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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문학평론을 처음 쓰기 시작할 때부터 한반도의 분단과 통일은 나의 큰 관심사였다. 그러나 ‘분단체제’에 대한 인식을 강조하며 한층 본격적인 논의를 처음 펼친 단행본은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1994)이다. 이후 『흔들리는 분단체제』(1998),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2006),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2009) 등이 잇달아 출간됨으로써 4부작 비슷한 모양새를 갖추었다.

그다음 책 『2013년체제 만들기』(2012)는 성격이 좀 달랐다. 역시 분단체제극복을 중요 주제로 삼았으나 2012년의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현실정치에 직접적인 영형을 끼치려는 야심을 갖고 소책자의 형태로 서둘러 출간한 것이었다. 나로서는 안 하던 짓이었고, 새 정부의 출범을 계기로 ‘2013년체제’라 부름직한 새 시대를 열어보려는 기획은 참담하게 실패했다. 하지만 시대의 대전환이라는 목표 자체는 깃발을 달리해서라도 계속 추구할 만한 성격이었고 책 내용에도 아직껏 유용한 것이 적지 않다고 스스로 위안하고 있다.

그렇게 따지면 본서는 크게 봐서 같은 종류의 여섯번째 저서가 되는 셈이다. 이번도 대통령선거라는 정치일정을 몇달 앞에 둔 상황이며 거대한 전환에 대한 꿈이 여전함은 서장에 밝혀져 있다. 그러나 현실정치에 대한 나의 개입능력이 극히 한정된 것임을 나는 2012년의 실패를 통해 깨우친 바 있고 내 책이 어떤 단기적 효과를 거두리라는 욕심은 내지 않는다. 다만 2012년 당시보다 한층 느긋한 마음으로 변함없는 희망을 품는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그사이 우리 사회에는 2016~17년의 촛불대항쟁이 일어났고 촛불혁명이라는 거대한 변화가 진행 중인 것이다.

당장의 선거승리보다 더 긴 앞날을 내다보면서 논의를 펼치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라는 개념을 주요 열쇠말로 삼아 그동안 아껴두었던 글들을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분단체제’ ‘한반도식 통일’ ‘변혁적 중도주의’ ‘촛불혁명’ 등 내 책의 독자라면 얼마간 익숙한 주제를 다룬 근년의 글을 보태 한권을 만들었다. 새로 집필한 것은 서장 「촛불혁명과 개벽세상의 주인노릇을 위해」뿐이지만 나머지 글들도 다소간에 새로 손을 보았다.

손질한 방식이 모두 똑같지는 않다. 제1부의 두편은 각기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에 대해 비교적 최근에 쓴 글들이고, 내용을 많이 손질하지는 않았지만 현재의 시점에서 읽히도록 표현을 조정했다. 반면에 제2부와 3부는 이중과제론을 처음 전개한 1999년의 「한반도에서의 식민성 문제와 근대 한국의 이중과제」를 시작으로 대략 시대순으로 배열했으며 더러 집필과 발표 경위를 글머리에 설명하기도 했지만 처음 발표된 시점이 드러나게 놔두었다. (일부 각주는 현재 시점에서 추가한 것이나 원래 주와 쉽게 구별되므로 따로 표시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시계열에 어긋나는 예는 작년에 처음 발표한 5장 「고 김종철과 나」인데, 내용상 4장 「근대 한국의 이중과제와 녹색담론」과 이어지기에 그렇게 배치했다. 하지만 6장부터 다시 연대순으로 돌아와 8장까지로 2부를 채웠다. 8장 「2013년체제와 변혁적 중도주의」는 2012년 총선에서의 야당 패배로 ‘2013체제 만들기’의 전망이 어두워진 상황에서 어떻게든 희망을 살려보려는 안간힘과 더불어, 변혁적 중도주의 개념을 다시 끌어들여 논의의 깊이나마 더해보려는 시도를 담은 것이다.

제2부와 3부 사이에는 ‘2013년체제 만들기’ 실패 이후의 자숙기간을 대표하는 약간의 공백이 있다. 그러나 세월호참사를 지켜본 뒤에 나도 ‘가만있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다시 입을 연 것이 9장 「큰 적공, 큰 전환을 위하여」(2014)다. 10장 「‘촛불’의 새세상 만들기와 남북관계」는 촛불대항쟁이 한참 진행되던 도중에 씌었고 11장 「시민참여형 통일운동과 한반도 평화」, 12장 「어떤 남북연합을 만들 것인가」는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의 산물이다. 끝으로 올해 초에 쓴 「기후위기와 근대의 이중과제」로 제3부가 마무리된다.

제4부는 ‘단평 모둠’으로, 해마다 써온 ‘신년칼럼’을 위주로 그동안 책으로 엮지 않은 시국 평을 주로 모은 것이다. 그중 두번째와 네번째 글은 이미 다른 저서에 실린 것을 중복 게재했는데, ‘단평 모둠’이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저지한 2004년의 촛불시위 이래 우리 현대사의 흐름을 드러내는 일정한 서사를 이룬다면 2008년의 촛불 그리고 2010년의 천안함사건에 대한 기억이 포함될 필요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제4부는 비교적 부담없이 읽히는 짧은 글들이라 1~3부의 시대적 배경을 일별하고 출발하고 싶은 독자의 ‘미리보기’로 이용될 수도 있고, 본론을 접한 뒤에 일종의 복습용으로 삼아도 좋겠다.

근대라는 역사적 현실이 점점 난맥상을 더해가는 시점에 유독 이 땅에서는 촛불혁명이라는 민중주도 민주적 변화의 거대한 사건이 벌어졌다. 한국과 한반도가 근대에 대한 적응력을 높임과 동시에 근대를 극복하고 개벽세상을 열어가는 세계사적 작업을 선도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본서가 이 작업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다면 더없는 보람이요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책의 내용을 준비해온 지난 20여년의 세월에 온갖 은택과 지적인 깨우침을 주신 분들이 일일이 거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여기서는 단지 출간의 최종 단계에 직접적인 도움을 준 창비의 한기욱 주간, 이남주 부주간, 염종선 상무, 황혜숙 본부장, 그리고 신채용 숲과나무편집실 대표, 이지영 인문교양출판부장, 박주용 팀장 등 실무진에게 감사하는 데 그치고자 한다. 그동안 내 책을 거듭 내면서 사업상 재미를 별로 못 본 강일우 사장에게도 감사와 위로의 뜻을 전한다.

2021년 11월
백낙청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