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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록] 문학, 『창작과비평』, 그리고 한국 사회

백낙청(『창작과비평』 편집인)

김두식(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황정은(소설가)

*이 인터뷰는 팟캐스트 「라디오 책다방」 104, 105회(2015년 5월 4일, 5월 11일)에 방송된 것이다.
 

김두식 오늘 ‘북 토크’ 시간에는 백낙청 선생님 모셨습니다. 선생님 모시자마자 기선을 제압해볼까 해서 사주(社主)를 모셔서 부담스럽다, 이런 이야기 했다가 야비하다고 얘기 듣고 ‘멘붕’입니다. 바로 반격을 하셔서 깜짝 놀랐는데요,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백낙청 네, 안녕하세요?

김두식 창비 「라디오 책다방」이 창비의 상징적 얼굴인 백낙청 선생님 모셨는데요, 평소에 「라디오 책다방」 자주 들으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백낙청 자주는 못 듣고요.

김두식 어떻게 들으세요?

백낙청 컴퓨터로 들어요. 창비 「라디오 책다방」으로 바로 들어가든가, 아니면 팟빵(podbbang).

김두식 누구 도움을 받진 않으시는군요.

백낙청 거기까지는 해요.

김두식 저희가 통상 신작을 내신 저자분이나 작가분을 모시는데, 백선생님도 곧 신작 『백낙청이 대전환의 길을 묻다』, 부제가 ‘큰 적공을 위한 전문가 7인 인터뷰’(창비)라는 책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방송이 나올 때쯤에는 출간되어 있겠지만 저희는 아직 책을 읽지 못한 상태에서 방송을 하게 됐는데요, 어떤 책인지 잠깐 소개 좀 해주시겠습니까?

백낙청 2014년 겨울호 『창작과비평』에 「큰 적공, 큰 전환을 위하여」라는 제법 긴 글을 썼습니다. 쓴 이유는, 『2013년체제 만들기』라는 책을 써서 2012년 선거에도 영향을 주고 13년 새로운 체제 출범에 기여해볼까 하다가 잘 안됐잖아요. 그 이후에는 자숙을 하고 있었죠. 국민 앞에 나설 면목도 없고, 그게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같지도 않고. 그러다가 세월호사건을 겪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다짐을 하고 새롭게 살아보겠다 하는 생각을 했는데, 나도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흔히 하는 말로 가만히 있지 않겠다 하는. 근데 『2013년체제 만들기』 이후로 사회적인 발언에서는 가만히 있는 편이었거든요. 그러다가 가만히 있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생각을 가다듬어서 처음에는 세교연구소에서 하는 ‘세교포럼’에서 발표했고요, 그다음에 글을 만들어서 계간지에 실었습니다. 그전부터 왜 가만히 있냐고, 책을 한권 내라고 쪼아대는 친구들이 있었죠. 그런데 지금 책을 낼 실력도 없고. 그러다 대담집을 하면 어떠냐 하는 얘기가 있었어요. 발표도 하고 토론도 하면서 느낀 것은, 대담집을 만드는 것이 편한 길이긴 한데, 대담이라고 하면 보통은 내가 인터뷰이가 되는데 그렇게 한권을 풀어낼 만한 ‘꺼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내가 풀어낸다고 한들 관심 가질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그러지 말고 내가 인터뷰어로 나서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인터뷰하고 내가 쓴 글을 일종의 총론으로 삼고 각론을 채워보자. 그렇게 해서 작년 연말부터 계획을 잡아서 금년 1월달부터 일곱분을 인터뷰했습니다. 인터뷰는 3월 중으로 끝났나. 그러고서 정리해서 지금 책이 거의 나올 단계가 되었습니다.

김두식 선생님보다 훨씬 젊은 연배의 분들을 만나신 거죠? 상대방이 부담스러워하지 않았나요? 저도 선생님이 저 인터뷰하러 오신다고 하면 “무슨 일인 거지?” 이랬을 것 같은데, 다들 흔쾌히 수락하던가요?

백낙청 흔쾌히 수락한 분도 있고 안한 분도 있는데 그게 나이가 많아서 부담스럽다기보다도, 가령 여성 쪽에서는 나보다 나이 어리지만 여성학계에서 원로로 치는 조은(曺恩) 교수라든가, 거기도 이미 명예교수가 된 사람인데 그분은 좀 망설였던 것 같아요. 본인은 그렇게 말 안하지만 원로 남성이라는 사람들 만나서 무슨 얘기가 될까 하는 게 상당 부분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김두식 그래도 응하신 거잖아요?

백낙청 응했죠. 설득을 많이 했어요. 내가 직접 나서진 않았지만 기획팀에서 나서서 백선생은 그렇게 몽매한 사람은 아니다 하고 설득한 모양이에요.

김두식 수긍하신 모양이네요.

백낙청 일단 부딪쳐보자, 이렇게는 생각하신 것 같고, 끝나고 나서는 안 물어봤어요.
김두식 박성민(朴聖珉) 씨나 이런 분은 정치컨설턴트로 유명하기는 하지만 많이 알려진 분이 아닌데요, 선택을 해서 인터뷰를 하셨더라고요.

백낙청 흔히 나오는 정치학 교수나 정치평론가보다 버전이 다른 사람을 해보자…….

김두식 일종의 선수거든요.

백낙청 그렇죠. 현장의 선수니까 한번 해보자. 토론은 꽤 재밌게 된 것 같아요, 내 생각에는. 박성민 씨가 아무래도 현장을 생생하게 아는 사람으로서 재밌는 얘기를 많이 했고, 그러다가 이론적인 얘기가 나오면 나도 끼어들어서 이러쿵저러쿵했죠.

김두식 잘 팔릴 것 같으세요?

백낙청 내 책이 별로 안 팔려요.(웃음) 아마 부수로는 『2013년체제 만들기』가 제일 많이 팔렸을 거예요. 그게 5, 6천부까지는 잘 팔렸어요. 그러다가 4월 총선에서 져버렸잖아요. 그러니까 뚝 끊어지더라고요.

김두식 예전에는 선생님 책 그거보다 잘 팔린 게 있었을 텐데요.

백낙청 70년대에 나온 평론집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1』, 그거는 몇부 나갔는지 누적부수를 알 수가 없습니다. 창비 책 중에서 70년대에 나온 것 중에 그런 게 많아요.

김두식 집계가 안되어 있는 거죠.

백낙청 그렇죠. 70년대도 집계를 치밀하게 하지 않았지만 80년대에 계엄이 나고 정식으로 검열을 했잖아요. 그러면서 옛날에 찍은 책도 중쇄를 할 때마다 검열을 받으라는 거였어요. 우리가 고지식하게 염무웅 선생의 문학평론집 『민중시대의 문학』(1979)도 검열에 넣었더니 70년대에 멀쩡하게 잘 팔리던 문학평론집인데 계엄사에서 불허가 된 겁니다.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몇쇄 표시 없이 계속 찍었죠. 제 것도 좀 나갔을 겁니다. 가령 신경림 선생의 『농무』(1975) 같은 거, 그건 지금도 많이 나가고 있지만 몇십만부 나갔는지 기록이 전혀 없어요. 80년대 내내 기록을 안하고 찍어서 팔았으니까.

김두식 누가 들으면 탈세한 거 아니냐 할 수도 있는데 당시에는 그런 게 전혀 문제가 되진 않았던 거 같고, 뒤로 책을 팔 수밖에 없었던 상황인 거죠.

백낙청 탈세는 아니에요. 왜냐하면 당시 창비 규모의 회사는 인정과세(認定課稅)라는 걸 하잖아요. 그냥 세무서에서 알아서 때리는, 이 정도 하는 거 같으니까 얼마 내라 하는 거죠.

김두식 너무 옛날 얘기 같네요. 인정과세 같은 것도 추억의 단어고요. 오늘 방송은 저희가 백선생님의 모든 것을 파헤치자,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인터뷰를 꽤 하셨더라고요. 그래서 선생님 무슨 생각 하고 계신지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그래서 흔히 알고 있는 정치·사회 면에서의 선생님 활동, 통일이나 국제문제에 관한 활동보다는 선생님의 본업인 문학평론가이자 계간지 편집인으로서의 백낙청에 대해서 같이 얘기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고요. 굳이 제목을 붙이면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로 해보려고 합니다. 저도 좀 놀란 게, 선생님이 계간지 『창작과비평』을 만든 1966년에 스물여덟살밖에 안되셨더라고요. ‘민주회복국민선언’으로 학교에서 74년에 잘리신 때가 서른여섯살이셨고요. 당시에 ‘민주회복국민선언’에 이름 올렸던 분들 쭉 보면 역사 속의 인물들, 오래전에 역사 속으로 돌아가신 분들이 많고, 그러다보니까 외람되지만 상대적으로 굉장히 옛날 사람 이미지가 있으신데요. 좋은 점도 있지만 억울하거나 손해 본다는 느낌도 있을 것 같아요. 원로라는 느낌 때문에 억울하신 때는 없어요?

백낙청 책이 잘 안 팔린다든가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죠. 어떡하겠어요?(웃음)

황정은 선생님의 현장비평을 제가 가장 최근에 본 게 2014년 봄호 『창작과비평』에 실린 좌담이었거든요.1) 그때 강경석(姜敬錫) 선생님하고 송종원(宋鐘元) 선생님하고 신간들에 대해서 짧은 대화를 나누셨더라고요. 그런데 선생님께서 본의 아니게 작품을 많이 읽지 못하고 평론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런 말씀을 자주 하셨어요. 또 평론집에서 독서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이런 고백도 하셨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에는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새로 나온 문학작품을 어떻게 읽으세요?

백낙청 요즘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가 않은데요. 그래서 사실은 나는 김두식 선생이나 황정은 작가하고 얘기한다 하면 그 점에서 주눅이 들어요. 이 양반들 책을 많이 읽으시는 분들인데…….

김두식 「라디오 책다방」 때문에 억지로 읽고 있는데요.(웃음)

백낙청 근데 나는 문학 독서를 몰아서 합니다. 어느 시기에 몰아서 하고, 그다음에 다른 일에 착수하면 그 일을 하고. 하는 일이 잡다해서 그렇고, 그리고 요즘에는 체력으로 봐서 독서할 수 있는 절대시간이 한정되어 있고요. 그런데 지난 6개월 동안은 문학 아닌 다른 일을 했습니다. 영문학 쪽은 작업을 한 게 있어요. 해외의 전문지에 글도 써내고. ‘국제 D. H. 로런스 학술대회’(International D. H. Lawrence Conference)라는 게 있어요, 3년마다. 그게 끝나면 우리가 국제 특집호를 만들어냅니다. 로런스학계에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분들이에요. 그런 분들하고 나하고 소위 초빙, 객원 편집자가 되어서 그 호를 편집하는데, 그 작업을 지난 몇달 동안 해왔고 아직도 계속 중입니다. 영문학 쪽은 그런 일을 한 편이고, 아까 말한 대담집으로 바빴고.

김두식 몰아서 읽는다는 게 재밌는 거 같아요. 영문학 책을 읽을 때는 영문학 책만 읽고.

백낙청 그렇게 완전히 몰아서는 아닌데, 『창비』 편집에 관여하니까 한국문학 작품을, 창비에서 나오는 소설이라든가 몇개는 읽지만 특별한 경우 아니면 잘 안 읽고 있다가요, 그다음에 몇달 동안, 과제가 주어졌을 때라든가 그럴 때 읽죠. 그래서 이번에는 「라디오 책다방」에서 문학 얘길 한 걸 계기로 앞으로 몇달 열심히 해보려고 합니다.

황정은 최근에 읽은 작품 중에서 인상 깊었던 작품 얘기 좀 해주세요.

백낙청 최근에는 별로 못 읽었죠. 황정은 작가한테는 미안하지만 연재할 때는 「소라나나나기」 열심히 봤는데, 개고해서 단행본으로 낸 책을 작년 12월에 주셨을 거예요. 아직 안 읽었는데 그것도 예정 리스트에 있습니다.

김두식 그리고 박민규(朴玟奎) 작가에 대한 언급도 하셨죠. 세월호에 대해서 쓴 글.2)

백낙청 그 책, 그 글들은 많이 봤고 황정은 씨가 쓴 글 인용도 했고. 그리고 작가의 작품이 아니고 기록단(416 세월호 참사 작가기록단)이 쓴 『금요일엔 돌아오렴』(창비 2015)은 봤죠. 마음이 아픈데, 사람들이 마음이 너무 아플 게 걱정이 되어서 안 읽잖아요? 정작 읽으면 아프기도 하지만 힘이 되는 이야기 같아요. 그래서 참 좋은 책이라고 생각해요, 창비에서 나왔지만.

김두식 애들의 실체가 나와서 좋은 책인 거 같아요. 304명이 우르르 나오는 거보다도 한명, 한명.

백낙청 애들도 각각이고 엄마 아빠도 각각이에요. 비통한 건 다 마찬가지지만 대응하는 방식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공통점이 있다면, 거기에 나온 분들은 고통을 통해서 내가 이런 세상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좌절하거나 물러서지 않고 뜻을 세워서 싸워나가고 있잖아요. 그런 게 참 감동적이었고. 그리고 우리가 세월호 이후에 변한 게 없다고 하는데, 사실 변한 게 구석구석 많이 있죠. 이게 집결이 되어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까지 안 갔다는 거지 여기저기 많은데, 그중에 많은 것들은 유족들의 바뀜이 아닌가 해요.

김두식 한국 사회의 민낯을 보여준 면이 있고, 유족들이 변해가는 모습이 어떤 면에서는 희망적이고 그런 게 있는 거죠. 오늘 문학평론가로서의 백낙청 선생님 이야기를 해야겠는데요, 평론이 예전 같지 않고 예전에 평론이 가졌던 힘을 생각해보면 역할이 축소되었다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도 좀 들고요. 백낙청 선생님 같은 경우에 문학평론가로서도 많은 역할을 하셨지만 담론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많이 하셔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문학평론가보다는 거대담론을 만들어내는 분으로 기억되는 경우도 있거든요. 근데 어떤 사람들은 또 거대담론을 부정적으로, “어우, 거대담론 싫어” 이런 사람도 있잖아요. 담론의 역할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지식인들이 거대담론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이런 말씀도 2006년에 하셨는데.

백낙청 거대담론이 폐단이 있다는 건, 거대한 얘기를 하다보면 구체적인 현실에서 동떨어질 수 있잖아요? 문학의 경우는 작품하고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고. 그걸 거대담론을 포기하는 걸로 해결하려고 하면 안되는 것 같아요. 내가 거대담론을 얘기 안하면 결국 남의 거대담론에 사로잡히는 결과가 되니까. 거대담론 차원에서는 그 차원대로 자기의 생각을 개발하고 담론을 개발하는데, 자기 생각을 끊임없이 개척해나가야 하고요. 사회현실을 얘기할 때는 구체적인 현실하고 맞물려서 가야 되고요. 작품의 경우는 작품에 대한 인식하고 함께 가야 한다고 보는데, 내가 얼마나 성공적으로 했는지는 장담할 순 없지만 적어도 그런 걸 시도해왔어요. 어떤 사람이 내 문학비평이 실제비평보다 이론비평에 강하다 얘기하면 마음속으로 승복 안하죠. 둘이 같이 가는 거지 어떻게 따로 가냐.

김두식 담론이 있어야 제대로 된 개별 비평도 가능하고 서로 이야기가 오갈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 같아요.

백낙청 담론이라는 말이 얼마 전부터, 10~20년 전부터 부쩍 유행을 하는데 원래는 잘 안 썼어요. 고유의 표현을 하면 ‘언설(言說)’이라고 하죠. 말하는 거요. 그러니까 언설이 있어야 하는 건 당연한 건데, 그걸 담론이라고 하면 격도 있고 이론적 깊이도 있고 그런 것처럼 보이는 거죠. 우리가 언설을 하면서 사는데, 그 언설을 깊이있고 정제되고 정합성도 있고 그러면서도 현실에 충실한, 그런 언설을 개발하려고 하죠. 그건 이론가나 담론가가 아니라도 누구나 자기 삶을 충실하게 살려고 하면 말을 제대로 하려는 훈련을 끊임없이 하면서 살아야 하잖아요. 그런 뜻이 되겠죠.

김두식 과거에는 스타 평론가들이 있었잖아요. 백낙청 선생님도 그렇고 김현이나 김윤식(金允植), 김우창 같은 분들이 일정한 권위를 누리던 시대가 있었는데요, 사람들이 평론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어느 시점부터 그런 평론가들의 시절이 사라지고, 어떻게 보면 인터넷에서 누구나 별점도 매기고 자기 평을 쓸 수 있게 되다보니까 좋은 면도 있지만 평론가들의 역할이 축소되는 면도 있는 것 같거든요. 긍정적인 면, 부정적인 면이 있을 텐데,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좋은 시절을 누려본 입장에서 변화랄까…….

백낙청 글쎄, 여러가지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는 것 같은데요. 세상에서 스타 평론가라고 다 인정을 하면 스타 평론가 되는 거겠죠. 나는 나를 포함해서 우리나라에 그렇게 훌륭한 평론가가 있는지 잘 모르겠고. 그런 식으로 나열하면 유종호 선생님 같은 분도 그랬고요. 참 훌륭한 비평 많이 하신 분인데, 그렇고, 지금 평단에서 활동하는 평론가 중에서 사회적으로 명성과 권위를 누리는 사람이 별로 없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인터넷에서 아무나 쓰는 글은 평론이 아니고 평단에서 평론가 완장을 차고 써야지 평론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아무나 쓰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도 많이 나오지만. 그런 글 다 포함하면 좋은 평론의 절대량이 줄어들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런데 엉터리가 너무 많아서 섞여버리는 게 있고. 또 하나는, 평론의 역할이 줄어들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공공성의 실태라고 할까, 공정하고 바른 소리를 하는 게 잘 안 먹히고 대접을 못 받는, 문학만이 아니고 모든 분야에서, 그런 현상의 일부가 아닌가 해요. 말하자면 엉터리, 더 심한 표현을 쓸 수 있지만 그런 사람들이 자기들 세상 만나서 판치고 있으니까 그 안에서 바른 소리를 하려는 사람들은 문학이든 다른 분야든 별로 빛을 못 보는 시대라고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황정은 진지한 것을 혐오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아요.

백낙청 진지하게 나쁜 소리 하는 사람들하고 일반적인 냉소적 분위기하고 같이 가요. 똑같은 사람들이 하는 건 아닌데 이상한 소리 해서 냉소 분위기를 키워놓고. 정치에서도 그렇잖아요. 정치하는 놈들 다 똑같은 놈들이다, 이런 식으로 정치혐오가 커지면 결국 편해지는 건 기득권 가진 인간들이거든요. 특히 여당이라든가. 그래서 진지한 걸 무시하는 사람들하고 적극적으로 못된 소리 하는 사람들이 상보적인 것 같아요.

김두식 그래도 과거에 소설가들이 이름을 얻었던 만큼 평론가들도 누구 하면 거의 전국민이 알던 시절하고 비교해보면 많이 바뀌기는 바뀐 것 같고요. 요즘 젊은 평론가들 중에서 저 사람은 정말 잘 쓴다, 나보다 잘 쓴다, 이런 후배들 있나요? 어떤 후배들이 있을까요, 좀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 하는?

백낙청 재밌는 사람들 많죠. 나보다 잘 쓸 수밖에 없는 건, 나보다 훨씬 많이 읽으니까요. 그건 개인 차원에서 누가 더 재주가 있고 덜하냐를 따지는 것보다, 시나 소설도 비슷하지만 평론이나 학술 쪽은 더한 것 같은데, 선행 업적을 소화하고 딛고 넘어서는 게 중요하다고 보거든요. 개인을 놓고 보면 누구는 180센티고 누구는 160센티면 하나는 작고 하나는 큰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나 160짜리가 50센티, 1미터짜리 되는 단 위에 올라서면 180짜리가 아무리 해도 안되잖아요. 그러니까 지금까지 평단이나 담론계에서 이룩한 성과를 얼마나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그걸 딛고 일어서느냐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김두식 기존의 성과들을 이해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평론가가 나와야 된다고 보시는군요.

백낙청 그런 평론가가 없다는 건 아니고, 누가 재주 있느냐, 당장에 글 잘 쓰느냐 하는 경쟁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문학전통을 세워가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김두식 어떤 전통이죠, 구체적으로는?

백낙청 원론적으로 말해서, 이제까지 우리 문학이나 평론이 이룩한 성과가 있단 말이에요. 그걸 내가 재주 있다고 해서 ‘이제까지 나온 소리는 재미없어,’ 아니면 ‘평론이라는 건 각자 개인이 자기 재능 갖고 하면 되는 거지’라고 생각하지 말고, 문학평론도 시나 소설 못지않게 개인적인 작업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집단적이고 연속적인 작업이라는 거죠. 시, 소설도 그런 경향이 있지만 평론이 더 강한 거 같아요.

김두식 일종의 학문 영역이기 때문에.

백낙청 그렇죠. 절반은 학문 영역에 걸쳐 있고.

김두식 선행 영역하고 단절될 수 없는 건데 말씀 듣다보니 우리가 좀 단절되는 경향이 있긴 있는 것 같네요. 과거의 흐름에 대해 생각하는 것보다는 자기 재능이나 자기 글 쓰는 데 집중하게 된다고 할까요? 선생님의 비평언어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은 민족문학, 리얼리즘 같은 말인데요. 민족문학이라는 개념은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이라는 책의 제목으로 쓰이기도 했고 한때는 문단의 담론을 주도했던 용어이기도 한데, 개념이 정확히 뭔지가 잡히지는 않아요. 한국 사람들이 쓴 문학은 다 민족문학인가? 저희도 오늘 녹음하기 전에 여러 사람이 모여서 민족문학이 뭘까, 여러가지 얘기들을 했는데요,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민족문학은 어떤 의미를 갖는 거죠?

백낙청 민족문학이라는 개념이 분석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 건 아니지만 엄밀한 의미의 분석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특정한 시대의 논쟁적인 개념이었어요. 가령 우리 시대의 민족문학 논의가 본격적으로 벌어진 것이 70년대 초인데, 한쪽에서는 국민문학이라는 말을 많이 썼죠. 영어로는 둘 다 ‘내셔널 리터러처’(national literature)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일제강점기에는 국민문학이라고 하면 식민지로서 일본문학에 복속된 황도문학(皇道文學)과 혼동될 여지가 있었고.

김두식 식민지 지배에 복무하는 문학으로서의 의미가 있었던 거죠.

백낙청 일제 식민지의 신민이고 법률상 일본제국의 국민인데 거기에 대한 자의식이나 저항의식이 없는 용법으로 쓰인 거죠. 그런데 그 시절에는 민족문학이라는 개념이 널리 퍼지지 못했습니다. 프롤레타리아문학, 계급문학을 주장하신 분들이 항일운동을 하신 분들인데도 민족문학이라는 개념을 수용 안했고요. 해방 이후에 들어와서 카프(KAPF) 하던 사람들 중에 임화(林和)나 김남천(金南天) 같은 분들이 지금은 계급문학 할 때가 아니라고 판단을 하고 민족문학을 들고나온 적이 있어요. 그게 6·25전쟁 거치면서…….

김두식 이북 가거나 사라지신 거죠.

백낙청 흐름이 끊겼고. 70년대 초에 다시 시작되면서 그때는 분단시대니까, 여전히 식민지시대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분단시대니까 분단된 대한민국의 국민문학이 아니고 민족 전체를 생각하는 문학을 하자는 뜻에서 민족문학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리고 문학의 보편성은 원론적으로 추구할 만한 가치지만, 보편성을 들먹이면서 민족문학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한국 사람이 쓰면 한국문학이지, 하는 사람들이 서양 선진국의 문화를 수입하면서 그걸 문학의 표본으로 놓고 하니까 거기에 저항하는 의미도 있었고요. 그리고 그 상황을 옥죄고 있었던 게 독재정권이어서 그에 저항하는 의미로 민족문학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87년에 군사독재는 끝났고, 하여간 그 시절이 논쟁적인 상황이었다고 하면 그 상황이 많이 달라진 거죠. 그래서 내가 그걸 2006년도에 정리를 해봤는데요, 어느 잡지에 실린 게 아니고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창비)이라는 평론집을 내면서 서장으로 「민족문학, 세계문학, 한국문학」이라는 긴 글을 썼습니다. 그래서 2006년 시점에는 그런 식으로 민족문학을 논쟁의 초점으로 삼는 시기는 지난 것 같다, 그러나 그 시점에도 아직 유효한 민족문학의 의미는 어떤 게 있을까 하는 걸 몇가지 살펴본 바가 있어요. 간단히 말씀드리면, 민족문학 개념을 처음 제시할 때의 문제의식은 유효하지만 민족문학 개념을 중심으로 담론을 끌고 갈 논쟁적인 맥락은 거의 사라졌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 책이 너무나 안 팔렸기 때문에,(웃음) 내가 그런 걸 썼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김두식 저는 일상적으로 순수문학하고 참여문학의 대립에서 참여 쪽을 대변하는 용어 중의 하나로 민족문학이라는 표현이 쓰이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요.

백낙청 그러니까 순수와 참여의 원론적인 대립이 있다가 거기에 우리의 민족현실, 특히 독재하에 분단되어 있고 대외의존도가 심한 현실을 구체적으로 채워넣은 거죠.
김두식 그래도 지금 상황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의미가 있을 수 있는 거죠?

백낙청 옛날에 쓰던 그대로 되풀이하고 고집하는 사람도 꼴통이고, 민족문학이라고 얘기하면 무조건 촌놈 취급하는 사람들도 가슴에 손을 얹고 그게 우리 시대의 전반적으로 냉소적인 기질의 반영인지 생각해볼 만하죠.

황정은 얼마 전에 들은 재밌는 얘기였는데, 선생님께서 「민족문학, 세계문학, 한국문학」을 책으로 정리해서 내셨는데 그 책이 안 팔린 탓인지, 서울이 아니라 지방 쪽에 계신 분이었는데, “민족문학이 끝났으면 끝났다고 얘길 해야지 끝난 줄도 모르고 내가 이걸 붙들고 얼마나……” 이렇게 불평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웃음)

백낙청 그거는 정리하기 전부터 그런 얘기들이 많이 있었어요. 민족문학이 일종의 구호랄까 깃발로서의 용도는 많이 사라졌다고 그랬고. 70년대에는 논쟁적인 개념으로 유효하기도 했지만 그런 개념을 쓰다보면 소위 진영논리가 생기거든요. 그래서 민족문학 진영의 작가가 있고 그렇지 않은 작가가 있고, 이렇게 편을 가른단 말이에요. 사람의 성향에 따라서는 어느정도 갈라지긴 합니다만 작품은 그렇게 가를 수가 없는 거잖아요? 작품은 달리 봐야 하는데, 그걸 작품 위주로 보지 않고 사람 위주로 보는 폐단이 생겨요. 그건 나도 경계를 한다고 했지만 은연중에 그런 게 있었어요. 지금 누군가가 눈을 밝혀서 쭉 검사를 해보면 나오는 게 있을 겁니다.

김두식 선생님도 완전히 자유롭긴 힘들다는 말씀이시죠.

백낙청 자유롭지 않았다는 거죠. 그런데 내 경우에는 애당초부터 그냥 진영논리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하고, 더구나 그 진영논리의 폐단을 일찍 지적하면서 당시로서는 우리 편이 아닌 작품을 평가하기도 했어요. 90년대 중반에 쓴 어느 글에서는 시인 중에 김기택(金基澤) 같은 시인을 이야기하고 신경숙(申京淑) 작가 작품 이야기하고.

김두식 『외딴방』(문학동네 1995)에 대한 글을 쓰시고요.

백낙청 『외딴방』은 조금 더 뒤고요. 『풍금이 있던 자리』(문학과지성사 1993)부터 신경숙을, 그때 처음 알았죠. 그래서 그전 작품도 찾아보고 그랬는데, 그랬을 때 반발하는 동지들이 꽤 많았습니다. 왜 우리 편은 안 띄워주고…….(웃음)

김두식 오, 이거 재밌다. 오늘 방송 망할 줄 알았는데 재밌는 얘기 나오는 거 같아요.

백낙청 그럴 때 나온 얘기 중의 하나가 “우리는 열심히 지방에서, 예하부대에서 민족문학을 위해서 싸우고 있는데 본부에서 바꿨으면 바꿨다고 알려라도 줘야 돼지 않냐…….”

황정은 아, 그게 그래서 나온 얘기군요. 그런 맥락이 있었구나. 그런데 이전 세대에서도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최근에 문학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학이 뭘 할 수 있는가 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가능한가, 이런 고민을 실제로 소설이나 시 쓰는 분들이 상당히 하는 걸로 알고 있고 그에 관련된 논의도 활발하게 전개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문학의 사회적 역할이 무엇인지 궁금해요.

백낙청 내가 그렇게 황작가에게 물었으면 틀림없이 답을 안했을 거야.(웃음)

황정은 우와, 네.(웃음)

김두식 내가 얘기했죠, 오늘 이런 일이 분명히 생긴다고? 오늘 얘기 왔다 갔다 하다보면 분명히 백선생님이 이렇게 돌려치고 나올 장면 있을 거라고 미리 얘기했습니다.(웃음)

백낙청 그래서 거기에 정면으로 답하기보다, 우리가 80년대에 완전히 정치주의적인 문학이나 문학론이 승했잖아요? 90년대에 그에 대한 반발이 강했고, 2000년대에 들어서까지도 문학과 정치, 문학의 정치성 얘기를 하면 촌놈 취급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게 우리가 편리하게 잡는 기점은 진은영(陳恩英) 씨가 『창작과비평』에 쓴 글을 가지고 잡는데,3) 어쨌든 그 무렵부터 이 얘기가 활발하게 제기가 된 것은 우리 문학이 그만큼 더 성숙한 결과라고 보고요. 그런데 논의 진행을 보면 진은영 씨의 문제의식을 제대로 살려서 진전시키려는 사람들이 있는 한편에, 쓸데없는 얘기해서 남의 힘 빼는 그런 얘기들이 참 많아요. 가령 랑시에르(J. Rancière)가 나름 정치를 정의하는 게 있지 않습니까. 보통 우리가 정치라고들 말하는 건 치안이지 정치가 아니다, 정치라는 건 그야말로 이제까지의 우리의 감각적인 것, 감수성의 배분을 바꿔놓는 것, 그래서 기존 질서를 바꾸는 게 정치지 그렇지 않고 주어진 틀 안에서 하는 정치는 치안이다라고 얘기했는데, 그게 한편으로 중요한 지적이긴 하지만 사실 한편으로는 치안하고 정치하고 잘 구별이 안되거든요. 불란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특히 한국 같은 데서는. 용산참사 같은 경우는 치안을 제대로 했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 아니에요? 동시에 정치의 문제고. 그 사건으로 인해서 많은 젊은 문인들이 다시 현장에 나가서 낭독회도 하고 하는 계기가 됐는데, 그런 논의를 심화시키려는 노력이 있는가 하면 정치의 의미 자체가 확실치 않다고 해서 외국 이름들 끌어들여서 생산적인 토론이 안되게 하는 경우도 있고. 그런데 우리 문단만 그런 건 아니에요. 학계도 보면 의미있는 문제제기가 나오면 그걸 물타기하고 판 흐려놓는 걸 업으로 삼는, 본인은 의식 안했더라도 그렇게 하는 유식한 분들이 많죠.

황정은 그렇지만 그분들한테는 어떻게 보면 그게 자신들의 흐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30도 각도로 흐르는 물에서는 45도 각도로 들어오는 물이 이 물을 흐려놓는 물이지만, 45도 각도로 흐르는 물은 자기 나름의 흐름이잖아요. 저는 그래서 그런 의견도 충분히 존중받을 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고요.

김두식 현실이 어렵다보니까 과거에 했던 순수냐 참여냐 하는 논의가 훨씬 더 구체화되어서 전개된다는 점에서는 좋다고 생각해요. 아주 안 좋은 현실 속에서 문인들이 자기들 쓰고 싶은 거 쓰다가 현실이 우리가 생각한 것만큼 좋은 게 아니구나 하는 걸 깨닫고 다시 이런 논의를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 같거든요.

백낙청 아까 말했듯이 이런 논의가 몇년째 이뤄지고 있다는 것 자체는 굉장히 긍정적인 현상이죠.

황정은 선생님께서는 영문학하고 철학을 공부하셨고…….

백낙청 영문학만 했어요.(웃음)

황정은 철학은 전공 않으셨나요?

백낙청 철학은 강의 좀 듣고 그런 거고,(웃음) 원래 학부에서는 영문학하고 독문학을 전공했어요. 그러다가 대학원 가서 영문학을 선택했죠.

김두식 이 단계에서 제가 난제를 하나 던져야겠는데, ‘로런스’냐 ‘로렌스’냐 하는 문제가 있어요. 창비 하면 늘 부딪치는 문제가, 저도 책을 내고 제 책에서 ‘시스템’을 ‘씨스템’이라고 썼다는 이유로 김두식은 무슨 글을 이렇게 쓰냐는 비판을 받고 몇번이나 제가 아니고 창비 때문입니다, 해명을 했거든요.4) 예컨대 ‘이탈리아’가 아니라 ‘이딸리아’ 같은 창비가 고집하는 창비식 맞춤법 있지 않습니까. 이건 백낙청식 맞춤법입니까, 아니면 창비 출판사의 오랜 전통입니까? 이걸 고수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뭘까요?

백낙청 ‘로런스’는 거기에 해당이 안되고요. 국어사전에 그렇게 나올걸요.5)

김두식 보통은 ‘로렌스’라고 쓰잖아요?

백낙청 그게 잘못된 건데, 대개 일본 사람들이 영문학 연구도 우리보다 먼저 했고 서양문학 연구를 많이 해서 그 사람들의 표기를 통해서 알려지는데, 일본어에는 ‘ㅓ’라는 모음이 없어요. ‘Lawrence’ 하면 ‘로런스’라고 쓸 수가 없어요. 그래서 ‘로렌스’라고 썼습니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은 ‘로-’ 하고 장음 표시를 해요. 그래서 ‘로오렌스’ 이렇게 읽는데 한국어는 장단음 표시 안하잖아요. 그래서 로렌스, 로렌스 그렇게 읽게 돼요. 그것도 문제고 또 하나는, 우리말로 표기할 수 있는 외국말은 원음에 가깝게 한다는 게 원칙인데, ‘로런스’라는 사람을 ‘로렌스’라고 쓸 이유는 없는 것 같아서요. 나도 한참 지나서 고쳤습니다. 그다음에 창비 표기법은…….

황정은 된소리 표기법요.

백낙청 그거는요, 처음에는 나의 고집으로 시작됐는지 몰라도 지금은 지지세력이 좀 있고…….

김두식 학파가 좀 갈리는 것 같더라고요.

백낙청 네, 갈려요. 교정 보는 사람들은 굉장히 불편해요. 또 하나는, 책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잖아요? 그런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단적인 예로, 유홍준(兪弘濬) 선생은 부모들이 항의를 하는 거예요. 애들 성적 떨어뜨린다는 거죠. 그래서 유홍준 씨는 그걸 안 씁니다. 국립국어원에서 정한 표기법을 씁니다.

김두식 뒤에 따로 표기를 해놓고 그러던데요.

백낙청 그건 내가 그러자고 한 거예요. 색인이라도 넣어주자. 그래야지 창비 표기법으로 하면 이렇게 되는 사람이고 실제로 원음에 가깝다고. 그런데 국립국어원의 표기를 준수하지 않는 것은, 된소리 안 쓴다는 국어원의 원칙이 아무 근거가 없는 거예요. 한글 자모 스물넉자만 쓴다고 되어 있어요. 근데 우리가 한글을 쓸 때는 스물넉자를 적절히 배합해서 된소리도 쓰고 그러잖아요.

김두식 그 원칙이 그렇게 해서 나온 거예요?

백낙청 ‘스물넉자만 쓴다’ 원칙은 한글에서 안 쓰는 글자를 일부러 만들어서 외국어 표기를 할 필요 없다는 거고 그건 상식적인 건데, 그걸 자기들 멋대로 한글 자모 스물넉자만 쓴다고 해놓으니 된소리를 못 쓰는 거죠. 이건 행정 편의주의라 해야 하나. 행정에 꼭 편할 것도 없는데 일단 그렇게 관료주의적으로 정해놓고 고집을 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영어식 표기를 위주로 했잖아요. 그러니까 문제가 안되는 거예요, 된소리 없는 게. 그리고 불어 같은 경우는 된소리가 있는데 대신에 가령 [p] 같은 경우는 ‘ㅍ’도 있고 ‘ㅃ’도 있는 체계가 아니거든요. ‘빠리’를 ‘파리’라고 해도 ‘파리’라는 다른 단어와 혼동될 염려가 없으니까 당시로서는 큰 문제가 안됐는데, 점점 여러 분야를 연구하고 여러 나라에 관광객들이 다니고 그러니까 상황이 달라졌죠. 우선 태국에 갔을 때 ‘Phuket’이라는 유명한 관광지가 있잖아요. 거기 태국말로는 ‘켓’하고 ‘껫’이 완전히 다르다고 해요. 그래서 몇가지 예외를 두기 시작했어요. 별 명분 없는 조치인데 철회는 못하고 야금야금 예외를 만들어가고 있는 거죠. 그리고 전공 연구자들도 국어원 표기법을 잘 안 따라요. 중국어 하는 사람들도 안 따릅니다.

김두식 러시아어도 따르기 곤란한 것 같고요.

백낙청 러시아어는 따라도 큰 문제가 없어요. 가령 [p]로 썼으면 ‘쁘’로 읽으면 된다 하는데, 어떤 언어에서는 ‘쁘’와 ‘프’의 구별이 다 있단 말이에요. 한국어도 그렇고. 그러니까 여기저기서 무너지고 있는데 아직까지 그 원칙을 바꾸지 않은 걸로 압니다. 그래서 창비는 말은 많지만 끝까지 버텨보자, 하고 있습니다.

김두식 영어 표현일 때 지적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러시아어나 스페인어 같은 경우는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는데 영어 표현은 눈에 익숙하잖아요. ‘system’이면 ‘시스템’으로 적는 게 익숙한 상태에서 독자들이 항의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왜 너만 이렇게 쓰냐는 식으로. 이건 일종의 창비의 자존심 같은 거군요.

백낙청 애국심이죠.(웃음)

김두식 밖에서도 지금 다 웃고 있어요. 창비 관계자 분들도 다 웃고 계세요.(웃음)

황정은 머리는 왜 움켜쥐시는지.(웃음)

김두식 최근에 서민(徐民) 교수님이라고 「라디오 책다방」에도 나온 단국대 의대 교수님이 「세월호와 독서」(『경향신문』 2015.4.14.)라는 글을 써서, 사람들이 요즘 소설을 안 읽어서 공감능력이 떨어진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저희도 최근에 ‘시적 정의’라고, 김영란(金英蘭) 대법관 모시고 말씀 나눌 때에도 법관들도 마찬가지로 문학을 안 읽다보니 공감능력이 떨어진다는 얘기 했는데요, 문학을 읽어야 공감능력이 생기는 걸까요? 우리 시대에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공감, 이런 건가요?

백낙청 문학작품을 많이 읽으면 공감력이 커지는 건 사실인 것 같아요. 문학을 안 읽는다고 안 생기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쉽게 공감력을 키울 수 있는 게 문학작품을 읽는 거고, 소설은 조금만 재미 붙이면 재밌잖아요? 그걸 안하니까 그만큼 손해 보고 있는 거죠.

김두식 이제 저희가 선생님과 창비 얘기를 조금 했으면 좋겠는데요, 창비라는 출판사와 계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창작과비평』이 내년이면 50주년을 맞는데, 계간지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고요. 저도 선생님이 1966년, 스물여덟살의 청년으로 쓰신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라는 글을 쭉 다시 읽어봤는데 요즘으로 치면 20대 논객들의 결기랄까 그런 게 느껴지더라고요. 요즘 글 쓰는 젊은 사람들 중에 확 지르는 친구들이 있잖아요? 선생님이 스물여덟살에 쓰신 글을 보면서 이분한테도 이런 젊은 시절이 있었구나 싶게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글을 읽을 수가 있었는데, 창간사를 다시 보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백낙청 내가 그 글을 다시 잘 안 읽습니다. 별로 유쾌한 경험이 아니라서요.(웃음)

김두식 왜요?

백낙청 아 뭐 젊은 패기나 열정은 있겠죠. 있는데, 내가 낸 첫 평론집의 서문을 보면 그 글을 실을까 말까 망설였는데 역사적인 의미도 있고 실으라고 해서 실었다, 그런 얘기가 나오고요. 그보다 훨씬 전에, 평론집 나온 건 1978년인데 66년에 그걸 쓰고 3년 후인 69년에 「시민문학론」이라는 걸 썼는데 거기 보면 내가 누구라고 말을 안하고 인용하면서 들입다 깐 부분이 나옵니다.

김두식 누구죠?

백낙청 그게 나예요. 내가 나를 깐 겁니다.

김두식 그런 것도 하셨어요?

백낙청 창간사의 한 대목을 두고 내가 이런 형편없는 소리를 했다, 그랬습니다. 별로 자랑스러워하진 않는 글인데 뭐 역사적인 의미는 있겠죠. 최근에는 50주년이니까 여기저기서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고 근래에 와서는 『창비』 잡지를 두고 글을 쓰는 분들도 있고 해서 그게 중요한 자료인 모양인데, 그분들한테 맡겨놓으면 되겠죠.

황정은 당시 창간사에서 한국문학의 빈곤을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과거 문학의 후신도 아니요 현재 세계문학의 일부도 아니며 그렇다고 20세기 한국이라는 소우주가 따로 있어 그 속에서 자기나름의 완벽한 기능을 가진 것도 아닌 문학”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50년이 흐른 거잖아요.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백낙청 전체적으로 아직도 한국문학이 아주 풍성한 문학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그렇지만 과거 문학의 후신이 아니다 하는 얘기는 「시민문학론」을 쓰면서 바로 수정을 했고요. 전통이 단절된 면은 많지만 전통단절로 가는 건 요즘 말로 하면서 싸가지 없는 짓이고. 요즘도 싸가지 없는 ‘애들’이 많아요, 내가 볼 때는.(웃음) 근데 나도 싸가지 없었으니까 너그럽게 보죠. 그다음에 세계문학의 일원도 아니다 하는 대목은, 앞부분의 전 세대 문학을 부정하는 태도가 바뀌면서 과거에도 우리가 세계적으로 내놓을 게 많지는 않지만 아주 없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후로 생산된 한국문학 중에서, 그게 꼭 외국어로 번역되어서 인정받았냐 아니냐를 떠나서 잘 번역해서 내놓으면 인정을 받아 마땅한 작품들이 더러 나왔다고 생각해서 두번째 얘기도 수정해야 할 것 같고요. 소우주 얘기 한 건, 부족한 문학이라도 우리끼리만 닫혀서 살면 좋은 줄 알고 읽고 지낼 수 있는데 지금 그런 시대도 아니지 않느냐 하는 뜻이었는데 그건 어떻게 보면 하나 마나 한 소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도 한국문학을 판단할 때하고 외국 작품을 판단할 때 기준을 달리하잖아요. 그러지 말고 한국문학이나 외국문학이나 같은 안목으로 판단하고 논의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죠.

김두식 계간 『창비』는 유신시대에 판매금지를 당했고 군사정권 때 폐간된 경험이 있습니다. 80년의 강제폐간 이후에는 허가 없이 잡지를 냈다는 이유로 출판사 등록도 취소되어서 당시에 ‘창작사’라고 출판사명을 바꾸기도 했고 88년 복간되기 전까지 잡지 못 내는 고초를 겪었는데, 『창비』 내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가 언제였는지 궁금합니다.

백낙청 군사정권이라는 말을 굉장히 한정해서 쓰는 것 같은데, 크게 봐서 군사정권이 두번 있었죠. 박정희 정권, 전두환 정권. 판금당하고 한 것도 다 군사정권 안에서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고요. 사실 잡지가 판금되고 불려다니고 그런 일 자체는 별로 어렵지 않았어요. 내가 잡지 때문에 잡혀가서 영영 감옥을 간다든가 하지 않아서 이렇게 생각하는 면도 있지만, 그때는 잡지가 한번 당하고 나면 그다음 호가 훨씬 더 많이 팔렸거든요.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중정(중앙정보부)에 가서 며칠 있다 나오면 존경하는 사람도 많고 박수 치는 사람도 많고. 잡혀들어가는 건 싫지만 들어가서는 기왕에 왔으니까 며칠 있다가 가는 게 장사가 더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살림은 어려웠지만 그것도 괜찮았는데, 나중에 출판사 차리고 영인본 장사하고 하면서, 책은 많이 팔렸지만 관리를 할 줄 모르잖아요. 경영을 못하니까 밑엣놈이 돈 떼먹고 달아나기도 하고. 우리가 은행 계좌가 없으니까 친구나 친척의 어음을 빌려서도 하고 시기가 되면 갚아야 하는데, 그게 어려울 때는 정말 아주 속이 타죠. 그런 게 사실 더 힘들었어요. 돈문제가 힘들었고. 그다음에 85년 전두환 정권 때 출판사 자체가 등록취소가 됐잖아요. 그때는 좀 속이 탔어요. 왜냐하면, 주변의 젊은 친구들은 “그까짓 거 자폭하고 저항하고 말지” 그러지만, 필자 한 개인이라든가 잡지 하나가 없어지는 거라면 자폭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우선 딸린 식구들 있죠, 사원들 직장도 있고, 또 수많은 사람들이 창비에서 책을 출판했는데 그게 다 창비 이름으로 못 나가는 거 아니에요? 그때는 김윤수(金潤洙) 선생님이 대표를 하셨는데, 당국에서 나하고는 대화도 안하려고 해서 김윤수 선생이 나서서 당국과 협상도 하셨고요. 외부에서도 지원을 많이 해주셨죠, 국제적으로도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그래서 ‘창작과비평’에서 ‘비평’ 떼고 ‘창작사’라는 이름으로 다시 출판 등록을 받은 겁니다. 잡지가 없어진 건 80년이고, 출판사가 85년에 없어졌다가 86년에 이름 바꿔서 다시 살아납니다. 그랬다가 6월항쟁 이후 88년에 잡지도 복간되고 출판사 이름도 되찾았죠.

황정은 저는 편집자로 일하실 때 일화가 좀 궁금한데요. 원고 끝까지 안 준 필자라거나 애먹인 필자들이랑요.

백낙청 편집일 더러 해보셨나?

황정은 아니요.

백낙청 편집일이 굉장히 중요한 작업이라고 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편집자들이 별로 대접을 못 받는데, 우선 저자가 쓴 걸 읽고 제일 먼저 판단하는 게 편집자죠. 그리고 『창비』 잡지 처음부터 그랬고 출판사도 쭉 그래왔는데, 이름있는 사람이 써왔다고 그냥 싣지는 않거든요. 고치자는 얘기도 하고, 반발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데 그 과정이 중요하고, 지나고 보면 감사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거든요. 또 하나는, 평론가하고 편집자의 입장이 다른 게, 둘이 섞이지만 원론적으로 말하면 평론가라는 건 다른 생각 다 버리고 작품이 좋냐 나쁘냐를 객관적으로, 시시비비를 가려서 정직하게 말하는 게 평론가의 의무 아니에요? 그런데 편집자는 교수나 교육자에 더 가까운 면이 있습니다. 이게 좋지는 않지만 더 붙들어놓으면 더 좋은 게 나오지 않을까, 이런 전략적인 판단도 있어요. 이런 판단을 하는 사람이 편집자예요. 물론 나쁜 전략적 판단도 있어요. 안 좋은 작품이지만 돈벌이가 되겠으니까 하자, 이것도 편집자의 역할이지만, 좋은 의미로 보면 편집자에게는 길게 보면서 전략적으로 판단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편집자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한데 우리나라는 대접을 못 받는 경향이 있고. 내 경우에는 교수를 하면서 편집자도 했으니까 편집자라고 무시당하진 않았지만.

황정은 그때는 지금처럼 컴퓨터로 파일을 주고받던 시대는 아니니까 원고 주고받다가 분실하거나 이런 일도 있었을 것 같아요.

백낙청 그런 일이 있어요. 신상웅(辛相雄) 씨라고 『심야의 정담(鼎談)』이라는 장편을 『창비』에 연재했는데, 마지막회분을 써왔는데 두고서 못 찾은 거예요.

황정은 누가 분실한 거예요? 작가가?

백낙청 작가는 우리한테 줬고, 우리가 받아놓고 보관했는데 못 찾은 거죠.

김두식 세상에.

백낙청 할 수 없잖아요. 어떡하냐, 본인한테 알려주자. 그러니까 본인도 황당한데…….

김두식 원본이 없는 거죠?

백낙청 그렇죠. 유일본이죠. 그래서 다시 찾아보겠습니다만 정 뭣하면 새로 써야겠습니다, 했는데 그게 어딘가에서 나온 거야. 그런 일도 있었어요.

황정은 영영 못 찾은 원고도 있었나요?

백낙청 그런 규모로는 없었지만 아마 있었겠죠.

김두식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빛나는 삶을 보내신 면이 있잖아요. 일찍이 미국에서 유학을 하셨고, 중간에 병역의 의무를 다하겠다고 돌아온 청년 백낙청이라고 해서 신문에도 나고. 그래서 나중에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실에서도 근무를 하게 되셨고, 그 이후에 굉장히 빨리 서울대 교수도 되셨고, 교수 되고 난 뒤에 다시 미국으로 가서 박사학위를 따셨고. 어쨌든 ‘영어 천재 백낙청’의 빛나는 시기가 있고 그다음에 생각보다 길게, 74년에 해직이 되고 복직하신 게 84년인가 그렇죠?

백낙청 아니에요. 학교에 돌아간 건 80년 ‘서울의 봄’ 때 복귀했는데, 엄밀한 의미의 복직은 아니었어요. 신규 특채로 들어갔고 파면취소청구 소송은 대법원에 계류 중이었어요. 그러다가 1년 지나고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패소했습니다. 신문에 나니까 또 쫓겨났는가 하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는데 그때는 이미 신규채용으로 서울대에 있었고, 만약 그 소송을 이겼으면 공백기의 월급도 받아내고 퇴직금 몰수당한 것도 되찾을 수 있는데 못한 거죠. 하지만 뭐 죽은 사람도 있는데요.

김두식 저희는 종종 이런 농담을 하는데, 그래도 백선생님은 맞지는 않았을 거다, 하고요. 남영동 대공분실 같은 데서도 조사받고 그러신 거잖아요? 그래도 설마 누가 백낙청을 때리지는 못했을 거다 하는 얘기를 우리끼리 웃으면서 하는데, 맞지는 않으신 거죠?(웃음)

백낙청 네, 안 맞았습니다.(웃음)

김두식 그리고,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었어요. 요즘 저도 개인적으로 암울하다는 느낌이 있거든요. 한국 사회가 그래도 10년 후에는 더 나을 거다라는 믿음이 제 안에 있었는데, 요즘은 그걸 잘 모르겠고 우리나라가 길이 있나 싶고요. 미래가 잘 보이지 않는 시기, 저도 그렇고 친구들도 그런데, 선생님은 그 시기를 엄청 길게 보내셨던 건데 미래가 보이지 않는 시기에는 어떤 힘으로 견디셨는지 그런 걸 여쭤보고 싶었어요.

백낙청 그때 박정희 정권이 언제 끝난다, 그런 걸 예견하진 못했죠. 그래도 영영 갈 거라곤 생각 안했고, 가는 데까지 가보자. 나이도 젊고요. 그리고 70년대는요, 전체적으로 80년대보다 덜 살벌했습니다. 광주항쟁 이전이거든요. 광주 이후에 학생들이나 운동 전체가 훨씬 더 과격해져서 정부와의 대립도 더했죠. 70년대도 전태일 사건도 있었고 YH사건도 있었고 노동자들이나 이런 사람들은 사정없이 탄압을 당했지만, 그때 민주화운동권은 80년대처럼 기반이 넓은 게 아니고 학생운동 일부하고 명사들 얘기라서 다소 낭만적인 분위기가 없지 않았죠.

김두식 미래에 대해서 이게 끝날 거다, 전두환 때든 박정희 때든 이게 오래가지 못할 거다 하는 생각이 있었던 거군요.

백낙청 전두환 때는 더 확실했고요, 오래가지 못한다는 게. 박정희 때는 임기가 없잖아요. 훨씬 막막했습니다만, 전두환은 자기가 단임제로 하겠다고 하고서 7년 끝나고 자기 비슷한 사람을 심어놓을 생각을 했겠지만 꼭 뜻대로 되라는 법은 없고. 박정희는 얼마나 오래 살지 모르잖아요. 중간에 무너져도 어떤 희생을 치를지도 모르고. 막막하긴 했지만 그때는 젊어서 그런지 그렇게 절망감은 없었어요.

김두식 지금 우리 상황에 대해서도 낙관하시는군요.

백낙청 나는 앞이 안 보인다, 10년 후에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는 무책임한 얘기 같아요. 공부 안하는 사람들이 그냥 해보는 얘기고. 사태를 제대로 들여다보면 몇년 후에 확 바뀌거나 훨씬 어려워진다, 이렇게 봐야 할 것 같아요. 훨씬 더 어려워졌을 때 어떻게 대응할지 그건 그때 가봐야 알겠지만 지금도 그런 생각은 해봐야 될 것 같습니다. 누구는 지금 파시즘이 다시 왔다 하지만 나는, 어디서 그런 글도 썼지만 파시즘은 아무나 하나.6) 파시즘 할 째비들이 못되거든요. 우리 사회가 반드시 이뤄야 할 전환을 몇년 안에 못 이루면요, 혼란이 훨씬 더 심해지고 그러면 국민들이 차라리 제대로 된 파시스트가 나와줬으면 좋겠다 하는 정서가 퍼질 수도 있다고 봐요. 그러면 좀 겁나는 사태가 오는 거죠. 지금보다 살상이 커지고.

김두식 네. 그리고 출판사들의 특징, 계간지들의 특징이 예전에는 창비하고 문지가 확실히 구별이 된다든지 그랬는데 요즘은 창비든 문학과지성이든 문학동네든 문예지나 출판사들의 색깔이 사라진다고 걱정하는 분들도 있는데, 어떠세요?

백낙청 창비의 담론을 보면, 평론을 포함해서 색깔이 사라졌다고 보지 않아요. 다른 데서 약간 무시하는 쪽으로 가죠. 취급을 안하고. 작가들을 보면 딱히 창비 작가다, 문지 작가다 이런 거는 많이 없어진 것 같아요. 창비가 독자적으로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는 걸 잘 못해서 그런 것도 있고, 또 하나는, 정상적인 거 아니겠어요? 작품 잘 쓰면 이름있는 출판사 아무데서나 내는 게 좋은 거지. 그런데 70년대는 안 그랬어요. 가령 황석영의 「객지」나 「한씨연대기」 같은 거 『창비』 아니고는 실어주는 데가 없었습니다. 문학 이외의 분야에서도 리영희 선생도 그렇고 박현채 선생, 강만길 선생…….

김두식 다 여기 아니면 책도 못 낼 양반들이었던 거죠.

백낙청 네. 그분들을 실어주는 데가 어떤 데가 있냐면, 오히려 관변적인 성격의 잡지들 있잖아요? 정부에서 돈을 대거나 하는 잡지에 박현채 선생이 가끔 글을 썼어요. 그런 잡지 하다보면 경영자 입장에서도 가끔씩 그런 글 싣는 게 나쁘지 않고, 또 그 안의 실무자 중에는 어떻게든지 박현채 선생 같은 분의 글 하나 넣으려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경우 빼면 정말 우리 필자라고 대접해서 실어주는 데는 『창비』밖에 없었거든요. 그래서 더 구별이 되는 게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은, 당연한 현상입니다.

김두식 『창비』 40주년 때는 『창비』 편집진에서 ‘운동성의 회복’을 모토로 내걸었는데, 내년에 50주년을 맞이해서 전체적으로 계간지의 방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선생님은 50주년에는 뭘 하고 싶으세요? 이건 정말 흔치않은 일이잖아요. 생각해보면 스물여덟에 시작하셨기 때문에 50주년도 맞고 60주년도 맞고 그런 거지, 보통은 잡지 시작하신 분이 50주년을 직접 보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요.

백낙청 그렇죠. 그런데 오늘 나를 불러서 방송 망했다고 자꾸 그러시니까,(모두 웃음) 특종을 하나 드릴게요. 완전히 특종은 아니고 편집위원들이나 편집간부들은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요. 『창작과비평』 창간호가 나온 게 66년 1월입니다. 그러니까 2016년 1월이 50주년이 되는 해고, 봄호는 2월달에 나올 테고 그게 50주년 기념호가 되겠는데, 잡지 내기 전에 잡지 등록을 하잖아요. 잡지 등록을 한 게 1965년 12월이에요. 그래서 금년 12월이면 내가 편집인으로서 50년을 채웁니다. 그래서 자, 이 정도면 됐다 하고 내려놓을 생각이에요, 편집인을.

김두식 아, 예……. 아니, 이거 대박이 아닌 거 같은데,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백낙청 특종은 특종 아니에요?

김두식 특종 맞습니다.

백낙청 보도거리가 될지 안될지 모르겠지만 신문이나 언론에 아직 안 낸 거거든요.

김두식 마음을 먹으신 거군요.

백낙청 마음을 먹고 우리 내부에서는 공표를 했죠, 편집인은 그만한다고. 그리고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발행인은 아직 김윤수 선생이에요. 김윤수 선생도 나하고 같이 물러나시겠다고 해서 발행인, 편집인은 회사 대표가 자동적으로 겸임하는 것으로 바뀔 테고, 앞으로는 주간 중심제로 바뀔 겁니다. 지금은 주간이 있지만 편집인 밑에 있는 셈 아니에요? 실무는 다 하지만 편집인이 최종 책임을 지는 그림인데, 앞으로는 법률상의 발행인, 편집인이 편집권을 주간과 주간이 지휘하는 편집위원회에 독립시켜주는 체제로 바뀔 겁니다.

김두식 결심의 계기는 50년이라서 그런 거예요?

백낙청 50년인 게 크죠. 그러니까 내가 죽을 때까지 끝까지 해먹는 방법이 있고,(웃음) 아니면 적당한 시기에 내려놓는 건데, 50년이라는 게 딱 부러지는 해라서 그런 면에서도 적당하고. 또 하나 내가 내려놓는 게 중요하다고 보는 게요, 창비가 잘하고는 있는데 최대 약점이 백아무개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고들 해요. 그게 일말의 진실이 담긴 말 아니겠어요? 그래서 백아무개가 없는 계간지를 51차년도부터 만들어보아라…….

김두식 선생님, 원래도 굉장히 자율성을 중시하시죠.

백낙청 중시하지마는, 내가 편집인으로 있고 편집위원회에 참여하거든요. 실제로 진행을 주도하고 여러 사람들 의견 조정하는 일은 그간 백영서(白永瑞) 주간이 해왔습니다만, 그런데 그 정도가 아니고 아예 편집에서 손 뗄 테니까 잘해보시라 하는 거죠. 물론 글은 계속 쓸 거예요. 논객으로서는 기여하겠지만, 편집에서는 손 뗄 생각이에요.

김두식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50주년에 놀라운 기획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다가. 선생님 굉장히 어려운 결심을 하셨어요.

백낙청 50주년은 준비TF를 만들어서 작업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제일 큰 변수가 백낙청이가 계속 해먹을거냐 안 해먹을거냐 아니겠어요?(웃음) 2016년 준비를 할 때 거기에 맞춰서 준비를 해야 될 테니까 그 변수를 빨리 제거해줘야지 구체적인 계획이 나올 것 아닙니까.

김두식 아, 훌륭하세요. 정말 놀랐는데요. 저희가 오늘 긴 시간 문학평론가로서의 백낙청 선생님, 그다음에 『창작과비평』 계간지와 출판사를 운영해온 출판인으로서의 백낙청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봤는데 마지막에 갑자기 폭탄을 터트리셔서 저희도 깜짝 놀랐습니다. 첫번째 방송분을 일단 여기서 마치고, 잠깐 쉬시고 두번째 방송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오늘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백낙청 예, 고맙습니다.
 

후속 인터뷰(2015년 5월 11일)

김두식 오늘 창비 백낙청 선생님 모시고 여러가지 이야기 들어보는 두번째 시간입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백낙청 네, 안녕하세요?

김두식 지난주 녹음 때는 선생님이 마지막에 50주년을 맞아서 『창작과비평』 편집인을 그만둔다는 선언을 하셔서 제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좀 당황을 했어요. 방송이 잘 마무리됐나 모르겠네요.

백낙청 김교수가 언론인이 아니라서 그런 것 같아요.

김두식 언론인은 특종 잡았다고 좋아해야 되는 거죠. 통상 이런 큰 출판사들, 큰 기업, 정치인 등등은 2세한테 물려주는 그런 경우 많은데, 그런 생각은 안해보셨어요?

백낙청 내가 소위 친인척 관리는 제법 엄하게 해왔다고 자부합니다.(웃음)

김두식 원래 잡지일, 출판사일에 많이 개입을 안 시키셨군요.

백낙청 지금 딸아이는 비상임 편집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데, 얼마 안됐어요.

김두식 그런 식으로 물려주지 않아야겠다, 결심하신 이유가?

백낙청 내가 하는 동안에 친인척 관리하는 건, 친족들이 들어와서 설치면 다른 사람들이 일하기가 나쁘잖아요. 물려주는 문제는, 『창비』 잡지는 세습용이 아니지요. 회사가 주식회사고 영리법인이긴 하지만 이것도 어떻게 보면 사회 공물(公物)이고, 앞으로 어떤 형태로 안정되게 유지할지는 더 연구해봐야겠죠.

김두식 한국문학 얘기 오늘 할 텐데요, 한국문학에 대해 사람들이 늘 갖는 궁금증, 편견 같은 것들, 사람들이 궁금해할 만한 내용들로 질문을 꾸며봤습니다. 단순하고 무식해 보이는 질문이라도 너그럽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한국문학계가 흔히 ‘문단’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문단에 대해서 폐쇄적이다, 권위적이다 하는 얘기들이 있고요. 박민규 작가가 자주 얘기하잖아요. “문단이 어디 사무실이라도, 주소라도 있는 줄 알았어요, 이런 농담요. 문단이라는 것이 실체가 있기는 있는 건가. 왜 한국문학계 전체를 문단이라고 부를까. 역사의 산증인이신데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백낙청 문단이라는 게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는 존재 같아요. 어디 사무실 있냐 그러면 없는 건 분명한데, 단(壇)이라는 게 무슨 교단처럼 단이 있어서 그 위에 올라가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따로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데, 아주 없다고 할 순 없죠. 특히 우리 문학의 규모가 작았을 때, 등단 절차가 있고 매체가 뻔하고 그럴 때는 작품이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되면 거의 단 위에 올라가서 노는 사람들은 서로가 읽고 얘기하고. 그리고 특정 사무실이 있는 건 아니지만 잡지사, 신문사, 다방에 사람들이 모이는 건 어느 나라에나 있었던 예이고 우리라고 특별한 건 아닌데, 우리 문단에도 일찍부터 그런 문단하고 따로 노는 사람들이 있었죠.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만 해도 그런 문학인들 모임에 드나드는 분은 아니었고 이육사(李陸史) 같은 시인은 감옥살이, 독립운동하느라 어울릴 시간이 없었고. 그래도 문단이라는 게 있었고, 너무 폐쇄적으로 가면 나쁘지만 그런 동네가 있다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글쎄요, 요즘은 어떤지 황정은 씨가 더 잘 알지 않나. 문단이라는 게 있는 거 같아요, 어때요?

황정은 저는 일단 친구도 없습니다.(웃음)

김두식 일단 등단이라고 하는 절차는 우리 문학계가 갖는 특징이잖아요?

백낙청 등단이라는 절차도 지금은 많이 무너졌죠. 어디어디로 나오면 등단이라고 확실하게 인정해주는 몇군데가 있고요. 신춘문예, 주요 문예지를 통해서 작품 발표하고 데뷔하면 인정받는데, 그렇다고 그걸 안했다고 해서 전혀 인정 안해주는 것도 아니고 모호한 영역도 있죠. 그런 회색지대를 벗어나면 본인은 문인이라고 생각하지만 남들이 인정 안해주는 경우가 있는데, 그 경우에도 꼭 그 사람이 문인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는 뒷날 봐야지 알 일이죠. 『창작과비평』 창간하면서 내세운 것 중 하나가 신인과 기성 구별 없이 원고를 모집한다는 거여서 그렇게 광고가 나갔고 지금도 그 광고가 나가는 것으로 아는데, 지금은 그게 의미가 없어요. 우선 신인, 기성 구별 안하는 게 우리만 아니고 많이 있고, 또 우리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신인문학상이 있잖아요? 어린이 쪽에도 있고. 그런 우리 나름의 등단 절차를 병용하고 있으니까 예전처럼 철저히 무시하는 것과 다르죠.

김두식 상 주는 작품들 빼고는 대부분 등단 작가들의 작품이 올라오고 있고요. 현실적으로 그런 면이 있겠죠. 문단이 있냐 없냐를 떠나서 문단권력, 문화권력 이런 얘기들이 자주 나오는데요, 선생님도 문단권력, 문화권력 얘기 나올 때 손꼽히는 분 중 한분 아닌가요?

백낙청 그렇죠. 저 개인도 그렇고 창비도 그런데, 대개 그렇게 말할 때는 비판적인 뉘앙스가 강하죠. 그거를 사안별로 비판할 건 비판하되, 어느정도의 힘을 축적했다고 해서 무조건 권력이라고 배척할 필요는 없는 것 같고 그 힘을 제대로 행사하느냐 아니냐가 중요하겠고요. 그리고 그래도 어느정도의 실력을 쌓은 잡지들이 몇개는 있어야죠.

김두식 힘이 있다는 걸 부정은 안하시는 거죠? 지난 인터뷰에서도 많이 하신 얘긴데.

백낙청 힘이 있다는 걸 부정할 순 없는데 그 힘이 가령, 신문사 문화면을 맡은 기자의 힘보다 강한 거냐? 우리가 우리 나름의 담론을 개발해서 생기는 힘은 신문사 기자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신문사의 기자나 문화부장이나 지면을 잡고 있는 사람들이 지면을 통해서 행사하는 권력도 작은 게 아니죠. 또 그런 기관에 있으면 따라오는 부수사업들이 있지 않습니까? 상도 아주 큰 상을 주고, 심사를 맡긴다든가. 이런 걸 보면 계간지 중에서 조금 힘이 있다는 거지, 나는 아직도 우리 문학이나 문화의 지형 속에서 『창비』가 세속적인 힘이 큰 편은 못된다고 봅니다.

김두식 이제까지 나온 여러 비판 중 하나가 장르문학, 대중문학에 대해서 창비가 소홀한 거 아닌가 하는 얘기도 있어요. 선생님 개인적으로는 장르문학, 추리소설, 이런 것들 많이 읽거나 접할 기회가 있으세요? 여기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백낙청 내가 많이 읽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뭐 본격소설 따로 있고 장르·추리소설 따로 있고 판타지문학 따로 있고,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얼핏 보기로 추리 분야에 들어갈 수도 있고 판타지문학일 수도 있지만 소설이 제대로 됐냐 안됐냐가 중요한 거지, 어느 분야에 들어갔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김두식 근데 예를 들어서 창비에서 추리소설을 낸 적은 거의 없잖아요? 계간지에서 추리소설을 실어준다거나 하는 일도요. 그게 편집진의 취향 같은 걸까요, 아니면 공유되는 정서?

백낙청 취향도 있고, 능력의 문제도 있겠죠.(웃음) 그런 분야를 제대로 섭렵하면서 좋은 작품을 골라낼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도 추리소설 싣는다, 이러면서 실을 필요는 없잖아요? 추리소설을 평소에도 읽으면서 어떤 작가는 추리소설이라고 한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면서 골라내야 되는 거죠. 아동문학을 별도의 장르로 취급하지 않습니까. 요즘은 청소년문학이라는 것도 있고요. 그런데 옛날에 이원수 선생님 같은 분, 그분은 아동문학가이면서 우리 문단의 중요한 시인이고 소설가였다고 생각을 하고요. 내가 글에서 언급한 적도 있는데 김려령(金呂玲)이라는 작가가 『완득이』(창비 2008) 쓰고 『우아한 거짓말』(창비 2009) 쓰고, 그런데 평론가들이 이건 청소년문학이라고 해서 별로 취급을 안하거든요.7) 나도 자세히 평론한 건 아니지만 그런 작품을 마치 이거는 정통적인 문학이 아닌 것처럼 피해가는 건 옳지 않다는 의견을 낸 적이 있어요.

김두식 약간 의외인 게, 창비도 청소년문학으로 유명하거든요. 저도 종종 청소년문학이 왜 따로 있어야 되냐, 무슨 청소년문학이냐, 그냥 문학인데, 이랬다가 청소년팀한테 김두식 선생은 뭐 저런 소리를 하냐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는데, 백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니까……. 사실 다를 게 없죠.

백낙청 청소년이 주로 읽으라고 쓴 작품인데 청소년 아닌 사람이 읽어도 좋은 작품이 있고, 청소년을 상대로 내놓고 읽으라고 하면 무리다 싶은 작품도 있거든요, 좋은 작품이라도. 그러니까 일차적인 독자층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른 구분이고, 그 문학적 성과는 따로 판단할 수 있는 거죠.

김두식 그리고 편집위원 제도가 따로 있지 않습니까, 계간 『창비』에도? 문학평론가가 특정 출판사에 소속되는 것도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제도 아닐까 생각하는데요.

백낙청 아닐걸요. 아닌 걸로 압니다.

김두식 아, 외국 출판사들도 그렇군요. 역시 골라내는 안목이 있어야 하니까 소속된 평론가들이 있는 건가요?

백낙청 잡지가 제대로 되려면 그래도 문학에 대해서 또는 다른 문제에 대해서 뜻을 같이하고 평소에 소통을 하는 일종의, 에꼴(école)이라는 표현도 쓰는데 그런 게 형성이 돼야 하잖아요? 문학잡지 같으면 문학평론가, 연구자 빼고는 어렵죠.

김두식 출판사, 계간지는 책을 많이 읽혀야 하는 부담이 있다는 걸 아니까 특정 출판사에 소속된 평론가 입장에서는 객관적인 목소리를 내기가 어려운 현실적인 문제가 있지 않나요?

백낙청 편집위원이 그가 관여하는 출판사에 얼마나 ‘소속’하고 있냐는 따로 검토할 문제지요. 아무튼 편집위원의 경우는, 특정 작가와의 관계에서 편집위원만 돼도 건드리기 싫은 작가가 있죠, 그 회사의 간판 작가 같은 사람은. 그런 부담스러운 지점도 있지만 그냥 평위원은 그게 큰 문제가 아니라고 보고요. 나처럼 편집인 겸 주주가 되면 좀 달라지는데, 나는 글쎄요, 창비하고 가까운 저자, 출판사의 중요한 저자라고 해서 안 좋은 걸 좋다고 말하는 평론을 쓴 것 같지는 않아요. 더러 뒤표지에 추천사 써달라고 하면 좋은 말만 쓰게 되고, 약간 토를 달면 또 실무자들이 빼기도 해요. 그분 그렇게 건드리지 말라고. 이건 장르가 평론이 아니고 추천사인데 괜히 그렇게 토 달지 마십시오, 그런 적은 있는데, 하여간 완전히 왜곡된 평론을 그런 이유로 한 적은 없거나 거의 없으리라고(웃음) 믿고 있습니다.

황정은 온라인 서점하고 포털에 별점 시스템 있는 거 알고 계시죠? 이 시스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문학에 별점 매기는 시스템이요.

백낙청 매기지 못할 이유는 없잖아요? 우리가 그걸 신뢰할지, 별점이 많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건 아니라는 걸 독자들이 알면 좋은데, 어쨌든 막을 길도 없고요.(웃음)

황정은 세계문학과 한국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하면 좋겠는데요. 선생님께서는 D. H. 로런스 연구로 하바드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으셨고 40년째 가지고 계신 원고도 있다고 하셨는데, 로런스 말고 다른 작가를 연구할 생각은 없으셨는지? 예전에 ‘주체적 인문학을 위하여’라는 강의에서 조지프 콘래드(Joseph Conrad) 작품을 다루셨더라고요.8)

백낙청 네, 콘래드는 좋아하고 관심 많이 가진 작가 중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이 제 책 제목인데, 평론집으로 나온 지 벌써 4년 됐습니다만 최신 평론집인데, 그 2부를 보면 외국문학 얘기들이에요. 거기서 다루는 작가가 하나는 디킨스(Charles Dickens)고, 에밀리 브런티(Emily Jane Brontë)의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이라는 작품도 다뤘고, 엘리엇(T. S. Eliot)의 비평적 개념에 대해서 쓴 글도 있고, 그리고 토머스 하디(Thomas Hardy)에 대해서 쓴 글도 있어요. 많이는 못했습니다. 다 관심을 가진 작가들이죠.

황정은 서양 고전 읽기의 중요성을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말로 표현하신 적이 있더라고요. 왜 이이제이인지 설명 부탁드릴게요.

백낙청 그것도 조금 시대적인 상황과 관계 있는데, 아직도 유효한 표현인지 모르겠어요. 외국문학을 한다는 사람도 그렇고 일반 독자들도 서양문학에 대한 숭배사상이 있잖아요. 세계문학, 그러면 으레 서양문학, 우리를 변방의 오랑캐처럼 생각하는 게 있었는데, 그런 걸 꼬집느라고 우리식으로 하면 쟤들이 오랑캐인데 오랑캐문학을 읽어서 오랑캐를 제압하는 데 활용하자, 한 거죠. 서양의 기준을 맹종하지 말자는 뜻도 있고 우리의 민족적 주체성을 세운다든가, 제3세계를 강조해서 서양 고전을 배격하는. 그런데 그건 꼭 제3세계 사상과 관계 있는 것도 아니고 서양문학 내부에서도 점점 그런 담론이 많잖아요. 포스트모던에 와서 문학이라는 개념을 해체하고 고전 개념을 해체하고, 소위 고전이라는 작품이나 대중문학 작품이나 똑같은 문학이고 문건이고 문화현상이지 뭘 그리 고전을 따르느냐 하는 논의가 많이 퍼졌는데, 나는 그 점에서는 좀 완고한 문학주의가 있거든요. 고전이 수백년 동안 읽힐 때는 그렇게 읽힐 만한 이유가 있어서 읽히는 거고, 우리가 그걸 읽고 껌뻑 죽어서 서양문화나 서양문명 전체 앞에 굴복하면 안되지만, 진짜 좋은 작품들을 읽어보면 서양 사람들이 저지르는 못된 행태를 비판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게 이이제이라는 거거든요. 걔네들의 작품을 끌어다가 서양을 비판하면 효과적이고 재미도 있고 그렇지 않냐…….

김두식 세계문학 개념 자체도 다르게 얘기하시는 게 있죠. 집에다 꽂아두는 세계문학이 아니라 일종의 운동으로서의 세계문학이라고 해야 하나. 괴테나 맑스 인용하면서 그런 얘기도 많이 하시는데,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세계문학이 어떤 건지도 들려주세요.

백낙청 ‘세계문학’(Weltliteratur)이라는 용어를 처음 쓴 사람도 괴테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처음 쓸 때도 말씀하신 대로 운동적인 개념이에요. 각국의 고전들을 늘어놓고 그것의 총합을 세계문학이라고 하는 게 아니고,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서 지식인들과 문인들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있는 세상이니까 그런 상호소통을 바탕으로 종래의 문학과 다른 문학을 만들어내자는 주장을 괴테가 했거든요. 그 말을 알아듣고 지적한 사람은 내가 처음이 아니고 다른 분들도 있었습니다만, 아직도 괴테의 세계문학 그러면 괴테가 동서양의 문학을 섭렵하면서 훌륭한 문학을 인정했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맑스의 경우는 본격적인 문학론으로 전개했다기보다, 「공산당선언」에 그런 말이 나오잖아요? 부르주아 시대 들어서 세상이 많이 바뀌고 종래의 국가나 지역의 한계,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고 하면서 문학에서도 과거의 편협한 국민문학이나 민족문학 대신에 세계문학의 시대가 온다는 얘기를 했는데, 괴테와 맑스를 묶어서 괴테적・맑스적 세계문학 개념이라고 정리하는 것은…….

김두식 선생님이 그런 이름 붙이셨죠?

백낙청 과문한 탓인지 내가 처음이 아닌가 싶어요. 괴테의 경우나 맑스의 경우나 그 사람들이 각자의 민족언어, 국민언어일 수도 있고 지역언어로 된 문학을 철폐하고 전지구적인 문학을 만들자는 얘기는 아니거든요. 중요한 건 각자의 민족문학, 국민문학, 지역문학을 하되 그걸 새로운 정신으로, 특히 다른 나라 문인, 지식인과의 활발한 교류를 바탕으로 새로운 문학을 하자는 거니까, 흔히 포스트모던이라고 해서 전지구적으로 공유하는 대중문화하고는 개념이 다른 거예요. 거기에 비하면 전통적이고 낡은 생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제 취향에는 이게 맞습니다.

김두식 문학의 사회적 역할을 많이 고려하셔서 이런 개념도 잡으신 것 같습니다. 통상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고 하면 노벨문학상을 많이 얘기하고요, 우리나라도 노벨문학상 발표 나올 때면 고은 선생님 댁에 카메라 기자가 진을 치기도 하고, 출판사들도 각각 자기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 노벨문학상 받길 기도하면서 대기하고 보도자료도 만드는데, 한국 작가가 수상하는 거 언제쯤 가능한지, 수상하는 것 자체가 의미는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백낙청 그런 질문은 안하실 줄 알았어요.(웃음) 출판사의 경우에는 자기 회사에서 낸 책이 노벨문학상을 받길 바라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약발이 예전 같지는 않죠. 지금은 노벨상 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대박이 터지진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서, 출판사의 영리적인 이유와 상관없이 너무 법석을 떠는 건 촌티 아닌가 싶어요.

황정은 저는 한국에서 노벨문학상에 관심을 가지는 과정을 보면 대단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몇년 전부터 노벨문학상 때가 되면 굉장히 고대하고, 언론이 나서서 기사를 뿜어대면서 우리나라의 어떤 작가가 물망에 오른 것 같다, 베팅이 걸렸다, 그게 몇년 전까지였고요. 최근 몇년 사이에는 실망하고 냉소하는 분위기가 있는 거죠. 저는 이게 양쪽 다 웃긴 거예요. 한국에서 도서 구매에 관한 기사가 작년에는 2인 가정 기준으로 한달에 책 한권 사본다, 근데 올해는 책 한권 가격보다 덜 소비를 한다는 거죠. 한달에 한권도 안 사본다는 건데, 그런 나라에서 노벨문학상 씨즌만 되면 갑자기 관심 가지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이게 그들에게 왜 중요한가…….

백낙청 황정은 작가가 웃긴다고 그랬으면 웃긴 거예요.(모두 웃음)

김두식 출판계가 유사 이래 최악의 불황이다 하는 소리를 계속 듣거든요. 5, 6년째 단군 이래 최악의 불황이다,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백낙청 나는 직접 경영에는 관여하고 있지 않지만 창비사 사장이나 출판계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면 최근 몇년 동안 해마다 더 나빠진 건 사실입니다.

김두식 지난 시간에도 말씀하셨지만 경영의 어려움 같은 것도 겪어보신 거잖아요. 그런 것에 비해서는?

백낙청 창비사는 그때에 비하면 용 됐죠.(웃음) 그런데 출판계 전체로 어렵다는 거고, 창비는 이윤의 폭은 해마다 줄어왔지만 그래도 선방을 한 편에 속하죠.

김두식 책을 너무 안 읽는 시대로 가는 건 맞는 것 같거든요. 그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대책이 있는 건지, 그냥 좋은 책 만들면 되는 건가요?

백낙청 그냥 내버려두면 곤란하다고 생각해서 운동을 벌이는 사람도 있고, 「라디오 책다방」에 나오면 판매에 얼마나 직결이 되는지 안 물어봤는데(웃음) 이런 것도 저변을 넓혀가는 것 중 하나 아니겠습니까.

김두식 이것도 중요한 실험이죠.

백낙청 그래서 그것도 너무 절망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김두식 힘들다는 얘기를 너무 많이 듣다보니까 글 쓰는 사람들 입장에서도 그런 것 같아요. 인세라야 몇백만원 벌까 말까 한 상황, 책이 몇천권 안 팔리니까 이런 때 책을 써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정말 어렵긴 어렵고요. 대한민국의 오늘날 상황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사회와 정치에 대한 이야기 오늘 해야 될 것 같은데요. 분단체제는 백낙청 선생님의 오랜 화두 중 하나인데, 최근 들어서 사람들의 분단에 대한 생각은 점점 무뎌지는 것 같고, 특히 젊은 세대는 분단이나 통일 문제가 자기 개인의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듯해요. 예전에는 이산가족도 있고 했는데 그런 세대가 지나다보니까 선생님께서 ‘후천성분단인식결핍증후군’, 이렇게 이름을 붙이시기도 한 상황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분단체제가 왜 중요한 문제인가, 여전히 분단체제 극복은 왜 중요한 과제인가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볼까요?

백낙청 분단체제를 이해하자는 취지 하나는요, 분단이나 통일에 대한 관심만 가지고는 문제가 해결이 안되고 그걸 분단체제라는 차원에서 볼 필요가 있다고 하는 거거든요. 분단의 문제라고 하면 통일인데, 사실 통일, 통일 하지만 통일이 이제까지 되지도 않았고 단기간에 될 전망도 없잖아요. 근데 그걸 가지고 통일해야 한다, 통일이 될 거다 하면 헛소리죠, ‘통일 대박’을 포함해서. 그렇지 않고 통일이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해야 된다, 그러면 젊은이들한테는 실감도 안 나고 귀찮죠. 꼰대들이 통일해야 된다고 소리 지르고 말 안 들으면 젊은 애들 나쁜 것처럼 얘기하고 그러니까. 그래서 우리가 분단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대처해나가려면 통일의 개념부터 바꿔야 한다는 게 분단체제론의 취지예요. 남과 북을 아우르는 체제 비슷한 것이 있어서, 말로 통일하자고 해서 될 일도 아니고 한쪽 편을 들어서 다른 쪽을 욕한다고 해결되지도 않죠. 양쪽이 대립하면서도 공생하는 전체적인 구조를 보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나갈까를 냉철하게 인식해서, 필요할 때는 남북관계의 발전을 통해서 해결하고 어떤 대목은 국내에서 민주주의를 더 추진하고 복지를 향상해서 해결하고, 이런 게 맞물려가면서 분단체제보다 나은 체제를 한반도에 건설하자. 그리고 사람들이 통일방안에 대해서 잊어버리고 있는 게요, 2000년에 6·15남북공동선언에서 우리는 갑자기는 통일 안한다고 이미 합의했어요. 정확히 어떻게 할지는 명시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게 남측이 그동안 얘기해온, 그동안이란 노태우 정권 때부터입니다, 남북연합처럼 가든가, 아니면 북에서는 원래 연방제를 주장해왔는데 6·15공동선언에서는 좀 물타기를 해서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고 한 급을 낮췄습니다만, 둘이 공통점이 있으니까 그 방향으로 가겠다, 그게 정확히 뭔지는 분명치 않지만 통일을 단기간에 하거나 한꺼번에 하지 않고 중간단계를 거쳐서 점차적으로 하겠다는 합의거든요. 그런 식의 중간단계를 거치는 것이, 분단으로 인해서 야기된 여러가지 내부 문제, 청년실업 포함해서 젊은이들의 생활상의 문제까지 풀려면 이걸 종합적으로 보면서 풀어나가야 된다는 얘기를 하면 나는 젊은이들이 훨씬 더 호응할 것 같아요.

김두식 통일해야 한다는 것만으로는 안 먹힌다는 거죠.

백낙청 통일이 대박이고 곧 될 거다 그러면 “그래?” 그랬다가도 지나보면 아니거든요. 뻥치는 게 분명하니까요.

김두식 분단체제가 우리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를 자꾸 얘기하는 게 중요한 것 같고요.

백낙청 우리가 피부로 느끼는 생활상의 문제 있잖아요? 그걸 분단체제하고 연결시켜서 보는 훈련이 필요한 거예요. 모든 문제가 분단에서 유래한다는 식의 단순논리가 아니고, 어떤 모순은 남한 특유의 모순도 있고 어떤 문제는 자기 집안의 문제일 수도 있는 거고, 어떤 문제는 세계체제 전체, 자본주의체제라고 할까, 거기서 야기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게 한반도에 작용할 때는 분단이라는 특이한 현실의 매개를 거쳐서 한다, 이렇게 정확하게 보고 정확하게 대응하자는 얘기죠.

황정은 ‘분단비용’이라고 말씀하셨더라고요. 저는 분단비용이라고 하니까 확 와닿는 면이 있었어요.

백낙청 대개는 통일비용이 크다고 하지만 분단비용이 더 크다, 이렇게 말하잖아요? 그 대목 자체는 와닿는 면이 있지만 근데 통일을 어떻게 하자는 거냐, 그걸 풀어줘야 되거든요. 그저 통일, 통일 해서는 실감이 안 나요. 통일의 개념을 바꿔야 합니다. 우리가 1945년에 일제에서 해방되면서 통일국가 만들려다 못 만들었잖아요. 거기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단 말이에요. 그때 우리가 만들려다 실패했고 그러다 전쟁 거쳐서 분단이 굳어져왔는데 그럼 어떻게 통일국가 만들어볼까, 이런 생각인데 그건 적어도 당분간은 가망 없는 이야기죠. 그게 벌써 70년 전 이야기인데 70년의 세월이 지난 현재 한반도에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지만 세계 전체가 바뀌었는데, 이 시대에 꼭 그런 통일국가를 지향해야 하느냐도 검토해봐야 해요. 그러니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가 뭔가 하는 것은 진행하면서 차차 결정하고, 우선은 6·15공동선언에서 합의한 1차 단계, 그것만 해도 분단체제를 극복해가는 커다란 첫걸음을 내딛는 것 아니냐. 우리가 하자는 통일이 그런 거다, 그게 안됐을 때 온갖 기막힌 일이 벌어지게 마련이다 하는 거예요. 한반도 전체도 그렇고요, 북의 핵무장도 그렇고, 북의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는 것도 그렇고, 한국이 미국에 꼼짝 못하는 것도 그렇고, 청년실업 같은 생활상의 문화, 우리 사회의 ‘갑질’ 문화, 어느 사회나 있는 거지만 사실 우리나라의 열악한 실정은 분단하고 관련이 깊습니다. 우리 정도의 경제력과 문화수준을 가진 사회에서 이 정도로 낡은 시대의 ‘갑질’이 횡행한다는 것이나, 여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통계자료에도 나옵니다만 우리나라의 남녀평등지수라는 게 국제수준에서 보면 형편없거든요.

김두식 경제수준에 비해서 너무 낮죠.

백낙청 물론 더 나쁜 나라도 있지만 소위 경제대국이라고 하고 몇천년의 문화를 자랑하고 있고 또 교육수준이 엄청 높잖아요. 특히 여성들의 교육수준을 따지면 세계에서 굉장히 높은 나라일 겁니다. 요즘은 딸이니까 공부시킬 필요 없다는 부모는 별로 없잖아요. 일단 공부는 시키는데 공부하고 나와서는 사회에서 맥을 못 추는 거야. 이런 것이 분단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따져봐야죠.

김두식 거칠게 얘기하자면 어떤 관계가 있죠?

백낙청 소위 남성 위주의 문화라는 게, 군사문화라는 게 전형적인 남성 위주의 문화 아니에요?
김두식 거기서 시작됐다는 거죠.

백낙청 거기서 시작됐는지 어디서 시작됐는지 모르지만, 유교사회를 욕하는데 유교사회는 철저한 문민사회입니다. 그런 문민사회의 전통을 가지고 현대 국가로 이만큼 발전한 대한민국에서 군사문화가 이렇게 판치는 게 남북문제 없이 가능한 거겠어요?

김두식 저희가 지금 분단체제 설명도 들었지만 백낙청 선생님 하면 민족, 통일에 관한 이미지가 바로 떠오르는 면이 있는데요. 선생님이 자라오신 배경을 생각하면 궁금증이 생기더라고요.

백낙청 내 자라온 배경이 어때서 그래요?(웃음)

김두식 (웃음)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서 해외 유학에다가 여러가지 혜택을 누리신 부분이 있고. 물론 아버님께서 납북되셨다든지 하는 아픔이 있다고 해도 무엇이 백낙청에게 청년시절부터 민족, 분단, 통일 이슈를 붙잡게 했을까 하는 궁금증이죠.

백낙청 내가 ‘후천성분단인식결핍증후군’이라는 말을 썼는데, 사실 보수적인 사람들에게 그게 더 적습니다. 분단에 대한 인식 자체는 그들이 훨씬 더 가지고 있고, 특히 기득권세력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은 철저히 인식하고 수시로 이용해먹죠. 그래서 거기에 필적할 만한 분단체제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진보는 깨지게 되어 있다고 봐요. 그 사람들 못 당합니다. 그 얘기를 하는 이유는, 나도 보수진영에서 분단을 인식하고 통일을 생각할 만한 기반을 다 갖춘 사람이에요. 내가 원조 탈북자입니다. 1945년 10월에 탈북했어요, 평안북도에서. 국군포로, 납북자 문제 들고나오잖아요? 우리 아버지가 1950년 7월에 북측 당국에 의해서 연행되셨고 그후에 북으로 끌려가신 모양이니까, 나는 원조 납북자가족의 한 사람이죠. 그런데 나는 해법이 좀 다르죠. 그런 걸 인식하는 사람 중에 기득권을 누리는 데 몰두하는 사람들은 해결한다고 큰소리치면서 해결 안되기를 바라거나, 자기 나름대로 진지하게 해법을 내놓는데 현실성이 없는 거예요. “북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북측 동포를 구출하자”. 말은 근사한데 안되잖아요? 그런데 나는 그 문제를 인식하면서 현실적인 해법도 윤곽은 내놓았다고 자부하거든요. 그게 급진적인 통일운동가들이 하는 그런 통일론이 아니고, 분단체제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국내 개혁과 남북관계 개선을 병행하면서 남북의 재통합은 단계적으로 해나간다. 그게 안전할 뿐만 아니라 순리라는 말이에요. 지금 70년이 지났는데, 우리가 일제 36년이라고 그러지만 35년이거든요. 그럼 일제 식민지 생활의 꼭 두배를 산 겁니다. 이미 두배를 했어요. 세상이 얼마나 달라졌습니까. 일제시대만 해도 1910년 당시의 세계와 1945년의 세계를 비교해보세요. 완전히 달라진 세상 아닙니까. 게다가 변화의 속도는 더 빨라진다고 하는데 그런 세월을 우리가 70년을 살아놓고, 1945년 당시에 꿈꿨던 낡은 해법을 부르짖고 소리 지른다고 되겠어요? 그러니까 점점 더 젊은이들은 짜증내고 냉담해지고 그러는 건데, 그야말로 젊은이들하고 말이 통할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얘길 해야죠.

김두식 선생님의 개인적인 배경을 보면 보수우파가 되셨어야 하는데 현실적인 해결책을 찾다보니 이런 방향으로 가게 되더라는 말씀이시군요. 덕분에 고생을 하신 것도 있죠? 원래 타고난 배경에서 그냥 지냈으면 훨씬 편한 인생을 사셨을 것 같은데.

백낙청 고생도 했고 좋은 일도 많았는데 그걸 꼭 김두식 교수는 빛나는 시기가 있었다고 표현을…….(웃음)

김두식 죄송합니다.(웃음) 최근에 ‘성완종 리스트’ 같은 걸로 정치권이 혼란스럽고, 저는 박근혜 정부 이후에는 요새 우리나라에 정부가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전에 이명박 정부가 굉장히 헤맬 땐데, 이명박 정부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그래도 보수층에서 이명박과 그 주변 사람들이 제일 나은 사람들이다, 하는 얘기를 듣고 무슨 소리냐 싶었거든요. 그런데 요즘 보면 ‘어, 진짜 그 양반들이 제일 나은 사람들이었나? 지금 이 사람들은 뭐지?’ 이런 생각이 들고, 민주주의도 그렇고 정치적·사회적으로 우리 사회가 굉장히 퇴보했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선생님이 보시기엔 어떤가요? 이런 것도 분단체제의 시각에서 설명이 가능한가요?

백낙청 물론 분단체제론에서도 설명이 가능한데, 분단체제론에서 파생한 담론 중에 ‘87년체제’라는 말이 있잖아요. 87년체제론을 빗대서 내가 ‘2013년체제’를 만들자고 했던 건데, 2013년에는 87년에 맞먹는 새 출발을 하자는 취지가 있었고 또 하나는, 2013년체제라는 표현을 쓰는 분들도 거기까지는 생각을 공유 안한 부분도 많은데, 87년체제는 왜 이 모양 이 꼴이 됐느냐. 사실 그때는 우리가 엄청난 변화를 이룩하지 않았습니까? 좋은 변화고, 87년체제가 1961년 박정희 쿠데타 이래 군사독재체제를 무너뜨렸지만, 그 군사독재체제의 기반이 됐던 분단체제 또는 1953년 정전체제의 기반은, 흔들어놓기는 했지만 무너뜨리지는 못했단 말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87년체제는 소위 61년 독재체제하고 53년체제라는 기반을 공유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87년체제가 잘 돌아가서 너무 늦기 전에 다음 단계로 이행하면서 토대에 해당하는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꿨어야죠. 그걸 못해서, 처음부터도 보수와 진보의 타협으로 출범한 체제인데 분단체제에 확실한 기반을 가진 반민주세력은 강해지고 민주세력은 지리멸렬해진 거죠. 나는 이게 이명박 정부만의 책임이라고 보진 않습니다. 이미 노무현 대통령이 야심차게 했던 개혁들이 대부분 실패했잖아요. 그때부터 87년체제의 말기 현상이 비롯됐다고 보는데, 그때 국민들이 실망했을 때 이명박 씨가 나타나서 내가 집권하면 잘살게 해주고 경제 살리고 한다고 선진화 원년을 선포했잖아요.

김두식 그런 게 있었는지도 이제 기억이 잘 안 나요.(웃음)

백낙청 그것이 87년체제를 더 나은 것으로 바꾸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고 87년체제를 더 연장해서 점점 더 엉망으로 만들어간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명박에 대해서 불만이 가득했죠. 그때 나타난 것이 박근혜 후보 아닙니까. 그때는 그런 용어를 안 썼지만 87년체제를 끝장내겠다고 ‘시대교체’라는 말을 썼어요. 야당에서 정권교체 이야기를 하니까 “나는 정권교체 정도가 아니라 시대교체를 하겠다”, 이런 말을 했고 내용상으로도 경제민주화 하겠다 뭐 하겠다, 4대강도 다시 조사하겠다, 온갖 약속을 하고 당선되지 않았습니까? 국민들이 속기는 속았지만 그때 이미 87년체제는 안된다, 극복해라, 명령을 내린 건데, 이명박 때보다 더 나빠진 거죠. 박근혜 대통령 개인의 문제도 있고요, 또 하나는 전환할 때에 전환을 못하니까 점점 더 나빠지게 되어 있는 겁니다.

김두식 그게 이번에 나올 책을 만들게 된 계기 아닌가요?.

백낙청 그렇죠. ‘2013년체제 만들기’라는 얘기를 할 때 그런 게 이미 깔렸는데, 그때는 박근혜 정부 겪기 전이었죠. 겪어보고서 그 점이 더 확실해졌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황정은 저는 현재의 야당이 선거에서 실패할 때마다 이제는 ‘우클릭’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 선거에서 이기고 싶으면 우클릭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나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거든요. 대단히 어이가 없었는데, 실제로 문재인 대표가 이승만, 박정희 묘역을 참배하기도 했고 박원순 시장이 동성애를 부정하는 발언을 해서 곤욕을 치르기도 했잖아요.9) 이걸 우클릭이라고 봐도 될지, 이런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백낙청 이승만, 박정희 묘역 참배 자체만 가지고 우클릭이라고 단정할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야당 대표가 되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다른 걸 보면, 정부나 여당 쪽에서 종북이라고 몰아치니까 군복 입고 나서고 천안함사건 북한 소행이라고 얘기하는 거 보면 이 양반이 우클릭 노선을 택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은 가요. 정은씨가 어이가 없다고 표현했는데, 그건 어쨌든 망하는 길이죠. 그렇다고 좌클릭이 답이라는 얘기는 아니에요. 나는 소위 ‘변혁적 중도주의’라는 걸 얘기했는데, 중도주의는 중도주의인데 분단체제의 변화를 겨냥한 중도주의라는 거죠. 변혁성하고 중도주의는 사실 모순된 개념인데, 해당되는 층위가 다른 거죠. 중도주의라는 건 국내에서 이런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서 최대한으로 광범위하게 중도세력을 규합하고 좌우의 극단적인 세력을 쳐내야 한다는 거고. 그런데 그걸 할 때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해야 하느냐 하면, 한반도 분단체제의 작용으로 우리가 온갖 문제의 멍에를 쓰고 있으니까 이 체제를 변혁하는 것, 한반도의 분단체제를 그것보다 나은 사회로 바꾸는 것, 이걸 큰 목표로 삼고 그 목표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그 목표 달성에 맞지 않는 극단논리를 배제하자는 건데, 아직까지는 그냥 하나의 과제로 제시된 거지 광범위한 중도세력이 결집한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런데 야당의 대표쯤 되는 사람이 그런 인식과 경륜을 가지고 리더십을 발휘하면 금방 된다고 봐요. 국민들이 변혁적 중도주의라고 하면 어렵고 짜증나는 말이겠지만, 이제까지 좌우의 여러가지 단순논리가 나오는 것에 대해서는 저거 가지고는 안된다는 걸 피부로 다 알고 있거든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된다는 걸 유능한 정치지도자가 나와서 설득하면 풀릴 거고, 그럼 이건 좌클릭도 아니고 우클릭도 아닌, 어떤 면에서는 좌클릭도 하고 우클릭도 하는데 일관된 전략을 갖고 좌로 갈 건 좌로 가고 우로 갈 건 우로 가는 노선이죠.

김두식 근데 현실적으로는 이런 문제도 있지 않나요? 제가 문재인 대표를 위해서 변명을 하자면, 일단 문대표는 군복이 어울리고요. 총을 쏘면 자세가 나오잖아요? 군복 입고 일종의 쇼를 하는 건데요. 그 문제에 대해서 제가 문재인 대표한테 가서 이 문제가 분단체제에서 비롯된 건데, 이 분단체제의 중요한 결과물이 군사문화고 근데 야당 대표가 그런 식으로 군복 입고 총 쏘고 하면 안된다고 얘기하기에는 일반 국민들의 정서랄까 표를 가진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방법이 분단체제에 관한 이해, 설득만으로 될까 싶고…….

백낙청 김교수나 내가 문대표를 만나서 분단체제는 어떻고 저떻고 해서는 설득이 잘 안될 겁니다. 본인이 문제의식을 갖고 공부를 해서 자기 나름대로 깨닫고 자기 전략이 나와야죠.

김두식 철학과 방향을 가져야 한다는 거죠.

백낙청 이 나라를 옳은 방향으로 지도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든 공부해야 할 거라고 봅니다. 그게 아니고 계속 해먹겠다고 하면 그런 공부 할 필요 없어요. 그런 공부 안하고 해먹는 데만 몰두하는 사람이 유리할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이 공부가 없으면. 그러면 한쪽은 좋은 일 하겠다고 하면서 우왕좌왕만 하고, 이쪽은 수십년간 해먹은 노하우를 가지고 이번에 또 꼭 이기겠다고 하면 그쪽이 더 유리하죠.

김두식 공약을 다 뒤집어도 국민들이 궐기하거나 그러지 않잖아요. 그런 상황에서는 선거 때는 그냥 아무거나 막 던질 수 있는 건가, 기가 막히기도 하고요.

황정은 그렇지만 저는 박원순 시장 같은 경우에는 상당히 실망을 많이 했어요. 성소수자에 관한 부분은요. 많은 성소수자들이 박원순 시장을 지지하고 있었잖아요. 박원순 시장이 대선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선거가 한번 있는 것도 아닌데 매번 이런 식이라면 이렇게 이겨서 뭐하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백낙청 선거를 이기기 위한 거라도 다음 시장선거에 나와서 이기겠다는 사람하고 대선에 나오겠다는 사람하고는 태도가 달라질 수 있죠. 이번에 박시장 하는 거 보면, 박시장 개인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는데 박시장 포함한 주변 세력이 대선 생각을 많이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듭니다. 소위 보수기독교 쪽에서 난리 쳐서 후퇴한 거 아닙니까. 서울시정 운영하는 데는 그 사람들이 큰 문제가 안돼요. 오히려 자기 지지세력 가지고 가는 게 좋고, 대선을 생각하더라도 나는 굴복하는 게 전략적으로 좋은 게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계산하기에 따라서는 시장만 하고 말 것이 아니라 큰 꿈을 가지고 있는데 선거 때 전국의 보수기독교들이 총궐기해서 덤비면 곤란하겠다, 이런 생각도 할 수는 있어요. 근데 난 그것도 잘못이라고 봅니다. 국민이 대통령한테서 보는 건 강한 리더십이에요, 자기가 원칙 가지고 한다고 하면 욕을 먹으면서도 밀고 나가는. 그러면서도 전략전술을 아주 무시하자는 얘기는 아니지만 한쪽에서 난리 치니까 쑥 들어가고. 이번에 문제가 된 성소수자 차별금지를 포함한 ‘서울시민인권헌장’이라는 게 동성애를 장려하는 것도 아니고 외국에서처럼 동성결혼을 허락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적으로 차별하지 말자는 거 아니에요? 일반적인 인권원칙에 의한 건데 그걸 밀고 나가는 것이 전국적인 정치지도자로서도 중요한 게 아니겠나…….

김두식 제가 생각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시장이냐 대통령 꿈을 갖고 있냐를 다 떠나서 차라리 대권에 관한 꿈을 가지고 보수기독교 표를 얻어야 되니까 이렇게 하자 하고 한 거면 다행인데, 어쩌면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특별한 플랜 없이 움직이다 이렇게 된 것 아닌가 하는 거죠. 그럼 정말 최악이거든요.

백낙청 문재인 씨나 박원순 씨나 원래 대통령 되겠다고 꿈꾼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본인의 생각이 달라졌든 주변이 부추겨서 그렇든 대권 꿈을 꾸기 시작하면 경계할 게 그거라고 봅니다. 김대중, 김영삼 씨처럼 젊어서부터 그걸 목표로 한 사람들은 큰 목표를 위해서 작은 것에 흔들리지 않는 게 단련이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이 그런 판에 뛰어들면 우왕좌왕할 수 있죠. 그리고 자기가 욕심이 부족하고 작으면 주위의 욕심 많은 사람들한테 휘둘릴 가능성이 커집니다. 내 욕심이 크면 주변에 공천 생각하고 뭐 생각해서 이러십시오, 저러십시오 하는 사람들 다 쳐내버리거든요. 못 들은 척하고 가죠. 그런 말 하는 사람이 내 공천을 위해서 선생님 이렇게 하십시오, 하겠어요? 나라를 위해서 이래야 합니다, 저래야 합니다 하는데, 그런 데 깜빡 넘어갈 수 있죠.

김두식 욕심이 적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약점 같은 거죠.

황정은 이번에 나온 대담집의 계기가 된 「큰 적공, 큰 전환을 위하여」라는 글을 제가 읽었는데요, 부끄러운 일이지만 ‘적공’이라는 어휘가 낯설어서 사전을 뒤져봤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힘을 들여 애를 쓰는 것’이라는 의미가 있더라고요. 우리 사회가 적공이 부족하고 전환을 이루려면 적공이 절실하다, 이 말씀에 상당히 공감을 했어요. 그런데 이런 노력이 연구자나 지식계층한테만 필요하다는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데, 또 한편으로는 책을 이렇게 안 보는 사회에서 적공이라는 게 어떻게 이루어질까, 지속적으로 이걸 쌓아간다고 해도 이게 다 어디에 쌓일까, 그런 걱정이 좀 되더라고요.

백낙청 큰 전환을 이룩하기 위해서 큰 적공이 필요하다고 하는 얘기도 있고, 적공과 전환이 둘이 아니다 하는 얘기도 했죠. 말장난이 아니고, 작은 일을 전환하는 것 자체가 적공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공력, 공덕이라고 하잖아요. 우리가 공덕을 쌓아가는 것 자체가 전환을 이루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적공을 해서 그게 어디 갈까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나는 제대로 사람이 정성을 모아서 공덕을 쌓고 공력을 쌓으면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고 봐요. 그래서 그게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다고 봅니다.

김두식 그런 면에서는 낙관적이시군요. 우리 국가, 우리 민족이 시간이 걸리지만 어쨌든…….

백낙청 그러니까 차곡차곡 쌓아서 몇년 후에 전환을 이룩하리라 낙관하는 건 아니고요. 그건 안될 수도 있지만 어쨌든 한번 쌓인 공덕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거죠.

황정은 선생님 말씀 듣고 보니까 도서관 생각이 나는데요. 도서관에 적공들이 물리적 결과물로 쌓였을 때 미래의 누군가는 그 도서관을 방문할 테고, 그때 비어 있는 선반이 아니라 적공들로 꽉 차 있는 선반이 있다면 이미 당도한 전환도 확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지금 드네요.

김두식 선생님의 그 믿음은 어디서 나오는 거죠? 공덕이 사라지지 않더라 하는 믿음이, 선생님의 살아오신 경험에서 나오는 건가요?

백낙청 객관적 사실 아닌가요?(웃음)

황정은 예전에 역사에도 그런 일이 있지 않나요? 로마 법전이 상당히 오래된 고문서였고 도서관의 구석진 곳에 낡은 양피지 형태로 처박혀 있었는데, 그걸 어느날 학자들이 찾아내서 들여다보는 과정 중에 해석하는 작업이 벌어지고 법이 다시 쓰였다는 것 아니에요? 그런 사례를 생각해보면…….

김두식 오, 사라지지 않는다, 공력을 쌓은 게.

황정은 작년 4월 16일 이후로 많은 사람들에게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포인트가 생겨버린 것 같습니다. 목격자가 이렇게 많은 사건이 또 있을까 싶어요. 저는 이제 서른여덟해 살아왔지만 제가 이런 사건을 또 겪을까 모르겠고, 개인적으로도 큰 사건이었고 사회적으로도 공감대가 폭넓게 형성이 됐는데요. 벌써 1년이 지났는데 상황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려오고요. 정치권을 보면, 그 광고 문구 있잖아요, 뭘 상상해도 그 이상을 볼 것이다. 그런 상황을 계속해서 겪고 있는 것 같아요. 근데 선생님께서 「큰 적공, 큰 전환을 위하여」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더라고요. “우리 사회의 혼란이 극에 달했으나 어디까지나 혼란이요 교착이지 ‘세월호 이전’으로의 복귀가 아니라는 점이 희망이다.” 그래서 그 희망을 조금 더 듣고 싶습니다. 어떤 점에서 희망을 보고 계시는지.

백낙청 세월호 이후에 흔히 정부가 있기는 있나, 국가가 있나 하는 질문을 많이 하잖아요. 근데 좋은 정부가 없고 좋은 국가가 없는 거지 있기는 확실히 있어요, 정부가. 황정은 씨 말대로 이만큼 많은 목격자, 사실관계로도 많은 증거가 모인 사건이 드물거든요. 그런데도 어떤 평론가들은 우리가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리얼리즘이 불가능하다는 얘기를 하는데, 리얼리즘 얘기는 여기서 할 필요 없겠고, 이만큼 많은 자료가 있는 사건이 드뭅니다. 비행기 사고 났다고 해보세요. 블랙박스를 건져봤자 거기 나오는 정보라는 게 한정되어 있는 거고, 객실에서 무슨 일이 있고 이런 거 모르잖아요? 더군다나 블랙박스도 없고 생존자도 없으면 비행기가 떨어졌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예요. 그런 거에 비하면 세월호만큼 많은 사실을 생생한 육성과 기록과 화면으로 갖고 있는 경우는 드물어요. 그런데도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는 건 이걸 바탕으로 더 진실을 규명해야 하는데 그걸 못하고 있다는 얘긴데, 이게 저절로 안되고 있는 게 아니라 이걸 확실하게 막고 있는 정부가, 뼛속까지 나쁜 정부가 있기 때문에 안되는 겁니다.

황정은 저는 그 정부의 물리적 형태를 지난주와 지지난주 광화문에서 봤습니다.

백낙청 점점 더 나가죠. 더 나빠지고 있죠. 그러니까 우리가 세월호 이후에 달라져야 할 것이 여러가지가 있는데, 황정은 씨도 글을 썼지만 체념이야 너무 쉽잖아요. 체념하면 안되고, 체념하고 통하는 얘긴데 엄살을 그만 부려야 합니다. 정부가 이래서 안되고 사실을 몰라서 못한다느니 그런 엄살은 그만하고, 문학이 세상을 바꿀 수 없으니까 어떻게 하냐 그러지 말고, 조금 더 단호해질 필요가 있지 않나, 그런 생각입니다.

김두식 제가 기본적으로 엄살 전문이라(웃음) 오늘도 엄살을 많이 떨었는데, 단호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신 부분이 와닿네요.

황정은 엄살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요, 저는 이런 상황으로 도래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냉소라고 생각하거든요. 세월호 이후에 뭔가를 해야겠는데 도대체 뭘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이런 얘기 자주 들어요. 백선생님도 우리 사회의 권력에 굴종하고 피해자를 멸시하는 습성의 내면화, 이런 모습을 지적하셨는데, 저는 여기에 더불어서 무력감도 학습이 되고 내면화된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뭘 해도 바뀌지 않고 뭘 해도 이길 수 없다, 한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런 무력감이 냉소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고요.

백낙청 그러니까 엄살 그만 떨자는 얘기가 그건데, 엄살 떨다보면 그게 결국 냉소로 이어지죠.

황정은 냉소로 이어지면 사건이 일어나고 문제가 드러나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죠. 문제 자체는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데 변화나 개선은 너무나 미미하거나 아예 없거나 덮여 있거나,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보니까 내 집 마당이나 쓸지, 내 앞가림이나 잘하지, 그냥 나만 아니면 돼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늘어나는 거 같고. 만성적 패배감요.

백낙청 이번에 내가 대담집을 내고 끝에다 짤막하게 후기를 하나 썼어요. 거기에 내가 도대체 뭘 할 수 있는가, 괜히 이것저것 하려고 하지 말고 내 나름 비교적 잘하는 거 하자, 그래서 생각을 정리해서 책을 내는 걸 했다고. 그런다고 세상이 뭐가 바뀌나 하는 질문이 따라오지 않겠어요? 근데 그냥 세상이 바뀐 게 없다, 이러지 말고 질문을 세개로 쪼개서 물어보자, 그랬어요. 첫째로 우선 나는 얼마나 바뀌었나를 물어보고, 두번째는 주변에 바뀐 사람이 누가 있는가 살펴보자 이거예요. 아무도 안 바뀌었다 하지 말고, 살펴보면 있어요. 많아요, 바뀐 사람들이. 그다음에 세번째, 그런데도 세상이 안 바뀌는 건 왜 그런가를 탐구해보자는 거죠. 그럼 당장은 정말 뼛속까지 못된 정권이 있고, 그 토대랄까 배경으로는 분단체제라는 게 있고요, 그것보다 조금 더 낮은 차원에서 얘기한다면 87년체제의 말기 국면이라는 게 있고, 87년체제가 연장되는 데는 그 저변에 분단체제라는 토대가 있고. 그리고 더 학구적으로 탐구하고 싶으면 분단체제라는 건 세계체제, 우리 인류가 갖고 있는 별로 좋지 않은 세계체제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작동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 공부는 각자 자기 처지와 능력에 따라 할 거지만 한번 살펴보자, 이거예요. 내가 얼마나 바뀌었나. 주변에 바뀐 사람은 얼마나 있나. 그런데도 세상이 안 바뀐 것은 왜냐. 그렇게 따지고 들어가야지, 그냥 바뀐 게 없네, 세월호 유가족 얘기를 들어도 하나도 바뀐 게 없다더라, 이러면 안되죠. 그이들이 안 바뀌었다고 절규하지만, 사실 자기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잖아요. 그냥 아이를 잃은 것만이 아니고 어떻게 보면 부모들이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난 면도 있는데, 그 사람들이 전력을 다해서 싸우는데도 진실규명이 안된다 그 얘기거든요, 세상이 안 바뀌었다는 건. 그 얘기하고 그냥 편안히 앉아서 “세상이 변한 게 없어”라고 하는 건 질적으로 전혀 다른 거죠.

황정은 선생님 쏘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사용하세요?(웃음)

백낙청 페이스북도 하는데 열심히는 못해요.

황정은 저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강력하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집중한 시기가 또 있었나 싶거든요. SNS를 통해서 매순간 뭔가를 말하고 있는데, 말이 되게 흔한 시절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말이 흔해서 그런지 말이 왜 이렇게 힘이 없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백낙청 근데 너무 흔하면 아무래도 금이 떨어지죠. 그래서 우리가 가만히 있지는 말아야 하고, 그만할 짓은 그만해야 좋을 것 같아요. 엄살도 그만 떨고 쓸데없는 수다도 덜 떨고 그런 것도 필요하지 않나……. SNS에 나가서 내가 그런 얘기 한다고 사람들이 들어줄 건 아니지만요.

김두식 엄살 좀 그만 떨자는 말씀이시네요. 이제 시간이 많이 지나서 슬슬 마무리를 해야 할 때입니다. 선생님, 우리 시대에 어쩔 수 없이 어른이 되신 거고 앞으로도 건강하게 활동하시길 바라는데요, 선생님 늘 맑고 밝으신데 특별히 건강 관리하는 비법 있으신가요?

백낙청 글쎄요. 혹시 검찰에서 수사에 착수하면 출두해서 성실히 답변하겠습니다.(웃음)

김두식 아유, 무슨 말씀이세요?

백낙청 검찰에서 너의 건강비법이 뭐냐, 조사를 하면요.(웃음)

김두식 「라디오 책다방」 정도로는 답변 안하시는 거군요.(웃음) 이 유머코드 깜짝 놀랐어요. 선생님 현장에서 활동하는 문학평론가 중에 거의 최고령이신 듯한데, 앞으로 특별한 계획 갖고 계신 거라면? 로런스 책 있으시고요.

백낙청 문학평론 좀더 써보려고 그래요.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창비 2011)이라는 책 보면 1부, 2부로 나눠놨죠. 2부가 영문학이나 서양문학에 관한 이야기고. 그런데 앞서 얘기했지만 문학평론에서 한국문학 얘기할 때 기준과 안목이 다르고 외국문학 얘기할 때 다르고 그래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그리고 서양문학에 대해 글을 쓰면 그건 연구논문으로 쳐주는데, 나는 사실 연구논문을 써본 일이 없어요. 전부 일종의 문학평론이죠. 그래서 서양문학, 한국문학 포함해서 평론을 더 써볼 생각입니다.

김두식 『창작과비평』 편집인으로서의 위치는 내려놓아도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은 계속 이어나가실 그런 계획을 말씀해주셨고요. 저희 오늘 방송이 「라디오 책다방」 씨즌 1의 끝에서 두번째 방송이고 선생님이 마지막 게스트이세요. 「라디오 책다방」, 거의 2년 이상을 끌어온 재밌는 실험이었는데요, 옆에서 지켜보면서 어떠셨는지?

백낙청 좋았어요.

김두식 좋으셨다는 한 말씀과 함께 방송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 앞으로도 건강하게 좋은 글 많이 써주시기를 기대하겠고요,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백낙청 고맙습니다.

 

  1. 이 책 120~48면 참조.

  2. 박민규 「눈먼 자들의 국가」, 김애란 외 『눈먼 자들의 국가』, 문학동네 2014.

  3. 진은영 「감각적인 것의 분배」, 『창작과비평』 2008년 가을호.

  4. 2015년 이후에는 관용적 표기의 범위를 넓혀 ‘시스템’으로 쓰고 있다.

  5. 1999년 이래 국립국어원 외래어 표기법은 ‘로런스’를 따르되 ‘로렌스’를 허용하고 있다.

  6. 백낙청 「광복 70주년, 다시 해방의 꿈을」, 『창비주간논평』 신년칼럼(2014.12.30.)

  7. 백낙청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8. 「주체적 인문학을 위하여」, 『백낙청 회화록』 6, 469~504면.

  9. 성소수자 차별금지 조항이 명시된 ‘서울시민인권헌장’ 제정을 둘러싼 논란과 관련해 2014년 12월 1일 박원순 시장은 한국장로교총연합회와의 간담회에서, 동성애에 대한 보편적 차별금지 원칙을 지지하나 서울시장으로서는 동성애를 지지할 수 없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