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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록] 창비문화 인터뷰 1: 창비의 유년시절, 60년대

‘창비’ 30년을 듣는다

백낙청(『창작과비평』 편집인)

고은명(창작과비평사 편집자)

*이 인터뷰는 격월간 『창비문화』 1996년 1~2월호에 실린 「기획연재: ‘창비’ 30년을 듣는다」의 한 꼭지이다.
 

고은명 1996년 1월에 『창작과비평』이 창간 30주년을 맞습니다.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은데, 창간 당시의 포부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의 느낌 같은 것을 듣고 싶습니다.

백낙청 당시의 포부는 창간호의 권두논문에서 어느정도 밝혀놓았어요. 그때 나름으로는 원대한 포부를 가졌다면 가진 건데 실제로 나 자신이 이렇게까지 오래 하리라고는 생각 못했어요.(웃음) 그후 74년에 가서 일종의 부대사업으로 시작한 출판사업이 지금은 이렇게 커졌고요. 아무튼 시작은 미약해도 뜻있는 여러 사람들이 합류해 우리 사회에서 좀더 큰 기능을 해낼 수 있길 희망했던 창간 당시의 포부가 기대 이상으로 달성됐다고도 볼 수 있는 거죠. 알게모르게 많은 분들이 함께해주신 덕입니다.

고은명 기대 이상이라고 하셨는데 물론 아쉬운 점도 있을 것 같아요. 아울러 앞으로 바람이 있다면……

백낙청 한 개인으로서는 분명 기대 이상이지요. 그러나 다른 한편 최근 들어서 세상이 급격히 바뀌고 출판계 규모라든가 경제 규모가 커지고 이른바 국제화·세계화의 도전도 맞게 됐는데, 우리가 과연 이러한 상황에 충실히 대응해나가고 있는지는 좀 의문이에요. 이런 반성은 이제까지 꾸준히 해왔지만, 30주년을 계기로 심각하게 따져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앞으로 30년을 생각해보면, 내가 지난 30년처럼 관여할 수 있는 시기는 그리 길 수도 없겠고 길어서도 안되겠지요. 그러나 포부가 있다면 정말 세계적인 잡지로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고은명 그러면 이제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죠. 『창비』 같은 잡지를 만들어보겠다는 구체적인 구상을 언제, 어떻게 하셨는지 좀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세요.

백낙청 나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바로 미국에 갔지만 당시의 고등학생들은 전쟁 통에 학교공부를 제대로 못한 대신 입시지옥에 시달리는 요즘 학생들에 비하면 관심이 다양하고 정치적인 의식도 꽤 있었다고 봐요. 그래서 나 자신도 미국 대학을 다니면서 50년대 미국사회와 대학의 보수적 분위기에 늘 답답함을 느꼈고, 귀국하면 한국의 문단과 지식인사회에 뭔가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요. 그러려면 우선 잡지가 필요하겠다고 느꼈습니다.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그런 얘기도 나누곤 했지만 잡지 창간을 구체적으로 생각한 것은 65년 들어서였어요.

고은명 그 당시에는 계간지라는 형태가 드물었던 걸로 아는데 어떻게 계간지라는 형태를 취하게 되셨는지요?

백낙청 잡지를 한다는 생각을 구체화하면서는 계간지를 하겠다는 생각이 처음부터 뚜렷했어요. 그 이유는 대략 세 가지인데, 첫째 기존의 잡지들보다 수준을 높여야겠는데 월간지로서는 수준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생각이었죠. 또 내가 교직을 가진 처지라 학교일을 하면서 잡지를 만들려면 계간지라야지 그 이상은 어려웠고요. 게다가 설혹 편집일을 다른 사람이 덜어준다 해도 재정적인 사정을 고려할 때 월간지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고은명 제호를 정할 때의 얘기를 좀 해주세요. 다른 후보도 많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백낙청 제호를 정하기 위해 사람들과 여러 갈래로 많이 얘기했어요. 온갖 것들이 다 나왔지요. 가령 당시 조선일보에 있던 남재희(南載熙)씨가 ‘서울 리뷰’라는 제호를 내놓았고 나의 고등학교 동창인 황병기(黃秉冀)씨는 ‘흐름’이라는 것을 제안했던 것 같아요. ‘창작과비평’은 내가 생각한 것 같은데…… 사람의 기억력이라는 것이 간사하니까 확실히 말하기는 뭣하지만, 내가 생각해낸 것 같아요. 그 얘기를 듣고서 평범하면서도 참 좋다고 한 사람이 황병기씨로 기억됩니다. 지금은 대유행이 되어버렸지만, 당시는 제목에 ‘과’자가 들어가는 게 거의 없었지만요. 어쨌든 그렇게 정해졌어요. 아, 이것은 발표할 사항은 아니지만 임재경(任在慶)씨는 ‘전위’라든가, 아예 좀 세게 나가자고 했지요.(웃음)

고은명 잡지를 만들려면 돈이 꽤 많이 들 것 같은데요. 창간자금은 어떻게 마련하셨나요?

백낙청 처음에는 회사를 하나 따로 등록하려고 했는데 그랬다면 자금이 많이 필요했겠지요. 사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있지요. 아까 내 친구 황병기 이야기를 잠깐 했지만, 일찍부터 잡지에 관한 내 포부를 말해온 상대 중에 황병기씨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 나중에 실제로 잡지 사업을 도와주게 된 친구들이 있었지요. 황병기씨는 지금은 오로지 음악에 전념하여 우리 국악계의 보배로운 존재가 되었지만 당시는 집안의 사업에도 손을 대고 있던 터라, 처음 내 생각에는 그가 발행인이 되어 뒷바라지를 하고 내가 편집권을 가진 상태에서 다른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잡지를 꾸려나가면 일이 수월하겠다 싶었는데, 정작 창간 준비가 진행되면서 그런 체제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이 주위에서 많이 나왔지요. 황병기씨 쪽에서 그런 기미를 알고, 이미 사무실 준비까지 해놓은 상태에서 선선히 물러서겠다고 했지요. 그래서 당시 신문기자를 하던 이종구(李鍾求)씨가 알선을 해서 나와는 생면부지인 문우출판사(文友出版社) 오영근(吳永斤) 사장이 발행을 맡아주기로 된 거지요. 지금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편집자 책임 아래 독립채산제로 나간 것이 『창비』를 위해서는 잘된 일이지만, 그때 황병기씨한테 공연한 폐를 끼쳤다는 생각은 있어요.

고은명 그래서 문우출판사 사무실을 쓰신 건가요?

백낙청 문우출판사 사무실이 공평동 태을다방 옆의 작은 건물 위층 어디에 조그만 게 있었는데, 거기는 가끔 일이나 생기면 들르고 편집실은 우리집을 사용했지요. 창간호 자금에 관해서는, 당장 들어갈 돈은 원고료와 종이 값뿐이었고 그나마 원고료는 소설밖에는 주지 않았어요. 인쇄비 같은 것은 외상을 길게 끊으니까 나중에 팔아서 갚으면 되고 130여 페이지에 70원짜리 창간호를 만드는 데는 9만원가량 들었어요. 그걸 어떻게 기억하느냐 하면, 당시 잡지를 만드는 데 깊이 관여한 사람이 임재경, 이종구에, 지금은 작고했지만 당시 한남철(韓南哲)이라는 필명을 쓰던 소설가 한남규(韓南圭)와 문리대 철학과 조교를 하면서 『청맥』 편집부장을 하던 김상기(金相基) 그리고 채현국(蔡鉉國) 등이었는데, 이종구, 한남철, 김상기, 이 세 사람은 돈이 전혀 없어서 필자 구하는 등 노력봉사를 한 반면 임재경씨는 경제부 기자를 해서 돈이 좀 있고, 채현국씨 역시 부친 사업을 돕는 처지라 여유가 있어서 나까지 합쳐 세 사람이 다달이 만원씩만 모으면 석 달이면 9만원이다, 그걸로 기본 경비는 된다는 계산을 한 적이 있거든요. 이시영(李時英)씨가 68년에 사립대학 등록금을 3만원 낸 기억이 있다고 하니까 아주 적은 돈은 아니지만 1인당 한 달에 만원으로 계간지를 해나갈 수 있다면 해볼 만하다는 생각들이었지요. 그런데 다달이 만 원씩 모으는 것도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는 않더군요. 그후에는 주로 내가 여기저기에 손을 벌려 조달을 했고 채현국씨 같은 이는 결과적으로 3만원 이상을 뜯겼지만 내 품이 좀 들었지요. 창간호는 2천부를 찍었는데 꽤 많이 팔렸어요. 대개 그렇듯이 2호, 3호는 창간호보다 못해서 좀 고생을 했지요. 그러나 4호부터 다시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했고, 6호에 「분례기」 연재가 시작되면서 발행부수가 껑충 뛰어서 형편이 좀 피었습니다.

고은명 그러면 2, 3호를 빼면 크게 손해를 보진 않은 거네요?

백낙청 아니, 한 호에 9만원 정도는 계속 들어갔어요. 그러나 잡지도 두꺼워지고 원고료도 제대로 주면서 그 이상의 손해를 안 본 것이 성공이라는 얘기예요.

고은명 문우출판사는 대행만 해준 건가요?

백낙청 원고 모으는 일에서 활판 인쇄의 교료를 놓는 데까지 내가 했고 옵셋, 제본, 판매, 수금 같은 일은 그쪽이 대행해줬지요. 업무분담 선이 조금씩 달라지긴 했어도 그때는 물론 나중에 일조각(一潮閣)에서 할 때도 우리는 항상 독립채산제로 했어요.

고은명 어려울 때 얘기를 하니까 기분이 좀 묘하신 것 같은데요. 분위기를 좀 바꾼다는 의미에서 「분례기」 얘기를 좀 해주세요. 『창비』가 대중적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이 「분례기」가 나오면서부터 아닌가요?

백낙청 이호철(李浩哲) 선생이 어느 심사에서 낙선한 중편을 하나 가져와 보여주셨는데 아예 장편으로 고쳐 쓰면 뭐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들더군요. 채현국씨도 읽고 같은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방영웅(方榮雄)씨를 만나 시골 얘기를 하든가 똥례 주변 사람의 얘기, 그런 것들을 키워 장편을 만들면 좋을 것 같다는 얘기를 했지요. 그랬더니 이 친구가 우선 앞부분을 고쳐 왔는데 정말 깜짝 놀라게 좋아져서 연재를 시작했지요. 뒷부분으로 가면 「비밀」이라고 했던 원작품 중편의 문제점을 완전히 벗어던지지는 못한 것 같지만, 지금도 나는 「분례기」가 훌륭한 장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그게 실리고 나서 여기저기에서 화제가 되고, 지금 정확한 부수는 기억 안 나지만 6, 7, 8호 계속 늘려갔는데도 매번 거의 다 팔렸어요. 심지어 어떤 친구는 정기구독을 권유하니까 「분례기」가 계속 실린다는 게 사실이면 정기구독을 하겠다고도 했어요.

고은명 아까 말씀하신 다섯 분이 초창기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셨다고 했는데요, 어떤 형태였나요? 발기 모임 같은 것이 따로 있었나요?

백낙청 정식으로 그런 모임이 형성된 것은 아니고, 그 다섯 사람이 가장 가까이서 헌신적으로 도와서 잡지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실제로 편집실무도 그렇고 자금문제도 그렇고 처음부터 모든 책임은 내가 진 셈이에요.

고은명 그 다섯 분 이외에도 도움을 주신 분들이 많을 것 같은데요.

백낙청 창간호에 글을 주신 분들은 일단 다 그렇게 봐야겠지요. 소설가 두 분에게는 우리가 적으나마 고료를 드렸지만 나머지 분들은 모두 그냥 원고를 주셨으니까요. 게다가 이호철 선생 같은 분은 소설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조언도 하고 다른 문인들을 소개도 해주었어요. 또 김승옥(金承鈺)씨는 편집 및 디자인 면에서 재주도 있고 경험도 많아서 창간호 표지 만들 때 의논도 많이 했습니다. 표지의 대체적인 모양은 내 의견이 주로 반영됐지만요. 그밖에도 정명환(鄭明煥) 선생 같은 분이 싸르트르의 『현대』지 창간사를 번역해주셨고…… 그때뿐 아니라 지난 30년 동안 온갖 사람들께 온갖 신세를 다 져온 느낌입니다.

고은명 창간호에 창간사를 대신해서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라는 권두논문을 발표하셨는데요, 왜 창간사를 안 쓰셨습니까? 그리고 그 글이 발표된 후 반응이 어땠는지요?

백낙청 창간사라고 하기에는 글이 너무 길고 개인 논문의 성격이 강해서 권두논문 형식으로 실었는데요. 글에 대한 반응은 찬반간에 꽤 있었던 듯합니다. 하지만 내 글 하나에 대한 반응보다, 면수도 얼마 안되는 잡지 『창비』가 나오자마자 사람들에게 뭔가 깊은 인상을 심어주고 꽤 화제가 된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김수영(金洙暎) 선생 같은 분이 창간호가 나오자마자 칭찬하고 다니신 것도 당시로서는 아주 고무적인 일이었고요. 그때만 해도 나하고 안면이 있기 전인데……

고은명 책의 체재에 대해서는 특별한 구상이 있으셨나요? 처음에는 시도 싣지 않았던데요.

백낙청 문학 중심의 계간지지만 꼭 문학에 한정하지 않겠다는 방침은 처음부터 서 있었어요. 또 좋은 작품을 발굴하겠다는 생각도 있었지요. 하지만 아무래도 평론 쪽에서 뭔가 새로운 얘기를 해보자는 생각이 강했어요. 시를 싣지 않은 것은 어떻게 보면 프랑스 『현대』지의 영향이랄 수도 있지만, 싸르트르는 애당초 시와 소설을 근본적으로 달리 보는 문학관을 가졌는데, 우리 경우는 그런 것은 아니고, 첫째는 우선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이지요. 시단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니까 이것저것 번잡하게 하는 것보다, 소설 한두 편 싣고 문학평론에서 문제제기를 계속해나가면서 문학 이외의 것을 다루어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겠다는 식으로 우선 출발했던 겁니다.

고은명 1967년 겨울호부터 발행소를 일조각으로 옮겼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백낙청 직접적인 계기는 문우출판사가 부도가 났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다른 출판사를 구할 수밖에 없었는데, 일조각 한만년(韓萬年) 사장께서 맡아주시겠다고 하신 거예요.

고은명 일조각에서 책을 낼 때는 재정적으로 어땠어요?

백낙청 일조각과의 관계도 문우출판사와 마찬가지로 독립채산제였습니다. 그러나 일조각은 큰 출판사니까 아무래도 거래처 상대로 일하기가 훨씬 쉬웠지요. 원고료는 우리가 필자들에게 주고, 제작비는 나중에 판매대금과 상계해서 모자라면 내 쪽에서 넣고 남으면 받기로 했는데 일조각에 간 이후로는 원고료 지출은 계속 있었지만, 우리가 그쪽에다 생돈을 넣은 기억은 없어요.

고은명 그러면 신구문화사 쪽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나요?

백낙청 사실 일조각 자체는 문단이나 소장 학자들과 그렇게 관계가 밀접한 동네가 아니었지요. 그에 반해 신구문화사(新丘文化社)는 신동문(辛東門) 선생이 주간으로 계시면서 문인들이 많이 모여들었고 내가 염무웅(廉武雄) 선생과 처음 만난 것도 그쪽에서였지요. 그런데 신동문 선생과 점차 가까워지니까 신선생 말씀이 발행처를 신구문화사로 옮겨서 좀더 본격적으로 해보라는 거예요. 지금은 작고한 이종익(李鍾翊) 회장도 적극 도와주겠다는 거지요. 하지만 그런 이유만으로 그동안 우리에게 고맙게 해준 일조각을 떠날 수는 없었지요. 그러다가 69년에 내가 박사 공부를 마저 하러 미국으로 가게 되면서 회사를 독립시켜놓지 않으면 편집의 독립성이 계속 유지되기가 어려울 것 같아 ‘창작과비평사’를 따로 등록하기로 했지요. 그리고 그걸 계기로 신구문화사와 손잡기로 결정한 거예요. 어차피 대표를 신동문 선생께 맡길 참이었고 편집은 염무웅 선생이 하고, 게다가 그동안 일조각에서 해주던 이상으로 신구문화사에서 밀어준다면 내가 없어도 잘되리라는 계산이었지요. 한만년 사장께서도 물론 서운해하시긴 했지만 양해를 하셔서 독립된 잡지사로서는 69년에 창사를 한 셈입니다. 그래서 신동문 선생이 『창비』의 3대 발행인이자 창작비평사의 초대 사장이 되시고, 염무웅 선생이 편집장을 하게 된 거죠. 그런데 내가 떠난 이후로 모든 게 원래 생각했던 것만큼 원활하게 진행되지는 않아서 남은 분들, 특히 염선생의 마음고생 몸고생이 무척 컸던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그 얘기는 염무웅 선생한테 직접 들어보는 게 좋겠지요.

고은명 오랜 시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