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칼럼

[회화록] 4권 해설

혼란의 시대, 희망의 전언: 세기전환기의 백낙청

김영희
 

백낙청 회화록의 네번째 모음인 이 책은 『창작과비평』에서 1997년 말에 마련한 선생의 회갑기념 회화에서 시작한다. 당시 편집위원 세 사람과 편집인인 선생이 이틀에 걸쳐 나눈 대화의 기록인 「회갑을 맞은 백낙청 편집인에게 묻는다」는 민족문학론, 분단체제론, 리얼리즘론을 위시해 선생이 그간 관심을 기울여온 문제들을 두루 되짚어보는 자리이자 ‘국민의 정부’ 출범과 함께 ‘IMF 위기’를 맞이한 싯점에서 슬기로운 대응 방향을 논의하는 뜻깊은 자리였다. 필자도 편집위원의 한 사람으로 이 회화에 끼게 되어 선생의 글들을 다시 읽으면서 질문거리들을 준비하느라고 고심하던 기억이 새롭다. 대학에서는 사제관계로 또 창비에서는 편집인과 편집위원의 관계로 선생과 오랜 연을 이어온 필자로서는 개인적 감회도 감회려니와, 다양한 관심들이 근본에서 서로 맞물리며 상통하는 선생의 사유를 다시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이 책의 마지막에 실린 2004년의 좌담 「지구화시대의 한국 영문학」은 선생의 정년기념논문집인 『지구화시대의 영문학』에 실린 글들을 대상으로 영문학 동학들과 나눈 대화의 기록이다. 필자 자신도 이 논문집에 글을 기고하였고 그에 대해 좌담자들과 선생 사이에 오간 토론을 고맙게 읽었었다. 비단 필자의 글만이 아니라 글 하나하나에 대해 선생의 곡진한 논평이 이어졌는데, 사실 논문집을 헌정받은 당자가 그에 대해 길게 거론하는 것부터가 유례없는 일이 아닌가 싶다. 작품이 되었든 평론이 되었든 제대로 대접하는 길은 정성들여 읽고 진솔하게 반응하는, 필요한 경우에는 냉정한 비판을 가하기도 하는 것이라는 평소의 소신을 실천으로 보여주신 셈이다.

회갑과 대학 정년퇴임을 맞게 된 이 시기에 선생의 이력에 대한 관심이 회화에서 부쩍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2003년 초 정년을 계기로 창비 웹매거진에서 마련한 대담은 제목대로 ‘영문학연구에서 시민사회의 현안까지’ 다양한 화제를 짚으면서 유학 경험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도 담고 있다. 같은 해 『작가연구』에 수록된 대담 「민족문학운동의 역사와 미래」 역시 중등학교 시절부터 시작해 해외유학, 『창비』 창간의 경험들이 소상하게 술회되고 선생의 사상적 모색을 시기별로 되짚고 있어 선생의 전모를 친근하게 접할 수 있다. 이런 점검은 20세기를 마감하는 무렵에 있었던 「시대적 전환을 앞둔 한국문학의 문제들」에서도 각도를 조금 달리 하여 이루어진다.

생각해보면 선생 개인으로도 이 시기는 하나의 전환기가 될 법하고, 실제로 오랫동안 직접 챙겨오던 『창비』의 편집과 운영에서 한발 물러나면서 삶의 새로운 국면을 예비하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선생은 1998년 가을부터 1년간 미국의 하바드옌칭연구소 초청으로 하바드대학의 객원연구교수로 체류했다. 장기간 해외체류는 선생이 하바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1972년 이후로는 처음으로, 당시 한겨레신문의 요청으로 고은 선생과 나눈 대담에서 말한 것처럼, “자본주의문명의 극치”인 미국의 문제점과 동시에 “미국사회의 활기”도 확인하면서 오랜만에 한국사회에서 거리를 두고 세계 속의 한국을 되짚어보는 기회가 되었다. 이 책에 월러스틴과의 대담도 실려 있지만 이 무렵부터 서구 지성계와의 지적 상호교류가 부쩍 잦아진다는 인상을 곁에서 받았다.

그때쯤 필자도 오랜만에 연구년을 맞아 캘리포니아의 버클리에 머물고 있었는데, 마침 그 해 7월 뉴멕시코의 작은 도시 타오스에서 열린 제7회 국제로렌스학회에서 선생과 만나게 되었다. 선생은 하바드로 가시기 직전이고, 먼저 미국에 와 있던 필자는 같이 머물던 윤모 교수와 지금은 시카고대학에 있는 최경희 교수와 함께 자동차로 미국 서부지역을 돌아보던 차였다. 학회를 마치고 선생의 귀국 비행편이 있는 앨버커키까지 여행 겸 배웅 겸 함께 모시고 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노중에 싼타페 거리를 걸으면서 ‘국민문학을 겸하는 민족문학’이라는 명제와 다름아닌 ‘지혜의 위계질서’ 개념을 두고 나눈 대화가 기억난다. 그런데 그 길지 않던 시간에 선생은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건강 때문에 이제는 책과 거리를 두면서 인생관도 좀 바꾸어보겠노라는 것이었다. 평소의 웃음기 머금은 표정에 어조도 담담했지만, 우리는 무어라 위로도 드릴 수 없이 황망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이 회화록에서도 여실하듯, 훗날 이 문제를 선생 나름의 꾸준한 노력으로 극복하면서 예의 날카로운 지적 모색을 더하면 더했지 늦춘 법이 없으니 후학으로서는 그저 고마울 뿐이다.

사사롭다면 사사로운 이야기가 좀 길어졌지만, 역시 이 시기는 선생의 이력에서나 사회 전반으로나 하나의 분기점이 될 만하다. 1997년 말 ‘IMF사태’와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라 할 ‘국민의 정부’ 출범이 겹치면서 한국사회가 새로운 시련과 도전을 맞이하는 새 국면에 접어들었으며, 곧이은 세기전환기에는 2000년의 6ㆍ15공동선언으로 남북화해의 결정적인 계기가 마련되는가 하면 이듬해 9ㆍ11사태로 시작된 미국의 대테러전쟁이 세계를 어지럽게 했다. 선생의 표현대로 일종의 ‘천하대란’과 같은 혼란의 징후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가운데서도 한반도의 경우에는 부시의 ‘악의 축’ 발언이나 2003년 북핵위기 등 간헐적인 위기가 오긴 했지만 상대적으로 남북정상회담을 기점으로 경제협력이 가속화되고 민간교류가 활성화되는 등 남북의 긴장은 오히려 완화되는 형국이 전개되기도 했다. 이같은 혼란스런 시기일수록 세계적인 변화의 흐름을 바로 읽고 우리 민족의 당면한 과제를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지혜가 필요할 것인데, 세기전환기를 맞은 우리의 대응을 숙고하는 토론이나 기획이 창비에서나 다른 매체에서나 활발했다. 「IMF시대 우리의 과제와 세기말의 문명전환」이나 「통일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동북아시대 한국사회의 중ㆍ장기 전략과 단기적 과제」 같이 새로운 시대에 대한 분석과 전망을 본격적으로 시도하는 자리들이 마련되었거니와, 각 신문이나 잡지, 방송 등 다양한 매체에서의 대담이 부쩍 늘어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회갑을 넘기면서 지식인사회의 원로로서의 역할도 더 가미되었고, 아울러 이때가 세기전환기이자 한결 지혜로운 대응이 필요한 혼란기라는 점도 작용한 듯 보인다.

이같은 대응을 모색함에 있어 무엇보다 중심을 이루는 주제는 역시 분단체제론이다. 분단체제가 여러 삶의 국면에서 발현되는 방식에 대한 논의들이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고, 이와 관련하여 통일ㆍ환경ㆍ여성ㆍ시민ㆍ민중운동이나 국내외 정세 등의 다양한 주제들을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이 자리에서 분단체제론의 의미를 되풀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대담이나 좌담을 통해서 분단체제론이 대국적인 시각을 유지하면서 우리 사회의 미세한 국면까지 설명해낼 수 있는 이론적 가설임이 더욱 설득력있게 제시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분단체제론이 중요하게 원용하고 있는 세계체제론의 이론가 월러스틴과 깊은 대화를 나눈 「21세기의 시련과 역사적 선택」이 눈길을 끈다. 이 대담에서 선생은 분단체제가 세계체제의 한 하위체제이자 그것의 극복이 궁극적으로 세계체제 극복의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피력하며, 한반도를 보는 세계체제론적 시각을 동아시아 정세와 관련지어 다시 제기한다. 세계체제론의 각론적인 성격을 지니면서도 분단체제론에는 한반도의 대다수 민중의 깨달음과 공동의 노력으로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지혜의 시대를 열어나갈 수 있다는 선생 나름의 기대와 믿음이 살아있다. 여기에 사회과학자인 월러스틴의 ‘과학’이 모두 포괄하지는 못하는 문학평론가 백낙청의 ‘실천’으로서의 과학 내지 진리탐구가 가지는 의미가 있지 않나 한다. 근원적 진리에 대한 관심이 ‘지혜의 위계질서’라는 새로운 화두의 형태로 이 대담에서 제기되는 것도 이런 연관에서인데, 이 대담을 촉발하고 이 대목에서 집중적으로 거론되는 선생의 발제문은 『창작과비평』 105호(1999년 가을호)에 「한반도에서의 식민성 문제와 근대 한국의 이중과제」라는 제목으로 수록된 바 있다.

1998년 ‘흔들리는 분단체제’라는 제목의 책을 내기도 했지만, 이 시기에 분단체제의 역사적 경로에 대한 관심이 한결 구체화되고 명료해진다. 결국 나중에 분단체제는 1987년 이후 동요기를 거쳐 2000년 6ㆍ15선언을 기점으로 해체기로 들어섰다고 정리되기에 이르는데, 창비 편집위원들과의 내부토론도 하나의 실마리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생의 작업이 개성적이고 독보적인 경지를 보여줌은 물론이지만, 동시에 집단적 성취의 한 정점이라는 성격도 지님을 다시 상기하게 된다. 모든 작업이 근본적으로는 이런 성격을 띠겠지만, 선생의 경우에는 의식적으로 이를 추구하면서 대화와 토론에 자신을 한껏 열어왔는데, 두툼한 단행본 다섯 권에 달하는 이 회화록 자체가 그를 증거한다. 이 제4권에서도 대화를 통해 서로 생각을 정리하고 진전시켜나가는 장면을 여러 군데서 목도할 수 있을 것인데, 가령 건축가 김석철(金錫澈) 선생과의 만남은 그 두드러진 예이겠다.

분단체제의 ‘흔들림’은 분단체제 극복으로 다가가는 긍정적 계기이자 그만큼 한반도의 상대적인 안정성이 위협받는 위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런 위기의 시대일수록 한민족 민중의 성숙한 대응이 더욱 필요한데, 통일 자체에 대해서도 발상의 근본적 전환이 필요함을 선생은 오래 전부터 주장해왔다. ‘과정으로서의 통일’이나 이와 맞물린 국가연합 등 복합국가 체제에 대한 모색이 그것으로, 2000년 6ㆍ15선언 이후 이런 주장은 한결 힘을 받게 된다. 이전부터도 선생은 스스로의 지향이나 태도를 ‘중도주의’라고 통칭해왔지만, 분단체제가 흔들리는 위기국면에서 다양한 변혁ㆍ개혁 세력의 요구와 실천을 수렴해내는 중도적인 인식과 실천이야말로 한반도에서 분단체제 극복과 더 나은 사회 건설로 나아가는 가장 현실적이자 이상적인 방책이라는 판단이 깊어진다.

결국 ‘변혁적 중도주의’로 표현되게 되는 이런 노선은 장기적 전망과 중단기적, 현실적 대응을 결합하고자 하는데, 어찌 보면 근대 자본주의에 대한 선생의 이중적 관점, 즉 “근대에 적응하면서 동시에 극복하는” 이중과제의 한반도적 실천노선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중과제론은 발상 자체로 따지면 이미 70년대부터 선생의 사고체계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이지만, 근대의 ‘성취’나 ‘달성’을 말하다가 이 시기에 와서 ‘적응’으로 용어를 바꾼 것도 의미심장한 변화라고 할 만하다. ‘성취’나 ‘달성’이 근대를 하나의 목표로 상정하는 함의를 갖고 실제로도 민족국가 형성이라는 미완의 과제를 강조했다면, ‘적응’에서는 우리가 속해 있는 근대에 대한 한결 냉정한 인식과 분단체제 극복에 대한 좀더 복합적인 사고가 함축되는 셈이다.

이 회화록은 말 그대로 대담, 좌담, 인터뷰, 토론 등 다양한 회화의 기록이다. 글과 달리 회화는 당사자의 육성을 들려줄 뿐 아니라, 상대방과 말을 나누는 가운데 내용이 이룩되어가는 면도 있기 때문에 형식 자체로서도 글과는 다른 의미가 있다. 그런 한편 글에 비해 정치함이나 깊이가 떨어지기도 쉬운데, 선생의 회화는 대화의 맛을 살리면서도 치밀함을 잃지 않는다. 대화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게 잘 듣는 것이라고들 하는데, 이 회화록을 읽다 보면 과연 그렇구나 하게 된다. 상대방의 진의를 깊게 새겨듣고 적실한 핵심을 붙잡아 맥락에 맞게 발전시켜나가는 가운데, 대화의 자리를 문득 함께 궁구하는 공부의 현장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분단과 통일문제를 다룬 글을 묶은 책에 ‘분단체제 극복의 공부길’이라는 제목을 단 데서도 엿볼 수 있듯이, 선생은 모든 삶의 실천을 공부하고 깨달아가는 도정으로 받아들이는 듯하고, 여기에는 개인만이 아니라 공동체 시민들의 그 나름의 깨달음을 통해서 함께 이룩해나가는 사회에 대한 전망이 뒷받침되어 있다.

선생은 영문학자이면서 문학평론가를 겸하고 있거니와 동시에 사회적 실천에 평생을 바친 활동가이기도 한데, 그 모든 면모가 이 공부길에 대한 지향과 맺어져 있음을 필자를 포함한 영문학과의 제자들만큼 현장에서 경험한 경우도 드물 것이다. 회화를 읽다 보면 선생의 수업장면들을 떠올리게 된다. 선생은 토론을 유도하고 이끌어나가면서 때로는 추궁하고 때로는 격려하되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특히, 서툴게 표현된 발언들이 선생의 입을 통해 한결 분명하고 종요로운 이야기로 거듭나던 경우들이 기억에 오래 남아 있는데, 이런 경험은 비단 필자만의 것이 아닐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민주화운동에 가담했다는 죄로 해직당한 후 오랫동안 재야에서 활동하다가 80년 봄의 일시적 해빙을 틈타서 복직한 이후, 선생은 그야말로 그동안 못한 교육자의 책무를 보상하기라도 하듯이 강의에 몰두했다. 대담에서 보면 선생은 그때의 일을 회고하면서, 그 덕분에 ‘개전의 정’이 있다고 보였는지 광주항쟁에 연루되어 구속되고 다시 해직되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고 우스개처럼 말하고 있기도 하다.

하여간 80년대에 대학원 시절을 보낸 서울대 영문학과 대학원생들은 공부에 대한 열의가 높았고 동시에 사회적 실천에 대한 의식도 강했는데, 여기에는 8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에 자극된 바도 있었지만, 백선생의 복직도 큰 기여를 했음은 아무도 부정하기 어려울 법하다. 선생은 늘 공부하는 자로서의 기본을 강조하면서 영문 해석 하나하나에서부터 문장 쓰는 법까지 엄밀한 글쓰기와 사고를 훈련시키고자 했고, 음으로 양으로 그 영향을 받은 학생들은 여러 공부모임을 꾸려서 스스로를 훈련해나갔다. 선생 자신도 수업과 별도로 이런 모임을 오래 이끌어나갔고, 수업을 보조하는 공부모임이라는 새로운 시도를 하기도 했다. 수강생이 조를 나누어 선배 한 사람과 함께 어려운 텍스트를 미리 읽고 수업에 임하는 방식으로 당시에 우리는 농담 섞어 ‘새끼과외’라고들 불렀는데, 그 선배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필자로서는 당시의 동료 후배들의 열의가 눈에 선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절이 아니면 가능한 일이었을까 싶지만, 이런 경험들은 선후배가 함께 공부하고 격의없이 논쟁하는 학풍을 조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정년퇴임을 맞이하면서 대학에서는 떠났지만, 그 어름에 선생은 더욱 본격적으로 사회적인 활동에 개입하고 관심과 분야를 확대해나갔다. 시민방송 이사장직을 맡아 시민방송을 제 궤도에 올려놓기까지 경영 일선에서 시민운동가로서의 역량을 발휘했다면, 일반에게는 잘 안 알려졌지만 원불교 경전 영역작업에 참여하여 영문학자로서 고전적인 저작의 해외소개에 크게 기여한 점도 기록해둘 만하다. 이 회화록에도 두 활동과 관련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으니 일독을 권한다. 필자의 미숙한 필치로 전하느니 독자들이 직접 선생의 육성을 듣는 편이 낫겠다 싶어 본격적인 해설은 처음부터 피하려고 마음먹었지만, 그러다보니 선생이 싫어하는 덕담 식의 글이 되고 만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선생과 독자 모두에게 두루 해량을 바라면서 여기서 난필을 거두려고 한다.

金英姬|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