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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의 말: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

나는 대학생 때 백낙청 선생님의 로런스 강의를 두 학기 들었다. 그 강의를 통해서 발견한 로런스는 내가 고교시절에 읽었던 그 작가가 아니었다. 로런스는 근대 산업문명과 온몸으로 맞서서 싸운 사상적 거인이었다. 그 점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기까지는 백선생님 특유의 엄격하고 치밀한 텍스트 읽기에 학생들도 동참해야 했는데, 그 덕분에 나를 포함한 수강생들의 고통과 시련이 컸다.

그후 50여년이 지난 지금, 나는 선생님의 신작을 보고 있다. 누구든 일별하면 곧 짐작하겠지만, 이 책은 엄청난 공력을 들인 저서이다. 남들은 회고록을 쓰기도 벅찰 팔순의 고령에 이런 대작을 내놓을 수 있는 정신력이 그저 놀랍다고 할 수밖에 없다. 1970, 80년대라는 정치적 암흑기와 그 이후 지금까지, 한국의 비판적 지식인들의 보루였던 『창작과비평』을 거점으로 백낙청은 민족문학론과 리얼리즘론, 분단체제론, 그리고 그때그때의 상황에서 필요한 화두를 우리 논단과 지식사회에 끊임없이 던지는 일을 계속해왔다. 그리하여 대체 이 왕성한 지적 이론적 작업의 사상적 토대와 그 배경이 무엇인지 궁금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내 생각에, 그 해답은 상당부분 이 책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책은 ‘로런스’야말로 백낙청 자신의 평생의 화두였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즉, ‘근대를 어떻게 이해하고 동시에 극복할 것인가’라는 선생의 일생에 걸친 사상적 탐구과정에서 로런스는, 말하자면 ‘베이스캠프’였던 것이다. 로런스의 텍스트를 정밀하게 읽고, 로런스와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백낙청은 자신의 사상을 단련해왔고, 그것을 ‘개벽사상’이라는 이름으로 요약한 결산보고가 바로 이 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로런스에 관한 (한국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매우 독특한 연구서이면서, 동시에 저자 자신의 문학 정치 사회사상을 집약하고 있는 저술이기도 하다. 로런스를 깊이있게 들여다보고자 하는 사람은 물론,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지식사회의 가장 지성적인 양심을 대변해온 한 사상적 거인의 진면목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인내심을 갖고 꼼꼼히 읽는다면, 이 책에서 실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전 영남대 교수, 영문학
 

해방 이후 한국에서 출판된 문학책 중 한 권을 들라면 나는 이 책을 고르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서양사상의 주류에 반란한 D. H. 로런스 최고의 안내서로되, 한국문학의 졸가리를 헤아리는 데도 맞춤한 참고서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직면한 미증유의 과도기를 제대로 겪을 사유의 종자들이 곳곳에서 빛나는 지침서로서도 종요로우매, 서도(西道)의 황혼녘에 한반도의 남쪽에서 날아오른 지혜의 부엉이가 일대 장관이다. 일언이폐지컨대, 이 책은 서양에 대한 통투(通透)한 이해를 바탕으로 역사적 격동 속에 숨은 한국의 개벽사상을 다시금 들어올린 백낙청 사상의 보고(寶庫)다.

최원식 / 인하대 명예교수, 국문학
 

백낙청 선생의 이번 저서는 20세기의 영국작가 D. H. 로런스를 서양의 개벽사상가로 규정한 제목부터 도전적이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으로 외설 시비를 일으킨 로런스가 머나먼 조선땅에서 19세기 중반에 발아한 개벽사상을 공유하고 있다니, 독자들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일단 책을 펼쳐들면, 언제나 현실에 발을 딛고 시대의 모순과 대결하며 리얼리즘론과 민족문학론, 분단체제론 등 치밀하고 논리적인 담론으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온 ‘대지의 지식인’이 이런 제목을 붙인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저자가 밝혔듯이 ‘한국의 독자들을 위한’ 로런스 연구서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외국문학 연구는 외국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소개하든가 종합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저자는 로런스를 주제로 박사학위논문을 쓰고 귀국한 1972년 이래 평생을 한국인의 주체적인 시각에서 로런스의 작품과 사상을 읽어내려고 노력했고, 근 50년 동안의 이런 적공이 온축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왜 로런스이고 왜 개벽사상인가? “유럽중심적이고 근대주의적인 지식・진리 개념과 우주관을 뿌리째 문제삼”은 “로런스의 도전”이 바로 개벽사상과 상통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로런스를 서양의 개벽사상가라고 한 것은 주체적인 자의식에서 나온 발상이다. 그것은 또한 동학의 후천개벽운동과 3・1운동, 4・19와 5・18, 6월항쟁과 촛불혁명을 거치며 피와 땀으로 일구어낸 한국 민주주의의 진전과 함께 한국이 이제는 정신과 문화의 차원에서도 주목을 받게 되었다는 자부심의 표현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 책이 전문적인 연구서이면서도 국내 독자들을 위한 친절한 안내서로 읽히도록 각 장의 첫머리에 집필경위와 그 당시의 시대적 맥락, 개인적 소회 등을 밝히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로런스의 작품과 사상을 분석한 종합적이고 입체적인 연구서지만 그것을 구성하는 한 편 한 편의 글은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 리얼리즘과 전형성,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연속성 같은 한국문학의 쟁점들에 관한 저자의 견해를 로런스를 활용하여 설명하고 설득하는 독립적인 평론으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

오래전부터 백낙청 선생은 통일담론에서도 물질과 정신의 개벽을 강조해왔다. 통일을 달성하려면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나 국내외 정치환경의 변화 못지않게 원한과 증오와 분열의 심성을 송두리째 뒤바꾸는 ‘마음공부’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개벽사상, 특히 원불교의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는 1997년 회갑 기념대담에서 원불교야말로 유・불・선뿐만 아니라 서양의 기독교와 현대과학까지 통합할 수 있는 너른 품을 가지고 있으며, 이 점에서 서구의 물질문명을 수용하면서 극복할 수 있는 개벽사상의 모태로 삼을 만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때부터 10년간 원불교 경전의 영역에 정진한 백선생은 원불교의 『정전』과 『대종경』이 “한국어로 된 역사상 최초의 세계종교 경전”이라고 평가했다. 동학의 개벽사상과 개벽운동(갑오농민혁명과 3・1운동, 1920년대의 개벽문화운동)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지만, 수박 겉핥기식으로 동학 경전을 읽은 나로서는 오랜 적공 끝에 나온 백선생의 이런 판단을 존중할 수밖에 없다.

어떤 논자는 백낙청 선생을 ‘개벽 좌파’로 부르기도 했지만, 나는 이런 명칭이 영문학자와 문학평론가, 출판문화운동가(『창작과비평』을 중심으로 한 20세기 후반부의 ‘창비문화운동’은 『개벽』을 중심으로 한 1920년대의 ‘개벽문화운동’ 못지않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나는 평가한다), 통일운동가, 개벽사상가 등 다양한 면모를 지닌 백선생을 좌파라는 좁은 틀 속에 가두는 것 같아 좀 불만이다. 내가 본 백선생은 청사(晴蓑)라는 아호가 뜻하는 것처럼 맑은 날에 도롱이를 쓰고 다니는 시대의 이단아로서, 서구식 ‘개화’를 지상목표로 삼는 시류를 거스르며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글공부와 마음공부를 통해 중도적 ‘개벽’을 추구한 선비이기 때문이다.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를 읽은 후에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정지창 / 전 영남대 교수, 독문학
 

D. H. 로런스는 「도덕과 소설」(1925)이라는 평론에서 “예술이 하는 일은 인간과 그를 둘러싼 우주 사이의 관계를 그 살아 있는 순간에 드러내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연이어 그는 고흐의 해바라기를 예로 들면서 고흐가 앞서 말한 관계를 “드러내고 또는 이룩한다”라고 표현한다. 아름답고도 심오한 말이다.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 또한 관계를 이룩하는 것이라니. 예술의 입장에서 관계는 이미 성립된 것이자 또한 성립되어야 할 무엇이다. 달리 말하자면 예술적 진리는 그렇게 과정으로서, 능동적인 참여로서 존재한다는 말일 것이다. 로런스의 말은 나를 깊은 생각에 빠뜨렸다. 이 책의 제목이 강하게 암시하듯이, 로런스가 정말 ‘서양의 개벽사상가’라고 부를 만한 인물인지 나로서는 쉽게 판단할 수 없다. 급진적인 미래전망을 내세운 사상가들이 자주 빠지곤 했던 단순화와 억측의 위험들로부터 그가 완전히 자유로운지도 확신하지 못한다. 다만 백낙청 선생의 책 덕분에 나는 로런스의 여러 통찰을 음미할 수 있었고, 그가 단지 이름 있는 소설가일 뿐만 아니라 사상가의 면모를 지닌 작가, 매력적인 비전을 지닌 작가였다는 점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런데 정작 나를 매혹시킨 것은 따로 있다. 로런스 연구를 발판으로 삼아 근대사회에 대한 거시적인 전망, 예술의 역할에 대한 철학적인 이해, 리얼리즘에 대한 진지한 재고찰 등을 일관된 흐름으로 모아내는 백선생의 치열한 문제의식이다. 게다가 그는 기존의 글들을 단순히 묶어내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재의 시점에서 새롭게 제기된 논의들과 꼼꼼하게 대결하는 면모를 보여준다. 지치지 않는 이 불굴의 비평정신에도 경의를 표한다.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이 책은 한명의 비평가가 한 작가의 연구를 통해 어떻게 자신의 사상체계를 ‘드러내면서 이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이다.

김동수 / 서울대 강사, 불문학
 

사실 나는 백낙청 선생님을 통해 로런스에 입문했고 어떤 의미에서는 문학 자체에 입문했다. 내가 배운 로런스는 무엇보다 내게 직접 말을 거는 사람, 그러니까 과거 지구 저쪽 어딘가의 삶이 아니라 바로 내 삶, 우리의 삶에 대해 말하고 있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문학주의’(이런 용어가 있다는 건 나중에 알게 되었다)의 보이지 않지만 답답한 우리에 갇히지 않고서도 문학공부를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한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애송이 대학원생 시절, 루카치에 대한 어쭙잖은 지식을 바탕으로 수업에서 로런스를 비판한 적이 있다. 그때 백낙청 선생님에게서 들은 말은 (정확한 표현은 기억나지 않지만) 이런 것이었다. “비판을 하려거든 ‘들어와서’ 하라.” 당시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들어가면’ 투항하는 것 아닌가?), 세월이 좀 흐른 후에 어렴풋이 느낌이 왔다. 한발만 걸치고 ‘간을 보는’ 식으로 문제를 건드리지 말라. 너의 뭔가를 걸고 문제와 부딪혀라. 어떤 답이 나오든 문제에 책임을 져라.

이 말이 다시 생각난 것은 지금 이 책의 제목 때문이다.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 이 책에서 거론하는 후천개벽사상에 문외한인 처지에, 또는 자신이 문외한이라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처지에 선뜻 ‘들어가서’ 뭔가를 하기는 꺼려지게 만드는 제목이 아닌가. 그런데 저자가 이 점을 몰랐을 리 없다. 그렇기에 이 제목은 한발을 (또는 두발 다) 빼고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한 의식적인 도전이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발견하게 되는 사실은 우선 개벽사상에 대한 논의가 책 전체에 퍼져 있지는 않다는 점, 그럼에도 최제우나 천도교 사상 및 불교와 원불교에 대한 저자의 관심이 진지하고도 깊다는 점, 그리고 ‘후천개벽’ 개념 자체는 서구 이론의 맥락에서도 아주 낯선 것은 아니되(가령 그것과 벤야민의 역사관, 또는 저자 자신도 거론하는 아감벤의 메시아주의의—상동성은 아니더라도—연속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저자가 동양의 사상적 종교적 유산을 로런스의 변화, 발전해가는 사유와 대면시키는 가운데 이 천재적 작가에 대한 새롭고 독특한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1970년대에 학위논문의 논지를 상당부분 반영하여 학술지에 실었던 논문에서부터 최근에 새로 쓴 글까지, 실로 지금까지의 학문적 생애 전체에 걸친 로런스 연구의 결과를 이 책에 담았다. 이는 매우 이례적이면서도 모험적인 시도인데, 모험적인 것은 지난 40, 50년간 당연히도 현실과 학문의 경향이 변해왔고 그에 따라 글의 시의성은 물론 주장의 타당성에도 변화가 생겼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 자신 반복해서 읽고 그로부터 영감을 얻었으며 대학원 수업에 활용하기도 한 『무지개』론과 두 편의 『연애하는 여인들』 관련 논문이 「재현과 (가상)현실」 같은 이론적인 글이나 더 근래에 쓰인 다른 글들 못지않게 오늘날에도 여전히 공부거리를 던진다는 것은 그것대로 주목할 점이거니와, 저자가 단 한 편의 논문도 과거에 학술지나 계간지에 실렸던 그대로 싣지 않고 글의 현재성을 살리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 점은 후학들에게 또다른 종류의 배움을 안겨준다. 여기에 실린 각 논문은 출판 당시 국내와 국제 로런스 연구의 맥락에서 선도적인 주제와 주장을 담고 있었고(가령 로런스와 하이데거의 연관성에 관한 다각적 논의, 『연애하는 여인들』에 등장하는 뢰르케의 포스트모더니스트적 면모에 관련된 주장 등), 로런스의 시 「죽음의 배」와 윤회에 관련된 것을 포함해 많은 주장들은 지금도 국제적 차원의 논의를 기다리고 있다. 한편 『무의식의 환상곡』에서 로런스가 펼치는 일견 성차별적인 담론을 ‘남성론’으로 읽어보자는 제안(8장)은 영미권보다 오히려 국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될 법한데, 물론 여기서 이 문제를 더 구체적으로 거론할 수는 없다.

이 책은 어떻게 과거의 정신적 산물이 현재의 실천적 담론으로 거듭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범이다. 내가 알기로 저자에게 학문적 글쓰기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삶에 대한 정관적(靜觀的) 논평이 아니라 근본적 개입의 한 형식이(었)다. 그렇기에 과거와 현재가 연속성을 띠며, 과거의 산물이 현재의 새로운 구도 안에 무리없이 재배치될 수 있는 것이다. 그에게 연구와 비평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 이 점은 오늘 우리 앞에 나타난 그의 책에 뜻밖의 새로움을 부여한다. 지난 20, 30년간 학문세계와 비평계에서 나란히 일어난 ‘감수성의 분열’은 현실에 진정으로 개입하려 하지 않는 연구논문과 현실에 대한 깊은 탐구를 버거워하고 꺼리는 비평이 급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책에서 펼쳐지는 사유의 모험이 얼마나 독창적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비평적 연구’란 어떤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도, 우리는 의도적인 복고풍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책의 표지를 넘겨볼 필요가 있다.

김성호 / 서울여대 교수, 영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