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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록] 창비문화 인터뷰 2: 언 땅에 틔운 푸른 싹

‘창비’ 30년을 듣는다

백낙청(『창작과비평』 편집인)

고은명(창작과비평사 편집자)

*이 인터뷰는 격월간 『창비문화』 1996년 5~6월호에 실린 「기획연재: ‘창비’ 30년을 듣는다」의 한 꼭지이다.
 

고은명 7호(1996년 1~2월호)에서 선생님께서 60년대 얘기를 하시고 지난호에는 염무웅 선생님께서 70년대 얘기를 해주셨는데, 이번에도 70년대를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7호의 이야기가 선생님이 미국 유학을 가시는 것으로 끝나는데, 유학중에는 『창비』 일에 전혀 관계하지 않으셨습니까?

백낙청 전혀 관계하지 않은 셈이에요. 잡지가 나와서 보내주면 한 페이지도 빼놓지 않고 다 읽고 염선생한테 독후감 같은 것을 써 보내기는 했지요.

고은명 교정을 봐서 보내시지는 않으셨어요?(웃음)

백낙청 아니, 내가 교정 봐서 오자 지적하는 사람으로 호(號)가 나 있는 모양인데 그때는 안 그랬어요.(웃음) 그럴 시간도 없었지만, 요즘 내가 이따금 그런 잔소리를 하는 건 이제는 창비가 교정에서도 일류가 돼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지요. 아무튼 그때 염선생하고는 매번 독후감을 써 보내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다른 때도 더러 문통을 했지만 그것 외에는 관여한 게 없어요.

고은명 72년도에 편집인으로 복귀하시는데요, 염선생님이 잡지를 만드실 때와 특별히 달라진 점이 있다면……

백낙청 72년 여름호까지는 염선생이 혼자 만들었고, 가을호도 거의 계획을 세워놓은 상태에서 내가 왔는데, 그 이후의 책을 봐도 기조가 달라진 것은 없을 거예요. 나 없는 사이에 염선생이 여러가지로 고생은 했지만 대신 60년대의 창비에 비해 체질이 좀더 민중적으로 됐다고 할까, 역시 미국 유학한 엘리뜨 영문학도, 서울대 전임이 주관하는 잡지와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지요. 아마 내가 돌아와서 염선생과 갈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 사람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나는 잡지의 변모에 전적으로 찬성하는 입장이었어요. 그래서 내가 돌아와서 한 일은 그 기조를 유지하면서 재정 등 기반을 튼튼히 하는 것이었지요. 가령 돌아와서 염선생을 통해 만난 박현채(朴玄埰) 선생의 경우 처음 뵙고 내가 적극 도와주십사고 하자,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하는 말인지 뭘 알고 하는 얘긴지 긴가민가하시는 눈치였어요. 그후 박선생이 가져오신 글들을 계속 실었고, 결국 선생과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됐지요. 강만길(姜萬吉) 선생의 경우도 염선생이 잡지에 「이조후기 상업구조의 변화」를 청탁해 실은 후, 내가 돌아와서 술 한잔하면서 의기투합했어요. 염선생 시절과는 이렇게 자연스럽게 이어졌지요.

고은명 73년에 만해문학상을 제정했는데요, 상을 제정하게 된 경위와 2회 후에 중단한 이유를 좀 설명해주시지요.

백낙청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상이 많은 시절이 아니었고 또 『창비』 지면을 통해서 활약하는 문인들은 다른 데서는 예심에도 거의 넣어주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우리도 상을 하나 만들었는데, 주변에서 비판도 있었어요. 상이라는 것이 결국 개인주의적인 경쟁을 부추기는 제도인데 ‘창비’가 지향하는 바와 다르지 않느냐는 거지요. 또 실제로 운영해보니 확실히 상 때문에 인화에 금이 갈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기여하는 바가 더 많으리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상을 중단하게 된 것은, 2회를 시상할 때 이미 긴급조치 9호가 나온 뒤였는데, 그때 3회 후보자로 우리 내부에서 유력하게 거론된 사람이 김지하(金芝河)와 조태일(趙泰一)씨였지요. 그런데 김지하씨는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도 위태로울 때였고, 조태일씨는 『국토』를 내자마자 판금된 상태였습니다. 이 긴급조치라는 것이 내가 언젠가 ‘긴급조치야말로 유신의 꽃’이라고 표현했던 것처럼 아주 묘해서, 긴급조치를 비방하는 것은 물론 긴급조치에 걸렸다는 사실을 보도해도 긴급조치에 걸리게 되어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긴급조치에 걸린 작가를 가지고 얘기한다는 것 자체가 불법인 거지요. 그런 상황에서 심사를 한다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해 중단했는데, 그 ‘긴급한’ 조치라는 게 유신정권 끝나는 날까지 계속된데다, 10·26 이후 다시 시작하려고 하니 이듬해 7월에 잡지 자체가 없어져버렸지요. 잡지도 없는데 상만 주는 것도 구차하고…… 그러다 보니 88년까지 오게 된 겁니다.

고은명 74년 1월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개헌청원지지 문인 61인 선언’ 참여로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고, ‘민주회복국민선언’ 참여 등 잇따른 반독재 민주화운동 참여로 서울대학교에서 해직되시지요?

백낙청 ‘문인 61인 선언’이 나오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그 전의 개헌청원운동에 있었어요. 이럴 때 문인들이 가만있을 수 없다 해서 정초에 내가 주로 한남철씨와 함께 세배 다니면서 서명을 받았지요. 명동 YMCA 코스모폴리탄 다방에서 이호철 선생의 사회로 내가 선언문을 써서 낭독했는데, 그때만 해도 61인이란 수가 적은 수도 아니었고 실제로 참석한 분들이 꽤 쟁쟁했어요. 이희승(李熙昇) 선생에, 안수길(安壽吉)·박연희(朴淵禧) 선생 같은 원로들 그리고 김지하씨 등…… 황석영(黃晳暎)·최민(崔旻)씨가 당시로서는 궂은일을 맡은 ‘따까리’였던 셈이고요. 경찰에서는 쉽게 풀려났는데, 이튿날 긴급조치 1호가 선포되면서 다시 한 사람씩 정보부로 불려갔지요. 사실은 내가 주동자인 셈인데 불똥은 엉뚱하게 이호철 선생한테 튀었어요. 이호철 선생은 그때 이미 여러번째여서 찍혀 있었거든요. 김우종(金宇鍾)·임헌영(任軒永)·장백일(張佰逸)·정을병(鄭乙炳)씨 같은 사람들을 묶은 문인간첩단 사건이란 건 조작한 겁니다. 나는 그야말로 초짜고, 또 서울대 전임강사니까 아무래도 학생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그래서 미국에서 갓 돌아와 물정을 모르는 순진한 자유주의자 대접을 받아 엄중 경고 받고 훈방이 된 거예요. 그해 11월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결성할 때는 서명은 했지만 표면에는 안 나섰지요. 그런데 그달 27일인가 ‘민주회복국민선언’에 또 서명을 했거든요. 학교 쪽에서는 수습하려고 노력했는데 어차피 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나 역시 『동아일보』에 「교수의 인권과 대학의 기능」이라는 글을 싣는 등 수습을 위해 뛰어다니는 학교측 인사에게는 섭섭한 짓을 계속했고요. 사표 내달라고 하는데 사표도 안 내고…… 그래서 결국 파면당하고 말았지요.

고은명 74년에 창작과비평사를 설립하고 단행본 사업을 시작하여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객지』 『전환시대의 논리』 등 빛나는 ‘창비신서’들을 많이 냈는데, 신서라는 씨리즈는 당시 출판계에 거의 없던 걸로 아는데요?

백낙청 ‘신서’라는 것이 당시에도 없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우리가 낸 성격의 책들을 내지는 않았지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현대편이 1번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객지』가 1번이 되는 게 좋았을 것 같아요. 사실 원고도 제일 먼저 들어왔고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연재를 했기 때문에 원고가 다 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내려고 보니까 번역 등 수정할 게 많았어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낼 만한 책인 것은 틀림없지만, 사실 창비신서의 첫 권을 번역본으로 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하면 자랑스러운 일은 아닌 것 같아요.

고은명 75년부터 78년에 걸쳐, 『창비』 75년 봄·여름호 및 『국토』 『신동엽전집』 『한국의 아이』 등 ‘창비’의 책들이 잇따라 판매 금지되고, 리영희 선생님의 『8억인과의 대화』 때문에 선생님이 재판까지 받으시는 등 사건이 많았는데요.

백낙청 74년은 나 개인적으로는 곡절이 많았지만 ‘창비신서’는 무사했습니다. 신서 4번인 『전환시대의 논리』는 리영희 선생이 뭐 그런 책이 팔리겠냐고 하시는 걸 내가 팔릴 것 같다며 냈는데, 당시 신서 중에서 제일 많이 나갔고 아직까지도 꾸준히 팔리고 있지요. 『전환시대의 논리』도 그때는 별 말썽 없이 넘어갔어요. 그런데 75년부터 잡지가 점점 당국에서 악명이 높아져가고, 긴급조치 9호라는 아주 편리한 제도가 생겨 그때 나온 책들이 연달아 판매금지가 됐습니다. 『국토』가 제일 먼저 당했고, 그다음이 『신동엽전집』이에요. 『한국의 아이』는 좀 뒤지요. 『창비』 봄호의 경우 김지하씨의 시가 오랜만에 실리니까 많이 찍었는데도 매진이 되자, 당시 총판을 맡은 양우당(良友堂)에서 그동안 팔린 대금을 어음이 아니라 수표로 결제해주며 더 찍으라고 했지요. 그래서 몇천 부를 더 찍었는데 깔자마자 긴급조치가 나온 거예요. 걸릴 것이 있는 품목은 자진 회수하라는 공문이 왔는데 공문은 어느 출판사에나 보낸 거지만 우리 쪽에는 좀 특별한 신호도 있어서, 반품하라는 서류를 서점에 보냈지요. 그러나 반품을 한 데도 있고 안 한 데도 있었어요. 여름호의 경우는 깔아놓은 지 얼마 안되어 리영희 선생의 「베트남 전쟁 III」이 문제가 되어 문공부에서 정식으로 판금 공문이 왔지요. 얼마 안 있어 『신동엽전집』이 나왔는데 그때는 내가 정보부에 연행이 돼서 조사를 받았습니다. 담당 수사관은 상당히 호의적이었어요. 이 책을 왜 냈느냐고 묻기에, 훌륭한 시인의 좋은 시집이고 이제 작고한 뒤니 정리를 해야 될 것 같아 냈다고 했더니, 꼭 그렇게 말해야겠느냐, 유족의 생계도 있고 회사 재정에 도움도 될 것 같아 냈다고 하면 좋지 않겠느냐는 거예요. 그래서 물론 그런 생각도 했다고 그랬더니 조서에 그렇게 써줬어요.(웃음) 『8억인과의 대화』가 나온 것은 77년이에요. 『신동엽전집』도 그렇고, 그해에 『8억인과의 대화』가 판금만 안됐으면 창비가 적자를 모면할 수도 있었지요. 아주 잘 팔렸으니까. 그런데 이것이 악명 높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문제를 삼아서…… 나는 조사를 받고 일단 풀려나왔고 리영희 선생은 구속된 상태에서 나중에 기소됐지요. 외국에서는 필화사건이 생기면 제일 중하게 당하는 사람이 발행자예요. 그런데 우리나라의 관례는 저자가 주로 당하잖아요. 사실 나는 처음에는 내가 기소되리라고 생각 안 했어요. 『우상과 이성』의 발행자도 함께 걸린 상태였고요. 그러나 유독 창비사의 대표만 기소되고부터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데 1심에서 실형이 떨어졌어요. 단단히 경고를 한 꼴이지요. 실형을 받았지만 법정 구속은 안됐고 2심에 가서 나는 집행유예를 받고, 리영희 선생은 3년에서 2년으로 줄었지요.

고은명 80년 3월 서울대학교에 복직되셨는데요.

백낙청 76년 재임용 법률에 의해 해직된 분들은 일찌감치 복직이 정해졌지요. 그러나 리영희 선생과 나는 우선 복권이 되어야 하는데 반공법은 복권이 안된다는 말이 많아서 끝까지 복직이 불투명했어요. 그러다가 막판에 가서 3월 1일자로인가 복권이 됐지요.

고은명 80년 7월 계엄사에 연행되었다가 풀려난 후 국보위 결정으로 『창비』가 폐간되었는데요, 그 전후 얘기를 좀 자세히 해주시지요.

백낙청 80년 5·17이 나면서 소위 김대중 내란사건 관련자를 중심으로 여러 사람이 연행됐는데 나는 거기서는 빠졌어요. 7월에 2차로 검거한 사람들 중에 끼였지요. 그게 제헌절이었을 거예요. 집에서 한창 원고를 쓰고 있는데 합수부에서 데리러 왔어요. 아까도 얼핏 얘기했지만 나는 안기부 같은 데를 다니면서 실무자들 덕을 본 적이 많아요. 나를 취조한 친구가 지금도 누구라고 하면 아는 사람은 알아주는 대단한 수사관으로 자기 말에 따르면 ‘사람백정’이었어요. 수사가 대충 끝나고 나면 상부 결정을 기다리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기 마련인데, 그의 말로는 2차 검거자 명단에는 내가 톱으로 올라 있어서 고참이자 유능한 수사관인 자기가 맡았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가 맡은 것을 천행으로 알라, 자기쯤 되니까 나를 구제하자는 건의라도 할 수 있다,라는 거예요. 사실 나는 복직이 된 후 우리 국민이 나에게 되찾아준 일터인데 여기에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여기저기서 함께 일하자고 제안할 때 당분간은 학교 쪽에 충실하고 공부도 더 하고 싶다며 거절하곤 했지요. 그래서 그들은 나에 대해 복직시켜줬더니 개과천선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때 연행된 사람 중 해직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나는 면했습니다.
조사를 받을 때 보니 그들은 정말 온갖 정보를 다 갖고 있던데 유독 창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묻지를 않았습니다.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지요. 모를 리는 절대로 없는데…… 그런데 며칠 안돼 잡지가 폐간되는 거예요. 이미 없애기로 했으니 물을 필요가 없었던 겁니다.(웃음)

고은명 잡지가 폐간된 후 세무조사를 받는 등 80년대 들어서도 많은 사건들이 있었던 걸로 아는데요, 폐간 후의 갖가지 얘기들은 나중에 더 듣기로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지난 3월 23일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으로 선출되셨는데, 앞으로의 포부를 좀 밝혀주시지요. 『창비』 편집인으로서의 역할과는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나갈 계획이십니까?

백낙청 사실 창비 편집인으로서의 역할을 축소하려는 생각은 작년부터 했어요. 연초부터 실행에 옮기고 있기도 하고요. 다만 내 의도는 책 좀 읽고 글을 좀 더 쓰려는 거였는데 뜻밖에 복병을 만난 셈입니다. 아무튼 작가회의 회장이 됨으로써 편집인 기능은 그냥 축소가 아니라 조금 다른 의미에서 당연히 거리를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안하려고는 했지만 기왕에 맡은 바에는 작가회의가 한국문학을 대표할 수 있는 공적인 기관이 되게 해야겠다는 생각인데, 그러려면 아무래도 창비에 너무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될 것 같아서요. 아무리 창비 자체가 내용적으로 공적인 성격을 띠었다 하더라도 엄연한 상법상의 영리사업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정말 최원식(崔元植) 주간과 회사의 이시영 부사장을 비롯한 임직원 여러분 모두의 책임이 그만큼 무거워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고은명 요즘 굉장히 바쁘신 걸로 아는데, 오랜 시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