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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록] 회갑을 맞은 백낙청 편집인에게 묻는다

백낙청(『창작과비평』 편집인·문학평론가·서울대 교수, 영문학)

백영서(『창작과비평』 편집위원·연세대 교수, 역사학)

김영희(『창작과비평』 편집위원·한국과학기술원 교수, 영문학)

임규찬(『창작과비평』 편집위원·문학평론가·성균관대 강사, 국문학)

1997년 12월 30일 창작과비평사 회의실

* 이 좌담은 『창작과비평』 1998년 봄호에 「회화: 백낙청 편집인에게 묻는다」는 제목으로 수록된 것이다.
 

백영서 1998년을 여는 이번 봄호에서는, 좀 특별한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다른 호와는 달리 우리 창비 내부 사람들끼리의 회화로 하고, 그중에서도 편집인 백낙청 선생님의 이야기를 주로 듣는 기회로 삼을까 합니다. 이번 호가 통권 99호이자 창간 32주년 기념호라는 것 외에 새해 초에 백선생님이 환갑을 맞으신다는 또 하나의 이유도 있기 때문이죠. 보통 우리 학계나 지식인 사회에서 회갑을 맞으면 이런저런 기념 행사와 문집을 증정하는 아름다운 관행이 있는데 선생님께서 다 마다하셔서, 창비에서는 차제에 백선생님을 모시고 선생님이 그동안 생각해오신 것들, 현실에 대한 선생님의 의견, 창비의 방향, 이런 것들을 점검해보는 기회를 갖기로 했습니다. 특히 창비가 올 여름호로 100호를 맞게 돼서 저희로서는 올해를 새로운 도약의 해로 삼으려고 하는데 오늘 백선생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99호와 100호를 연결시키는 작업도 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개인사적으로는 회갑을 맞으시고 또 창비의 100호를 목전에 둔 편집인이신 백선생님의 소감을 듣고자 합니다.
 


 
백낙청 환갑행사를 사양했더니 여러분이 이런 자리를 만들어주셔서 오히려 더 큰 잔칫상을 받은 기분입니다. 요즘은 환갑 맞는 일이 하도 흔해져서 무슨 소감을 말하기도 쑥스럽게 됐습니다만, 사실 개인적으로는 지난 1년 남짓한 기간에 유달리 힘든 일이 많았어요. 다행히 좋은 인연들을 만나서 무사히 넘겼고 건강도 회복중입니다. 이제부터는 뭔가 새출발을 할 수 있겠다 싶은 참에 회갑이 겹치니까 나 개인에게는 무척 뜻깊은 전기가 되는 느낌입니다.

창비로서는 이번호가 99호고, 다음에 100호, 101호가 연이어 나오는 금년이 매우 뜻깊은 해인데, 아시다시피 우리 창비뿐 아니라 출판계 전체, 나아가서는 나라 전체가 지금 굉장히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죠. 그래서 이 어려움을 어떻게 이겨내고, 그것을 오히려 새로운 도약의 기회로 만드느냐 하는 문제를 온갖 분야에서 궁리하고 있는데, 창비로서도 그야말로 또 한번 자기쇄신을 하고 새롭게 출발하는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백영서 아무래도 개인적인 얘기에 앞서서 먼저 여러 독자들이 궁금해할 최근 시국의 변화에 대한 얘기부터 안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그중에 크게 보면 두 가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최근의 대선을 통해서 우리 정치사에 처음으로 야당으로의 정권교체가 일어났다는 것이고요. 그와 겹쳐서 소위 IMF시대라는 유행어가 나올 정도로 경제적인 난국을 맞았다는 것인데, 먼저 대선에 대해서 간단히 점검해보지요.

김대중 후보는 어느 토론회의 마지막 대목에서 개인 발언을 하면서 ‘하늘이 이런 난국을 풀게 하기 위해서 그동안 계속 낙선시켰다가 이번에 당선시킬 것 같다’는 말을 했습니다만, 또 당선 직후의 행적을 보면 난국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지도자로서의 면모도 보여서 일부에서는 안도하는 견해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경우 작년에 6월항쟁을 평가하는 글에서는, 제가 잠깐 그 대목을 인용하자면 “보수대연합이 개혁의 숨통을 조일 수는 있을지언정 안정된 보수문화를 창출할 수 없다”고 전망하신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의 입장에서 보수대연합, 자민련과 국민회의의 연합, DJP-DJT까지 나가던가요?-그런 연합에 의한 새로운 정권의 창출에 대해서 지금 어떻게 전망하고 계신지 말씀해주세요.

김대중씨 당선은 잘된 일

백낙청 질문을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나는 이번 대선 결과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질문이겠고, 다른 하나는 이번 김대중씨 당선이 잘됐다는 입장이라면 그전에 나 자신이 김대중씨에 대해서 비판적인 얘기를 한 것이라든가 지역주의·보수대연합, 이런 문제에 대해서 발언했던 것과 상치되는 바는 없는가 하는 질문이겠죠. 먼저 대선 결과로 말하면 한마디로 나는 대단히 잘됐다고 봅니다.

백영서 그럼 누구를 찍으셨느냐고 질문해도 되겠습니까?(웃음)

백낙청 까놓고 이렇게 대답할 수도 있지요. 내가 찍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기도 처음이라고요.(웃음) 물론 권영길(權永吉) 후보가 표를 좀 많이 얻기를 바라기도 했지요. 아무튼 김대중씨의 당선이 잘됐다고 보는 게, 첫째는 정권교체라는 것이, 여야간의 평화적인 정권교체라는 것이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든지 의미있는 것이고, 그 점은 내가 부인한 적이 없어요. 다만 한때 욕심을 더 내서 단순한 정권교체를 넘어서 이른바 3김으로 대표되는 낡은 구조를 청산하는 좀더 큰 변화를 바랐던 것인데, ‘3김청산’이라는 것은 3김보다 나은 세력이 나와서 청산해야지 그렇지 않고 자기가 3김 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그 일을 해낸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거든요. 그런데 이번 선거의 경우를 보면 당선가능성이 있는 사람 중 그 어느 누구도 그런 세력을 대표한다고 생각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 우리가 정말 어떤 획기적인 세대교체, 또는 세력교체를 이룰 준비가 안된 상황에서 정권교체나마 된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아까 백영서씨가 안도감 얘기를 했는데, 역시 오늘처럼 분단체제 전체가 흔들리는 위기국면에서는 정권담당자 개인의 수습능력과 관리능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지요. 그리고 그것은 그야말로 오랜 준비와 훈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런 점에서 역시 김대중씨가 탁월하다고 생각하고요.

또 한 가지는 선거기간 동안에는 공개적으로 말하기가 미묘한 문제였는데, 여러가지 여건이 겹쳐서 호남 대통령이 나올 절호의 기회가 온 김에 한번 뽑아주어야 한다는 것이 내 신념이었어요. 지역주의에 대해서, 특히 지역맹주 중심의 지역할거주의에 대해서 나는 늘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왔지만 이것 역시 그래요. 가장 바람직한 청산방법은 어느 지역의 맹주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가지고, 그런 참신한 국민통합세력이 나와서 지역주의를 극복하는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아직 우리가 그럴 힘이 없다는 것을 그간의 현실이 증명해왔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역시 호남 대통령이 한번 나와서 그 스스로가 지역화합을 위해서 노력할 기회를 줄 필요가 있다, 그 스스로 노력을 안할 경우에는 다수의 호남인들도 미련없이 동참하는 국민통합운동을 벌일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었어요. 물론 영남이나 다른 지역에서 대통령이 나왔을 경우도 으레 지역화합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하지만 그건 호남에서 대통령이 나왔을 경우와는 개인의 문제를 떠나서 객관적으로 전혀 다른 상황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김대중씨가 호남출신 대통령이라는 면에서도 잘됐다고 보는 거지요.

보수대연합 문제에 관해서는 아까 질문에서 보수대연합과 DJP 또는 DJT연합을 동일시하는 것같이 들렸는데, 내가 말하는 보수대연합이라는 것은 더 넓은 개념이에요. 우리 사회에서 실세를 가진 정치집단 중에서 심지어 김대중씨가 이끄는 국민회의조차도 자민련과 손잡고, 이들 야당연합이나 당시의 신한국당이 중요한 문제에서 거의 비슷하게 보수적인 성향을 띠고 또 이 사회의 수구세력들을 껴안으려고 경쟁하는 전체적인 상황을 말했던 거죠. 그런 상황을 두고서 그러한 보수대연합으로도 안정된 보수문화를 창출할 수는 없다고 했는데, 그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봅니다. 또 그 점을 이번 대통령 당선자도 깊이 유의해줬으면 하는 바람이죠. 다시 말해서 자민련과 손잡고 집권한데다 제1야당인 한나라당은 오히려 더욱 보수적인 집단이라고 해서, 정치권의 상층부에서 여야를 아우르는 대연합 또는 대타협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이 나라에 진정으로 보수적인 문화가 정착하는 것도 아니고, 개혁의 숨통이나 조이다 보면 더 어지러운 세태가 되리라는 겁니다.

그리고 지역주의에 대해서 내가 그것도 분단이데올로기의 일종이다, 분단체제의 자기재생산을 돕는 이념적 장치의 하나다라고 주장했는데, 그것도 여전히 유효한 얘기라고 생각해요. 다만 조금 아까 말했듯이 어느 특정 지역에 기반을 두지 않은 범국민적인 연합세력이 빠른 시일 안에 형성돼서 그러한 지역주의를 타파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었던 것은 현실성이 부족한 판단이었다고 반성을 해야겠죠. 그러나 호남출신 대통령의 집권이라는 새로운 상황에 맞춘 국민통합운동·시민운동·민중운동의 필요성은 이제 더욱 절실해졌다고 하겠지요.
 

현 경제위기의 거시적 배경

백영서 분단체제론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얘기되겠습니다만, 선생님이 듣기 좋은 얘기부터 한마디 하면, 이번 선거야말로 선생님이 주장하신 분단체제론이 잘 적용되는 사례가 아니었는가 하는데요. 이번 선거기간에 그야말로 남쪽의 일부와 북쪽의 일부, 이른바 극보수세력들이 결합해서 대선에 영향을 끼친다는 얘기들이 일간지에도 나왔어요. 오익제(吳益齊) 사건이라든가 재미교포가 들고 온 북한의 편지 사건, 이런 것을 통해서 실제로 남한의 정세변화에 북한이 깊이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얘기지요. 남북문제는 동시에 작용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은 제가 이해하는 바로는 분단체제론의 핵심인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백낙청 글쎄요. 남북한의 강경파가 일정한 공생관계에 있다는 것은 굳이 분단체제론까지 갈 것 없이 건전한 상식 아니겠어요? 분단체제론이라는 말을 못 들어보고도 그런 판단을 하는 사람은 많죠.

백영서 그렇지만 대부분은 그동안 남한만을 단위로 해서 보는 것에 너무 익숙해 있잖아요. 최근에 우연인지 아니면 선생님이 말씀하신 분단체제의 작동방식이었는지 모르지만, 북한에 식량위기가 심각해지고 우리도 갑자기 경제적인 위기를 맞아서 상당히 혼란을 겪고 있는 이 상황, 생활의 궁핍마저 예상되는 이 상황을 본다면 결국은 남북이 ‘동질성’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김영희 덧붙여서 함께 질문드리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분단체제론의 또다른 의의는 분단으로 말미암은 손실과 성취를 함께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이고, 특히 80년대 상황에서 한국의 경제적 성장을 해명하는 데 상당히 유효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현재는 남북한 모두가 위기상황을 맞고 있지요. 이런 달라진 상황을 분단체제론적인 틀에서 설명하고 전망을 해보자면 어떻게 될는지요? 분단체제가 냉전체제의 일환만은 아니지만, 그런 성격도 분명히 가지고 있고 따라서 미국의 지지와 후원이 남한이 이룩한 성취의 중요한 한 기반이었다고 보이는데, 이제 냉전구조가 세계적인 차원에서는 해소되면서 남한이 누리던 서방세계의 보루로서의 프리미엄이 상당히 약화되었고, 그런 변화가 이번 IMF사태에서 미국이 보여주는 대응에서도 드러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언뜻 듭니다만-

백낙청 지금 김선생 말대로 분단체제라는 것이 단순히 냉전체제의 한 부분은 아니지만 분단체제의 형성과정이나 그동안의 재생산과정에서 동서냉전체제라는 것이 큰 비중을 차지해왔거든요. 그러니까 동서냉전이 끝남으로 해서 분단체제는 그걸 지탱해주던 커다란 기둥 하나가 없어진 셈이니까 거기에서 여러가지 정치적·경제적 위기가 따라오는 것은 당연하다고 봐요. 북한의 식량난이라든가 남쪽의 혼란이나 이런 모든 것이 냉전의 종식과 무관하지 않지요. 분단체제가 이득도 있고 손실도 있다는 측면에서 보면, 이득 중의 하나가 경제개발의 초기단계에는 매우 유리한 체제였다, 그러니까 냉전체제 속에서 한국이 최전방 보루로 있기 때문에 미국에서 적극적인 지원을 해준다는 점만이 아니고, 그런 상황에서 구성된 우리나라의 사회구조 자체가 정치민주화에는 대단히 불리했고 또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인 자주성이라는 면에서는 심지어 식민지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의존성이 강했던 반면에 경제발전에는 일시적으로 유리한 체제였는데, 그러나 이것이 무작정 계속되는 이득은 아니고 일정한 수준의 경제개발을 이루고 나면 그때부터는 오히려 질곡으로 작용하는 그런 체제란 말이죠. 이 점 역시 분단체제론과 무관한 많은 경제학자들도 인정하잖아요? 아무튼 나 자신은 분단체제를 허물어가는 작업을 수행하면서 경제의 체질도 바꾸어나가야 한다고 주장해왔는데, 우리 경제체질이 오늘날 같은 위기를 자초했다는 것은 지금 많은 사람들이 동의를 하고 있는 거죠.

그밖에 서방세계의 보루로서의 프리미엄이 상실된 것도 이번 위기에 크게 작용한 건 사실이라고 봐요. 옛날 같은 냉전시대라고 한다면 한국에 대한 신용위기가 이렇게 오지를 않아요. 왜냐하면 미국이 남한을 부도내겠는가, 안 낼 것이다라는 것을 온 세계가 알고 있으니까. 그 대신 미국이 부도를 막아주는 만큼 우리 내정에 깊이 간섭을 해서 그 댓가를 음양으로 챙겨갔는데, 그동안에 우리가 경제성장도 하고, 소련이라든가 중국, 이런 사회주의 강대국들의 위협이 없어지고 하면서 어느정도 자주성의 폭이 넓어진 면이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넓어진 폭을 활용해서 우리 자체로서 분단체제극복을 위한 개혁을 하고 남북화해를 하면서 미국과의 관계도 지혜롭게 유지해나가는 대신에, 우리끼리 낭비도 너무 했지만 미국에 대해서도 분수 모르고 객기를 많이 부린 것 같아요. 그러니까 미국으로서는 객관적으로도 그전처럼 냉전의 보루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닌데다가 단기적으로는 필요 이상의 마찰 내지는 교란작용을 한다는 일종의 괘씸죄까지 자청하는 꼴로 보이고, 이런 여러가지가 중첩되지 않았는가 싶군요.
 

김영삼정권도 잘한 게 있다

김영희 선생님께서는 이번의 정권교체가 획기적인 세력교체에는 미달하더라도 일정한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동시에 앞으로 시민운동·민중운동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그런데 전에 문민정부가 섰을 때만 하더라도 진보적인 운동이 상당한 혼란을 겪었고, 아직도 거기서 벗어났다고 보기는 힘든데, 이번의 김대중씨 당선은 그것보다 더 큰 여파를 몰고 올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런만큼 참된 세력교체의 문제가 이제 비로소 현실적이고도 어려운 문제로 제기되는데, 이럴 때일수록 일상적인 진전과 좀더 큰 전망과의 결합을 고민하는 일이 절실해질 것 같습니다.

백낙청 그렇지요. 결합을 어떻게 이룰지는 한참 더 얘기하다가 결론으로 도출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은데, 이왕에 김영삼정권 얘기가 나왔으니까 한마디 덧붙이고 싶은 얘기는, 지금 김영삼정권의 금이 땅에 떨어져서 좋게 말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물론 다른 것은 다 제쳐놓더라도 이런 경제파탄을 몰고 온 데 대한 책임은 면할 수가 없죠. 그러나 김영삼정권이 처음 들어서서 개혁을 잘한다 해서 90 내지 95퍼센트의 국민이 찬동한다는 여론조사까지 나왔다가 지금은 아마 95퍼센트나 그 이상이 욕을 하고 있는데, 이런 우리들의 변덕도 반성할 문제예요. 나는 김영삼정권이 우선 초기에 하나회 같은 군부의 사조직을 해체하고, 돈 안 드는 선거 하는 방향으로 여러가지 정치개혁을 하고, 그리고 전·노 두 전직 대통령 잡아넣고, 게다가 판결은 사법부에서 한 거지만 광주민주항쟁이 역사적으로 옳았고 그것을 진압한 세력이 내란세력이라는 판단을 내려놓은 것은 우리가 마땅히 기억하고 평가해줘야 할 업적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런 것이 없었으면 김대중씨가 이번에 대통령이 될 수 있었겠어요? 아무리 JP와 손을 잡았다 한들 나는 그건 의문이에요. 또 한번 북풍이 작용한다든가 비토세력이 나타난다든가 해서 더 엄청난 국가적 혼란이 왔을 거예요. 김영삼정권에 대해서도 이런 때일수록 지식인들은 냉정하게 평가를 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고요.

그다음에 김영삼정권이 들어서면서 시민운동이나 민중운동에 여러가지 혼란이 일어난 것은 사실인데,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얘기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렇게 된 원인이 그때도 지역주의가 큰 것이었어요. 다시 말해서 다른 맹주가 있는 지역에서는 여전히 그분이 앞으로 집권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차원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어떤 때는 김영삼씨가 정당한 개혁을 하는데도 발목을 잡는 현상이 나타나서 힘이 모아지지 않았던 것이지요. 또 하나는 우리 민중운동 전반의 문제인데 식민지시대 이래로 우리가 말하자면 지는 운동만 해왔단 말예요. 지면서 명분을 세우고, 그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는 운동을 해왔기 때문에, 가령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하면 그게 비록 시차가 있었고 3당합당이라는 지저분한 형식을 거쳤지만 6월항쟁이라는 엄청난 국민적 저항의 결과로 결국은 93년에 문민정권이 출범했는데, 그런 전환을 우리가 이루어놓고도-말하자면 나쁜 일을 맞아서 결연하게 싸울 줄은 아는데 좋은 일을 맞아서 활용할 줄은 몰랐던 것 같아요. 어쨌든 30여 년 만에 문민정권을 이루었으면 그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그게 얼마나 민주적인 문민정부가 될지에 대해서 우리가 감시도 하고 우리 자신도 노력을 했어야 하는 거죠. 이번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정권교체를 이룩했다는 점에 관해서는 설혹 DJP로의 교체가 미흡하다고 반대했던 사람도 인색할 필요는 없는 거고, 분단체제 아래서 이만큼이라도 해낸 것이 우리 국민의 승리라는 점을 받아들이고 시작하자는 겁니다. 다만 정권교체가 무엇을 위한 정권교체냐? 길게는 민주주의가 더 전진하고 민족통일이 이룩되기 위한 것이고, 그 중간단계로서도 좀더 참신한 세력이 나오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서의 정권교체여야지, 정권교체가 됐으니까 모든 것이 다 됐다고 하고 주저앉아도 곤란한 것이고, 반대로 이러이러한 일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정권교체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냐 하고 이 성과를 폄하해서도 안된다고 봐요.

임규찬 저도 덧붙여 한 가지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대통령 당선자 자신도 민주주의와 경제의 동시적 발전을 주요 목표로 내걸고 있어 아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민주정부로서의 자질과 연관지어 볼 때 확실히 기대되는 바가 많습니다. 그런데 IMF시대의 위기가 과연 어느 정도 위기인가에 따라서 우리가 생각하는 발전모델과 과제들이 상당히 혼선을 빚을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특히 선생님의 분단체제론과 관련지어 볼 때 한편으로는 국제경쟁력 강화라는 측면을 이야기하면서 은연중 종전의 경제상승 구도를 그대로 유지하는 선상에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분단체제의 타파와 민주화의 진전에 따른 삶의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위기사태와 관련해서 경제문제나 발전모델과 관련하여 좀더 세밀한 전망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백낙청 IMF ‘시대’라고 해야 하나? ‘사태’라고 해야 하나?(웃음)

백영서 일단 ‘사태’라고 정리하죠 뭐.
 

경제위기 극복과 주인된 자각

백낙청 일단 ‘사태’라고 해요? 하지만 이거는 단순한 ‘사태’ 차원을 넘어서 일종의 경제적인 신탁통치죠. 그런데 신탁통치라는 말의 어감이 참 나쁘기는 하지만 첫째는 멀쩡한 독립국가라고 생각했는데 신탁통치 아래 들어간 것만큼 엄청난 사태라는 거고, 둘째로 나는 그걸 단순히 나쁘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고 봐요. 어떻게 보면 해방 직후에 신탁통치안이 나왔을때 거기에 대해서 우리 국민이 너무 정서적으로 반응을 했기 때문에 분단을 강화하고 결국 6·25라는 참화를 겪었는데, 신탁통치가 받아들여졌더라면 어떻게 됐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는 없지만 사실 6·25 같은 참화는 피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학자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 당시에도 설령 신탁통치를 받아들인다 해도 참으로 착잡한 심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했을 텐데, IMF문제도 마찬가지예요. 한편으로는 이것이 대부분 자업자득이요 삼켜야 할 쓴약이라는 자세가 필요하겠지만, 설령 IMF의 처방이 100% 유익한 것이라 할지라도 경제주권의 상실에 대한 부끄러움이 없다면 독립국가의 국민 될 자격이 없는 거지요. 어쨌든 우리가 그동안 잘못해왔고 당연히 구조조정을 해야 할 것을 미루어왔고 개혁할 것을 안한 것을 IMF의 실질적인 경제신탁통치를 통해서라도 하게 된다면 결국은 IMF가 우리를 위해서 머슴노릇을 해주는 거 아니겠어요? 문제는 IMF를 머슴으로 부릴 만큼 우리가 주인의 자세가 되어 있느냐, 그런 마음자세가 되어 있느냐 하는 거고, 더구나 IMF 쪽에서야 우리의 머슴노릇 하려고 들어오는 게 아니거든요. 그들의 요구가 어떤 것은 우리 국민의 장기적인 이익에 부합되는 것이지만, 또 어떤 것은 IMF라는 기구 자체, 혹은 그 기구가 실질적으로 대변하는 미국 중심의 세계자본만을 이롭게 하는 거지요. 우리의 머슴이 아닌 저들의 머슴으로 우리에게 와서 주인행세를 하겠다는 측면이 있지 않느냐, 그래서 우리가 그런 것을 잘 가려가지고, 그들이 하는 일이 우리 이익에 부합되는 일은 그대로 수용해서 철저히 머슴으로 부려먹고, 그들이 우리에게 주인행세를 하려고 하는 것은 힘닿는 데까지 막고, 힘이 모자라면 괜히 객기 부리지 말고 일단 예봉을 피해가면서 또 우리 나름대로 준비를 해나가면, 그것 또한 우리 생활의 주인이 되는 훈련이 되겠지요. 그런 주인된 자각만 있으면 밖에서 들어와서 간섭하고 주인행세 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우리 머슴이 될 수 있다고 봐요.

백영서 여기는 다 경제를 모르는 사람들끼립니다만, 저는 지금 사태를 나누어서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하나는 지금 당장 문제가 되고 있는 우리 경제의 외환수급사정을 악화시키는 단기성 외채라는 것, 그것은 선생님이 말씀하신 주인이냐 머슴이냐를 따질 수 없는, 그건 문제가 있는 자금들 아니냐는 거죠. 지금 동남아의 사정을 보면 그런 자금들이 제조업에 투자되는 것은 거의 없거든요. 환차를 노려 금융과 부동산 투기를 해서 동남아에 거품경제를 만드는 핵심이었죠. 그건 금방 빠져나가고 금방 들어오고 하는 건데, 그것에 대해서는 요즘 비판적인 소리도 높아져 자본이동에 세금을 물리자는 주장도 나올 정도예요. 그것 말고 공장에 투자하는 식이라면 그런 것까지 거부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없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저는 일단 그 둘을 구별해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요. 문제는 설사 후자라 하더라도, 선생님의 발상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주인이 되느냐 안되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발전모델을 따르려 하는가와 관계있다는 점을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 싶어요. 요즘 갑자기 우리나라에서 영국의 전 수상 새처(Thatcher)의 인기가 높아지고, 우리나라에도 새처 같은 사람이 있었다면 여기에 대처해나갈 수 있었을 거라는 주장들을 하더군요. 영국도 IMF 돈을 받았지만 새처가 극복했다는 거지요. 요즘 새 정권에서도 그걸 모델로 삼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다 개방하고, 누구나 와서 투자를 하면, 가령 삼성이 가서 투자를 하면 영국 여왕까지 와서 축하인사를 해주듯이 하자는 거겠지요. 그런데 과연 그것이 우리 문제의 해결방향일까, 물론 지금 하도 다급해서 당선자도 누구 돈이든 다 끌어들이기 위해 불철주야 애쓴다고 하는데 과연 그게 바람직한지도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저는 그런 점에서는 완전한 시장기능에만 맡기는 식으로 가기보다는 그동안 해왔던 정부의 기능을 어느정도 살려서 시장기능과 결합시키는 방법이 필요하다고 보는데요.

백낙청 글쎄, 경제를 잘 모르는 사람들끼리 앉아서 너무 구체적인 얘기를 하면 웃음거리가 되기 쉬우니까(웃음) 그래서 내가 일부러 주인이니 머슴이니 하는 비경제학적인 용어를 쓴 거예요. 그런데 이번에 IMF사태를 계기로 우리가 정말 분단체제라는 것도 더 생각해봐야겠지만, 분단체제론에서 늘 얘기하는 것이 분단체제 자체가 완결된 체제가 아니고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한 하위체제라는 점인데, 이번 기회에 자본주의라는 걸 좀더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어쨌든 자본주의 세상에 살 바에는 거기에 제대로 적응하지 않고는 당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 하나 있고, 또 하나는 자본주의 세상이라는 것이 자기가 착실하게 살아도 당하는 사람이 나오게 마련인 세상이라는 것이죠. 지금 환투기는 곤란하고 제조업 투자는 환영한다고 구별하지만 그건 내 쪽 사정이고, 내가 그렇게 구별한다고 해서 투기꾼은 자기가 스스로 양보해서 안 들어오고 제조업자는 자진해서 들어오고 그러는 게 자본주의가 아니란 말이에요. 자본주의라는 것이, 비록 잘못된 내용일지언정, 인간은 모름지기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그런 원리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란 말예요. 매사가 궁극적으로는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서 움직이는 것 아니에요? 그리고 점점 국경의 장벽이 없어져가는데, 이것도 자본주의는 원래 세계체제요 세계경제니까 국경을 넘나들면서 천하를 자본이 주무르는 게 바로 자본주의의 본성이려니 하고 우리가 대응을 해야지, 그냥 뭐는 이래야 한다, 뭐는 저래야 한다고 당위론을 펼쳐봤자 안 통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이번 기회에 우리가 뼈저리게 각성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IMF사태는 새로운 발전모형의 연구 기회

그럴수록 임규찬씨와 백영서씨 두 사람 모두 말한 발전모델이라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데, 나는 한국경제가 장기적으로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려면 그건 분단체제를 허물어가는 과정과 합치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늘 해왔지요. 다시 말해서 남북한의 분단과 대결 상태는 그대로 놔두고 남한만이 어떻게 해서 G7에 들어간다느니 하는 것은 무망할뿐더러 위험천만의 길이라는 생각이었는데, 이 점이 이번에 거의 입증되지 않았나 싶어요. 그리고 국제경쟁력 강화라는 문제도, 나는 남한경제의 국제적인 위상이 현재보다 더 내려가지 않도록 노력하자는 주장을 해왔지요. 더 내려가지 않기 위해서도 경쟁력이 강화될 필요가 있기는 하지만, 무턱대고 선진국 진입 운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자세라고 봐요. 말하자면 수세적인 자세지요. 물론 나한테 구체적인 전략은 없지만요. 아무튼 비슷한 얘기 같아도 전혀 발상이 다르다고 봐요. 더 내려가지 않도록 하자는 것은 어차피 경쟁하는 세상인데 여기에서 더 내려가면 우리가 장기적으로 더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을 할 실력까지 잃어버리니까 그렇게 되지 않도록 최소한의 여건을 유지하면서 장기적인 대안을 달리 찾아보자는 얘기고, 그러다 보면 구체적인 전략도 훨씬 조심스러워지고 지혜로워지겠지요. 반면에 더 올라가자는 사람들은 대개가 후진국에서 중진국으로 가서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가는 순서가 있는 것이고, 우리가 다음에는 선진국으로 가게 되어 있다는, 내가 볼 때는 매우 단순하고 위험한 발상에 젖어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지금 IMF사태를 맞아서 우리가 정신을 차리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하는데, 나도 우리가 정신을 차려서 다시 일어서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디로 어떻게 일어서겠느냐? IMF사태가 일어나기 전의 흥청망청 살던 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이라면 그것은 참 우스운 소리죠. 오히려 차제에 새로운 전략을 개발하고 장기적인 발전모형이랄까 목표를 연구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거예요.

백영서 선생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만, 일반인들의 실감과는 거리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들어요. 저 자신도 그렇습니다만, 당혹스럽게 이 연말연시에 IMF한파를 맞으면서 가능하면 환율도 옛날식으로 내려가고, 가능하면 김당선자 말마따나 1년 6개월 안에 문제가 해결돼서 옛날 같은 소비와 성장을 누리는 사회가 돌아왔으면 하고 바라지요. 그야말로 단순히 관치금융을 고치고 경제구조를 바꾸는 구조조정을 바라지, 더 나아가서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발전모델의 갱신까지는 피부에 와닿지 않을 거예요. 정말로 발전이라는 개념을 되씹어보고 자본주의를 근원적으로 생각하고 새로운 문명을 생각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낼까에 대해서는 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백낙청 돌아보는 건 좋은데 처음부터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그렇게 포기할 필요는 없어요. 지금 이걸 계기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런 사람들이 더 생각을 모으고 뜻을 모아서 정말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해야지, 그게 되겠느냐 하고 미리 말할 필요는 없지요.

임규찬 저도 이참에 시골에 내려가서 이런저런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니까 의외로 이번 일을 빈부격차의 그런 시각에서 바라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가령 재벌놈들, 도시놈들 잘먹고 잘살더니 나라꼴을 이렇게 만들었구나 하는 시각도 의외로 많다는 점에서 역으로 이번 기회를 잘 활용한다면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갈등구조를 해결하는 단서도 되지 않을까─

김영희 너무 단순한 예일지 모르겠지만, 기름값이 오르면서 사람들이 자동차를 덜 몰고 나와서 도로교통 문제가 일시적일지라도 좀 나아졌잖아요. 이런 것을 보면서 우리나라에 적합한 경제규모라든가 소비수준이 어딘가 하는 물음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지 않겠어요?

백영서 이런 시각도 저런 시각도 있을 수 있는데 실제로 정치가라든가 여론 주도층에서 그걸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가는가에 따라서 모양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매스컴의 역할, 언론의 역할도 중요하고요. 일시적으로 우리가 허리띠를 졸라매서 잘 극복하면 그냥 돌아가는 거고, 그야말로 새로운 발전모델을 찾는다면 그렇게 갈 수도 있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위기이자 동시에 기회인데, 저는 비관적인 쪽이에요. 저야 정책집행자가 아닌 대학 선생에 불과하지만, 지금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을 동시에 추구한다는 DJ 측에서 이 기회를 통해 새로운 발전모델 추구까지 가려고 할까, 또 하나 제2의 박정희를 꿈꾸며 대국주의로 가려는 것이 아닐까, 60년대 이후 늘 그런 방향으로 우리 사회를 이끌어왔기 때문에 정치가들은 그런 쪽으로 국민을 동원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겠지요. 그래서 저는 대세가 그렇다고 한다면, 대세와 관련해서 다시 창비 문제로 돌아가면 창비가 지향하고 있는 것들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제가 창비 문제를 다시 꺼내는 것은 이런 전환기가 도래하는 것을 얼마나 예상했으며, 비전을 제시하는 지식인의 역할을 얼마나 제대로 수행했는가 하는 의문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지식인들이 반성해야 할 여지는 많은 것 같습니다. 주위에서,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경제학자들이 많은데 이런 사태를 충분히 예측했느냐 하는 비난, 나아가 사회과학도들에 대한 비난을 들으면서, 70년대 이래 한국 지식인사회를 선도적으로 이끌어온 중요 매체인 우리 창비는 반성할 점이 없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거대담론에 치중하고 현실문제에서 멀어진 창비?

그런 점에서, 저도 편집진의 일원입니다만, 우리가 주로 해온 일은 바로 지금 제기한 발전의 문제,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이해, 근대의 문제에 대해서 끊임없이 되물어왔는데 이런 것들은 주로 80년대 말에서 90년대에 들어와서 주로 다루어온 일이고, 그래서 우리는 나름대로는 의견을 개진해왔고 비전을 제시하려고 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이런 노력들, 즉 창비가 제기한 근원적인 질문들이 과연 일반인들의 실감과 잘 맞아떨어진 것일까요? 이런 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담론상업주의’라든가 거대한 설명틀만 제기하려고 한다든가 하는 식의 비판을 불러일으키는 게 아닌가 하는데, 이 점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백낙청 뭘 가지고 담론상업주의라는 거예요?

백영서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런 거겠죠. 근대와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라는 것도 그렇고, 더 가까운 계기로는 식민지에서의 근대성에 관한 논쟁처럼 작년 인문사회학계의 대표적인 쟁점으로 거론될 정도로 관심을 끈 것이 있는데, 이런 것들이 현실문제를 비껴선 이론중심이라고 얘기들이 되는 것 같습니다.

백낙청 근대와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라는 논의는 상업주의와는 별 관계가 없는 것 같고요. 별로 상업성 있는 논리는 아니었다고 보는데……(웃음) 일제 식민지시대의 성격에 관한 논의는, 글쎄 그것도 담론상업주의냐 아니냐 하는 데 우리가 신경쓸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나는 그런 말이 나올 정도로 그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 창비가 기여했다면 일단 잡지로서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두 문제에 대해서 나오는 비판의 성격이 조금은 다른 것 같아요. 식민지시대에 관한 논의는 우선은 그걸 먼저 제기한 분들이 대개 식민지시대에 일본이 조선의 근대화에 일정하게 기여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학자들이고, 또 그중에 상당수가 은연중에 식민지시대에 우리 민족과 민중이 겪은 고난에 대해 다소 둔감하다고 할까, 그렇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해 분노하는 학계의 다른 쪽에서는 도대체 창비가 이런 문제제기에 지면을 주는 것 자체가 못마땅하다는 게 있지요. 하지만 그것을 안 다룬다고 해서 그런 논의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이렇게 공론화해서 종전에 그런 논의에 참여했던 분들도 더 분명하게 입장을 정리해보고, 또 참여하지 않았던 여러 사람들도 새로운 기여를 하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그래서 일단은 잡지로서 잘했다고 봅니다. 문제는 아직까지 우리 편집진 자체로서 뚜렷한 기여를 한 것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거예요. 글로 나온 것은 아마 지난 98호에 우리 자문위원이기도 한 유재건(柳在建) 교수가 「식민지·근대와 세계사적 시야의 모색」이라는 글을 쓴 것이 아직까지는 유일한 셈인데, 그러니까 결국은 자기들이 이 문제를 천착해서 새로운 뭐를 내놓지도 않으면서 종전에 논의하던 분들을 끌어 모아서 그야말로 상업주의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비판을 받게 되는 거지요. 앞으로 창비 편집에 직접 관여하는 사람들이나 창비가 새로 개발한 필자들이 뭔가 새로운 것을 내놓지 못한다면 그런 비판을 받아서 마땅하다고 봐요.

김영희 상업주의 이야기는 요즈음의 식민지 관련 논의를 두고 나온 거고, 좀더 일관된 비판은 90년대에 들어와서 창비가 거대담론에 치중한다든가 현실문제에서 멀어진다든가 하는 지적인데요.

백낙청 거대담론이라는 비판과 관련된 좋은 예가 바로 ‘근대와 근대극복의 이중과제’겠지요. 하지만 그건 논의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을 거예요. 가령 식민지시대에 관한 논란만 하더라도 바로 근대의 성격에 관한 논의가 되는 거고 예의 ‘이중과제’를 구체화하는 한 가지 방식인데 유재건 교수 글에서 겨우 그런 연결의 단초가 열린 정도지요. ‘근대와 근대극복’이라는 용어 자체는 우리 편집위원들도 곧잘 쓰던데 ‘근대’도 거창한 문제지만 ‘근대극복’은 더욱이나 막연한 느낌을 주기 쉽지요. 내 생각에는 근대극복이라는 말을 쓰려면 적어도 두 가지 여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봐요. 하나는, 근대라는 것이 자본주의시대라는 전제 위에서 하는 얘기인데, 근대가 무한정 지속되지 않는다라는 확신이 있어야 해요. 그 신념도 없이 막연히 근대극복, 근대극복 하면 그건 겉멋이요 말놀음밖에 안되는 거죠. 자본주의가 언젠가 끝난다는 문제에 대해서 나는 크게 봐서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 같은 사람의 ‘역사적 자본주의’관에 동의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가 지금 전성기에 있지만 자본주의체제라는 것은 그 본성상 승승장구하다 보면 자연히 더이상 그런 방식으로는 작동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것이 50년 후가 될지 100년 후가 될지는 모르겠는데 첫째는 10년, 20년 내에 일어나는 단기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것과, 반면에 수백 년씩 지속될 만큼 그런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그 중간쯤의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 더는 작동이 불가능한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에 동조를 하고요. 동시에 종전에 자본주의극복을 얘기하던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수명을 다할 때 필연적으로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나서 사회주의가 성립된다고 했는데 월러스틴은 그런 보장은 없다는 거죠. 그런 역사의 법칙이라는 것은 없고, 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나쁜 체제가 될 수도 있는 거고, 또 그가 그런 말을 했는지 안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인류가 멸망을 해서 아무런 체제가 없는 세계가 올 수도 있어요. 다만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는 자본주의보다 더 나은 미래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근대는 어차피 끝나게 되어 있는데 이걸 좀 제대로 극복해보자라는 근대극복에 대한 신념이 하나 있어야 하고요.

그다음에는 이것이 한반도에서 사는 우리가 지금 당면한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신념이 있어야지요. 분단시대를 사는 우리 한국인의 최대목표가 분단체제극복이고 이것은 분단체제보다 나은 체제를 한반도에 건설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이 작업은 한편으로는 우리가 통일국가를 달성함으로써 자본주의 세계체제 안에서, 근대세계 속에서 제자리를 잡는 그런 작업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까지 이 세계가 작동해오던 방식에 대해서 뭔가 견제를 하고 새로운 것을 내놓는 작업이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분단체제극복이야말로 한반도에서 근대를 달성하면서 근대극복을 향해서 나아가는, 근대극복의 실마리를 여는 이중적인 과업이랄 수 있지요. 가령 이런 식으로 논의를 구체화해나가면 이게 지나치게 거대한 담론, 우리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없는 거대담론이라는 비판은 해당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물론 거대담론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에 불만을 갖는 사람들은 계속 비판하겠죠. 하지만 그거야 거대담론 없이 살겠다는 사람들이 딱한 사람들이지 우리가 그런 사정까지 배려해서 근대나 근대극복 논의를 사양할 수는 없을 거라고 봐요.

백영서 그런데 창비 자체 문제를 얘기하다 보니까 결국 선생님이 주로 이끌어오신 분단체제론으로 얘기가 돌아갑니다. 선생님은 분단체제론이 거대담론을 담고 있지만 우리 당면과제에 적용되는 구체적인 것이라고 하셨는데, 쉽게 전달이 안되고 오해가 되는 면도 있는 것 같아요. 분단체제론에 대해서 염무웅 선생님도 최근에 쓰신 글에서 이런 표현을 했어요. “공인받지 못했을지는 몰라도 공론화에는 성공한 셈이다.” 그러니까 공론화에는 성공했지만 충분히 널리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이런 뜻으로 표현한 것 같은데……

백낙청 그거 내가 한 말 같구먼……(웃음) 몰라, 염선생도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
백영서 예. 염선생님도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그럴 정도로 그것조차도 잘 이해가 안되는 면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백낙청 공인이야 남이 해주는 건데 안해주겠다고 우기면 내가 어떡하겠어요?(웃음)
 

지혜로운 한반도 통일은 자본주의 세계체제 변혁과 연결됨

백영서 차제에 선생님 모시고 말씀 듣는 기회에 청문회랄까요, 몇 가지 점을 점검해보는 기회를 가졌으면 하는데요. 분단체제론에 대해서 저희들로서도 몇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우선 그중의 하나를 질문드린다면 선생님이 근대극복에 대해서 필요한 두 가지 요소를 말씀하시면서 근대, 즉 자본주의극복의 신념을 강하게 피력하셨어요. 그중의 하나가 넓게 말해서 자본주의체제의 변화가능성·소멸가능성이었고, 두번째가 대안적인 체제에 대한 구상이랄까요, 그런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 점은 역시 막연한 것이 아니냐, 예전처럼 사회주의체제를 기계적으로 떠올릴 수 없는 지금에 와서는 더욱 그래요. 그런 것과 관련해서 질문을 드린다면 선생님은 분단체제 극복운동이 장기적으로는 세계체제 변혁과 연결된다고 보시잖아요. 어떤 대목을 빌린다면 현존체제에 대한 좀더 실질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고까지 주장하셨는데 그게 좀 막연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글에서는 분단체제에 대해서 올바로 인식할 때 분단체제를 허무는 사업은 사회주의체제 하나를 건설하는 것보다 낫다라고까지 말씀하신 적도 있으신데 그 점에 대해서 좀……

백낙청 그때 사회주의체제라고 한 것은 어느 특정한 나라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집권해서 스스로 사회주의체제라고 말하는 경우를 뜻하는 것이지 그것이 온전한 의미의 사회주의체제라고 인정한 건 아니에요. 말하자면 따옴표가 붙어 있다고 생각하면 되겠는데, 오늘의 세계에서는 그런 식의 ‘사회주의혁명’이 어느 국가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조차 의문입니다. 내 말은 설령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더라도 그것이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무슨 결정적 영향을 주는 사건은 못 된다는 거였지요. 자본주의 세계경제라는 것이 과거에도 소위 그러한 사회주의체제를 어떤 면에서는 포용하면서 견뎌왔고, 어느 싯점이 지나면서 그것을 대부분 와해시키는 데 성공했어요. 지금 남아 있는 사회주의국가라고 했을 때는 적어도 그런 의미의 사회주의체제인 중국이라든가 베트남, 북한, 이런 나라들도 실질적으로 세계시장에 통합이 되었거나 아니면 통합이 못 돼서 북한처럼 어려움에 처해 있는 그런 상황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설령 그런 체제가 하나 더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인류에게 무슨 대안이라는 생각을 안 주는 거에요.

반면에 한반도에서 통일이 이루어질 때 그것이 가령 남한자본주의가 일방적으로 주도해서 통일을 이루는 그런 경우가 아니고 뭔가 남북한의 민중이 획기적으로 참여해서, 크게 보면 자본주의 세계경제 속에 들어 있는 사회지만 그러나 종전의 남한이나 북한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민주적이고 정의롭고 어느정도 번영하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낸다고 하면 지금까지 자본주의의 논리만을 따라서 하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가 우리 삶을 꾸려나갈 수 있구나라는 역사적 모범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현존 자본주의체제에 더 큰 타격이 되리라는 것이죠. 사실은 지금의 세계체제가 유지되는 데에 한반도의 분단체제가 얼마나 큰 기여를 하고 있는지를 우리 스스로가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볼 필요가 있어요. 한민족의 세계사적 사명이라든가 한반도 통일의 세계사적 의의, 이런 식으로 우리가 멋있는 문구를 늘어놓을 때는 사실 그런 생각을 포함하는 것 아니겠어요? 다시 말해서 통일이 됨으로써 이런 엄청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통일 안된 상태가 기성체제를 유지하는 데 그만큼 몫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게 변할 때 그런 가능성이 열린다는 말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가 사실은 장래 일도 아니고 과거의 일이고 오늘날의 일이기 때문에 과학적인 검증이 가능한데도 잘 안하고 있는 것 같아요. 가령 브루스 커밍스 같은 사람은 한국전쟁이 베트남전쟁보다 세계사적으로 더 중요한 전쟁이었다는 주장을 하잖아요? 베트남전쟁의 의의를 우리가 깎아내릴 필요는 없지만, 또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결정적으로 패배했다는 식의 선전도 아니지만,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체제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굳어지는 데 한국전쟁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기여했는가, 또 그후로 유지되어온 남북의 분단상태라는 것이 세계체제 유지, 미국의 강경세력이라든가 군산복합체의 자기재생산에 얼마나 중요한 몫을 해왔고 냉전이 끝난 지금까지도 하고 있는가, 이런 것을 누군가가 냉정하게 계산을 해본다면, 한반도의 분단체제만 빠져도 미국은 미국대로 크게 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올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분단체제를 우리가 슬기롭게 극복한다는 것은 정말 그만한 의의가 있는 일이라고 봅니다.

김영희 아까 근대극복에 대한 신념과 관련하여 월러스틴 생각에 공감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가령 ‘지혜의 시대’를 얘기하신 글을 보면 선생님께서는 자본주의체제가 뭔가 좀더 진전된 방향으로 극복되지 않을까 하는, 월러스틴보다 좀더 분명한 확신 같은 것을 갖고 있다고 보이는데요. 월러스틴도 그 나름대로 신념이야 있겠지만 사실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월러스틴은 후퇴로 보는 측면이 있잖아요? 그런 면에서도 월러스틴은 자본주의 이후의 여러 가능성을 정말로 열어놓는 것 같고, 선생님께서는 ‘극복’에 대한 좀더 굳건한 신념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사실 이런 점은 민중에 대한 신뢰라든가 본마음 등을 얘기하실 때부터 일관됐던 것 같은데요.

백낙청 월러스틴과 비교해서 누구 신념이 더 굳건하냐는 것이 중요한 건 아닐 테고 내 나름대로 신념이 있다고 할 때 그게 얼마나 근거있는 신념이냐 하는 게 중요하겠지요. 그 부분을 좀 우회적으로 얘기하면 봉건시대에서 자본주의시대로 넘어온 것을 월러스틴은 우선 그게 전혀 역사적인 필연성이 없었다고 하고, 둘째로 그게 많은 의미에서 역사적인 후퇴였다고 하지요. 그리고 이 점을 일종의 손익계산서를 뽑아가면서 얘기하니까 그걸 가지고 우리가 따져볼 여지가 있는데, 사실은 그 이행과정에 어떤 필연성이 있었느냐 없었느냐에 따라서 손익계산서를 보는 태도도 달라지게 마련이에요. 왜냐하면 뭔가 그게 필연적인 것이었다 하면 실제로 손해가 났다 하더라도 감수해야 할 손해라고 해서 아무래도 다른 의미를 부여하게 마련인데, 나는 구체적인 자본주의로의 이행경로에 대해서 지식이 너무도 부족하지만, 자본주의의 도래라는 엄청난 사건이 아무런 필연성이 없이 이루어졌다고 단정하는 것도 그게 무슨 신의 섭리에 의한 것이다, 필연적인 역사법칙에 의한 것이다라고 단정하는 것만큼 무모하고 어쩌면 무엄한 발상이 아닌가 하는 느낌은 있어요. 그래서 분명히 필연도 아닌 사실들을 꿰맞춰가지고 필연이라고 해석하는 건 곤란하지만, 그렇다고 자본주의라는 이 엄청난 인류적인 경험, 불과 수백 년 사이에 전지구와 대다수 인간을 온통 바꿔놓은 이 엄청난 변화를 인류가 피할 수도 있었을 우발적 사태라고 말하는 건 무언가 불신이 지나친 태도라고 봐요. 마찬가지로 장래에 대해서도, 물론 우리네 하기에 달린 거지만, 자본주의라는 이 재앙이라면 재앙에 해당하는 역사가 우리가 그걸 거치면서 뭔가 인간이 새롭게 거듭나고 더 훌륭해지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보고 싶은 심정이 있어요. 그런 심정적인 것에다, 또 이렇게 부대끼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밝아지고 깨쳐가고 있다는 내 나름의 인식이 결합되어서 적어도 월러스틴이 언표한 것보다는 더 좀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김영희 선생님께서 계속 믿음이나 신념을 말씀하시는 것이 선택된 어휘라는 생각도 드는데요. 인식이 빠지지는 않겠지만 인식만은 아니고 믿음이라는…… 그런데 이런 부분에 대해서 비과학적이라든가 정말 순전한 믿음 차원이 아니냐 하는 비판들도 많았던 것 같아요. 근거가 뭐냐 하는 얘기도 있고……(웃음)

백낙청 근거를 다 제시할 능력도 없고, 지금 그럴 계제도 아니니까 일부러 믿음이라는 말을 썼는데 믿음이란 공부의 출발점이라 생각하면 되겠죠. 의심이 믿음으로 끝나기를 요구하는 것이 전통적인 종교의 입장이라고 한다면 믿음에서 출발해서 의심으로 가는 게 오히려 정당한 공부법이라고 봐요. 다만 이때 의심은 노력을 포기하는 불신이 아니라 더욱 탐구에 정진하는 자세라야지요. 그런 의미에서 우선 출발단계에 해당하는 믿음 얘기로 대충 넘어가려 한 건데(웃음) 그러나 자본주의가 무한정 지속될 수 없는 사회체제라는 명제는 어느정도 과학적 분석이 끝났다고 볼 수 있고, 장기적인 자본주의극복의 한 단계로서 한반도의 분단체제극복이 있고 그런 작업이 한반도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지금도 어느 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주장은 사실 차원에서 어느정도 규명이 가능하지요. 당장에 규명할 수 있는 면도 있고, 또 5년, 10년 내로 판가름날 문제도 있고 하니까, 순전히 믿음 차원에만 머문 얘기는 아닌 셈이죠.
 

북한동포돕기와 남한경제살리기를 하나의 운동으로 추진해야

백영서 분단체제에 대해서 얘기가 좀더 됐으면 싶은데요. 최근의 우리 활동 중에 분단체제 극복운동과 관련해서 선생님도 주목하셨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이 작년에 있었던 북한쌀돕기운동인데, 거기서 남북한 민중이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까지 보셨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백낙청 그랬지요. 한데 쌀돕기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고 식량 보내기, 더 정확히 말하면 옷가지와 의약품까지 포함하는 북녘동포돕기지요. 그 운동 자체는 여러분들도 다 알다시피 정부나 우리 거대언론에서는 별로 지원을 안해줬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알기로 총계 2백억원이 넘는 금액이 모였습니다. 액수로 보나 가담한 인원수로 보나, 운동을 주도한 분들의 자평에 따르면 3·1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운동이었다고 할 만큼 대단한 성과였습니다. 3·1운동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면이 좀 많지만 아무튼 큰 성과였다는 건 동감인데, 이게 분단체제 극복운동으로서는 얼마만큼의 의미가 있느냐, 어느 정도의 남북 민중연대로 발전할 수 있느냐는 것은 아직 미지수지요. 더구나 당장 IMF시대를 맞아서 그런 식의 운동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겠느냐 하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죠. 앞으로 일은 나중에 따로 얘기하더라도, 아무튼 이제까지 그 운동이 남한에서는 어느정도 민중적인 동원이 이루어진 운동이고, 그걸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북한동포와의 유대를 새로 확인하고, 분단문제를 새로 생각하고, 또 적어도 일각에서는 이것이 단순히 통일문제가 아니라 이런 동포돕기조차 전혀 지원을 안하고 심지어 훼방을 하는 우리 남한의 지배구조라는 것이 어떤 구조인가에 대해서까지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런 면에서는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을 겸하는 분단체제 극복운동에 부합되는 결과가 적잖게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북한민중과의 연대에 관해서는 우리가 남한과 똑같은 형태의 운동을 전제로 어떤 기대를 해서는 안될 거예요. 북한동포 중에서 실제로 굶고 있던 사람이 남쪽의 민간에서 모아 보낸 식량으로 인해 허기를 면한다면 그것 자체가 남북 민중간 연대의 가장 튼튼한 기반이 되는 셈이지요. 당장에는 그런 연대를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고, 또 일부 우리 언론에서 선전하듯이 북한정권이 사실을 감추고 자기들 정권에서 다 해주는 것처럼 속였다 하더라도 나는 그런 속임수가 언제까지나 통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언젠가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이런 어려움에 처했을 때 역시 가슴을 열고 도와준 것은 남한의 민중운동이었지 남쪽 정부도 아니었고 자신들의 정부도 아니었다는 것을 북쪽 민중들이 깨닫게 될 거란 말이죠. 또 하나는, 이런 사태를 초래한 일차적인 책임이 북한정권에 있는데 식량을 보내서 그들의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필요가 있느냐 하는 강경 논리도 있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나는 북한정권의 실정이나 비행에 대해서 그걸 심판할 수 있는 일차적인 주체는 북한주민이다, 그렇다면 심판할 사람들을 우선 살려놔야 나중에 심판을 해도 할 것 아니냐라고 답하고 싶어요.

백영서 그런데 작년의 경우에는 식량돕기운동 같은 걸로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남북 민중연대로 갈 수 있는 하나의 디딤돌은 됐다고 보더라도, 올해는 어떤 것이 구체적으로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백낙청 바로 그게 문제예요. 내가 아까 북한동포돕기운동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미지수라고 했는데, IMF사태가 아니더라도 단순한 동포애와 인류애에 입각한 북한동포돕기운동이 무작정 지속될 수는 없다고 봐요. 그래서 그동안의 성과가 참 대단하기는 하지만 그런 식으로 계속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IMF사태가 나기 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가졌던 겁니다. 그런데 지금 남한 사정까지 이렇게 어려워지니까, 정말 내 코가 석 잔데 아무리 북한동포가 내 동포라 하지만 역시 일정한 거리감이 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돕겠느냐? 물론 열심인 사람들은 이럴 때일수록 열심히 도와줘야 한다고 하겠지만, 요는 대중운동으로서 얼마나 확산될 수 있느냐, 얼마나 대중의 호응을 얻을 수 있느냐, 나는 그 점에 대해 낙관할 수 없다고 봐요. 대중적인 정서 자체가 아무래도 전보다는 더 냉담할 터인데다가 보수언론들은 저 북한동포돕기운동 한다는 친구들이 안 그래도 수상쩍었는데 지금 하는 꼴을 보니까 정말로 수상쩍은 친구들이다, 좋게 봐줘도 감상적인 통일론자들이다라고 몰아붙이기 십상이잖아요? 그래서 나는 북한동포돕기운동을 주도해온 시민단체·재야단체들이 이 싯점에서 한번 뭔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운동의 성격을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사실 이런 일은 혼자서 생각만 하고 있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생각이 난 순간부터 움직여서 영향력있는 분들을 설득도 하고 중지도 모아야 하는데, 처음에 말했듯이 환갑고개를 넘기가 유달리 힘들어서 아직 몇 분께 운을 떼놓는 일 이상은 못했습니다. 아무튼 지금 국민들 사이에는 경제살리기운동이라든가 금 모으기 운동, 이런 것이 정부나 방송, 신문 등 매체들의 지원 하에서 상당히 호응을 얻고 있지요. 북한동포돕기도 지금은 그런 정서를 수용하는 운동이라야 할 것 같아요. 그래서 구체적인 방법까지는 생각 못해봤지만 뭔가 북한동포돕기운동을 남한의 경제살리기라든가 경제바로잡기운동과 연결시킬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에요. 어떻게 보면 공연히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 북한동포돕기운동이라는 것이 단순히 그냥 동포니까 도와주자, 또는 인도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먹고 남는 것을 나눠주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남쪽에서의 삶에 대한 총체적인 반성을 동시에 촉구하는 그런 운동이었다고 한다면, 또 마땅히 그런 운동이 되어야 한다면, 이런 경제파탄을 맞아서 우리가 여러가지 반성을 하면 할수록 북한동포를 더 열심히 도와야 하는 거고, 동시에 북한동포를 돕는 과정이 반성을 좀더 제대로 하는 과정이 되어야 하고, 이럴 것 같아요. 이게 말하자면 분단체제 아래 살면서 남과 북을 하나인 동시에 둘로 보고, 둘인 동시에 하나로 보는 훈련이기도 하지요. 가령 북한동포돕기 돈을 모으면서 들어온 돈의 절반은 남쪽 빚 갚는 데 쓰고 절반은 북에 보낸다든가 이런 식으로 추진을 한다면, 남쪽의 경제살리는 일과 북쪽의 동포를 돕는 일이 어떤 의미에서는 별개의 일이지만 동시에 그 둘을 결부해서 하나의 운동으로 추진함직하다는 의식을 전국민적으로 확산하는 일종의 의식교육이 될 수도 있고, 운동의 방법 차원에서 얘기하더라도 북한동포돕기 한다는 분들이 IMF시대를 맞아서 우리 남한경제 살리기도 같이 하겠다고 나서는데 이걸 옛날처럼 언론에서 외면하기 어렵지 않겠어요? 물론 경제살리기운동은 다른 분야에서 이미 많이 하고 있는데 왜 북한동포돕기 하는 사람들까지 나서느냐라는 의문도 있을 수 있겠지만, 첫째는 재야단체들 스스로도 북녘돕기와 남녘돕기를 동시에 해본 일이 없는 단체가 많은데 차제에 새로운 훈련을 해볼 필요가 있고요, 둘째로 경제살리기운동이라는 것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국민의식을 퇴행시키는 결과가 될 수 있거든요. IMF가 요구하는 개혁 중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민주적인 개혁도 있는데 공연히 배타적인 의식을 조장할 수도 있는 것이고, 또 아까 백영서씨도 얘기했지만 하루라도 빨리 빚 갚고 옛날 같은 세월로 돌아가자는 식의 외채 갚기라면 오히려 천천히 돌아가는 게 낫지 서두를 필요가 뭐 있어요?(웃음) 그런데 정부가 지지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북한동포돕기운동을 해온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민간통일운동세력만이 아니라 뭐니뭐니 해도 우리 사회의 양심세력이고 민주화세력이거든요, 대체로 봐서.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이 나서서 북과 남을 동시에 돕자고 할 때는 덮어놓고 남쪽의 빚만 갚아주자는 것이 아니라, 또는 민족주의적 감정에서 무조건 경제주권을 회복하자는 운동이 아니라 국가의 경제운용에 대한 국민주권을 확보하자는 움직임과 민족통일을 위한 새로운 전기를 여기서 찾자는 움직임이 가세되는 거란 말이지요. 이런 것이 없는 경제살리기운동이라는 것은 실제로 누구 좋으라고 하는 운동인지 모를 일일 수 있어요.

임규찬 좋은 말씀입니다.

백낙청 오랜만에 깨끗하게 칭찬을 듣네.(웃음)

백영서 지금까지 분단체제론에 대해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만, 선생님이 분단체제 문제를 말씀하시면서 더불어 논하신 중요한 주제에는 국가체제와 관련해서 제시한 복합국가론이라든가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우리 한민족들을 묶는 다국적 한민족공동체 등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도 더불어 얘기했어야 할 주제인데 지금은 시간도 없고 해서 그냥 넘어가겠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건드려야 할 것은 민족주의에 대한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민족주의와 연결되는 민족문학론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질 수가 있을 것 같고요. 선생님께서는 70년대부터 민족주의, 민족문학론을 주장하셨고, 그것이 또 항상 언제까지나 영원할 거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일정한 역사적 토대가 있는 한은 그 주장을 하시고, 토대가 바뀌면 그것도 바뀔 거라고는 이미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만, 최근 창비에서도 그렇고 선생님 글에서도 민족주의랄까 민족문학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적어진 것 같아요. 특히 최원식 주간께서는 민족주의를 넘어서야 한다고 어디서나 얘기하시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민족문학은 아직도 유효한가

백낙청 지금 ‘민족주의와 연결되는 민족문학론’에 대해 물었는데, 임규찬씨도 잘 알지만 우리 문단에서 민족문학운동을 해온 사람들의 대부분은 민족문학이라는 것과 민족주의 문학이라는 것을 구분하지요. 민족주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된 것은 사실이지만 민족문학이 민족주의 문학은 아니라는 거예요. 80년대에는 민족주의적인 담론과 계급적인 담론을 이런저런 식으로 결합하는 여러가지 민족문학론이 있었고, 실은 80년대에 그런 계급담론이 왕성해지기 전부터도 우리 시대의 민족문학론은 민중문학론이기도 하다고 해서 단순히 민족주의적인 문학과는 구별하는 길을 열어놨던 거죠. 그런데 최근에 민족주의에 대해서 조금 더 비판적인 얘기를 많이 하게 된 배경은, 글쎄 한두 가지를 말할 수 있겠는데요. 하나는 그전부터도 민족문학론이 민족주의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처음에는 말하자면 좋은 민족주의, 나쁜 민족주의, 이런 식으로 구별하려는 경향이 없지 않았어요. 그러나 좀더 엄밀하게 말하면 민족주의 자체에 긍정적 면과 부정적인 면이 항상 복합되어 있고, 경우에 따라서 긍정적인 면이 더 커지기도 하고 부정적인 면이 더 커지기도 하지만 민족주의를 좋은 민족주의와 나쁜 민족주의로 나눌 수는 없다는 인식이 좀더 확고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실제로 분단시대가 오래 지속되면서 남북한을 통틀어서 민족주의의 부정적인 면이 점점 두드러지게 되지 않았는가 하는 거예요. 긍정적인 면이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식민지시대에 민족해방이 지상과제이던 그런 상황에서 민족주의가 띠었던 진보성이라는 것이 많이 없어지고, 그 대신 남쪽에서는 우리 나름대로 경제발전을 하면서 일종의 아류 제국주의 비슷한 것이 민족주의적인 감정과 결합되기도 하고, 또 분단이 오래 지속되면서 남한사람들에 국한된 민족감정 내지 국민감정 같은 것이 형성되었는데, 강만길 교수는 통일민족주의가 아닌 것은 그냥 분단국가주의라고 말씀하시지만 나는 그게 단순한 분단국가주의는 아니고 분단국민 특유의 민족주의, 말하자면 분단국가주의에 이용되기 안성맞춤이지만 그걸 무시하고서 현실적인 대중운동이 불가능하기도 한 분단민족주의랄까 분단시대의 국민감정이라고 부름직한 것이 점차 생겨났다고 봅니다. 또 북한은 북한대로 어느새 사회주의보다도 민족주의가 중요한 이념이 되어버린 인상인데 그것이 바람직한 면도 물론 있죠. 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식민지시대 일본사람들이 갖고 있던 천황 중심에다 혈연 중심의 민족주의를 연상케 하는 면도 있어요. 또 그런 극단적인 민족주의가 표면상으로는 통일을 지상목표로 삼고 있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남북대결의 한 수단이 되고 남한 전체를 식민지라든가 통일의 대의에 거역하는 그런 세력으로 몰아붙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북한의 기성체제를 강화시킬 뿐 아니라 남한의 강경세력까지도 도와주는 이런 이데올로기적인 작용을 한다는 걸 볼 때, 이런 민족주의에 대해서도 좀더 냉정하게 분석을 해서 시시비비를 가려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거죠. 그래서 관심이 덜해졌다기보다는 그 부정적인 면에 예전보다 더 주목을 하게 됐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민족주의를 그냥 해체하자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아요. 더구나 민족문학론으로 말하면 그것이 애당초 민족주의 문학론이 아니었던만큼 우리가 포기할 까닭이 없지요.

김영희 이런 문제의식을 선생님께서는 ‘민족주의와 다른 이념들의 창조적 결합’이란 말로 표현하신 적이 있는데, 그 다른 이념이 어떤 것들인지 궁금합니다. 80년대에 들어서면서 계급적 관심이랄까 사회과학적 인식과의 결합이 두드러지고, 또 새로운 이념으로는 환경이라든가 여성문제에 대한 언급들이, 물론 그전에도 단초적으로는 있었지만, 역시 이때 와서 늘어난 점이 눈에 띄는데요.

백낙청 80년대에는 민족문학론에 주어진 최대의 과제가 민족주의와 맑스주의 담론의 결합 문제였지요. 창조적인 결합 문제. 그런데 민족주의와 맑스주의 담론은 사실은 레닌주의를 통해서 이미 일정한 결합이 이루어져 있었죠. 또 그 연장선상에서 새롭게 변모한 예로 김일성주의를 통한 결합도 있었고, 중국의 마오 쩌뚱(毛澤東) 사상도 그러한 결합의 예라고 볼 수 있는데, 80년대 민족문학의 올바른 이념을 주장하는 젊은이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이미 이루어진 양자의 결합을 그대로 답습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답습한 노선을 안 따라오는 일부 민족문학론자들, 특히 선배들에 대해서 가열한 공격을 가하곤 했는데(웃음) 나는 그때도 정말 창조적 결합이라는 것은 레닌이나 마오 쩌뚱이나 또는 북에서 이루어진 결합을 충분히 감안하면서도 우리 실정에 맞는 새로운 결합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그게 6월항쟁 이후에 우리 문학이 새로운 단계를 맞으면서 좀더 구체적으로 소위 PD적인 입장, NL적인 입장, 그리고 자유주의적인 입장이라고 할까요, 이런 세 가지를 모두 종합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이 새 단계에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던 거예요. 그리고 셋을 종합하다 보면 그게 그냥 셋을 기계적으로 합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가지 새로운 쟁점들이 떠오르게 마련이죠. 느닷없이 떠오른 문제는 아니지만 가령 생태계 문제에 대해서도 새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고, 남녀간 성차별 문제도 새로운 각도에서 좀더 진지하게 본격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것이고, 그렇게 상황이 변했다는 거예요. 그전에도 그런 문제가 없었던 것이 아니지만 6월항쟁을 계기로 이런 문제를 우리가 실제로 결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고, 또는 바꿔서 말하면 결합하지 않고 종전의 단순논리를 고집해서는 현실적으로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는 단계에 왔다는 겁니다. 가령 전 같으면 단순화된 민족해방론에 몰두하더라도 그게 조국통일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지만 군사독재 타도라는 당장의 대의에 효과적으로 기여하는 역할을 했단 말이에요. 그런 역사적인 의의가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것이 안 통하는 시대가 됐고, 다른 것이 요구됨과 동시에 또 다른 것을 실현할 수 있는 공간이 열렸던 겁니다.
 

민족문학의 새 단계는 6월항쟁 이후부터

김영희 새 단계 말씀을 하셨는데, 전반적으로 공감은 합니다만 좀더 좁게 문학적 단계설정이라는 점에서 보면, 글쎄요, 지금 돌이켜보면 사회운동도 그렇고 문학 분야도 그렇고 87년에서 대략 90년 무렵까지는 실제 상황이 달라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전의 활동들이 확대된 공간에서 한껏 꽃을 피웠다고나 할까요? 그런 와중에 편향성도 노출되었구요. 그러다가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무언가 변화의 필요성이 폭넓게 감지되면서, 민족문학의 위기론 등이 등장하는데, 이런 점들을 보아도 적어도 문학현상으로는 역시 80년대, 90년대 식으로 나누는 게 실감에 더 다가오기도 하거든요. 특히 선생님께서 민족문학의 새 단계를 설정하실 때는 물론 창작만이 아니라 독서기회의 확대 등 종합적인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긴 했지만, 민족문학이 새로운 활력을 얻고 있다는 판단 내지 전망도 중요한 요건이었는데요, 이 점에 대해서 지금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요?

백낙청 87년 이후를 새 단계로 보는 데는 우선 최원식 교수부터가-

백영서 모호하다고 했던가요?

임규찬 아니, 그냥 새 국면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고 했죠.

백낙청 새 국면으로 보지 굳이 새 단계라고 하겠느냐고 비판한 적이 있죠. 사실 단계냐 국면이냐 하는 거야 정의하기 나름이지만, 중요한 것은 6월항쟁 이후의 새로움을 어떤 시각에서 보며 얼마나 중시하느냐는 거지요. 나는 어쨌든 6월항쟁을 계기로 우리 역사가 크게 바뀌면서 분명하게 새로운 가능성이 주어지고, 또 새로운 문학으로 탈바꿈할 필요가 생겼다, 이런 측면에서 단순히 국면이라기보다 단계로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아직까지는 그렇게 괄목할 만한 문학적 성과를 낸 것은 아니지만, 새로이 열리는 단계가 장차 그렇게 되리라는 희망과 믿음을 가지고 그런 논리를 전개했던 것인데, 과연 성과 자체가 거기에 부응했느냐? 나는 그건 반반이라고 봐요. 적어도 민족문학의 작품적 성과를 일부에서 말하는 ‘민족문학 진영’ 작가들의 작품으로 국한하지 않고 민족문학의 개념을 편협하게 잡지 않는다면 87년까지의 성과에 비해 그후에 훨씬 풍성해진 면이 분명히 있고요.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성과가 있다 할지라도 부정적인 양상이 너무 많으니까 전체적으로 잘됐다고 볼 수 있느냐 하는 반론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부정적인 양상이 많아진 것도 새로운 증상이니까 그것이 새 단계의 성과가 흡족하지 않다는 결론이 될 수는 있을지 몰라도, 단계가 새로워졌으니까 우리가 뭔가 새롭게 나아가야겠다는 주장 자체를 뒤엎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분명히 새 단계가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새로운 단계로 보지 않고 단순한 국면전환쯤으로 보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성과가 미흡한 면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전환점을 87년이 아니라 90년으로 잡아도 어쨌든 90년대는 크게 달라진 시대임이 틀림없어요. 세계적으로는 1985년에 소련에서 고르바초프가 집권하면서 그때부터 동서냉전체제가 허물어지기 시작하잖아요? 그 와중에 한국에서 6월항쟁이 일어나고, 6월항쟁이 일어나 제6공화국이 탄생해서 조금 지나 동서냉전이 종식되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이 통일되고 사회주의권이 무너지고 하는 것이 91년까지 급격하게 진행되지요. 그러니까 그런 과정이 완결되고 난 이후 무언가 크게 달라졌다는 점은 대체로 납득할 수 있을 거예요. 그렇다면 90년을 택하는 것이 외우기도 좋고 더 낫지 않겠느냐 한다면 거기에 대해서 머리 싸매고 반대할 이유까지는 없어요.(웃음) 다만 90년으로 잡으면 흔히 사회주의권이 몰락하면서 일부 거기에 지나친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이 절망하고 방황하는 풍조라든가, 세계화의 바람을 타고 퍼진 경박한 풍조, 이런 것이 새 단계의 주조인 것처럼 생각할 수 있는데, 나는 그거야말로 편벽된 생각이라는 거예요. 6월항쟁이라는 것 자체도 세계사의 큰 흐름 속에서 가능했던 거지만 그래도 우리가 주체적으로 이런 걸 이룩함으로써 뭔가 새롭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고 또 그래야만 하는 필요성에 당했기 때문에 이때부터가 새로운 것이다, 그리고 이후 세계사적인 변화에 우리가 당장에는 충분히 적응하고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잘못된 풍조가 두드러지게 되기도 했지만 이게 새 단계의 주조로 계속되지는 않는다고 보고 싶은 거예요. 당장에 IMF사태도 우리가 대응하기에 따라서는 90년대 초·중반의 일시적인 풍조를 바로잡고 좀더 제대로 된 성취로 나아가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가령 4·19부터 6월항쟁까지를 하나의 단계로 본다면 30년 가까운 세월 아니에요? 그렇다면 87년부터 20, 30년을 또 하나의 단계로 잡아보자고요. 물론 나는 30년씩이나 가기 전에 분단체제극복의 또다른 획기적 사건이 일어나서 또 하나의 새 단계가 열리기를 바라지만요. 아무튼 20, 30년을 잡아보면, 새 단계 초기에는 좀 엉기는 것 같았는데 그후에 보니까 역시 뭐가 나오더라, 이렇게 될 수도 있는 거니까 미리부터 너무 낙담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웃음)

백영서 시대구분을 전공하는 역사학도의 입장에서는 87년설을 지지하겠습니다.(웃음)
 

리얼리즘의 눈과 『외딴 방』론

김영희 역사학자가 그렇다면야…… 아무튼 87년을 기점으로 잡으시는 취지가 한편으로는 민족문학적 발상의 연속성을 주장하되, 동시에 민족문학진영 식의 사고방식은 벗어나자는 것이겠군요. 그리고 그럴 때 상당히 풍성한 성과를 말할 수도 있다고 하셨는데, 선생님께서 길게 다루시기도 했고 또 그에 대해 이런저런 논란도 많았던 것이 신경숙(申京淑)씨 작품에 대한 평가였습니다. 작품을 논하는 가운데 리얼리즘의 갱신이라는 문제의식을 실제비평으로 수행하신 셈인데, 이런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편에서도 많이들 갖는 의문은, 그전에 선생님이 말씀하신 민중적 시각, 혹은 가장 강력한 표현으로는 ‘각성한 노동자의 눈’이라는 기준에서 볼 때 신경숙씨 작품이나 그에 대한 선생님의 논의가 과연 어떤가 하는 점 아닐까요?

백낙청 실제로 어떻다고 봐요?

김영희 제 경우는…… 글쎄, 선생님께서 93년에 쓰신 글에서도 신경숙씨의 단편에 대해서 상당히 자상한 분석을 하셨지만 그때는 단편이기도 하고 다루어지는 주제가……
백낙청 그때도 물의는 많았어요.(웃음) 그게 바로 진영 개념과 관련된 것인데, 말하자면 분명히 우리 진영에 속하지 않는 작가에 대해서 이렇게 관심과 애정을 보인다는 것은 섭섭하고도 부당하다는 정서가 강했지요.

김영희 그랬죠.

백낙청 솔직히 말해 우리가 그런 식의 진영 개념을 탈피할 필요가 절실하다고 느껴서 의도적으로 신경숙이라든가 김기택(金基澤) 같은 사람을 부각시킨 면도 있었죠. 하지만 지금 거론하려는 것은 장편 『외딴 방』 얘기죠?

김영희 예. 선생님이 따옴표를 쳐서 말씀하시긴 했지만 ‘노동문학’으로서도 상당한 성과라는 평가를 하셨는데…… 그러면서 미흡한 대목 중 하나로 “다들 너무도 온순하고 착한 모습”으로 그려진다는 점을 『외딴 방』론(「『외딴 방』이 묻는 것과 이룬 것」, 『창작과비평』 1997 가을호-편집자) 끝부분에 덧붙여놓기는 하셨지요. 그런데, 저는 이 점이 노동자의 작업현장이나 생활현장을 여실하게 담아내기에도 그렇고, 작가 본인이 핵심적인 문제로 삼은, 그 시절 자신과의 대면이라는 문제에서도 미흡한 것 이상의 중대한 문제를 낳는다는 생각입니다. 사실, 작품을 읽을 때는 노동조합에서 활동하는 인물이나 산업학교에서 만난 노동자들이 다채롭게 느껴지는데,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간 후에는 차이들이 상당히 흐려진다는 인상도 있거든요. 많은 인물들이 크게는 한 가지 인간형, 신경숙적인 색깔이 덧칠된 인물들 같단 말예요. 이런 문제점이 최근 작품들에서는 증폭된다고 할까요? 가령 사람이 아닌 귀신들까지도 똑같아져버리는 식으로 말예요. 그런 점에서도 이런 경향이 이 작품에서나 신경숙 문학세계에서나 심각한 결함으로 적시되어야 하지 싶은데, 지엽적인 문제를 지적했나요?(웃음)

백낙청 아니, 지엽 문제는 아니지요. 신경숙의 다른 작품과 『외딴 방』을 물론 완전히 떼어서 생각할 수는 없지만 『외딴 방』은 소재 면에서도 별다른 데가 있고 특히 예술적 성취를 따질 때는 별개로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언급한 내 글은 어디까지나 신경숙의 『외딴 방』론이고 『외딴 방』에 대해서 높은 평가를 한 것은 틀림이 없는데, 『외딴 방』을 높이 평가했으니까 다른 작품들도 따라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고 읽는 이도 있겠지만-

김영희 저는-

백낙청 아니, 김선생이 그런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읽는 사람도 일부 있을 것이고, 과찬했다는 말도 그래서 나올 듯싶은데 비평은 칭찬하냐 비판하냐도 중요하지만 칭찬과 비판의 간을 맞추는 게 생명이니까 정당한 찬사라도 ‘과찬’에 이르렀다면 비평을 잘하지 못한 거지요. 또 하나의 독법은 『외딴 방』에 대한 높은 평가야말로 『외딴 방』만 못한 신경숙 자신의 작품에 대한 준열한 비판이라고 읽는 길이겠죠. 그런데 『외딴 방』 자체에 대해서 지금 김선생이 지적한 결함은 물론 나도 지적한 것인데 그것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해야 하지 않느냐는 얘기라면, 글쎄 그것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드네요.(웃음)

김영희 단순한 비중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비중이 그렇게 된 데는 민중적인 시각이라든가 각성한 노동자의 눈을 거론할 때의 문제의식이 약화된 점과 관련되는 것이 아닌가-

백낙청 글쎄, 그게 내 글에서 충분히 살아나지 않았다는 비판이면 모르지만 그런 시각이 실종됐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외딴 방』의 ‘나’라는 화자가 대체로 신경숙 개인과 사실상으로도 부합되는 면이 많고, 또 생각하는 바나 그런 것도 저자의 의견을 많이 반영한다고 보는데, 『외딴 방』 자체가 이루어놓은 성과는 ‘나’라는 개인이 생각하는 것이라든가 주장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라는 뜻에서 평가했고 또 비판도 한 거거든요. 소설에 나오는 ‘나’라는 화자보다 더 각성한 노동자의 눈으로 볼 때 이 작품을 어떻게 읽을 수 있는가라는 발상과 통하는 얘기라고 봐요. 우스개로 한마디 하자면, 이 글이 나오고 나서 하도 말들이 많기에 근래에 다시 한번 읽어봤어요. 읽어봤는데-

백영서 역시 잘 썼더라-(웃음)

백낙청 잘 썼더라고 하면 좀 뭐하겠지만, 어쨌든 웬만큼은 썼다는 생각이 들더군요.(웃음)

김영희 제가 선생님의 『외딴 방』론에 토를 달기는 했지만, 저로서는 리얼리즘이라는 말을 쓰지 않으면서도 리얼리즘을 이론적으로 점검하는 작업도 겸한 그런 작품론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리얼리즘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도 나올 수 있는데, 좀 단순화해서 전하자면 이 작품은 모더니즘에 기반한 성과인데 그것을 무리하게 리얼리즘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제기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요즈음은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부터가 혼란스러워지는 느낌인데요, 리얼리즘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서 선생님께서도 리얼리즘의 갱신이니 전면적 쇄신을 말씀하신만큼 아예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는데(웃음) 현재의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요?

백낙청 글쎄, 여러 사람들이 열심히-

백영서 싸우고 있습니다.(웃음)

백낙청 열심히 하고 있는데 내가 이런 말을 하면 건방지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도 환갑을 맞았으니까 좀 티를 내도 되겠지.(웃음) 솔직히 말해서 전반적으로 준비들이 부족한 상태에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특히 모더니즘을 옹호한다는 사람들 쪽에서-그러니까 기왕에 리얼리즘론을 편협하게 펼치던 사람들이 요즘 기가 죽었다고 할까 기세가 꺾인 것에 너무 쉽게 편승해서 모더니즘을 대안으로 내세우는데, 이미 모더니즘의 성과에 대해서 가령 나부터도 리얼리즘을 얘기하는 가운데 이미 인정했던 그런 것에서 크게 벗어나는 얘기는 아닌 것 같아요. 그런데도 새로운 이야기인 것처럼 하다 보면 개념의 혼란만 가중되고…… 물론 모더니즘과 근대성의 문제를 더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고, 흔히 모더니스트로 분류되는 국내외 작가들의 성과를 좀더 적극적으로 평가해보려는 노력은 해볼 만하겠지요.

임규찬 저는 선생님의 『외딴 방』론이 재미있었습니다. 그보다는 우리 시대에 필요한 비평문의 한 모범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선생님도 방금 젊은 사람들의 논쟁을 잠깐 언급하셨는데, 사실 작품에 대한 분석부터가 실력이 달리니까 이론 부분에서도 많은 문제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입니다. 개별작품론에서도 이론적 깊이가 있고, 그만큼의 이론적 실감을 주는 글이야말로 젊은 평론가들을 위한 보이지 않는 교육이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루카치처럼 굵직굵직한 작품론을 써서 단행본으로 엮는다면 그동안 단계단계를 짚어 써주신 글보다 문학 자체로 후배들을 위해 훨씬 좋은 공부법을 제시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도 해보면서, 이를 실현시킬 계획은 혹시 없는지 궁금합니다.

백영서 10년만 더 젊었다면-(웃음)

백낙청 아니, ‘10년만 더 젊었다면’이 아니라, ‘내 비록 청춘은 아니나’ 앞으로 그러도록 노력하겠습니다.(웃음) 사실 지난번 글의 경우 그 자체의 내용보다 다른 좋은 작가와 작품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딱 그것만 쓴 것이 좀 그릇된 인상을 줄 우려도 있었다고 봐요. 비평도 시나 소설과 마찬가지로 하는 말, 안하는 말이 다 중요한 건데 안하는 말에 의도가 실리지 않은 경우, 다시 말해 순전히 비평가의 게으름이나 능력부족으로 제때 못 읽었거나 쓰지를 못해서 잘못된 인상을 남긴다는 것은 곤란한 일이고 그런 것은 앞으로 힘닿는 데까지 시정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지요. 다만 지금 임선생 얘기의 말꼬리를 잡는 것은 아니지만 흔히 퍼진 생각이니까 한마디 하고 싶은데, 내가 이론비평을 주로 하고 실제비평이 부족하다는 지적 말이에요. 비평작업이 도대체 부족하다고 나무라면 유구무언이지만 작품 논의에 이론적인 관심이 투영됐다거나 또는 이론도 아닌 정세분석 같은 것이 끼어들어갔다고 해서 그것을 실제비평이 아닌 이론비평이라고 분류해버리는 건 잘못된 거지요. 나 개인으로 억울하다 안하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이론비평, 실제비평, 이렇게 나누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리면 곤란한 일이라고 봐요. 이론적인 관심이 전혀 배제된 작품론이라든가 또는 구체적인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평가가 어떤 식으로든 전제되지 않은 이론적 작업이라는 것은 최고 수준의 비평에 미달하는 것이거든요. 또 하나, 기왕에 내 작업을 잘 봐달라는 부탁을 하는 참이니(웃음) 분야를 서양문학으로 넓혀보면 임규찬씨가 주문하는 작품론의 구색을 띤 글이 사실은 나도 몇 개는 더 있어요. 『부활』론이나 『테스』론, 『폭풍의 언덕』론, 로런스 작품론도 몇 개 있는데, 그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독자들이 판단할 문제지만 나로서는 이런 글들도 우리 한국문학의 현장에서 이루어진 비평이라는 생각으로 쓴 것은 사실이에요.
 

외국문학을 읽는 방법-공감과 적개심의 절묘한 배합

김영희 외국문학 이야기로 자연스레 연결이 된 셈인데요, 선생님께서는 외국문학에 관한 논의도 민족문학론의 일환으로 전개해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외국문학에 대한 주체적인 시각을 강조하셨는데, 관련 강연들에서는 이를 구체적으로 ‘공감과 적개심의 절묘한 배합’이라든가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말로 풀기도 하셨지요. 그런데 애당초 적개심 운운하는 데 공감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특히 탈식민주의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근자에 와서는 거꾸로 선생님이 공감에 치우친 것이 아니냐, 결국 서양 정전(正典) 모시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냐 하는 비판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사실 말꼬리를 잡자면 ‘이이제이’라는 표현은 그렇게 볼 수도 있겠어요. 서양의 지배적인 추세에 대해서는 비판을 하되, 서양 고전에 대해서는 그런 추세를 비판하거나 제동을 거는 측면들을 읽어낸다는 이야기니까 역시 고전작품에 대해서는 적개심보다는 공감에 치중하는 것이다라고 말예요.

백낙청 그렇겠죠. ‘적개심과 공감의 절묘한 배합’이라는 말이나 ‘이이제이’라는 말이나 그게 그건데, ‘이이제이’라는 말은 약간 우스개를 섞어서 한 말이지요. 요즘은 저쪽에서 하도 우리를 오랑캐 취급을 하니까 일부러 중화주의적(中華主義的) 표현을 한번 써본 거고, 실제 방법은 그야말로 적개심과 공감의 조화를 구하는 겁니다. 그걸 ‘절묘한’ 배합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처방을 미리 정해줄 수 없고 각자가 실행의 과정에서 그때그때 연마해서 찾아내고 달성하는 길밖에 없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그 기본방향이 대충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김선생의 질문 속에 이미 나와버린 것 같아요.(웃음) 원래는 우리 학계가 서양의 고전을 너무 맹목적으로 숭상하는 경향이라 내가 ‘적개심’이라는 말을 써놓고 속으로 좀 우쭐하기까지 했는데,(웃음) 요즘은 탈식민주의다 뭐다 해서 소위 저항적인 독서, 또는 저항하는 독자, 이런 걸 내세우는 게 또다른 유행이 되었지요. 이때 저항이라는 것이 아마 내가 말한 적개심과 통할 텐데, 내 생각에 문제는 첫째 대상 작품에 대한 적개심이 지나치고 공감이 부족하다는 것이고, 둘째로 그런데도 정작 서양학계에서 유행하는 비평담론에 대해서는 ‘resistant reading’은커녕 너무도 고분고분한 게 아니냐는 거예요.

백영서 시간이 많이 됐습니다만 조금만 더 여쭤보겠습니다. 방금 말씀하신 공감과 적개심의 조화라든가 또는 오늘 대담 중에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라든가 하는 표현들, 사실 이런 것들이 선생님 글에 굉장히 많죠. 사실은 선생님 글이 어렵다고들 많이 얘기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에 기계적으로 대립되는 두 가지를 조화시키는 선생님의 이런 사유방식에 있을 거예요. 예를 들어서 한 문학평론가는 선생님의 글을 얘기하면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허허실실의 논리와 선문답을 연상시키는 수사법이 나 같은 범부에게는 이해가 잘 안된다고요. 선생님의 이런 표현은 제가 보기에는 서양의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영향도 있겠지만, 더 크게는 동양의 불교라든가 특히 유교 같은 것, 특히 선생님에게는 불교 영향이 큰 것 같습니다만. 그러다가 최근에는 지혜의 시대까지 말씀하시잖아요. 이것에 대해 때로는 과학적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독특한 사유방식에 대하여

백낙청 글쎄요. 나는 불교 경전이든 하이데거든 많이 읽은 사람은 못 되지만 그 양쪽에서 다 배웠고, 특별히 즐겁게 배웠다고 말할 수는 있지요. 하지만 방금 지적한 사고방식이나 어법은, 물론 불교의 영향도 있고 하이데거의 영향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문학 자체에서 오는 거라고 봐요. 내가 좋아하는 김수영 시 중에 「말」이라는 시가 있지요. 그중에 “고지식한 것을 제일 싫어하는 말”이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김수영 시인이 시의 본질에 대해 하고자 했던 발언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는가 합니다. 아무튼 문학의 언어는 되도록 친근한 언어여야만 하지만 고지식한 언어는 안된다는 게 내 생각이에요. 그래서 고지식한 것을 피하려다 보니까 선문답이다 뭐다 하는 소리를 듣는 것이 있고, 또 하나는 고지식한 것을 피하는 데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아직 친근해지지는 못했기 때문에 그런 비판을 받아 마땅한 면도 있다고 봐요. 그런데 이것도 가령 어느 대목을 놓고 이게 정말 나쁜 의미의 선문답인지 아니면 그런대로 중요한 얘기를 고지식하지 않게 해낸 노력의 산물인지 그야말로 물건을 놓고 따져봐야겠죠. 그런 구체적인 비판이라면 내가 늘 학수고대하고 있는데 사실 좀 아쉬운 것은 그런 식의 구체적인 비판은 별로 없어요. 그냥 너무 어렵다, 못 알아듣겠다, 나 같은 범부는 어떻다고들 하는데 그게 정말 겸손의 언사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임규찬 사실 선생님만큼 초기에 만들어놓은 이론적 틀이 견고하게 지속된 경우도 보기 드물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다들 하는 이야기지만, 지금까지 글을 보면 사실 큰 변화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거대한 뿌리에 근거하여 차츰차츰 심화 확산되고 있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견고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뿌리에 절묘한 조화가 연출되는 장면이 있는데, 바로 하이데거라든가 불교라든가 하는 동서양의 이질적 체계가 하나로 연결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과학적 인식이나 지식 등과 흔히 동양적 사유라고 말하는 구도(求道) 차원의 사유가 함께 작동하고 있어 여기에 일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또한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는 거죠. 이를테면 학적으로 분석해 들어갈 때 양자의 연관관계가 잘 안 보인다, 비약이 있다, 신비스럽다는 비판이 그런 예일 겁니다. 선생님이 처음부터 주창하신바, 일종의 서양의 형이상학을 넘어서겠다는 점하고도 연관이 되겠지만, 그런 주장에 비교적 동감하는 사람들도 선생님의 글을 읽어내고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데서는 뭔가 답답하다, 그럴듯하기는 한데 내 것으로 빨리 오지 않는다는 소감을 많이 피력합니다. 아까도 잠깐 얘기가 나왔는데 보통 사람들의 사유방법에 문제가 있어서 선생님 글을 수용하는 것이 힘든 것인지, 아니면 다른 측면 때문에, 이를테면 아까 선생님의 표현대로 논리전개가 치밀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백낙청 보통사람들이라고 하는데……(웃음) 나는 내가 말하는 내용이나 결론들이 대체로 보통사람들의 경험과 상식에 부합되어왔다고 봐요. 분단체제론에 따른 정세분석도 그렇고 한국문학이나 서양문학의 작품분석도 그렇고…… 그런데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이나 표현이 보통사람들을 친근하게 끌어들이는 그런 경지에는 아직 못 갔다는 걸 자인합니다. 하지만 요즘은 환갑이 청춘이라고 하니 좀더 지켜봐주시고……(웃음) 아무튼 나더러 비과학적이라고 하는 사람들보다는 내가 상식적인 얘기를 더 많이 해오지 않았는가 하는 자부심은 있어요. 언젠가 우리나라 사회과학도들에 대해서 좀 삐딱한 소리를 한 적이 있는데, 우리네 사회과학에 두 가지 문제가 있어요. 하나는 사회가 무엇인지를 묻지 않고, 또 하나는 과학이 뭐냐고 물을 생각을 안한다는 거지요.(웃음) 물론 사회과학도가 다 그렇기야 하겠습니까만, 아무튼 사회과학도든 아니든 도대체 과학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한두 번 묻고 끝낼 문제가 아니라 끊임없이 물어봐야지요. 특히 과학적이라고 인정된 결론이 우리 일상적인 경험이라든가 또는 동양적인 사유라든가 이런 것과 어긋나는 일이 많다면 그게 그렇게 어긋나도 되는 건지 한번 반성해봐야 하지 않겠어요? 사실 나는 과학에 대한 존중심이 누구 못지않다고 자부하는데, 또 사회과학의 정당한 이론을 포함해서 그런 과학에 대한 존중심을 시대의 풍조가 변하는 가운데서도 비교적 굳건히 견지해왔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된 것은 가령 사회과학 분야에서 얘기한다면 내가 과학에 접근하는 방식이나 과학적인 지식을 수용한 경로가 좀 달랐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가령 맑스에 대해서 내가 그 추종자로 자처한 적은 한번도 없지만 그의 사회이론에 대해서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아는 것이 너무나도 한정되어 있지만 어느정도 공부를 해서 얼마만큼의 존중심을 갖게 된 이후로는 나는 한번도 그런 기본적인 존중심을 버려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된 원인이, 내가 처음부터 사회과학도로 출발을 했다든가 또는 무슨 혁명운동에 투신해서 맑스·레닌주의를 학습하거나 한 것이 아니라, 언뜻 보면 맑스와는 전혀 상관없는 성격의 사상가나 작가들, 가령 D. H. 로런스를 공부하거나 맑스보다 늦게 만난 저자이기는 하지만 하이데거 같은 사상가에 깊이 공감하면서 맑스를 읽었고 내 나름대로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승복할 것에 승복하게 되었기 때문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맑스의 사회분석 중 많은 것이 내게는 전혀 다른 사상의 검증을 거친 과학이며 과학적인 분석이라고 말할 수 있고, 또 그렇기 때문에 80년대에 교조적인 맑시스트가 아니라고 누군가가 다그칠 때나 90년대에 들어와서 또 누가 달리 뭐란다고 해서 그러한 과학에 대한 신념을 바꿀 까닭이 없었지요. 더군다나 아까도 말했지만 이 IMF시대를 만나 자본주의가 뭔지 우리가 정말 골똘히 생각해봐야 한다고 할 때, 맑스만 가지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지만 맑스 공부도 이제 새로 해야 한다고 봐요.

백영서 이런 기회 아니면 듣기 어려운 얘기도 많이 듣고 있어 재밌네요. 한 가지만 더 여쭤보겠습니다. 선생님이 그런 독특한 경로를 거쳐서 사유방식을 가지고 계신데 그러다 보니까 가끔 독자들에게 다원방정식적인 발상을 요구한다든가 또는 선생님 스스로도 공부하시겠다는 뜻을 포함해서 공부길을 강조하시곤 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위압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 않을까요? 선생님이 사회과학도들에게 공부를 더 하라고 지적하신 경우도 있으니까 그런 점에 대해서 한말씀 해주시죠.

백낙청 글쎄요. 그게 위압적으로 들렸다면 부덕의 소치겠죠.(웃음) 하지만 공부에 뜻을 둔 사람이 누가 목에 칼을 들이대고 위압하는 것도 아닌데 아무개 말이 너무 위압적이라서 공부가 안된다는 것도 우스운 이야기 아니겠어요?

백영서 선생님의 사유방식에 깔려 있는 것에 대해서 어렵다는 말만 했습니다만, 또 하나 저로서 간취할 수 있는 것은 낙관주의가 아닌가 싶어요. 제가 70년대 선생님의 글을 읽었던 것 중에 아직도 기억나는 구절은 그 당시 한참 어려운 민중운동을 할 때 이 대목을 얘기하면서 ‘이미 이기고 있다는 은근한 기쁨’이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그게 아주 감동적이어서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려운 싸움에서도, 누구나 보면 다 지는 것 같아도 그 안에 이미 깔려 있는 은근한 기쁨을 말씀하신 적도 있고, 그외에도 요즘 정세변화를 얘기하시면서도 그게 지배층 내부의 변화인데도 늘 민중운동의 저력이 어떻게 쌓이면서 이런 것을 낳았는지 말씀하신단 말이에요. 그런 것을 보면 낙관적인 것을 늘 얘기하시는데 그것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요?

백낙청 그게 무슨 글이었나? 「문학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이었나?

백영서 글쎄요, 그 글이었던 것도 같고…… 아니면 「역사적 인간과 시적 인간」이었나요?

백낙청 맞아, 그걸 거야. 아무튼 낙관적이라는 말을 했는데, 흔히 혁명적 낙관주의니 그런 말을 쓰잖아요? 그건 말할 수 없이 암담한 상태에 처해서도 역사의 발전법칙에 의해서 좀더 좋은 날이 반드시 온다는, 장래에 대한 예보성 관측을 전제로 한 얘기인데 그런 식의 낙관주의를 나는 인정하지 않는 편이에요. 역사의 행방에 대해서 일기예보하듯이 이게 잘될 것인가, 못 될 것인가 따지는 것도 그렇고, 꼭 잘될 거니까 내 할 일을 한다는 것도 그다지 존경스러운 태도는 아니지요. 그런 의미의 낙관주의는 아니고 그런데도 그때그때 상황이 꽤나 암담할 때도 뭔가 이렇게만 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과 더불어, 단순한 희망이 아니고 신념 같은 것이 늘상 있었던 것은 사실이죠. 글쎄, 이걸 뭐라고 설명할까? 내가 나더러 겸손하다고 하면 겸손이 안되겠지?(웃음) 굳이 말하자면 이런 거예요. 어떤 싯점에서 어떤 희망이나 결의가 내 마음속에 떠올랐을 때, 이런 것이 내게 떠올랐을 때야 나한테만 떠올랐겠느냐, 내가 하느님의 계시를 받은 것도 아니고, 이런 마음의 움직임이 내게 있을 때는 사람 누구에게나 조만간에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뭔가 지금과는 달라질 것이 아니겠느냐, 뭐 그런 생각이죠. 물론 인류역사를 보면 그런 생각이 계속 짓밟히기만 하고 전혀 성과를 못 낸 시대도 많이 있었지만, 다행히 우리가 살아온 몇십 년의 세월은 험난한 일도 많았고 좌절도 많았고 아직도 그런 것투성이지만 세상이 좀더 인간의 본마음에 맞게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을 뒷받침해주는 좋은 변화도 실제로 겪을 수 있었지요.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낙관을 더 말한다면 이것이 인류의 이런저런 시대 중에서 우리가 우연히 좋은 세월을 좀 보았다는 것이 아니고, 지금이 천하대란의 시대이지만 그 한가운데에서 무언가 새로운 기운이 내 마음에 감지되듯이 우리나라의 동포들 마음에도 일어나고 있을 것이고, 또 우리 한반도에서 감지되는 것이 인류사회 전체 속에서 태동하고 있는 것이리라고, 이렇게 다시 한번 낙관을 품어봐도 괜찮을 것 같아요.

백영서 그러면 이쯤 할까요? 사실은 저희가 준비한 것 중에 아예 건드리지 못한 분야도 있습니다만, 원래 이번 회화는 중간에 뜸을 좀 들였다가 한 차례 더 하기로 계획했으니 오늘 미진한 내용은 새해 들어서 다시 다루기로 하지요.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후속 회화(1998년 1월 7일)

백낙청 오늘은 내가 이야기를 시작하지요. 지난번 우리가 모여서 얘기를 나눈 이래 해가 바뀌고 일주일 남짓 지났군요.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저번에 이야기를 마치면서 얼마 뒤에 후속토론을 하자고 했는데요. 나는 이것도 하나의 새로운 형식적 실험이라고 생각하는데, 다만 저번만 해도 얘기를 너무 많이 해서 정리하면서 줄여야 할 게 많은데, 오늘 또 너무 많이 얘기해놓으면 편집에서 주체를 못할 테니까 저번 회화가 본론이라고 치고 오늘은 보충논의 정도로 하는 걸로 합시다. 그사이에 지난번 모임을 주도한 백영서 교수가 불가피한 일정 때문에 외국에 가버리고 우리끼리 모였는데 어떻게 보면 더 오붓하게 말할 기회도 됐고, 또 백영서씨 없는 데서 그 친구 험담도 좀 해보고 자유롭게 얘기를 하면 좋겠어요.(웃음)

임규찬 민족문학론과 연관해서 마저 몇 가지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90년대에 발표된 선생님의 글을 유심히 보면서, 그전 시기까지의 글들의 분위기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80년대까지는 민족문학론 말고 그와 일종의 형제관계라고 할 만한 시민문학론이라든가 민중문학론, 리얼리즘론 혹은 제3세계 문학론 등 상호보완된 이론들이 서로를 추동해왔습니다. 그래서 어떤 글에서는 민중문학과 민족문학이 합치되는 그런 단계까지도 설정하여 민중·민족문학이라는 용어도 쓰셨던 것 같은데요. 그런데 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약간의 변화가 생긴 것 같습니다. 우선 민족문학론만 드높이 치솟는 형태이고, 대신 그 옆에 분단체제론이라든가 분단극복론이라든가, 언뜻 문학론과는 다소 벗어난 사회과학 이론체계가 훨씬 강화된 양상입니다. 이전 시대보다 문학론간의 상호지원하는 힘들이 부족한 듯한 모습이어선지 민족문학론만이 아주 외롭게 고군분투한다는 그런 느낌을 받았거든요.(웃음)
 

민족문학론과 분단체제론은 보완관계

백낙청 90년대에 문학평론을 덜 써서 그런 게 아닐까?(웃음) 민족문학론과 민중문학론의 상호보완관계는 80년대뿐 아니라 70년대부터 지금까지 일관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가령 내가 85년에 「민중·민족문학의 새 단계」라는 글을 썼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최원식 교수가 내 평론집의 서평을 쓰면서 ‘민중·민족문학’의 개념이 모호하다고 했던가? 어쨌든 그 용어에 대해서 비판을 했는데 나는 민족문학과 별도의 개념으로서 민중·민족문학이라는 개념을 내세웠던 것은 아니에요. 우리 시대의 민족문학론이라는 것이 원래부터 민중적인 민족문학론인데 80년대 들어 평단 일각에서 민중적 민족문학론은 따로 있고 나의 문학론은 소시민적인 민족문학론이라거나 아니면 민족문학의 시대는 가고 민중문학을 해야 한다는 등 그런 말들이 있었기 때문에, 바로 민중적인 민족문학 또는 ‘민중문학 및 민족문학’이 과연 새 단계에 진입했느냐, 아직 그렇지는 않다라는 논지를 펴면서 그걸 줄여서 ‘민중·민족문학’이라고 표현했던 거죠. 그러다가 뒤로 가면서, 그러니까 80년대 후반 이후로는 그럴 필요를 덜 느꼈던 것이, 일단 여러 정파들이 민족문학이라는 용어만은 공유하면서 논쟁을 벌였고, 또 조금 더 지나다 보니 자기네들이 진짜진짜 민중적 민족문학론이라고 주장하던 사람들은 오히려 잠잠해지고 70년대 이래의 민족문학론이 기본적으로는 민중적인 민족문학론이라는 것이 어느정도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거추장스럽게 중점을 찍은 용어가 불필요해진 것이지 그간에 큰 변화가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사실은 내 평론 중에서, 『민족문학의 새 단계』라는 평론집을 낸 직후 「민족문학론과 리얼리즘론」이라는 꽤 긴 글이 있는데 내 나름으로는 87년 6월항쟁도 거치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커다란 지정학적 변화도 거친 단계에서 한번 민족문학론 내지 민중문학론과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왕성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론을 포함한 리얼리즘론 전반과의 관계를 총점검하려는 글이었지요. 임규찬씨 표현을 빌리자면 민족문학론과 리얼리즘론이 ‘상호지원’하는, 거기다 내 나름의 표현을 덧붙이면 일정하게 ‘상호해체’하기도 하는 90년대적 논의를 열고자 하는 욕심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글에 대해서는 이후에 별로 논의가 없었던 것 같아요. 내 기억에는 조만영(趙萬英)씨가 좀 진지한 논의를 하다가 뒷소식이 끊긴 게 거의 전부예요.

90년대에 들어와서 분단체제론에 힘을 쏟으면서 민족문학론을 뒷받침해주던, 또는 옆에서 받쳐주던 논의들이 적어지지 않았는가라고 물었는데, 나는 분단체제론이야말로 민족문학론을 뒷받쳐주는 논의이고,(웃음) 또 역으로 분단체제론이 민족문학론에 의해서 뒷받침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내 개인사적 배경에서 민족문학론을 통해 분단문제에 대한 관심이 구체화되고 분단모순이라든가 분단체제의 개념이 나오게 됐다는 뜻만이 아니라, 분단체제론 자체가 문학의 본성에 충실한 발상이지요. 사회과학도들이 이걸 무시하면서 그건 문학적인 발상이라고 말하는 그런 의미-즉 과학성이 결여됐다는 의미-의 문학적 발상이 아니라, 사회구성체니 체제니 이런 것들이 아직도 많은 사회과학자들이 생각하듯이 저 바깥에 무슨 물건처럼 덩그라니 어떤 사회적인 실체가 있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탈구조주의에서 말하는 ‘텍스트’의 면모를 지닌다는 점, 분단체제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에서 말하는 모든 체제라는 것도 그런 비유적인 표현의 측면이 있다는 쪽으로 발상의 전환을 요구한다는 거죠. 또 하나 이게 문학적인 발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분단체제가 나쁜 체제니까 극복하자고 할 때에도 그것이 나를 빼놓은 다른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체제문제가 아니고 바로 나 자신도 그 체제 속에 얽혀들어서 그 체제에 의해 왜곡된 삶을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분단체제극복은 나 자신의 왜곡된 삶을 스스로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겸해야 한다는 주장이거든요. 문학에서 시를 쓰든 소설을 쓰든 항상 자기 문제를 완전히 버리고 써가지고는, 자기라는 것을 제외하고 글을 쓰면 그게 재미가 없잖아요? 자기 얘기를 반드시 소재로 쓰라는 게 아니고 뭘 하든지간에 자기 삶을 반조하는 행위가 포함된 언술이 되어야 하는 건데, 통상적인 과학에서는 자기를 빼놓고 맞냐 틀리냐를 가리려 들거든요. 물론 그런 소박한 태도를 비판하는 사회과학도도 많지만 정작 우리의 분단현실 같은 걸 다룰 때는 곧잘 잊어버리지요. 하지만 문학은 그럴 수가 없는데 분단체제론에는 그런 ‘문학 본연의’ 발상이 들어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민족문학론의 다른 한 면이라고 생각하는데, 다만 분단체제론이 구체적으로 문학평론에서 어떤 형태를 띠고 나타날 것인가가 아직 충분히 드러나지 못한 게 사실이기 때문에 분단체제론에 주력하면서 민족문학론이 약화된 것이 아니냐 하는 인상을 준 것은 있죠. 말이 난 김에 한 가지 고백하자면 그동안 문학평론의 형태가 아닌 분단체제론을 담은 글로 이미 책을 한 권 냈고 얼마 있으면 한 권 더 나올 예정인데, 솔직히 말해서 나는 정말 이러고 싶지 않았어요.(웃음) 나는 문학 하는 사람으로 어떤 문제의식을 제출하는 것으로 끝내고 우리나라에서 사회과학을 하고 역사학을 하는 분들이 이것을 어떤 식으로든 받아줘가지고, 그걸 그대로 다 인정하라는 말이 아니라 일단 그 문제의식을 수용해서 더 전문적인 역량을 발휘해서 논의를 진전시켜주기를 바랐는데 그런 것은 별로 없고, 물론 몇몇 분이 성의있게 비판을 해줬지만 그게 역시 인문적인 소양이랄까 문학적인 발상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사회과학으로서도 좀 너무 미흡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아무튼 이래저래 최근 몇 년 그 일로 더 분주했는데, 앞으로는 분단체제 논의는 더 하더라도 문학평론을 통해서 하는 기회가 많아졌으면 합니다.
 

‘생산적 대화를 위하여’

임규찬 앞서 최원식 선생님의 지적사항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관련된 문제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거론했으면 합니다. 최선생님이 지적하신 몇 가지 문제, 이를테면 계급적인 돌파력이 부족하다든가, 주류문화에 인색하다든가, 지나치게 서구파에 경사되어 있는 듯하다든가 등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최근 한 논자는 최선생님의 평론집에 대한 서평을 통해서 이러한 지적을 재인용하여 선생님의 한계를 교묘하게 다시금 확정하는 듯한 글도 나왔는데……

김영희 최선생님께서 지적한 또다른 문제는 민중성 문제였지요. 예술성과 민중성이 근원적으로 같다는 선생님의 논지에는 기본적으로 동의하시면서도 민중성이 좀더 근본적이지 않겠느냐 하는 지적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또, 선생님이 참다운 전문성을 말씀하신 데 대해서도 전문성과 민중성의 만남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좀더 구체적인 민중적 회로의 확보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논평을 하셨는데요. 최선생님께서 그 글을 쓰신 지도 꽤 됐죠? 그래서인지, 제게는 최선생님께서 민중적 회로의 확보에 대해 낙관적이랄까 그다지 어렵지 않게 보았다는 느낌도 있습니다만……

백낙청 알다시피 최원식 선생과 나는 많은 대목에서 의견을 같이할 뿐 아니라 지금 그는 창비 주간의 대임을 맡아서 『창작과비평』 편집에 관한 내 짐도 크게 덜어주고 있는데, 그럴수록 또 우리끼리 허심하게 상호비판하고 토론하는 분위기는 필요할 것 같아요. 그런데 이걸 공개석상에서 해놓으면 어떤 폐단이 있냐면, 가령 최원식씨가 내 책을 평하면서 이런저런 좋은 얘기도 많이 하고 또 비판도 하잖아요?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비판한 대목만 딱 집어내가지고 ‘그것 봐라, 최원식조차도 백낙청이 이것밖에 안된다고 하지 않느냐?’ 그렇게 나오기가 쉬운데, 내가 또 최원식씨에 대해서 이러저러한 얘기를 하면 다른 말은 다 거두절미하고 ‘거봐라. 백아무개도 최원식이는 이런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 그런 식으로 편히 살려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아요.(웃음) 그러나 어차피 그런 것은 우리가 각오하고 살아야 하니까, 또 이런 내부토론이야말로 요전날 백영서씨가 촉구한 IMF시대 한국 지식인의 자기반성을 이행하는 한 가지 방법이기도 하니까 최선생이 제기한 문제들 중 몇 가지만이라도 차제에 얘기를 해보죠.

계급모순에 대한 정면돌파가 부족하다고 한 말은 ‘정면돌파’가 뭘 뜻하느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는데 실제로 어떤 뜻으로 썼는지 잘 모르겠어요. 이 글이 씌어진 것이 1990년이니까, 좀더 구체적으로는 『민족문학의 새 단계』라는 책이 90년 초에 나오고 『창작과비평』 그해 겨울호에 최선생이 「‘강압의 시대’에서 ‘지혜의 시대’로」라는 서평을, 일종의 서평 논문에 해당하는 제법 긴 글을 썼고 이 글이 작년에 나온 그의 평론집 『생산적 대화를 위하여』에 수록이 됐지요. 내가 짐작건대 ‘계급모순의 정면돌파’ 운운한 것은 아직도 80년대 계급담론의 여진이 남아 있어서 최선생도 그런 지적을 한 게 아닌가 싶어요. 계급모순 문제는 80년대에 젊은이들이 집요하게 요구한 형태의 답변을 내가 안 줬다 뿐이지 내 나름으로는 끊임없이 언급을 해온 문제인데, 지금 싯점에서는 최선생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사실은 내가 궁금한 대목이에요. 그리고 나의 이 평론집에 와서 서구지향성이 강화됐다는 말도 했는데 서양문학이라든가 서양이론에 대한 글이 많이 실려서 그런 인상을 준 게 아닌지, 나는 이게 좀 소재주의적인 비판이라는 느낌을 가졌어요. 나중에 다시 얘기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지만 가령 동아시아 문제에 대해서 최선생이 내가 인식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더러 하는데, 지식이 부족한 건 더 말할 나위 없고, 기준을 잡기에 따라 인식 자체가 부족하달 수는 있지만 전보다 더 부족해졌다거나 서구지향성이 강화되어온 건 아니라고 봐요. 오히려 『창작과비평』 작년 여름호의 국학관계 좌담에서 서양도 이제는 제대로 보자는 주장을 최선생이 하던 끝에 “오늘날 우리 사회에 횡행하는 얼치기 서도서기(西道西器)가 아니라 진정한 서도서기를 실현해야” 한다는 발언을 했는데, 나는 그거야말로 국문학을 하고 동아시아를 얘기하는 사람답지 않게 좀 막 나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웃음) 나도 동도서기론을 비판하고 얼치기 서도서기도 물론 비판하는 입장이지만, 다른 자리에서 언젠가 말했듯이 이제는 서양에도 서도라는 것이 거의 없어진 상태다, 서기만 있지 서도가 사라진 상태이고, 동양에서도 동도라는 게 거의 사라졌고 있다 해도 서기를 이끌 힘은 없으니까 이제는 지난날의 동도와 서도를 다시 궁리해서 새로운 도기합일(道器合一)을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거든요. 그 점에서는 내가 오히려 덜 서구지향적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웃음)

전문성과 관련해서 민중적 회로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은 절대 찬성인데, 이건 우리 모두의 지속되는 과제지요. 그런데 민중성과 예술성의 관계를 두고 내가 예술성을 앞세웠다고 비판할 때에는……

김영희 앞세웠다까지는 아니지 않았나요?

백낙청 아, 여기 이렇게 말했네. “물론 민중성은 예술성과 따로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침투를 통해서 구현되는 것이니, 중세 비평의 용어를 빌리면, 문(文)은 도(道)를 꿰는 그릇〔貫道之器〕이다. 요컨대 예술성은 민중성의 궁극적 도구가 아닌가?”(『생산적 대화를 위하여』 81면-편집자)라고 했어요. 민중성과 예술성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내 기본적인 입장인데 예술성은 민중성의 궁극적 도구라고 하면 오히려 이건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는 발상에 가까운 것 같아요. 요는 민중성과 일치하는 예술성이란 게 뭔가 하는 것인데, 내가 「역사적 인간과 시적 인간」이라는 70년대 후반의 글에서 밝힌 입장이지만 사람이, 특별한 시인이나 예술가가 아니라 보통사람이 사람으로서 제대로 사는 것이 바로 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이게 곧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말하자면 하이데거적인 발상이지요. 예술성이라든가 시적인 존재를 그런 차원에서 인정한다면 ‘도를 꿰는 그릇’이 아니라 도 그 자체로서의 민중성과 일치하는 개념일 것 같아요. 다만 최선생이 언급하고 있는 「민족문학의 민중성과 예술성」이라는 내 글이 86년에 쓴 건데 그게 원래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이었어요. 그때 하도 민중성을 앞세우고 예술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서 예술성을 조금 더 강조한 점은 있지요.

그 다음에 또 무슨 문제가 있었지? 아, 주류문화 얘기가 있었죠? 이것도 각각의 역사적 맥락을 되짚어보면 최선생과 나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되는데, 최선생이 그 말을 한 것은 90년이고, 비판의 대상이 되는 글은 87년에 나온 걸 거예요. 「민족문학론과 분단문제」라는 글인데, 글쎄, 그 당시로 말하면 아직 전두환정권 아래라서 주류문화라는 것이 정통성도 없고 우리 사회에 뿌리가 약하다는 비판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고 믿고, 반면에 90년의 싯점에서 내가 ‘주류문화의 잡식성’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다는 비판은 나로선 경청해야겠지요. 하지만 정말 어려운 문제는 독자적인 주류문화의 성립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식민지는 아니지만 분단체제의 일부라는 멍에를 진 남한의 주류문화에 대해 그 실세를 과소평가하지도 않으면서 그 근원적 불구성에 대한 인식도 망각하지 않는 자세를 어떻게 견지하느냐는 걸 거예요. 이건 최선생이나 우리 모두가 함께 풀어나갈 숙제지요.

김영희 이 자리에 최원식 선생님이 계셔서 직접 답변도 하고 그랬으면 더 재미있었겠습니다. 이제는 리얼리즘으로 넘어가서 문학 얘기를 마무리짓고 다른 얘기도 해야 될 것 같은데, 리얼리즘에 관해서는 아까 선생님께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비롯한 리얼리즘 전반의 재검토를 거론하셨는데요.
 

백낙청식 리얼리즘론은 별종?

백낙청 내 리얼리즘론이라는 게 좀 별종의 리얼리즘론이지.(웃음) 저번에 말한 「민족문학론과 리얼리즘론」이라는 글도 뜯어 읽어보면 한편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론의 때늦은 옹호일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 기존의 모든 리얼리즘에 대한 해체가 될 수도 있지 않을지. 자기 꿈을 자기가 해몽하는 꼴이 돼서 미안하지만 아마 리얼리즘론에 대해서 그런 식의 아리송한 발언이 많을 거예요. 가령 로런스를 리얼리즘과 관련시켜서 쓴 글이 몇 개 있는데, 그건 통상적인 의미의 리얼리스트…… 물론 로런스라는 작가는 20세기 초 작가치고는 전통적인 사실주의의 뿌리가 깊은 작가지만, 그 점을 부각시키려고 한 게 아니고 기존의 리얼리즘론을 해체하면서 동시에 그를 단순히 반리얼리스트로 본다든가 모더니스트로 본다든가 이런 관점도 부정하는 논의를 전개했지요. 그래서 어렵다느니 아리송하다느니 하는 소리를 듣기는 하지만 우리가 그런 식의 작업을 더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김영희 일반적인 리얼리즘론과 선생님의 리얼리즘론이 다르고 로런스의 문학이나 생각과 만나는 두드러지는 대목이 재현(representation) 문제이지 싶은데요. 특히 근대문학에 들어와서 재현이 차지하는 무게를 중시하면서도, 재현 자체가 리얼리즘의 정수(精髓)는 아니라는 논의를 펴시는데, 이런 논지가 선생님의 독특한 면모이자 또 이렇게 저렇게 한쪽으로 읽히기도 쉬운 것 같습니다. 최근 한 평자는 선생님이 재현불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까지 보던데요. 재현에 거리를 두는 점을 이런 식으로 읽는 것이지요.

임규찬 저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방민호(方珉昊)씨의 비판은 선생님이 이론상으로는 반영론을 부정하는 듯한 견해를 제출하는데, 실제 작품을 평가하는 데서는 오히려 반영론에 근거해서 평가하고 있지 않느냐 하는 의문인 것 같아요. 물론 방민호씨의 경우 글 자체가 그 내부에 여러 혼선이 있어 명확한 논지를 추출하기는 힘들지만,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김영희 가령 방민호씨가 선생님의 관점을 어떻게 읽느냐면요, “‘리얼한 삶’이란 언어 저편에 있으며 언어는, 따라서 작품은, 언어 저편의, 즉 날것 그대로의 삶을, 아직 의식의 수면으로 올라오지 않은 세계를 수면 위로 건져올리는 일”이라고 본다고 읽거든요. 모호한 문장이긴 한데, 구조주의 언어관 비슷하게 읽어내면서 선생님께서 결국 재현불가능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는데, 사실 재현 자체에 대해서 선생님이 거리를 두는 면이 이런 식으로 읽히기도 한단 말예요.

백낙청 글쎄…… 방민호씨가 한 그런 식의 지적에 대해서는 ‘언어 저편’의 삶이 정확히 뭐라고 생각하는지를 함께 앉아서 먼저 밝히면 생산적인 대화가 이어질 텐데 지금 방민호씨가 없으니까 그럴 수도 없고. 재현이나 반영 문제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얘기해서 나는 예술의 본분이랄까 본성이 재현이나 반영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예술이 예술다울 때 재현작업이 그때그때의 사정에 맞는 방식으로 수반되게 마련이다라고 믿는 점에서 대부분의 리얼리즘론자들과 갈라지면서 동시에 통상적인 반리얼리즘론자들과 동조하지도 않는 셈이지요. 그러니까 재현이 리얼리즘의 정수라는 명제를 부정한다기보다, 리얼리즘적 재현 자체가 예술의 정수라는 명제에 회의적이면서도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예술작품에서 재현의 성취 여부가 예술적 성취의 한 척도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지요.

내가 지나치게 사실적인 정확성을 따지는 게 아니냐는 것은 차원이 좀 다른 문제인데, 고차원의 리얼리즘론도 아니고 사실주의 차원에서 사소한 트집을 잡는다는 불만이겠지요. 하지만 나는 해당되는 작품이 어느정도의 사실주의적 정확성을 독자로 하여금 기대하게 만들어놓았을 경우에 한해서, 그렇게 만들었으면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은 기대를 충족시킬 의무가 있는데 그것을 못한다고 비판하는 거지요. 문제는 어느 특정 사실이 틀렸다기보다는 독자에게 어떤 기대를 불러일으킨 작품은 그 기대를 일부러 무시해서 독자의 의표를 찌르는 것이 원래 의도가 아니었던 한 그것을 충족시켜야 하는데 이런 기본기조차 안되어 있다라는 매우 초보적인 비판인 거예요. 그런데 실제로 우리 주변의 작품들을 보면, 이것도 나는 우리 사회에서 고질로 되어 있는 대충주의, 적당주의의 연장이라고 보는데, 멀쩡하게 그런 사실주의적인 표면을 유지할 듯이 해놓고서는, 또 자기 나름으로는 유지한답시고 해나가면서 터무니없는 오류를 범하는 일이 너무 흔하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런 것을 지적하는 것은 사실주의를 하라는 게 아니라 작가가 작품을 이렇게 엉성하게 써서야 되겠느냐 하는 얘기가 되는 거죠.
 

여성문제를 보는 시각

김영희 리얼리즘과 관련해서 로런스 이야기가 나왔지만 로런스에서 선생님이 관심을 갖는 또 한 가지가 남녀문제인 것 같습니다.(웃음) 남녀를 이데올로기적, 혹은 차별적으로 구분짓는 데 대해서는 로런스 자신도 강하게 반발하지만, 그럼에도 존재하는 남녀차이에 대해서는 로런스와 선생님 모두 강조하는 편인데요. 거기에는 기술공학주의적인 사고에 치우쳐 자연이라는 범주가 무시되는 데 대한 경계도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70년대에 여성문제에 대해 짤막한 에쎄이를 쓰신 적이 있으시죠? 거기서 선생님께서는 여성문제를 이야기하더라도 남자로 태어난 이상 사내값을 하고 가겠다는 남자들의 충정 자체는 어떻게든 소화해내야 한다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는데, 따지고 보면 그 사내값이라는 게 참 복잡한 얘기인 것 같아요.(웃음) 사내값을 한다는 것이 기득권적인 위치에서 가능했다는 점도 있고, 또 사내값, 제대로 된 사내다움과 그야말로 고정관념으로서의 ‘남성다움’이 구분하기 쉽지 않다는 점도 있고요. 저 개인적으로도 페미니즘에서 남성적인 사고방식이나 성향, 그리고 거기서 나온 성취 일체를 비판 일변도로만 볼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이 페미니즘에서도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논제로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초기에 하셨던 발언과 관련해서 페미니즘에 공감하는 남성으로서 한말씀……(웃음)

백낙청 70년대에 그 글을 하나 쓰고서는 여성운동이나 여성문제 자체에 대해서 따로 쓴 게 없다 보니까 그 짧은 글이 마치 여성문제에 대한 나의 본격적인 입장표명처럼 되어가지고 여성문제에 관한 인식이 매우 ‘후진’ 사람이라는 평도 듣곤 했어요.(웃음) 얼마 전에 안동대 국제학술대회에 가서 발표한 글에서, 여성문제만 따로 쓴 것은 아니지만 여성운동의 독자성을 전제로 그것이 분단체제 극복운동과 결합할 가능성을 얘기했는데, 새로 나올 책의 제1장으로 실릴 예정이지만 그게 나와서 여성운동가들로부터 덜 욕을 먹을지 어떨지는 모르겠어요. 거기서 “남자 못난 것들이 자기가 사내로 태어난 것을 큰 벼슬로 안다”는 말을 했는데 ‘사내값’ 운운한 것과 사실은 통하는 이야기죠.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남성우월주의의 전반적인 폐단에 대해서는, 내가 물론 여성운동 하는 사람만큼 민감하진 못하겠지만 그것이 남자들 자신을 덜떨어지게 만드는 면, 사내값도 제대로 못하는 것들이 자기가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만으로 행세하는 꼬락서니에 대해서는 꽤 민감한 편이라고 생각해요. 로런스도 그런 데 거부감이 강한 사람인데 그의 영향도 은연중에 많이 받았겠지요. 그래서 여성문제를 직접 논의는 안했더라도 문학작품 논의할 때 간간이, 이건 정말 여성작가 특유의 시각으로 남자 못난 꼴을 잘 짚어냈다 싶은 걸 지적하면 작가 당자들도 그런 지적을 상당히 만족스러워하대요. 그래서 현대세계에서 자유·평등을 얘기하면서도 남성우월주의가 여전히 판을 치고 있고 그것이 남자들 자신을 더 못나게 만들고 있다는 점에 대한 비판의식이라든가 그런 것은 내 나름대로 강하다고 봐요.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남녀간의 정당한 차이는 존중되어야 하고 남자다운 게 뭐고 여자다운 게 뭔지가, 그건 새로 규정을 해야 되겠지만 아무튼 남자는 더 남자다워지고 여자는 더 여자다워지면서 양성간에 더 공정하고 조화로운 관계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에요. 그러다 보니 사회적으로 형성된 부당한 차별에 항거하는 것이 자칫 이 중요한 문제를 망각하게 만들어서는 안되겠다는 점을 강조하게 되고, 여성의 눈에는 역시 남자로서의 기득권수호로 되돌아가는구나라는 혐의를 받는지도 몰라요. 아직 너무 막연한 이야기라서 이것만으로 무슨 시비를 가리기는 힘들 것 같고, 아무튼 지금 나의 남녀관이 자연에 대한 존중이라든가 이런 개념과 연결이 된다고 했는데, 문제가 더 복잡해지는 것은 정말 자연적인 차이가 무엇이냐는 문제가 하나 있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적으로나 역사적으로 형성된 차이는 또 얼마나 존중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결부되거든요. 원불교 문자를 빌려서 설명한다면 원불교에서는 법신불을 사은(四恩)이라고도 해서 천지은·부모은·동포은-이때 동포라는 것은 우주의 온갖 생명들을 다 포함하는 뜻이죠-그리고 마지막으로 법률은(法律恩)이라는 것이 있어요. 법률의 은혜라고 해서 실정법을 무조건 존중한다는 뜻은 아니고 그렇다고 부처님의 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오면서 창안한 온갖 문물이나 제도, 문명 등을 기본적으로는 은혜로 받아들이는 발상이에요. 그러니까 자칫하면 현실순응주의로 갈 수 있는데, 아무튼 인간의 역사에 온갖 부정과 억압이 개재되었지만 기본적으로 그런 역사가 있고 인간이 살아온 것을 하나의 은혜로 느낄 것인가 아닌가 하는 중요한 문제가 걸려 있지요. 그걸 은혜로 받아들인다고 하면 원래 생물학적 차원의 차이가 아니더라도 가부장제를 통해서든 뭘 통해서든 역사적으로 형성되어온 남성다움, 여성다움을 깡그리 부정하기는 그만큼 더 힘들어지는 거죠. 그래서 일전에 김선생하고 그런 대화를 나눈 적도 있지만, 흔히 자연적으로 있는 남녀의 성별을 서양 담론에서는 ‘兒스’(sex)라고 하고, 사회적으로 형성된 성차를 ‘젠더’(gender)라고 한다면 ‘兒스’를 폐기하자는 건 아니지만 ‘젠더’는 폐기하자는 것이 대다수 여성해방론의 주장이라고 보는데, 현실적으로 그렇게 가르는 일이 가능하냐 하는 문제가 하나 있고, 원칙문제로는 자연적인 성별 그 자체는 아니더라도 문화적 성차가 일단 자연적 차이를 바탕으로 실제 인류역사를 통해 형성되어온 것이라면 거기에는 존중할 것도 꽤 있지 않느냐? 그래서 철폐할 것은 철폐하지만 그것도 말하자면 법률은에 보은하는 자세로 하자는 거예요. 이게 남자로서의 편견일 수도 있고, 특히 나이가 점점 들어가는 남자의 보수성일 수도 있지만, 지금 부당한 성차별은 별로 줄어들지 않으면서도 정말 사내다운 사내는 점점 적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보는 점에서는 통상적인 남성주의하고는 다르다고 믿어요. 그래서 사내가 좀더 사내다워야 한다는 주장은 지금도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거듭 말하지만 우리 시대의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은 남녀가 함께 새로 만들어나갈 일인데 남녀간에 온전한 합의는 불가능하지 않은가라는 생각도 해요. 남자도 제각각, 여자도 제각각이라서만이 아니라, 남녀차이라는 것이 워낙 근본적인 차이이기 때문에 남성적인 인식과 여성적인 인식이, 아주 상식적인 얘기를 벗어나면 상당히 달라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이것은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구별되어서 태어난다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인식’ 능력의 한계로 작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이건 김영희 선생이 많은 관심을 가진 이른바 여성적 입장의 객관성 문제와도 직결된 문제겠지요.

김영희 제가 자연 범주라고 한 것도 단순히 생물학적 차이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든 생물학적이든 오랜 시간 동안 구축되어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의 무게를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아무튼 저로서는 여성적 인식과 남성적 인식의 차이를 일반화해 부각시키는 것보다는 다수 여성의 경험과 밀접히 관련된 앎의 방식들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을 ‘여성적’이기만 한 것으로 보지 않는 논의들에 관심을 갖는데요. 가령 ‘지식’이라고 하면 인지적(認知的)인 것만이 ‘지식’인 양 여겨져왔으며 그런 가운데 여성들의 실천적·정서적 앎은 ‘지식 이전’의 것으로 밀려났다는 논의가 있는데, 어떤 면에서는 실천적·정서적 앎이야말로 인지적 명제로 표현되는 지식의 바탕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요. 이럴 때, 인지적 지식을 자리매김하는 동시에 그 위력-즉 실천적·정서적 앎들 가운데 끼어드는 ‘부정확’한 부분들을 교정하는 역할-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고…… 아무튼 이런 논의에서도 남성들과 여성들의 앎에 다른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정서적 지식’ 일반을 남성적인 것, 여성적인 것으로 대별하지도 않고, 밀려난 실천적·정서적 앎은 여성들의 앎의 방식일 뿐 아니라 노동하는 남성들의 그것이기도 하다고 보거든요……

백낙청 그건 중요한 지적이에요. 남성중심주의, 그리고 남성중심주의와 결부된 서양의 전통 철학이 인지적 지식, 머리로 아는 알음알이만을 특권화했기 때문에, 여성이라든가 몸으로 노동하는 계급이라든가 이런 사람들 특유의 실천적·정서적 앎이 오히려 보편적 앎에 기여하는 면을 되새길 필요가 분명히 있지요. 그런 점에서 여성의 인식과 남성의 인식이 다르다 하더라도 오늘의 상황에서는 여성의 인식이 더 진실에 가깝기 쉽다는 것도 인정할 수 있어요. 그런데 김선생도 그 비슷한 이야기를 썼다고 믿지만, 실천적·정서적 앎을 중시한다는 것이 그냥 그러한 측면을 보완하는 정도가 아니라 인지 위주 지식의 절대성을 부인하는 것이라면, 이건 ‘객관성’이라든가 ‘진리’의 개념 자체가 뒤바뀌는 엄청난 이야기가 되죠. 가령 몸으로 아는 것이 진짜 앎이라고 하면, 몸은 어떻게 수련해야 제대로 된 앎에 이를 수 있느냐는 문제도 생기지만, 남자 몸과 여자 몸이 근본적으로 다를 경우 동일한 앎이 얼마나 가능하냐는 것도 문제가 되겠지요. 인간이 감관(感官)에 의존함으로써 인식능력에 한계가 지어진다는 점은 가령 현대과학에서도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더 분명히 드러난다고 하지 않아요? 예컨대 광선이 입자냐 파장이냐 할 때에 사실은 파장이기도 하고 입자이기도 한데, 실험을 통해서 증명을 하려고 하면 입자임을 보여주는 실험과 파장임을 입증하는 실험을 따로 해서 양쪽 다 확인할 수는 있지만 파장인 동시에 입자의 상태를 증명하고 인지할 수 있는 인간의 감관능력은 없다고 하지요. 좀 엉뚱한 비유일지 모르나, 여성적인 인식능력과 남성적인 인식능력이 일치하는 대목이 한정된 상식을 넘어서면 과학적으로는 입증할 수 없고 명제로 정리될 수도 없는 게 아닌가, 남자와 여자는 전혀 다른 존재라서 진리도 남자 진리, 여자 진리 두 개가 있다는 말은 아니지만, 이때에 ‘하나의 진리’라는 것은 불교 문자로 분별지(分別智) 차원에서 도달할 수 없고 견성(見性)해서 남녀의 차별이 없는 자리를 깨치는 길이 있을 뿐이라는 거지요. 분별지의 차원에서는 남자는 여자가 아니라는 데서 오는 한계가 있고 여자는 남자가 아니라는 데서 오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역시 남자는 남자답고 여자는 여자다우면서 서로간에 어울려 사는 것이 중요하다, 또 그렇게 어울려 사는 중생의 삶이 곧 부처의 경지인지 모른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웃음)
 

원불교적 사유방식의 이유

임규찬 남녀관계 말씀 도중에 원불교의 개념을 원용하셨는데, 이와 관련된 질문을 하나 던져보겠습니다. 평소 궁금했던 점이기도 합니다만, 선생님의 초기 글에서는 비교적 불교에 대한, 이른바 동양적인 사유방식 내지는 불교의 비중이 컸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서서 원불교에 대한 관심을 강하게 표명하고 계십니다. 때로는 특정한 인물까지 거론하면서 말씀하시는데, 그런 측면이라면 불교계에서도 거기에 견줄 만한 사람도 많이 있을 텐데 특정 개인을 부각시킬 정도로 원불교 사랑에 어떤 연유가 있는 겁니까? 선생님의 사유방식은, 근저에 불교라든가 하이데거적인 사유방식이 깔려 있고, 그래서 ‘종교적인 인식’이라는 말씀도 초기에 하셨는데, 이런 개인적인 구도의 바탕, 개인적인 깨달음에 기반해서 거기에 일종의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과학이라든가 여타 여러 이론과 사유가 결합되는 그런 사유체계로 보입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는 불교에 대해서 개인적인 구도 차원에서는 인정을 해주지만 당면한 현실의 실천적인 행위 차원에서는 별로 인정을 안하시는 것 같아요. 그런데 원불교를 말씀하실 때는 양자가 결합하는 듯한 느낌도 들고, 아까 말씀하신 ‘법률은’의 경우에도 그런 예로 보이는데, 이런 측면이 특별하게 원불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동기인지?

백낙청 사회적 실천이라는 면에서는 몇해 전 조계종의 개혁불사(改革佛事) 이후로는 불교 쪽이 오히려 활발한 감이 있고, 원불교 교단은 교세가 약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가령 민주화운동 과정에서도 한 일이 별로 없었다고 봐요. 그러나 교리 면에서는 실천성이 더 강조된다고 할 수는 있겠지요. 원불교에 대한 나의 관심은 사사로운 연고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불교에 대한 관심의 연장이랄 수 있고 그 창시자인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이나 그의 수제자 정산(鼎山) 송규(宋奎) 같은 분이 현대 한국의 독창적인 사상가이기도 하다는 인식이 있는 거지요. 원불교는 한편으로 그 맥을 불교에 대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구한말 이래, 그러니까 서양문명이 들어오면서 그 엄청난 충격에 주체적으로 대응하려는 우리 민족의 사상적 모색의 맥을 동시에 잇고 있는 점이 특이하지요. 물론 불교 쪽에서도 고승들이 많이 나왔지만 내가 별로 연구는 못해봤고, 아무튼 단순히 불교를 유신한다든가 갱신해서 거기에 대응한다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동학의 최수운(崔水雲)에서 비롯되는 유·불·선 통합의 노력이 있잖아요? 강증산(姜증山)도 있고.

그런데 이런 작업이 원불교의 창시에 이르러 한 단계 더 전진했다는 느낌을 갖고 있어요. 그렇게 된 배경에는 수운이나 증산 이런 분들의 선구적인 작업을 딛고 일어섰다는 잇점이 있고, 또 하나는 유·불·선의 통합이라는 것이 말이 쉽지 그냥 갖다가 절충을 한다고 통합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럴 만한 바탕이 있어야 하는데, 가령 수운 같으면 유교에서 이단자가 되기는 했지만 유학을 바탕으로 출발을 한 셈이고, 증산의 경우는 선도(仙道) 쪽이 더 중요시되었지요. 이에 비해서 원불교는 사상적인 바탕을 불교에 두고 있는데 나는 유·불·선 통합을 하려면 불도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어렵다는 생각이거든요. 거기다가 유·불·선 통합이라는 것은 원래 유·불·선 3개만 통합하려는 것이 아니라 서양의 그리스도교를-동학 당시에는 천주학인데-어떤 식으로든 의식하면서 거기에 적절히 대응을 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는데, 그게 제대로 되자면 그냥 ‘동학’으로써 ‘서학’에 대응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와 현대과학, 이런 것까지도 유·불·선 통합작업에 끌어넣어야 되지요. 그런 시도는 수운이나 증산에서는 보기 어렵고 소태산에 와서 드디어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그래서 나는 어디선가 소태산의 언행록에 해당하는 『대종경(大宗經)』이 종교문제를 떠나서 우리 한국문학의 중요한 자산이라고 말했는데, 한국문학도인 임규찬씨만 해도, 안 읽어봤죠?

임규찬 네.(웃음)
 

다시 창비를 돌아본다

김영희 이제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지난번 회화 중 미진했던 부분이 역시 창비 이야기였지요. 물론 선생님 개인의 사고나 이런 것을 얘기하면서도 이 얘기가 간접적으로 짚어지기는 했지만……

창비 25주년, 30주년 기념호에서도 창비에 대한 독자들의 생각이나 바람을 묻는 등 저희 나름으로는 함께 가는 잡지를 만들려는 노력을 해왔는데, 그럼에도 계속 친근하지 않다는 불만들이 주변에 많은 것 같습니다. 90년대 들어 창비가 거시적인 모색을 진행중인 것이 사실인만큼 최원식 주간께서 지적했던 ‘민중적 회로’의 확보를 좀더 고민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저희로서는 창비의 모색이 현실에 대한 탐구와 별개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요.

백낙청 질문을 좀더 딱 집어서 하면 좋겠어요. 무슨 얘기를 했는데 그걸 어떻게 하겠느냐라든가…… 그러니까 일반독자들의 감각으로는 동떨어지게 느끼는 것이 뭐가 있는 것 같은데 그걸 어떻게 하겠느냐든가, 아니면 그때 뭘 하겠다고 해놓고 왜 안했느냐라든가 그렇게 딱 집어서 물어보면…… 사실은 그렇게 하는 게 독자에게 친근한 언어예요.

김영희 그렇죠?(웃음) 그런데 제가 생각이 충분치 못하니 이렇게 추상적으로 얘기하고 있는데……

백낙청 사실 창비가 어렵다, 독자들의 감과 멀다, 이런 것이 꼭 창비가 제기한 주제가 반드시 어렵다거나 현실과 동떨어져서가 아니고 어떤 경우에는 그걸 다루는 사람들이 제대로 다루지 못해서 독자들이 바로 자신의 문제라는 느낌을 못 받을 때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그 점을 반성한다고 할 때에도 반성하는 형식에도 그게 나타나야지. 가령 아까 내가 백영서씨 없는 사이에 험담 좀 하자고 했는데 다른 건 험담할 게 없고, 창비가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 지난번에 백영서씨가 묻지 않았어요? 근대극복의 문제라든가 식민지시대에 관한 논의…… 그런데 그것 말고 우리가 또 하나 지난 2~3년 동안 중요한 주제로 내세운 것이 동아시아 문제였거든. 그런데 동아시아 문제는 알다시피 발의자는 백영서씨고 또 그동안 각자의 전공분야라든가 개인적으로 주장해온 것을 보면 역시 백영서씨와 최원식 주간이 주도를 해야 하는 입장이었는데, 영서라는 친구 이것저것 물으면서 동아시아 얘기는 싹 빼버렸어. 나는 이게 의도적은 아닐지 모르지만 미필적 고의라는 혐의를 걸고 있어요.(웃음) 그러니까 그 친구가 있었다면, 가령 동아시아 문제만 해도 그렇게 띄워놓지만 말고 정말 독자에게 실감으로 다가오는 얘기를 해야 되지 않겠느냐, 당신은 무슨 얘기를 하겠소 하고 물으려고 했는데 개인적인 사정을 핑계로(?) 빠리로 도망가버렸어요. 식민지시대 문제만 하더라도 지난번에는 주로 일부에서 담론상업주의 운운하는데 그러냐 안 그러냐 하는 차원에서 접근했지,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 편집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문위원인 유재건 교수가 유일하게 발언을 했지 아직까지는 별게 없단 말예요. 그러면 이것을 백영서씨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최원식씨는 100호 기념 토론회에서 기조연설을 하겠다고 하니까 거기에서 대충 어떤 얘기를 할 것인가? 본인이 없으니까 당장 물어볼 건 아니지만 우리로서는 그에게 어떤 주문을 할 것인가? 이렇게 내용에 대한 얘기가 구체적으로 나오면-물론 내용을 얘기하다 보면 너무 어려워질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좀 어려운 이야기라도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실감이 더 나고 실감이 나면 어렵다는 생각이 사라지기도 하지요.

김영희 실감과 맞닿으려면, 가령 근대극복의 문제도 환경이면 환경이라든가 어떤 구체적인 문제와 관련해서, 근대극복의 문제의식이 있어야만 생태계문제에도 잘 대처할 수 있다든가 이렇게 각론으로 보여주어야 될 텐데요.

백낙청 지난번에 분단체제론과 연관시켜서도 말했지만, 가령 김영희씨 같으면 그전의 창비 좌담에서 누군가가 노동해방은 근대적인 안건이고 여성해방은 포스트모던한, 탈근대적인 안건이다라고 했을 때 그게 아니고 여성문제야말로 근대적인 동시에 탈근대적인 양면을 지닌, 흔히 쓰는 말로 이중적인 과제다라는 식으로 반론을 펼쳤는데 그런 식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고 봐요. 또는 식민지시대의 성격 문제 같으면 이것 역시 지금 여기에 없는 백영서씨나 최원식 교수가 주도적으로 발언해야 할 대목이지만 창비가 이제까지 지녀온 문제의식에 비춘다면 이 문제에 대해서도 각자가 어떤 공헌을 해야 할지 한번들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어요?

임규찬 지당한 말씀입니다.(웃음) 그런데 실제 편집위원으로 몇해를 활동하면서 창비의 구체적 과제에 저 자신이 어떤 기여를 했는가 뒤돌아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오늘 발언에도 이러이러한 몫은 누가 주도적으로 해야 하지 않겠느냐라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보이지 않게 그런 식으로 비켜서서 적극적으로 자기문제화하지 못한 점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일단 지켜보자라든가……

백낙청 그분들이 주도적인 발언을 해야 한다고 할 때는 이제까지 논의가 전개된 형태에 국한해서 본다면 역시 동양사를 하는 백영서라든가 또는 국문학을 한데다가 기획을 주도한 최아무개의 짐이 더 크다는 얘기고, 좀더 확대해서 보면 우선 임규찬씨도 한국문학을 할 뿐 아니라 특히 1930년대의 소설을 연구하잖아요? 우리가 일제시대 공업화의 과정이라든가 토지조사사업이 어떠했고 이런 데에 글로 개입할 만한 처지는 못 되지만, 각자 자기가 하는 분야에서는 이런 문제제기에 부응하는 작업이 있어야겠다는 얘기이고, 그런 의미에서는 누가 따로 주도적인 사람이 있는 게 아니죠. 물론 나 자신부터 해당되는 이야긴데, 사실 나는 이 문제가 창비 지면에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전에 내 나름의 어떤 문제의식을 단편적으로나마 내놓은 건 있어요. 카또오 슈우이찌(加藤周一)씨가 내한했을 때 대담을 했잖아요?

김영희 그게 94년 겨울호였지요?

백낙청 그때 식민지시대와 관련해서 식민지시대에 공업화가 이루어진 사실을 인정한다고 한국에서는 욕먹는 일도 있는데 나는 그것이 오히려 일본제국주의가 후발제국주의로서 정복주의적인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공업화도 더 하지 않았겠느냐, 자기네 공업기반이 예컨대 영국보다 약하기도 했고, 또 영국은 인도를 식민지로 삼았을때 그냥 식민지로 놔두고 수탈할 생각을 했지 그걸 영영 자기 땅덩어리로 만들 생각은 안했단 말예요. 그런데 일본사람들은 옛날의 정복자처럼 조선을 합병해서 영영 먹을 생각이었기 때문에, 물론 여러가지 다른 이유도 있죠, 대륙에서 전쟁을 치르려고 하니까 병참기지가 필요하고 그런 것도 있지만, 어쨌든 이것은 영구히 자기 땅이라는 전제 하에 공장도 더 짓고 그랬던 면도 있다는 거지요. 그래서 일본제국주의 특유의 후발성이라든가 후진성, 또 거기에 따르는 약탈성이나 정복주의적인 성격, 이것하고 그들이 이룩해놓은 공업화의 실적이 상호연관된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 양면을 연결시켜보자는 주장을 했는데요. 사실 이건 요즘 논란이 많은 박정희시대를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그 경제개발 업적을 인정해주는 분단체제론적 시각과도 통하는 거지요.

이제까지 식민지시대 논의의 주류를 보면 약탈성에 더 주목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수탈해갔는가 하는 쪽을 강조하고 일정한 개발을 이룩한 점은 인정을 잘 안하려고 하고, 반면에 그때 공업화가 얼마나 더 이루어졌는가 하는 점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뭐니뭐니 해도 그 덕에 한국이 근대화됐고 이후의 경제발전도 그 연속선상에 있다 해서 은연중에 식민지시대를 미화하는, 적어도 본의 아니게 미화하는 결과가 되는 것은 사실인 것 같아요. 그래서 이게 ‘수탈과 저항’론, ‘수탈과 개발’론, 이런 식으로 진행되어왔잖아요? 그런데 최근에 보면 그런 양분법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우리 학계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문헌을 널리 읽지는 않았지만 김용섭(金容燮) 교수 정년기념논문집에 김영호(金泳鎬) 교수가 쓴 글을 보면 ‘수탈과 저항’ 대 ‘수탈과 개발’의 대립을 넘어 ‘저항과 개발’이라는 차원에서 보자고 했던데 나는 그 글을 꽤 재미있게 읽었어요. 이런 논리를 세계체제론과 연결시켜서 세계체제 속에서 일본제국주의가 갖는 위상이 별로 높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에 대한 식민지정책도 한편으로는 더 폭압적이고 수탈성이 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이 인도에서 했던 것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의 공업화를 하고 사회기간시설도 건설했다, 이렇게 보는 것이 더 원만하지 않겠는가 합니다. 물론 일제가 설혹 그런 건설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저희들을 위한 것이었지 우리 민족을 위한 것은 아니었던 건 분명하지요. 그러나 이건 좀 다른 차원의 문제죠. 그들의 의도와 그 행동의 정치적인 성격을 떼어버리고 논의하는 것은 곤란하지만, 의도와 결과 문제를 혼동하는 것도 학문적인 자세는 아니라고 봐요. 세상살이의 이치로 따지더라도, 원불교 문자를 또 한번 쓰면 은생어해(恩生於害)하고 해생어은(害生於恩)하는 것이 우주의 진리인데 저들이 끼친 해독에서 은혜가 나오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해독을 끼친 저들이 은혜를 베풀었노라고 큰소리치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거기서 결과적으로 은혜가 나온 대목까지 부정할 까닭은 없지요. 우리가 그걸 활용을 해서 앞서 말한 IMF 이야기에서 쓰던 어법대로 일본사람들이 와서 잔뜩 주인행세를 하다 갔지만 가고 나서 보니까 많은 경우에 우리 머슴노릇도 했더라고 하게 된 경우라면 말이죠.
 

앞날을 전망하며

임규찬 IMF 이야기가 다시 나왔습니다만, IMF시대의 엄혹함은 시간이 갈수록 더 실감되는 것 같습니다. 이 어려운 시대의 주인노릇을 어떻게 할지, 창비와 창비 독자들을 위해 덕담을 겸해 마지막으로 한말씀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백낙청 시대의 엄혹함을 상기시키면서 덕담을 하기가 쉽지는 않지만,(웃음) 우리 모두가 시대의 주인이 되고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겠다는 각오가 확고하다면 빈말이 아닌 덕담이 가능하겠지요. 이번 사태는 결코 일시적인 유동성의 위기, 즉 기본적으로 장사는 잘되는데 한때 현금이 안 돌아서 생긴 위기가 아니고, 분단체제의 특정 단계에 맞춰서 형성된 경제모델이 더는 통용되지 않아서 벌어진 파탄에 가깝다고 봐야 합니다. 이제야말로 분단체제극복의 과정에 맞는 새 모형을 개발하느냐 신탁통치에 이어 더욱 강화된 신식민지통치를 감수해가면서 왕년의 풍요로운 생활을 전보다 훨씬 한정된 계층에서나 되찾느냐는 갈림길에 선 것입니다. 이제까지 분단체제극복을 주장하고 민족문학의 새 단계에 걸맞은 자기갱신을 도모하고 인식과 실천 전반에 걸친 패러다임 전환을 주창해온 창비는 바로 이러한 갈림길에서 제 몫을 하기 위해 꾸준히 준비해왔다고 자부해도 될 것 같아요. 다만 창비도 하나의 기업인 이상, 더구나 재정적으로 여전히 취약한 소기업인만큼, ‘IMF한파’를 그 누구 못지않게 타게 되어 있지요. 창비에서 일하는 우리 모두가 크게 분발할뿐더러 독자 여러분들이 왕년에 독재정권의 탄압에 시달릴 때와 다름없이 뜨거운 성원을 보내주심으로써만 이 고비를 넘길 수 있을 겁니다. 나는 그렇게 되리라고 확신하고, 이것이 단순히 한 잡지와 출판사의 생존문제에 그치지 않고 우리 민족과 인류의 새로운 미래를 여는 데 없어서는 안될 어떤 몫을 이 시대를 함께 사는 우리들이 힘을 모아 해내는 결과가 되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김영희 감사합니다. 독자 여러분께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인사를 함께 드리면서 이만 끝내기로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