서 우선은 독자들을 위한 써비스로서 1년에 한번이면 한번 별책부록을 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소설이면 소설을 쫙 모아서 말이에요. 그런데 ‘창비’가 너무 고답적이었다고 자기비판들을 하셨는데 ‘창비’가 좀더 대중적이 되고자 꾸준히 노력해온 면도 인정은 해야지요. 내용이 점차 토착화해왔다는 이야기도 아까 나왔고, 또 비근한 예로 재작년인가 종이파동이 났을 때가 있었지요. 그때 우리가 책값을 올리거나 좀더 싼 종이를 쓰거나 양자택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우리는 지대를 그대로 유지하는 대신 중질지 쓰던 것을 갱지로 바꾸기로 결정했지요. 그게 아마 32호 때 일이었지요. 그래서 좀 고급한 잡지다 하는 맛은 없어졌지만 독자들에게 좀더 많은 내용을 종전 값으로 제공할 수 있었고, 지금 생각해도 그건 잘한 일 같습니다.

백낙청 신선생님이야말로 너무 자화자찬만 하지 마시고(웃음) 앞으로 ‘창비’가 나가야 할 방향에 대해 한말씀 해주십시오.

신동문 나는 원래 발행인으로서의 소임을 제대로 못해서 무슨 충고를 할 면목이 없는 게 솔직한 심경입니다. 다만 아까 우리가 얘기했던 ‘폐쇄적’이라는 면, 이건 특히 내가 염형하고 ‘창비’를 할 때에 그런 말이 나올 일면이 있었다고 봐요. 그래서 이건 구체적으로 실행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건 알지만, ‘창비’의 성격은 성격대로 유지하되 무언가 더 포용력 있는 편집을 해주었으면 해요. ‘범문단적’이란 말이 참 애매하고 곤란하게 쓰일 수도 있지만, 욕심 같아서는 ‘창비적’이면서도 정말 좋은 의미로 ‘범문단적’인 잡지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호철 비슷한 얘긴데, ‘창비’의 편집은 계속 엄격하게 해나가야겠지만 편집하시는 분들이 너무 일상관계나 문단관계에서도 엄격주의에 매달리지 말고, 말하자면 좀 털털하게 많은 문인들과 좀 푸근하게 몸을 적시는 그런 면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개인성격에 관한 이야기가 돼서 안됐지만 백선생이나 염선생이나 지나치게 그 엄격한 편집에 열중해서 다방 같은 데 마주 앉아서도 그 ‘편집엄격얼굴’ 그대로 보이곤 해요.(웃음) 가끔 여러 사람들에게 술도 좀 사고……

신동문 술값도 안 주면서 술을 사래면 어떡해.(웃음)

백낙청 그러면 술값은 이선생님이 대시고 수양은 저희가 더 하기로 하지요.(웃음) 신경림 선생께서도 한마디 충고의 말씀 주십시오.

신경림 글쎄요. 아까도 나온 이야기지만 역시 공연히 민중을 들먹이기만 하는 설익은 작품들을 제대로 식별해야 할 것 같아요.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남의 말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공연히 목소리만 높다느니 목에 힘을 준다느니 하는 비난의 구실거리를 만들어주는 것 아니겠어요? 그래야 진정한 민족문학, 민중문학의 터전으로서 ‘창비’가 제 소임을 다할 수 있을 테니까요.

백낙청 오랜 시간 여러가지로 감사합니다.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창비’를 아껴주시는 여러분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하면서 오늘은 이만 끝맺기로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