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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

내가 로런스에 관한 단행본을 내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안 날 정도다. 로런스 연구로 박사논문을 제출한 것이 1972년, 거의 반세기 전이다. 그때부터 한국어 저서를 구상한 것은 물론 아니다. 72년 신학기를 앞두고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어 한국은 이른바 ‘유신독재’ 시대에 접어들었고, 나는 1974년 초부터 시국의 소용돌이에 휩쓸렸으며 계간 『창작과비평』 작업에도 복귀한 상태였다. 영어 학위논문의 출판은 기회가 주어졌더라도 필요한 수정작업을 감당할 처지가 아니었고 국문 저서를 구상할 겨를도 없었다. 첫 문학평론집을 낸 것이 1978년에 가서였다.

그러나 국내 독자를 위해 로런스에 관한 글을 한두 편씩 써내면서, 특히 1980년에 강단에 복귀한 뒤로, 학위논문 내용을 상당부분 활용하되 새 논의를 약간 추가해서 책을 한 권 만들겠다는 생각이 서서히 떠올랐다. 언제부턴가는 사람들이 물으면 생각은 하고 있노라고 답하는 단계로 나아갔다. 그게 80년대 후반이었다고 해도 벌써 30년이 훨씬 넘었다. 그사이 사람들의 질문에도 점점 큰 기대가 안 담기는 빛이 늘어났고, 세월이 더 흐르면서는 약간의 냉소가 서리는 기미마저 더러 보였다.

작업이 지연된 것은 나의 게으름과 내 나름의 ‘공익근무’가 바빴던 탓이 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심경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 까닭도 있다. 애초에는 학위논문의 내용을 선별적으로 활용하고 새 글을 좀 보태서 구색을 갖추면 책 한 권이 되리라고 쉽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작업이 계속 늦어짐에 따라 내가 왜 아직도 로런스를 붙들고 있는지를 동시대인들과 나 자신에게 설명할 수 있는 책을 써야 한다는 부담이 추가된 것이다. 영문학 교수로서 전공이 로런스라거나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내가 여전히 즐거움과 정신의 앙양을 느낀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시대적 현안과 고민이 넘쳐나는 독자를 위해서나 스스로 여러 긴박한 작업에 골몰한 나 자신을 향해서나 어떤 설득력 있는 답을 주는 책일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앞에 놓이게 된 것이다.

써내기만 한다면 무언가 답이 나오리라는 느낌은 마음 한구석에 늘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작업은 여전히 지지부진한 상태였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준 것은 후학들이었다. 나의 팔순에 맞춰 학위논문을 번역 출간하는 데 동의해달라는 옛 제자들의 요청을 받고, 딱히 팔순에 맞추지 않더라도 나도 저서를 빨리 완성해서 동시 출간하자고 합의한 것이다. 본서와 함께 『D. H. 로런스의 현대문명관: 『무지개』와 『연애하는 여인들』』이 간행됨으로써 그 약속이 늦게나마 실현되기에 이르렀다.

후학들과의 약속은 내게 이중의 자극이 되었다. 첫째, 비록 어느 해 어느 날로 못박지는 않았지만 드디어 일종의 ‘마감’이 생겼다. 번역작업이 예정보다 오래 걸리더라도 무작정 늘어질 리는 없는 만큼 나도 마냥 지체할 수만은 없는 필연에 직면한 것이다. 더 중요하게는, 학위논문이 통째로 번역돼 나올 판에 그 내용의 일부를 적당히 재활용하면서 책 한 권을 만든다는 안이한 발상을 폐기해야만 했다. 그러고 보니 내 작업이 지지부진했던 원인 중 하나는 그런 어중간한 저술이 스스로 내키지 않은 까닭이 없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아무튼 이제 학위논문과는 다른 차원의 새 작업을 해야 했고, 그 도전이 좋은 자극이 되기도 했다. 물론 학위논문의 일부를 원용했던 기왕의 성과를 개고하는 과정에 그런 활용의 흔적을 모두 지울 필요는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동안 연마해온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라든가 ‘후천개벽’ 같은 새로운 주제어들을 적극 도입한 새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제목부터가 외국 학계에 전달되기 힘든 저서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인으로서 한국 독자 상대의 글쓰기를 주업으로 삼겠다는 선택은 내가 오래전에 한 것이었고, 국제 학계의 인정이 특별히 중시되는 영문학 분야일지라도 수십년의 작심 끝에 내놓는 저서가 외국인이 알아주건 말건 초심에 충실할 일이라는 생각만은 확고했다. 실은 1990년대 초엽부터 로런스 국제학술대회에 간헐적으로 참여하면서 나는 국내의 로런스 연구가 비록 양적으로는 빈약하지만 외국 학계에서도 무시 못 할 수준이라는 자신감을 얻었고 실제로 우리 쪽의 기여를 괄목상대하는 외국 인사들이 적지 않았다. 이는 한국의 영문학도·로런스학도 중 상당수가 ‘한국에서의 영문학’이라는 주체적인 연구와 담론을 계발하려는 의지를 지녔기 때문에 이룩된 성과이기도 하다. 따라서 ‘서양의 개벽사상가 로런스’에 대한 나의 탐구에서 국제 학계도 취할 바가 있다고 할 때, 당장의 접근이 차단되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우선은 이 땅에서 내 할 일을 하는 것이 순서라고 마음먹었다.

이러한 결심은 한국과 한반도 역사에 대한 나의 긍지와 무관하지 않다. 그 최신·최대의 근거는 2016년 이래의 ‘촛불혁명’이지만, 촛불혁명 자체가 1987년의 6월항쟁 이래, 거슬러올라가면 4·19와 5·18 이래로 한국의 민주주의가 온갖 곡절을 거치면서도 꾸준히 진전해온 결과이며, 더 멀리는 3·1운동과 동학 이래의 후천개벽운동을 잇는 역사를 계승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역사가 단순히 정치적 민주화나 경제발전만이 아니라 정신 및 문화의 차원에서도 세계의 주목을 점점 더 받게 될 역사임은 촛불혁명 이후 한층 두드러진 각종 한류 열풍이라든가 최근 코로나19 감염증 사태의 대응에서도 실감된 바 있다.

후천개벽(또는 ‘다시개벽’)은 19세기 중엽 한반도에서 기원한 사상이자 운동이다. 지금도 학계에서는 그 논의가 동학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 책에서는 원불교의 창시자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의 사상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독자에 따라서는 특정 종교의 교리를 너무 많이 인용한다고 느끼는 분도 있을 테고 나와 원불교의 관계가 궁금한 분도 있을 것이다. 원불교와의 개인적 관계는 설명하자면 길지만, 본서의 논의가 어디까지나 국외자의 독립적 관점에서 이루어졌고 특정 종교의 호교(護敎) 내지 호법 행위와 무관함을 미리 밝히고 싶다.

원불교 교리에 대한 나의 이해는 미국의 불교학자를 포함한 교단 안팎의 교서 영역팀에 참여하면서 한층 진전했는데(1997년부터 2015년까지 간헐적으로 작업을 이어가서 『정전』과 『대종경』 『정산종사법어』를 잇달아 번역했다), 소태산 사상을 분단체제 극복운동에 참고하고 활용하려는 노력은 그전에 시작하여 그후로도 계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나는 동학의 다시개벽론이 한반도 고유의 사상적·역사적 돌파를 이룬 대사건임은 분명하지만 그 흐름이 소태산에 이르러 세계종교인 불교와 융합하고 근대의 과학문명, 그리스도교문명을 적극 수용함으로써 새로운 차원에 도달했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본서에 불교와 원불교 개념들이 자주 나오고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원불교의 개교표어가 근대의 이중과제를 집약적으로 표현한다는 해석을 제시한 것은 그런 인식의 반영이다.

한국어로 집필함으로써 국제 학계에서는 안 써낸 것이나 다름없이 되어버리는 책이 국내 독자들로부터도 외면당한다면 저자로서는 못내 섭섭한 일이 될 터이다. 영국의 작가를 다룬데다 비록 평론의 성격을 띠도록 썼으나 연구서의 성격을 겸할 수밖에 없는 책이 높은 대중성을 얻기를 바라는 것은 분명 허욕이지만 그래도 일반독자와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기 위한 내 나름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논의내용에서도 그 점에 항상 유의했는데, ‘책머리에’와 바로 이어지는 서장을 빼고는 장마다 ‘글머리에’를 써서 집필경위와 그때그때의 맥락, 나의 개인적 소회 따위를 밝힌 것 역시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서장 이후의 본론은 1, 2부로 나누었다. 제1부 다섯 꼭지는 내가 학위논문을 쓸 때부터 집중해온 『무지개』와 『연애하는 여인들』에 관한 글과 『쓴트모어』와 『날개 돋친 뱀』 등 소설을 다룬 글들이며, 제2부는 대부분 로런스의 산문을 주제로 삼은 다소 이론적인 논의인데, 마지막에 시에 관한 글 한 편을 추가해 총 여섯 장으로 구성했다. 한마디 덧붙인다면, 로런스가 워낙 사상적 편력의 폭이 넓고 예리한 통찰이 풍부한 저자이기 때문에 나로서는 정면으로 다루기 힘든 사상가들을 로런스를 끌어대어 논할 수 있었던 것이 본서의 자랑이기도 하다.

외국 글에서 인용한 표현에 괄호 속에 원어를 넣어준 것이 외국어를 전혀 모르는 독자에게는 오히려 번거로울 수도 있으나, 본서의 다수 독자에게는 이해를 도우리라는 기대 때문이었고, 원문이 길어질 경우는 ‘인용 원문’으로 돌렸다. ‘참고문헌’—더 엄밀히 말하면 언급된 논저들의 목록, 곧 통상적인 Bibliography라기보다 List of Works Cited—으로는 각주에 언급된 글들까지 모두 수록했는데, 이는 저자의 문헌 섭렵의 부족을 호도하려는 뜻이기보다 본서의 논의가 한국의 영문학 연구서로서는 드물게 많은 국내의 논자·연구자들과 주고받은 가운데 진행된 담론임을 부각시키려는 것이었다.

로런스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는 독자에게 더 친절해지는 길은 그의 생애를 개관하고 출발하는 방식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본서의 성격상 적당치 않지 싶고, 로런스 소설집 『패니와 애니』(창비세계문학 12, 백낙청·황정아 옮김)의 ‘연보’를 권말에 수록하는 것으로 대신했다.(원하는 독자는 연보부터 일별하고 본문 읽기로 들어갈 수도 있다.) 다만 로런스의 삶에서 본서의 독자가 특히 유념할 만한 사항 두어가지를 언급해둔다.

첫째, 로런스는 알려진 대로 탄광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광산촌에서 자랐다. 당시 로런스의 아버지와 같은 영국의 광부들은 대개 적빈과는 거리가 있는 비교적 안정된 삶을 살고 있었으나 전통적 계급질서가 여전히 확고한 시대였다. 따라서 등단할 때부터 로런스에게는 ‘탄광부의 아들’이라는 꼬리표가 붙어다녔다. 한편, 그가 전형적인 광부 가정 출신인 것은 아니었다. 자전적 요소가 많이 포함된 초기 소설 『아들과 연인』에 그려져 있듯이 어머니는 소중산층 출신으로 일종의 ‘강혼’(降婚, 영어로는 프랑스어 표현을 그대로 써서 mésalliance라고 함)을 했으며, 아들이 중산층 신사로 신분상승을 하기를 갈망하고 독려했다. 결과적으로 로런스는 어머니의 열망을 기대 이상으로 달성하고 ‘출세’한 셈이다. 노동운동에 가담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로런스는 자기가 진입에 성공한 부르주아계급보다 일상생활에서는 떠나온 노동계급과의 유대감이 자신에게 항상 더 생생함을 고백하곤 했다. 이것이 빈말인지 아닌지는 물론 그의 작품과 사상을 통해 검증할 문제다.

둘째로, 역시 알려진 사실인데, 로런스는 아내가 될 프리다와 애정의 도피를 벌여 독일과 이딸리아로 건너간 이후로 생애의 많은 시간을 여러 외국을 다니면서 보냈다. 그 배경에는 광부의 아들이 독일 귀족이자 은사의 부인을 이혼시켜서 결혼했다는 사회적 낙인 비슷한 것—유명한 작가가 되면서 어느정도 지워지기는 했지만—이 불편한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더 직접적으로는 그의 건강이 영국의 기후와 풍토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점과, 일생 내내 가난해서 글쓰기로 영국이나 미국에서 벌어들이는 돈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환율이 유리하고 생활비가 싼 고장을 찾아다닐 필요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로런스 국제학술대회는 대개 로런스가 살았던 곳에서 열리는데, 가보면 거의가 공기 맑고 풍광 좋은 고장들이다. 그가 건강에 이로운 장소를 찾아다녔기도 하거니와, 이딸리아나 호주 같은 데서도 도시에 살 형편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로런스가 살아가기에 편한 장소만 찾아서 외국을 다닌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새로운 삶의 실마리를 탐구하는 일이 언제나 먼저였고, 그러한 탐구는 본서의 중요한 관심사에 속한다.

셋째로, 그런 다양한 탐구의 도정에도 동아시아는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 중국 등 여러 오래된 사회들이 인류가 거의 잊어버린 더 먼 과거의 기억을 보존하려 노력해왔을 것이라는 포괄적인 언급을 지나가는 말처럼 던지기는 하지만 로런스 자신이 동아시아문명에 대한 별다른 인식이나 관심을 보인 바는 없다.(『연애하는 여인들』에 일본의 그림들이 살짝 나오고 버킨이 일본인 지인으로부터 유도를 좀 배웠다는 토막 언급이 있는 정도다.) 이는 동아시아의 연구자가 아니라면 특별히 주목할 점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로런스와 한반도 후천개벽사상의 만남 가능성을 탐색하는 입장에서는 음미해볼 만한 사실이다. 로런스 개인이 그러했음에도 후천개벽 사상가다운 면모를 보였다면 이는 로런스가 그만큼 특별한 작가요 사상가였다는 방증일 것이며, 한반도의 후천개벽사상이 로런스 같은 서양의 훌륭한 작가와 만날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다면 이는 한국인으로서 자랑이요 막중한 생각거리를 떠안은 꼴이 되겠기 때문이다.

이 책을 준비하는 오랜 세월 동안 내가 받은 도움과 일깨움을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제 집필 도중에도 유난히 많은 분들로부터 직접적인 도움을 받았는데, 그 이야기 전에 권말에 실린 ‘추천의 말’에 관해 먼저 약간의 해명과 감사를 해야겠다. 이는 원래 계획에 없던 일로서, ‘책머리에’를 포함한 모든 원고가 조판을 마친 뒤에 편집진에서 뒤표지에 몇분의 추천사를 받겠다고 했다. 문제는 책이 분량도 많고 내용도 특이하여 완독은 않더라도 어느정도 성격을 파악하고 써주는 수고를 마다않으실 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조심스레 부탁드린 분들이 한결같이 책을 성의있게 읽고 평해주셨으며, 길게 쓰신 분들은 적당히 발췌해서 홍보용으로 사용하라고 위임하셨다. 추천사의 전문은 책의 일부로 수록하면 좋겠다는 편집진의 의견에 결국 나도 동의했는데, 그러다보니 길고 짧은 발문이 다섯개씩이나 달린 저서를 내는 계면쩍은 호강을 하게 되었다. 김종철·최원식·정지창·김동수·김성호 동학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각주]

학위논문 번역작업을 발의한 후학들이 집필 착수의 계기를 마련해주었음을 이미 밝혔지만, 작업을 시작한 뒤로 강미숙·김영희·박여선·설준규·염종선·한기욱·황정아 등 여러 사람이 초고의 전부 또는 상당부분을 읽고 소중한 논평을 해주었다. 동아시아 정치사상 논의가 포함된 제10장에 대해서는 임형택 교수와 백영서 교수로부터 추가로 고마운 논평과 격려를 받았으며, 유두선·한기욱·김명환·유희석·강미숙·백영경 교수와 김경식 박사는 요긴한 자료를 찾아주었다. 동학들의 사전점검 덕분에 교정지가 처음부터 비교적 깔끔하게 나온 편이지만 정편집실의 김정혜 실장과 창비 인문출판부 강영규 부장 등의 세심한 교정을 거치면서 더 많은 바로잡음과 개선이 이루어졌다. 두루 감사드린다.

이런 과정을 거치고도 본서가 여러모로 미흡한 것이 오로지 나의 책임임은 더 말할 나위 없다. 내용도 미흡한데다 상업성에 대한 기대는 애당초 품기 어려운 책의 출간에 선뜻 동의해준 창비사와 강일우 대표에게도 감사의 뜻을 전한다.

이 책의 집필을 위한 막바지 준비를 서두르던 무렵 나는 아내를 잃었다. 아내와 사는 동안 나는 무언가 뒤가 든든하여 앞만 보고 달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일변한 여생을 살면서 과거를 돌이켜보는 시간이 잦아졌다. 그리고 내가 한 많은 일이, 아내의 특별한 도움이나 관심이 없던 작업의 경우에조차 옆에 함께 있어준 그의 기운을 받아 수행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 사이에 유명의 어긋남이 생긴 이후, 어떻게 하면 그 기운을 계속 받아 일하고 살아갈지가 나의 절실한 공부거리가 되었다. 이 책은 그러한 공부의 한가지 결실이기도 하다. 아내의 영전에 책을 바친다.

2020년 6월
백낙청 두 손 모음

—각주
*‘책머리에’에 이 대목을 추가하고 표지 디자인마저 끝나 제작과정에 들어가기를 기다리던 중 김종철 선생의 작고라는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들었다. 내게 준 마지막 선물이 된 글에 거듭 감사하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