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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록] 한결같되 날로 새롭게 나아가는 창비

명예편집인 백낙청 인터뷰 1)
 

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 『창작과비평』 편집인)

백영서(창비 주간, 연세대 사학과 교수)

심진경(문학평론가)

한영인(문학평론가)

2015년 12월 16일 창비서교빌딩 50주년홀

*이 인터뷰는 『한결같되 날로 새롭게: 창비 50년사』(창비 50년사 편찬위원회 엮음, 창비 2016)에 실린 것이다.
 

백영서 2015년 내내 창비 50년사를 위해서 그동안 창비에 관여하신 여러분을 인터뷰해왔는데, 한해가 저물어가는 오늘이 그 마지막 순서입니다. 50년 역사 그 자체이신 백낙청 선생님을 모시고 창비 역사와 관련된 주요 사실과 중요한 해석지점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여러 세대와 성별을 아울러 세 사람이 질문자로 나섰습니다.

백낙청 50년사의 일부로 관여하신 여러 사람을 인터뷰하는 기획은 참 좋은 것 같아요. 그동안에 정리된 것들을 대부분 봤는데 목소리가 다양하기도 하고, 또 그걸 읽으면 창비가 어느 개인의 작업이라기보다 집단의 작업이었음이 실감나거든요. 그 계획을 마무리하면서 나한테 특별한 자리를 마련해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다른 분들은 시기별로 나누고 그 시기에 한해서 얘기를 들었는데, 그러다보니 그분들도 하고 싶은 얘기를 다 못했고 독자 입장에서도 토막토막 끊어지는 것이라 한번 꿰어줄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는 어느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지만 내가 처음부터 깊이 관여를 해왔으니까, 그런 정리를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세분이 인터뷰어로 나서셨지만 그냥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자리가 됐으면 싶어요.

백영서 저희가 이 작업을 준비하면서 50년을 다섯 시기로 나누고 각 시기마다 중요한 분들을 인터뷰했는데, 아무래도 기억의 부정확함도 있고, 회고란 게 그렇듯이 지금의 시점에서 돌아보면서 간과되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부각되는 면도 있게 마련이죠. 그래서 그걸 크로스체크할 필요도 있는 것 같아요. 소홀히 다룬 부분이 있다면 좀더 확실하게 해두기도 하고요.

한영인 제가 먼저 질문을 드리는 걸로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국문학계에서 창비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창작과비평』의 창간 배경이나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알려진 바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덜 언급되었거나 설명이 필요한 사항에 대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1966년 창간 이후 「시민문학론」(1969년 여름호)을 발표하고 미국으로 떠나신 뒤 염무웅 선생이 『창비』를 맡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학계에서는 이 시기를 두고 창비가 초기에 가지고 있던 서구중심성을 탈각하고 민족적 색채가 강해진 때로 평가하는 흐름이 강합니다. 다른 자리에서 선생님을 모시고 얘길 들었을 때, 미국에 계시면서도 염무웅 선생을 통해서 『창비』를 받아보며 그 흐름에 대해 모두 수용하셨고, 돌아와서도 거부감 없이 수용할 수 있었다는 말씀을 해주셨지요. 그 시기의 다른 정황이나 염무웅 선생의 역할 같은 것들에 대해 말씀해주시죠.

백영서 제가 한 말씀만 첨언하면요, 이런 질문과 오늘 자리가 왜 중요하냐면 이미 창비는, 특히 그 초기의 역사는 연구의 대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구자들을 위해서도 정확한 기록을 남겨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백낙청 답변자의 책임이 더 무거워지는 것 같네요.(웃음) 염무웅 선생이 맡으시면서 『창비』가 더 민중적이고 민족적이 됐다고, 지금의 연구자들이 그런다고 하셨지만, 사실은 나 자신이 전부터 하던 얘기고, 창간 30주년 때 『창비문화』에서 고은명(高恩明) 씨하고 대담을 했는데, 내가 세번 하고 염무웅, 김윤수, 이시영(李時英) 선생들이 한번씩 해서 총 6회에 걸쳐서 나갔는데, 거기 그 얘기가 나옵니다. 그 대화들은 창비 연구의 기초자료가 돼야 한다는 생각이고, 새삼 연구자들이 꺼내기 전에 이미 나온 이야기가 적지 않다는 걸 말씀드립니다. 그 시절에 염선생의 역할이 참 컸어요. 간단히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다시 미국 유학을 가면서 그때까지 『창작과비평』이 일조각에서 발행되다가 신구문화사 쪽으로 옮기고 신동문(辛東門) 선생이 대표가 되는 잡지사 ‘창작과비평사’를 창립했어요. 그전에는 문우출판사나 일조각에서 일종의 위탁발행을 하던 체제였죠. 그때 신구문화사와 약속된 것은, 이종익(李鍾翊) 회장이 전적으로 지원하고 신동문 선생이 책임을 지되, 염무웅 선생이 편집장이 돼가지고 실질적인 편집을 주도한다, 이런 거였어요. 실은 그전부터 신구문화사 쪽에서 말하자면 우리를 ‘땡긴’ 거였죠. 그쪽으로 오면 훨씬 활성화될 거라고. 신동문 선생은 염선생이나 내가 신뢰하는 선배였고요. 그래서 그렇게 약속을 하고 갔는데, 그게 잘 이행이 안됐습니다. 그러다보니 신동문 선생도 자기가 근무하는 회사의 이종익 회장과 염무웅 선생 사이에서 입장이 난처해졌겠지만, 일선에서 이걸 감당해야 하는 사람이 염선생이었어요. 그래서 잡지가 합본호도 한번 내고 한호는 결호가 되기도 하고, 염선생도 도저히 안되겠다고 잠시 떠났다가 나중에 맘먹고 되돌아오고, 이런 곡절이 있었죠. 정말 그때는 염선생 아니었으면 거의 폐간될 판이었어요. 그렇게 잡지를 유지한 공로가 있는데다가, 염선생은 나하고 달리 한국 문단이나 작가들하고 안면이 넓고 또 서울대 출신이라 인맥도 많았고요. 염선생이 이렇게 고생해가며 후에 창비의 대표적인 필자로 알려진 사람들 상당수를 그때 발굴한 셈이죠. 가령 문인 중에서는 나 없는 사이에 『창비』 지면을 화려하게 장식한 분이 신경림, 황석영 두분이죠. 두분은 창비 출신은 아니지만 데뷔하고 한동안 쉬고 있다가 「농무」 등 일련의 시들로 신경림 선생이 화려하게 재등장하셨고, 황석영은 「객지」를 내놨지요. 이문구 씨는 사실 내가 도미하기 전에 이미 『창비』에 단편을 발표하고 알던 사이지만, 처음에 염선생이 연락을 해서 알게 됐어요. 그 둘은 연배도 같고 거기다가 염선생이 태생은 충청도가 아니지만 공주에서 학교를 나왔으니 절반은 충청도죠. 충청도 사나이들끼리 의기투합해가지고 가까워졌는데, 그래서 염선생이 맡고 있는 동안 이문구 씨가 『장한몽』을 연재했죠. 『장한몽』은 참 공이 많이 들어간 장편소설인데 원고료를 제때 못 줘가지고 서로가 고생한 모양이에요. 강만길 선생도 그때 처음 등장하셨고요.

백영서 아마 리영희 선생님도 그때…….

백낙청 리영희 선생은 초창기에 임재경(任在慶) 선생을 통해 알게 돼서 내가 떠나기 전에 번역자로 『창비』에 등장하셨지만, 필자로 활약하신 건 염선생이 할 때였어요. 그리고 박현채 선생은 처음 글을 주신 때는 내가 귀국한 후예요. 귀국한 직후 그분을 만나서 글을 받기로 했는데, 그러나 거기도 말하자면 염선생이 터놓은 관계였지요. 그러니까 중요한 필자 발굴도 그렇고 어려운 시기에 살아남은 것 자체도 큰 공로였죠. 그러면서 잡지의 체질도 많이 바뀌었는데, 나 자신을 돌이켜보면 창간 당시에, 창간호의 권두논문 같은 걸 보면 그야말로 근대주의자의 면모가 약여하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시민문학론」을 쓸 때만 해도 이미 꽤 달라져 있었고, 미국 가 있는 동안에 내 나름대로 공부하면서 달라진 바도 있어요. 또 염선생하고 계속 연락을 취하면서 잡지는 매호 받아봤어요. 한면도 안 빼놓고 다 읽었죠. 다 읽고 코멘트도 해 보내고. 그랬기 때문에 염선생이 체제를 바꿔놓는 동안에 가만히 있었던 게 아니고 나도 이미 동화돼가고 있다가 돌아와서는 쉽게 다시 손잡고 일할 수 있게 됐던 거죠.

백영서 창간 준비과정에 대해 꽤 알려진 얘기이긴 합니다만, 제가 인터뷰한 채현국(蔡鉉國) 선생의 경우 제가 알고 있는 것과 약간 차이 난다고 할 수 있는 게 황병기(黃秉冀) 선생과 김상기(金相基) 선생의 역할인 것 같아요.

백낙청 김상기 선생은 채현국, 한남철, 이종구(李鍾求), 임재경, 이렇게 나와 창간 초기에 아주 긴밀하게 협력한 다섯 사람 중의 하나이고 황병기 선생은 별도의 인맥인데, 사실은 『창비』 30주년 때 그 얘기를 다 했어요. 그러니까 지금 창비를 연구하는 학계 인사뿐 아니라 채현국 선생을 인터뷰하는 백영서 교수도 “아, 30주년에 백선생이 얘기한 것과는 다르네요” 이렇게 지적하셨어야 돼.(웃음) 여섯이 같이 어울린 건 아니에요. 채현국 선생은 처음부터 우리와 같이 논의를 하면서 황병기 씨가, 그는 나와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동기인데, 돈도 대주고 한 것처럼 얘기했는데, 그건 그렇지 않아요. 황병기 씨하고 같이 했으면 아마 큰돈을 댔을 겁니다. 그는 집안이 사업도 하고 돈도 있었죠. 그런데 그러지 말고 우리끼리 가난하게 해보자, 이렇게 방향을 정했죠. 사실은 황병기 씨가 거의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가 선선히 물러선 거예요. 제1기에 해당하는 시기는 정확하게 기억하기 어려워요. 그때 활동을 한 사람은 지금 최소한 70대거든요. 그러니까 기억력이 흐려질 수밖에 없지. 채현국 씨 얘기를 일일이 다 교정할 생각은 없는데,(웃음) 내가 인쇄소 사업을 하다가 『창비』를 시작했다고 했는데 그건 터무니없는 오보예요. 그때 내가 서울대 전임강사인데 무슨 인쇄소 사업을 하겠어요. 가업도 아니고. 채선생이 뭐하고 혼동을 했냐면, 70년대 중반이나 후반에 내가 창제인쇄소라는 걸 창립했어요. 인쇄도 모르는 사람이 인쇄소를 시작한 거는, 누가 돈을 대주겠다면서 돈 있으면 뭘 하고 싶냐고 물어요. 그런데 초기에 조그만 계간지를 하다보니까 제작처 어딜 가나 괄시받죠. 인쇄소에서 그런 설움을 하도 많이 당해서, 돈 있으면 인쇄소를 하나 차려보겠다, 그래가지고 시작했다가 당연히 한동안 죽을 쒔죠.(웃음) 그러다가 조태일 씨가 들어와서 질서를 잡았지. 조태일 씨가 관리능력이 있고 엄청 성실한 실무인이거든요. 그래서 나중에 조태일 씨한테 넘겨줬어요. 거저 준 건 아니지만(웃음) 조태일 형 입장에서는 어쨌든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조건으로 인수해서 좋아한 걸로 알아요. 인쇄소 사업이란 게 그 이야긴데 채현국 씨가 시기상으로 그걸 혼동한 거예요. 그 돈이 사실은 채현국 씨가 하는 탄광 쪽에서 나왔는데, 박윤배라는 친구를 통해서 나왔어요. 셋이 모두 친구 사이긴 했지만 때로 채현국 씨와 입장이 갈리기도 한 것이, 박윤배라는 친구가 처음에는 흥국탄광에 광부로 갔다가 워낙 능력이 있어서 현장소장을 해요. 그때까지만 해도 채현국 아버님의 총아였는데, 이 친구가 나중에 노조를 조직합니다. 그래서 파업을 일으키기도 하고. 그러니까 파업을 주동하는 소장 친구하고 업주인 아버지 사이에서 채현국 씨 입장이 굉장히 난처했죠. 그렇지만 두 사람의 우정은 깨지지 않았어요. 어쨌든 어떤 일들은 서로 모르게 진행된 것들이 있는데 인쇄소 자금도 그런 사례입니다. 자세한 경위를 이야기하자면 너무 길어집니다만, 박윤배 이야기는 제가 30주년 인터뷰에서도 좀 했지요.

한영인 『창비』의 평판을 높여준 제2기, 그러니까 1974년부터 1980년 폐간 직전까지의 『창비』의 성격을 보면 민족민중문화운동을 선도해오면서 문학만이 아니라 미술이나 다른 연행예술 같은 장르에 대한 조명이 꽤 많았는데, 그후에는 그런 관심이 떨어지면서 문학 위주로 재편되는 것 같습니다. 창비가 의도한 결과인지, 아니면 인적 구성의 변화 때문인지 궁금합니다.

백낙청 제2기를 74년부터 잡은 거는 그때 출판사가 생겼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런데 66년 창간에서 74년까지 이르는 사이에 어떻게 보면 출판사가 생긴 것 이상의 큰 변화도 있었고 위기도 있었죠. 아무튼 이른바 제2기에도 사실 창비가 민족문화운동을 이끌었다고 하기는 힘들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문화운동 쪽에 이론작업 같은 게 부족했기 때문에 이따금씩 『창비』에 실리는 한두편의 평론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죠. 그러다가 문화운동이 점점 확산되고 성장하면서 창비의 영향력이 축소되는 거는 너무나 당연했지요. 창비가 이것저것 다 하는 게 꼭 좋은 건 아니니까 문학에 치중한 것은 의도적이었다고도 할 수 있는데, 동시에 창비가 또 하나 열중한 것이 한국 사회 분석의 이론적 산실 역할이었어요. 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의 발단이 되기도 했는데, 이후 운동권의 논쟁이 대체로 관념 과잉으로 흐른 데 반해 창비는 민족문학론에 근거해서 분단체제론을 전개하는 등 그 나름의 성과를 냈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니까 문화 전반을 다루다가 문학으로 축소했다고만 볼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백영서 다음 질문은 시기가 전체에 걸칠 수도 있는 건데요, 『창비』가 복간된 이래로 조직도 많은 변화를 겪어왔습니다. 기본적으로 선생님이 편집인을 쭉 혼자 하면서 주도하시고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서 조력자라 할까요, 도움이 되는 파트너들과 더불어서 일을 해오셨죠. 그런 조직은 드문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경영에 관해서는 한때 염무웅 선생님도 참여하셨고, 그뒤로 정해렴(丁海廉), 고세현(高世鉉), 그리고 현재 강일우(姜一宇) 사장이 있지요. 또 기획에는 염무웅, 김윤수, 이시영, 최원식(崔元植) 선생 등을 비롯해 저도 조금 관여했고요. 그리고 편집위원회는 90년대 이후 젊은 인사들이 많이 결합하면서 그 구성을 봐도 저희 내부 용어로는 노장청(老壯靑) 3결합이라 하는 세대간의 조화를 이루는 형태로 이끌어왔는데, 그런 것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백낙청 백주간 말씀에 여러가지가 좀 뒤섞여 있습니다. 1988년 복간 이후로 고세현 사장의 경영체제를 갖추기까지만 해도 10년 이상의 세월이 있으니 그사이, 또는 그후에 일어난 일들을 나눠서 살펴보지요. 복간 이후 내가 편집인으로 복귀했습니다. 그전에도 내가 미국 가 있을 때하고 내가 국내에 있으면서 다른 분이 발행인, 편집인이 된 경우는 내용이 달라요. 내가 국내에 있는 한은 아무래도 실질적인 편집인 역할을 했고, 어떤 면에서는 실질적인 발행인 역할도 했어요. 85년에 창비가 등록취소가 됐잖아요. ‘창작사’라고 이름을 바꿔서 다시 등록을 허가할 때의 조건 중 하나가 백낙청은 손 떼라는 거였어요. 백낙청, 임재경이 손 떼고, 처음에는 이시영, 고세현도 손 떼라, 이랬죠. 그런데 그때 사장이던 김윤수 선생이 당국과의 협상을 맡아 하셨는데, 건강도 안 좋은 김선생이 고생하신 건 말로 다 못하지요. 아무튼 당국의 요구에 대해 “아니, 이시영, 고세현은 생계가 걸린 사람들인데, 손 떼면 이 사람들 굶어죽으라는 얘기냐. 안된다”고 딱 자르셨죠. 고세현 씨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편집사원이었지만 과거의 운동권 경력 때문에 그랬던 건데, 그냥 넘어갔어요. 이시영 주간은 업무국장으로 발령 내는 편법을 썼죠. 사실은 계속 출판사 주간으로 자기 하던 일을 했고요. 임재경 선생은 그렇게 깊이 관여하고 있던 건 아닌데도 해직 언론인이니까 손 떼라고 했던 건데, 좋다, 뗀다, 그런 거죠.(웃음) 그건 순순히 들어줬고, 나도 떼라고 하니까 떼겠다 그랬어요. 하지만 그건 서로 눈 가리고 아웅 한 거죠. 당국에서도 자기들 명분을 세우기 위해 백낙청을 손 떼게 만들었다고 보고하려 한 거고요. 나는 손 뗐다고 그랬지만 김윤수 선생과 나의 관계로 보나 뭘로 보나 계속 실질적인 역할을 했던 거예요. 어쨌든 복간이 되면서 내가 정식으로 편집인으로 다시 복귀를 했죠. 그러다가 주식회사 체제로 바뀌는 게 94년이고, 그다음에 최원식 주간이 들어서는 게 96년이에요.

백영서 미국 가시는 것도 관련이 있지 않나요?

백낙청 미국 간 것은 98, 99년이에요. 그전에 96년 초에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을 더는 피할 수 없어 맡았어요. 잡지일을 도저히 혼자서 할 수 없어서 편집위원이던 최원식 선생에게 주간을 맡아달라 했고, 10년 후에는 백영서 주간으로 이어졌는데, 말하자면 협업체제죠. 편집인은 그대로 있고 편집에 관여는 하되 현장에 가깝게 업무를 지휘하는 일은 주간이 맡는 체제가 된 거예요. 98년 후반기와 99년 상반기에는 내가 미국 하바드대학에 연구교수로 가 있게 되죠. 이때쯤 창비는 아무래도 전문적인 경영이 필요한 상황이었어요. 그전까지는 좀 어정쩡한 체제였거든요. 편집인이라는 사람이 어떤 점에서는 발행인 역할을 겸하는 면도 있고, 정식 발행인 겸 사장은 김윤수 선생이고, 이시영 부사장이 상근자로서 일을 하지만 전문경영자는 아니거든. 시인이잖아요. 그래서 세 사람의 어정쩡한 협업체제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죠. 거기에 나중에 최원식 씨가 편집 쪽에 가담하고. 아무튼 이대로는 안되겠어서 99년에 잠시 베이징에 무슨 일이 있어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백영서 선생님 평론선 『全球化時代的文學與人』(中國文學出版社)의 출판기념회였죠.

백낙청 그래요, 거기서 돌아오는 길에 한국에 와서 의논을 모아가지고 고세현 당시 전무를 사장으로 임명했고, 그때부터 창비가 전문경영 체제로 들어선 겁니다. 그전에도 창비가 구멍가게 시절일 때 빼고는 오너 경영이라고 할 만한 것을 해본 적이 없지만, 그때부터는 완전히 전문경영 체제로 갔어요. 오너 사장이 아닌 경우에도, 그가 CEO(최고경영자)냐 COO(현장 총괄책임자)에 불과한가를 구별하는 것은 인사권과 재무권을 갖느냐 하는 거예요. 그런데 고세현 사장은 인사권과 재무권을 완전히 행사했거든요. 지금 강일우 사장도 그렇고요. 물론 임원 인사라든가 큰 투자를 새로 한다고 할 때는 나와 의논을 하지만요. 이것도 창비가 자기식으로 진화하며 개발한 체제죠. 그리고 주식회사 체제를 만든 얘기인데, 사업이 점점 커지고 90년대 초부터 형편이 좀 나아지기 시작했잖아요. 『소설 동의보감』(이은성 장편, 1990),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1993~)도 나오고. 그러니까 개인회사라는 불안정한 상태를 벗어날 필요가 커졌죠. 주식회사가 아니라면 결국은 대표자의 개인 소유물이에요. 김윤수 선생이니까 우리가 안심하고 창비를 그의 사유재산으로 놔두고 일을 했지만, 어쨌든 창비는 일종의 공공재산인데 그걸 어느 개인의 사유재산으로 둔다는 건 참 불안한 일이거든요. 그래서 주식회사로 전환한 것이 94년이고. 지금 질문한 범위를 벗어날지 모르지만, 2003년에 우리가 파주에 사옥을 지어서 이사합니다. 또 한번의 큰 변화의 계기라고 볼 수 있죠. 그리고 노・장・청 3결합을 얘기하셨는데, 이것은 중국사를 연구한 백영서 선생이 아주 좋아해서 소개한 표현이고 우리가 그러려고 노력은 했죠. 그러나 그게 잘 이뤄졌다고 보기는 어려워요. 아무래도 ‘청’이 약했어. 그래서 다른 데 가면 장년 행세할 사람들이 창비에 와서 청년세대를 대표한다고들 했는데,(웃음) 앞으로는 좀 달라질 거예요.

백영서 그 표현을 쓰게 된 연유는 특정한 출판사나 잡지사의 계승형태와 비교해서 나온 건데, 가령 문학과지성사는 세대를 확 바꿔버리는 세대교체의 방식인데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점을 대비해서 얘기한 겁니다.

백낙청 문지하고 우리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죠. 우선 『문학과지성』은 우리하고 같이 폐간됐지만 그뒤로 우리처럼 끈질기게 당국을 괴롭히면서 복간을 요구한다든가 ‘유사 복간’ 행위를 한다든가(웃음) 그러지를 않았죠. 그분들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 88년에 복간이 허용됐을 때 『문학과지성』은 복간하지 않기로 선택하고 그 대신 『문학과사회』라는 이름으로 등록을 내면서 편집진도 확 바꿔버렸죠. 그건 그것대로 좋은 면이 있어요. 창비는 또 창비대로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가 있고 추진하는 사업이 있는데, 그 사업은 그렇게 주기적으로 동인그룹을 교체하면서, 바꾸면서 해갈 수 있는 사업은 아니라고 봤어요. 그래서 우리는 다른 길을 택했던 거죠. 최근에 문학동네는 사장과 1세대 편집진이 한꺼번에 퇴진했는데 왜 창비는 안 그러냐는 비판이 있었지만, 창비는 오너 경영을 안했으니까 이제 와서 오너 사장이 물러날 일도 없었고, 50주년을 맞아 편집인이 퇴임한다는 계획은 벌써 1년 넘어 전부터 추진해온 거니까 새삼 그걸 발표하며 법석을 떨 이유도 없었지요.

백영서 그 대목에서 제가 이 글을 읽는 독자를 위해서 좀 보충한다면, 『창비』는 다른 잡지와 달리 여러 사람의 의견이 오가는 교류의 장만은 아니다, 거기에다 창비 나름대로의 담론, 저희는 ‘창비 담론’이라고 하는데, 나름대로의 견해를 발신하는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상황에 맞춰서 변화는 하되 어떤 연속성을 가져야 하는 처지가 강해서 이런 맞춤형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제가 연속성이라고 표현했지만 또 미묘한 변화들이 시기별로 다 있거든요. 그중의 하나가 90년대 이후의 변화가 아닐까요? 예컨대 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사회 전반도 그렇고 창비도 그렇고 어느정도의 진영논리랄까, 강한 자기주장이 있었죠. 앞서의 질문에서는 민족민중문화라는 걸로 설명했는데, 90년대 들어와 창간 30주년과 최원식 주간 체제로 되면서 좀더 폭넓은 개방이라 그럴까, 진영논리를 벗어나서 유연하게 상황에 대비하면서 창비 입장을 재정리하는 주요한 변화가, 또 성취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 과정이 최근의 사태와 더불어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변화를 오늘의 논의와 연관해본다면, 그중에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이라고 해서 포용적인 입장을 취했는데, 그와 관련해서 최원식 주간이 제기한 회통론과 선생님의 입장 사이에 내부 논쟁이 있었고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죠. 이에 대해 설명해주시고 넘어가도 좋지 않을까 합니다.

백낙청 글쎄요. 그 내부 논쟁이라는 건 사실 작다면 작은 논쟁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중요한 문제였죠. 실은 지금까지도 최선생하고 나 사이에 의견 차이가 남아 있어요. 바꿔 말하면 의견 차이가 있다고 해서 창비 내에 중대한 균열이 생긴 건 아니고 원만한 협업체제가 유지돼왔지만, 생각의 차이는, 최선생은 그건 별 차이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나는 굉장히 중요한 차이라고 생각해요. 이 말만 들으면 최선생은 유연한데 나는 독단적인 게 되지.(웃음) 하여간 그렇습니다. 그런데 80년대에도 창비는 어떤 경직된 진영논리를 편 적이 없다는 점을 먼저 강조하고 싶어요. 바로 그랬기 때문에 당시의 소장층으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죠. 요즘처럼 SNS 같은 게 없어서 그렇지, 있었다면 굉장했을 거예요, 당시 그들의 기세를 봐서는. 그런데 그 중요한 논객 중의 한 사람은 얼마 전에 우리 세교연구소에서 열린 어떤 국제모임에 와가지고, 그때 자신들의 목표가 백낙청을 ‘장송(葬送)’하는 것이었다고 했는데, 그때 내가 장송 안 당했거든요.(웃음) 도리어 계속 반론을 펼쳤어요. 문학사 연구하는 사람들이 그 기록을 돌이켜볼 필요가 있는데, 나에 대해서 한참 공격한 사람들이 내가 논리적으로 반박했을 때 재반론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냥 딴소리하거나 아니면 옛날에 하던 소리를 그대로 또 하거나였어요. 80년대를 그렇게 넘겼습니다.

그런데 70, 80년대가 워낙 엄혹한 시대니까 독재세력과 반독재 민주화세력이란 진영은 없을 수가 없었고, 문학 하는 사람들도 거기 깊이 끼어들어서 참여하고 활동을 하다보면 안 좋은 의미의 진영논리에 어느정도는 감염되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90년대에, 최선생을 주간으로 모시기 전부터지만, 가령 내가 「지구시대의 민족문학」이라는 글을 93년에 썼는데요, 그때 이미 신경숙 얘기를 하고 김기택 얘기도 하고 그러거든요. 당시에 소위 우리 진영에 속하는 사람들이 엄청 서운해했어요. 그러니까 그런 진영논리에서 창비는 처음부터 거리를 두었지만 싸우며 살다보면 우리도 모르게 감염된 면이 있었고, 또는 논리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의 문학적인 인식의 범위, 독서의 범위가 좁아진 것도 사실이에요. 이걸 좀 넓혀야겠다 하는 생각이었고, 최선생이 주간이 되면서 그걸 본인의 중대한 임무 중의 하나로 받아들였죠, 나도 지원을 했고요. 그런데 우리는 완전히 진영논리에 빠졌다가 거기서 ‘개방’으로 전향한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적당히 넓히면서도 이제까지 견지해오던 창비의 자세를 그대로 지켜나가는, 이 두가지를 동시에 하는 게 중요했죠. 그 점에서도 최선생하고 나는 원칙적으로 합의했는데, 실행과정에서는 좀 온도차가 있었어요. 리얼리즘 문제에 대해서는요, 최선생은 내가 최선생의 회통론을 비판한 데 대해서 아무래도 당시에 서운해했고, 지금도 자신의 충정을 잘 몰라줬다고 야속해하는 면이 있을 거예요. 최선생이 보기에 속류 리얼리즘이 판을 치다가 이게 90년대 들어와가지고 완전히 배제당하잖아요. 그런 통에 그가 말하는 ‘최량의 리얼리즘’까지도 함께 묻혀버릴까봐 걱정해서 최량의 리얼리즘과 최량의 모더니즘이 회통하면서 같이 갈 수 있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어떤 의미로는 리얼리즘이 몰리던 시기에 그걸 옹호하고 보존하려는 충정에서 한 얘기인데, 물론 나는 그 충정을 이해합니다. 이해하고 인정을 하는데, 문제는 최량의 리얼리즘이라는 개념 자체가, 그러니까 최선생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개념은 문학사가(文學史家)의 개념이에요. 일제시대부터 있던 그런 사실주의와 모더니즘의 대립이 기본인 데 비해서, 우리 시대의 리얼리즘론에는 속류론자들도 물론 많았지만 1974년에 염무웅 선생이 「리얼리즘론」을 쓰고 그후로 여러 논의가 이어지는데, 그것은 이미 최선생이 말하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을 이루는 다른 차원의 리얼리즘이거든요. 그런데 최선생은 거기에 대한 인식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나를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땀 흘려서 한국비평사에 그래도 남을 만한 어떤 작업을 해놨는데, 최선생은 마치 그것이 없었던 것처럼 그보다 낮은 차원의 리얼리즘론과 모더니즘론의 회통을 얘기하니까, 첫째는 그동안 우리 비평사에 대한 왜곡이고, 둘째는 좀 다른 차원의 리얼리즘론이 추구하던 바를 너무 가볍게 외면하는 것이다, 이래서 비판했던 거죠. 그런데 요즘 봐도요, 최선생은 그냥 계속 자기 길로 가고 있어.(웃음) 내가 솔직히 평가한다면 최원식 선생의 장기는 첫째, 그는 문학사가이고 본인도 그렇게 얘기하죠. 그리고 작품에 대한 감각이 있어요. 그래서 평론가로서 볼 때에는 문학사가다운 식견이랄까 축적된 공력하고 작품에 대한 비평가적 감각이 결합돼서 나오는 글들, 그런 건 다른 사람들이 따라가기 어렵게 잘 쓰고 좋은 글이 많아요. 하지만 이론적 작업이 그의 장기는 아닌 것 같아.(웃음)

심진경 인터뷰 준비를 하면서 나름대로 자료를 좀 찾아봤는데요, 창비 담론에 관한 연구도 상당히 축적됐지만, 백선생님의 이론적 논의들에 대한 연구논문도 어느 학술정보 싸이트를 보니까 167편이 있더라고요. 문학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지금까지 선생님께서 해오신 작업, 그리고 그것이 한국 사회의 담론지형에 끼친 영향력이 상당하다는 방증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우리 모두를 고심참담하게 했던 신경숙 작가 표절 문제가 빌미가 되어 여러가지 이유로 창비와 백낙청 선생님에 대한 공격과 비판이 이어졌습니다.2) 그런 문제와 관련해서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일단 이 사건을 둘러싸고 문학과 표절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와 토론보다는 창비, 그리고 백선생님에 대한 일방적인 공격과 비판이 훨씬 많았던 것 같습니다. 80년대에 급진적 리얼리즘론자로 활동했던 분들을 포함해 문학권력 비판을 전면에 내세우는 젊은 비평가들이 그런 비판을 주도했는데요. 그분들 입장에서는 일련의 사태의 중심에는 창비의 상업주의적 타락이 있다, 이렇게 보는 것 같습니다. 그 근거로 민족문학론, 민중문학론, 리얼리즘론을 주장하던 창비, 특히 백낙청 선생님이 1990년대 이후 그러한 문학적 노선과는 관련 없어 보이는 신경숙 문학을 발굴하고 그에 대한 상찬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은 선생님 입장에서는 조금 억울한 얘기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신경숙 문학의 가치를 언급했던 「지구시대의 민족문학」에서 선생님은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나 「모여 있는 불빛」만이 아니라 그와 함께 공선옥(孔善玉)의 「목마른 계절」 같은 작품 또한 중요하게 언급하거든요. 그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한곳에 안주하거나 고여 있지 않고 끊임없이 쇄신을 모색하는 선생님의 이론적 탐구의 맥락 속에서 파악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거기엔 시대의 변화에 걸맞은 리얼리즘의 쇄신이라는 맥락에서 신경숙의 소설이 중요한 참조지점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선생님께서 신경숙 소설을 발굴하고 높이 평가한 지점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선생님의 리얼리즘론의 전개과정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를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백낙청 내가 신경숙 문학을 발굴했다고 그러면 억울해할 사람이 많을걸요?(웃음) 신경숙이 80년대 말에 등단한 작가잖아요. 그런데 「풍금이 있던 자리」(1992)가 나올 때까지 나는 신경숙을 모르고 있었어요. 『문학과사회』에 나온 걸 보고서 알게 됐고, 최원식 선생도 아마 그때 상당히 괄목상대를 했을 거예요. 그래가지고 우리가 청탁을 해서 받은 게 「모여 있는 불빛」이고요. 그런데 신경숙을 무슨 내면세계의 탐구자라든가 발견자라느니, 흔히 말하는 사인화(私人化) 경향, 그런 걸 칭송하는 게 아니고 그것과 다른 차원에서 신경숙의 성과를 평가해준 예는 당시로선 드물었을 거예요. 그래서 이것을 나쁘게 보는 사람들은 민중민족문학론 또는 리얼리즘론을 주장하던 백아무개가 신경숙의 그런 면을 인정해줌으로써 자신은 저쪽에 투항을 했고 신경숙에겐 전국민적인 작가로 행세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줬다, 이렇게 말하는데, 나로서는 오히려 신경숙 나름의 리얼리즘 성과를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알아주면서 기존의 논의를 확대 발전시켜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공선옥, 김기택, 고은, 황석영 등과 함께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나 「모여 있는 불빛」을 거론했고 그뒤로 『외딴방』이 나왔을 때 따로 작품론을 쓰기도 했지요. 하지만 그사이에 나온 『깊은 슬픔』(문학동네 1994)이 엄청난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건 비판적으로 언급했어요. 그런데 지금 와서요, 『외딴방』이 시시껄렁한 작품인데 백낙청이가 안목이 너무 없어서, 또는 벌써부터 상업주의에 오염되기 시작해서 잘못 짚었다, 이렇게 말하면 나는 할 말이 없어요. “아 그러세요? 저는 아니거든요”(웃음)라고 말하고 끝내는 수밖에 없죠. 그리고 심선생이 “우리 모두를 고심참담하게 했던 신경숙 작가 표절 문제”라고 하셨는데 솔직히 나는 모두가 ‘참담’했다고 생각지 않아요. 신경숙 때문에든 창비 때문에든 혹은 백낙청 때문에든 한바탕 신바람을 낸 분들도 적지 않았다는 현실을 직시하는 게 리얼리스트의 자세겠지요.

『외딴방』 이후에도 말하자면 『깊은 슬픔』 계열의 작품을 쓰긴 합니다만 『엄마를 부탁해』(창비 2008)만 해도 그런 계열이 아니지요. 심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나는 이것도 훌륭한 작품이라고 봐요. 『외딴방』만은 못해요. 내가 따로 작품론을 쓰지는 않았지만, 「우리시대 한국문학의 활력과 빈곤」(『창작과비평』 2010년 겨울호)에서 최근 10년 사이에 나온 우리 장편소설 중 두드러진 성과로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예담 2009)하고 『엄마를 부탁해』를 주로 거론했어요. 둘 중에서는 박민규의 장편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했지만, 『엄마를 부탁해』에 대해서도 더러 비판을 하면서도 여하튼 좋은 작품이라 주장했어요. 여성적인 시각에서 보더라도 흔히 전통적인 모성성을 너무 치켜세워서 가부장주의를 강화했다고 비판하는데, 그렇게 볼 면이 없지는 않지만 첫째는 모성이라는 게 꼭 가부장제도가 전유한, 가부장제도에 속아서 바보짓 하는 것이냐 하면 그렇게만 볼 수 없는 면들이 있어요. 또 하나는, 신경숙이 마지막 한방이 있어요. 그렇지 않아요? 어머니 자신도 가부장제 속에서 살아온 자기 인생이 좋은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서 딸은 그렇게 살지 말아야 된다는 걸 아주 확실하게 얘기하고, 실제로 어머니가 그 이미지대로만 산 여자는 아니라는 게 나중에 밝혀지잖아요. 그래서 나는 여성적인 시각에서도 그만큼 해내기도 쉽지는 않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처음부터 기존의 젠더 관념을 해체하는 걸 목표로 하는 전복적인 작품들하고는 다르죠. 그런 작품들에 비해서 어떤 면에서 못하며 또 어떤 면에서는 그들이 못 가진 미덕을 가지고 있는지, 이렇게 따져봐야 할 것 같아요. 그다음에 나온 작품은 별로 안 좋았어요.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문학동네 2010)는 신경숙이 또 변죽을 울리는구나, 꼭 써야 할 게 따로 있는데 그건 안 쓰고 이러는구나(웃음)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심진경 선생님께서 87년체제 이후 새롭게 전개되는 현실에 부응하고자 다양한 이론적 논의를 전개해오셨는데요. 리얼리즘론의 변화와 확장도 결국 그것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80년대 급진적 리얼리즘론을 극복하기 위한, 더욱 유연하고 변화에 민감한 새로운 리얼리즘론 말이지요. 그런데 최근 창비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번 신경숙 사태를 계기로 해서 상업주의나 문학권력의 문제에 대한 비판의 연장선상에서 선생님의 이론적 구도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앞서 『엄마를 부탁해』에 대한 입장을 말씀하셨지만, 선생님의 의도와 달리 많은 사람들은 『엄마를 부탁해』와 같은 대중적 상업성이 강한 소설을 본격소설로 상찬하시는 데서 그 비판의 근거를 찾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항간의 시각에 대해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그리고 이와 함께 창비의 문학비평 담론은 87년체제 이후에 모색해온 다양한 주제 이후에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 것으로 예측하시는지, 그러니까 기존 문학의 재정비인지 아니면 새로운 문학이론의 발견으로 가는 건지요? 제가 최근 평문을 읽기로는 계속해서 갱신 쪽으로 가시는 것 같습니다만.

백낙청 리얼리즘에 대해서 쭉 관심을 갖고 또 리얼리즘론을 처음 제기할 때의 초심에 충실한 탐구를 하겠다는 생각은 해오고 있지만, 근래에는 내가 리얼리즘이라는 단어를 그다지 내세우지 않아요. 최근에 발표한 「근대의 이중과제, 그리고 문학의 ‘도’와 ‘덕’」(『창작과비평』 2015년 겨울호)에서는 리얼리즘과 사실주의를 구별하는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했지만, 진정한 리얼리즘에 미달하는 사실주의조차 그렇게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하는 정도지, 본격적인 리얼리즘론이라는 건 내가 안 쓴 지가 오래됩니다. 어찌 보면 1990년의 시점에서, 그때가 소련・동구권이 무너지고 문학이념으로서의 사회주의사실주의 이론의 영향력이 한국 평단에서 꺾였을 때인데, 그 시점에서 내가 「민족문학론과 리얼리즘론」(벽사 이우성 교수 정년퇴직기념논총 『민족사의 전개와 그 문화』 하권, 창작과비평사 1990; 백낙청 평론집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이라는 꽤 긴 글을 쓰면서 나로서는 일단의 정리를 마쳤다고 생각했어요. 결론에 가서 우리가 어쨌든 리얼리즘이라는 걸 포기할 수는 없지만 어느 지점엔가는 리얼리즘이라는 이 거추장스러운 말을 사용하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는 식으로. 그래서 한편으로는 리얼리즘론의 옹호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리얼리즘 개념에 대한 점진적 해체를 시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양면적인 태도가 그후에도 지속돼왔어요. 그러니까 이게 여러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죠.(웃음) 하지만 그 얘기를 여기서 길게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신경숙 사태를 맞아 많은 사람들이 내가 리얼리즘을 포기하고 가령 문학동네나 문지의 입장하고 구별할 수 없는 그러한 쪽으로 갔다고 비판했다 하셨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신경을 안 써요. 다만 나의 리얼리즘론이 한계에 도달했는지 여부는, 나 자신이 리얼리즘의 어떤 한계, 단순히 속류 리얼리즘의 한계가 아니라 리얼리즘이든 무슨 이즘이든 형이상학적인 이념으로 고정될 가능성 자체를 일찍부터 경계해왔으니까 그런 사유의 궤적을 되짚어보면서 논의해준다면 고마운 일이겠지요.

백영서 리얼리즘을 갱신해서 더 새로운 차원에서 그 원래의 정신을 활용하시는 건데, 90년대 이후 창비 담론의 전개과정하고도 연관되어 있는 것 같아요. 창비가 90년대 전후로 많이 변하는데요. 한국문학사 연구하는 분들의 평을 보면, 문학사뿐 아니라 역사학에서도 그런데, 70, 80년대까지 창비의 역할은 무척 높게 평가하는 반면 90년대 이후에는 일반적으로 저평가를 하는 것 같아요. 그러다가 최근의 사태를 겪으면서 아예 비난 모드로 가는 데 대해서 저도 90년대 이후에 창비에서 활동한 사람으로서 이해가 안 가고 화도 나는데, 창비 내부로 시선을 돌려 왜 그런 일이 생길까라고 하면, 물론 밖에서는 사회분화가 이루어지고 다양한 논의들도 생겼으니까 예전처럼 창비가 대안운동의 중심이자 유일한 대안담론의 발신처는 분명 아니죠. 그런 외부 정황 말고 창비 내부가 다양한 논의의 갱신을 하는 과정에서 일반인들이 알기 쉬운 단일한 깃발이랄까 명료한 키워드를 제시했어야 하지 않나, 가령 이런 리얼리즘이 아니라 무엇이다라는 식으로 제시해야 했는데 그걸 안한 건지 못한 건지. 또다른 차원에서는 비문학 쪽에서 분단체제론이 모든 담론의 중심에 있고 그것이 다른 것들과 연결되며 확장되는데, 그런 작업이 유기적으로 엮이지 않으면서 일반인들한테 강한 인상을 주지 못한 게 아닌가 생각도 해봤습니다.

백낙청 창비가 발신하는 여러 담론들 사이에 유기적인 연관성이 부족해서 그 위력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지적이라면 수긍하는 게 마땅하지요. 그런데 깃발 얘기는요, 원래 부대가 나설 때 필요하고 운동에 필요한 게 깃발이지, 문학 하는 데 깃발이 뭐 필요해요? 70, 80년대는 운동이 치열하고 창비가 그 운동을 함께하다보니까 그랬는데, 민족문학론은 하나의 문학적인 담론인 동시에 운동의 깃발이었죠. 그런데 운동의 깃발이 되면 담론은 속화되게 돼 있어요. 그래서 현실적으로 절실한 필요가 없을 때는 빨리 깃발을 내리고 담론 개발에 충실하고 작품에 충실해야 하죠. 지금 와서 새로운 깃발을 안 올렸기 때문에 전파력이 없다 하는 거는, 물론 사실이지만 새로운 깃발을 올리는 것 자체가 이 시대에 안 맞고, 특히 문학잡지가 할 일은 아니라고 봐요. 그렇다고 우리가 민족문학의 깃발을 완전히 내렸느냐? 어떤 사람들은 그랬다고 주장하지만 민족문학론이든 리얼리즘론이든 민중문학론이든 애당초 그것을 제기할 때의 초심이랄까 문제의식은 우리가 쭉 견지해왔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 내부 회의에서 누가 한 얘기지만, 큰 깃발 한개보다도 작은 깃발을 여러개 들 때가 아니냐. 나는 그게 이 시대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라고 봐요. 그러니까 리얼리즘이라는 깃발, 민족문학이라는 깃발, 민중문학이라는 깃발, 세계문학이라는 깃발, 동아시아문학이라는 깃발 등을 좌르륵 여러개 들고나가서 그때그때 그 깃발 아래 오고 싶은 사람을 오게 해주는 게 더 효과적이고 시대에 맞는다는 거지요. 그런데 지적하시듯이 그러다보면 장사가 잘 안되죠.(웃음) 커다란 하나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어야 사람이 모이기 쉬운 거 아니에요? 그리고 사람들이 볼 때에도 아, 저게 뭐 하는 동네다, 그럴 텐데. 아쉽지만 나는 민족문학이라든가 리얼리즘, 그런 걸로 하나의 큰 깃발을 들 수는 없는 상황이고 안 드는 게 옳다고 봐요. 오히려 이제는 큰 깃발이라면 ‘창비’라는 깃발을 들면 돼요. 창비라는 깃발을 들면 아는 사람들은 아, 저 깃발 밑으로 가면은 작은 깃발들이 많다더라, 그중에 내 취향에 맞는 깃발도 있을 거다, 이래가지고 모이도록 하는 게 옳다고 봅니다.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창비가 욕을 엄청 먹었지마는 인지도가 그만큼 높아졌거든요.(웃음) 인지도가 곧 브랜드가치가 되지는 않죠. 인지도와 훌륭한 실적이 합칠 때 그게 브랜드가 되는 건데. 나는 우리가 전부 다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욕하는 내용과 같은 그런 못된 짓은 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간과하는 훌륭한 자산을 쌓아놓은 게 많기 때문에, 지금 욕먹으면서 형성된 인지도가 브랜드가치로 환산이 돼서(웃음) 창비라는 깃발을 높이 들고 있으면 앞으로 점점 많은 사람들이 모일 거라고 봅니다. 다만, 그랬을 때 그들의 다양한 취향을 충족시킬 수 있으면서도 완전히 잡동사니라는 인상은 안 주는 그런 여러개의 깃발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렇게 눈에 띄는 깃발 중의 하나가 분단체제론이죠. 그런데 그건 사회과학 담론 아니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기존 사회과학의 영역 속에 포괄될 수 없는 담론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기존의 사회과학 개념을 전복하는 담론이에요. 월러스틴이 ‘사회과학으로부터의 탈피’(unthinking social science)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같은 작업에 해당하는 담론입니다. 그러니까 넓은 의미의 인문학 담론이고, 문학담론과의 친연성이 대단히 높은 담론이에요. 그런데 그 담론을 구체적인 문학비평이나 문학이론으로 유기적으로 연관시키는 게 부족했다, 이렇게 비판한다면 맞습니다. 그건 맞는데, 그러나 문학담론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겐 그야말로 좀더 내용을 들여다보시라 말하고 싶어요. 나 개인으로 말하면 한편으로 분단체제론을 전개하면서 문학비평을 계속해온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게 완전히 따로 노는 작업을 했느냐?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아요. 내가 황석영의 『손님』(창작과비평사 2001)론을 쓴 적이 있는데3) 거기서는 의도적으로 분단체제론과 『손님』 작품평을 결합하려는 노력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분단체제론은 더 차원을 높이면 근대에 대한 이중과제론으로 나가는 것이고, 남한 사회의 실천노선으로 내려오면 이른바 변혁적 중도주의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각기 그 차원에서 문학담론하고 결합할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봐요. 이중과제론하고 세계문학 작품을 연결시킨 사례는 이미 있잖아요. 가령 임홍배 교수가 괴테론(『괴테가 탐사한 근대』, 창비 2014)을 쓰면서도 그랬고요. 변혁적 중도주의는 일종의 정치적인 실천노선이니까 그걸 문학하고 바로 접목하기는 어렵지만 그것도 변혁적 중도주의가 무엇이라고 규정하기보다는 뭐가 변혁적 중도주의가 아닌가 이렇게 쳐내는, 일종의 방법론적인 개념이거든요. 그런 것을 몸에 익히고 문학작품이나 현실을 보면 문학평론가로서도 플러스가 되지 손해가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죠. 그리고 최근에 쓴 내 글을 언급하셨는데, 그 글 나름대로 내가 전개해온 문학 바깥에서의 담론, 인문학 내지 사회과학의 담론, 이중과제론, 이런 것들과 문학비평을 결합하려는 하나의 시도지요.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독자들이 판단할 문제지만, 창비로서는 앞으로 그런 시도들이 다른 분들 손에서도 더 많이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한영인 선생님께서는 창비 50년사에서 창비를 대표하는 개인으로 이해되고 있는데, 저는 창비라는 집단의 역사와 백낙청이라는 개인의 역사는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권의 탄압이나 출판사 등록취소 같은 창비의 수난과는 구별되는, 백낙청 개인이 힘겹고 위태롭게 느낀 순간은 따로 있을 것 같거든요. 덧붙여서 보람 있거나 기뻤던 순간도 있겠고요. 이처럼 개인으로서 힘겨웠던 그리고 즐거웠던 순간에 대한 얘기가 궁금합니다.

백낙청 30주년 때인가 언제 인터뷰하면서, 내가 진짜 힘들었던 거는 탄압받고 그런 게 아니고, 구멍가게 하던 시절에(웃음) 돈이 안 돌아서 직원 월급 간신히 주고 어음 막고 그런 일이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게 참 힘들었어요. 염무웅 선생도 이번에 그런 얘기를 하신 걸로 아는데, 내가 『8억인과의 대화』 사건4) 때문에 잠시 편집인에서 물러나면서, 그때는 내가 발행인이기도 했는데 다 내려놓고 염선생이 승계했죠. 염선생도 그때 경영자로서 어음조각 만지면서 얼마나 고생했는가 하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은행거래 얘기도 하셨지만 창비는 은행에서 어음을 떼고 자시고 할 급이 못됐어요. 그야말로 구멍가게니까 우리가 쓰는 어음이라는 거는 소위 ‘문방구 어음’이라는 거죠.(웃음) 당시에 문방구에 가면 어음용지를 팔았는데, 출판계에서는 거의 그걸로 통했어요. 그건 부도가 나도 민사소송은 할 수 있지만 자동적으로 은행거래가 정지되지는 않지요. 또다른 이점은 사정이 급하면 좀 봐달라 그럴 수 있는 건데,(웃음) 은행어음은 그게 안되잖아요. 그런데 은행어음이 꼭 필요할 때가 있거든요. 은행도(銀行渡) 어음이라고 하는데, 인쇄용지 같은 걸 살 때는 현금 아니면 은행도 어음을 줘야 돼요. 그럴 때는 남의 은행어음을 빌려오는 거지. 당시 어음을 빌려준 분이, 그 두분은 내가 꼭 기록에 남겨야 할 분인데, 한분은 돌아가신 내 사촌형님 백낙신(白樂晨) 도화지질 사장, 그분은 내가 인쇄소 차렸을 때 사장도 해주셨어요. 그냥 이름만 빌려주는 사장이었지만요. 그 형님이 나를 끔찍하게 여기고 참 고맙게 해주셨죠. 또 하나가 앞서 말한 박윤배라는 친구예요. 그때는 박윤배가 흥국탄광에서 나와서 자기 사업을 차렸을 때인데, 그 회사 어음을 참 선선히 빌려주곤 했어요. 그쪽의 경리직원이나 간부들은 아주 죽을 지경이지, 불안하고.(웃음) 내가 한번 사고를 내기도 했어요. 제날에 못 갚으면 날 도와준 사람이 부도가 나는 참 중대한 문제였는데, 요즘처럼 전자거래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해당 지점에 돈을 들고 가서 넣어야 돼요. 그런데 가져가다가 교통이 막혀가지고 4시까지인가 하는 마감을 못 지켰어요. 그러면 1차 부도라는 게 나요. 다만 1차 부도 이후 곧 돈을 넣었기 때문에 완전 부도는 막았지만, 기업 하는 사람으로서는 1차 부도만 나도 신용이 떨어집니다. 그 회사 직원들 입장에서는 웬 날벼락이에요.(웃음) 은행에서 전화 와가지고 당신네 어음 왜 안 갚느냐, 부도났다 이러니까. 그런데도 박윤배는 워낙 대인이라서 허허 웃으면서 계속 도와줬지요.

신세진 사람 얘기하는 김에 한 사람을 더 얘기하면, 염선생이 맡았을 때도 박윤배니 채현국이니 이런 친구들이 가끔씩 도와줬지만 그런 푼돈 가지고는 안될 지경에 가 있었지요. 이미 우리도 규모가 커진데다 영인본 사업을 시작해서 퍽 많이 팔렸고 『창비』를 보급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지만, 외판사업은 관리를 잘해야 돼요. 나가서 파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야. 판매사원과 수금사원 관리를 잘해야지, 그 친구들이 떼어먹고 달아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죠. 그런데 관리가 서투니까 사고가 자꾸 터지고 계속 고생을 했어요. 게다가 좀 팔릴 만한 책 내면 판금당하지.(웃음) 그럴 때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준 사람이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입니다. 김우중과 박윤배가 나하고 경기중학 입학동기인데 그 둘은 입학하자마자 가출을 했다가 1년을 꿇어요. 그래갖고 나보다 한해 뒤에 졸업을 했는데, 둘이 굉장히 가까웠죠, 어릴 때부터. 박윤배가 김우중에게 가서 얘기한 거예요. 낙청이가 저렇게 고생하는데 너 좀 도와줘라. 그런데 김우중이 사실 공적으로는 규탄받을 일도 많지만(웃음) 심성이 좋은 친구예요. 박윤배가 연결해줘서 찾아가서 지금 돈으로 치면 엄청난 금액을 받았어요. 물론 절대 비밀이었죠. 유신 말기인데 그게 알려지면 그도 작살나는 거고. 물론 나도 김우중한테 돈 받았다 해서 내 사상이나 정치적 소신이 바뀐 건 전혀 없었지만 사실이 알려져서 이로울 것도 전혀 없었지요.(웃음) 아무튼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나 나 스스로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입 꽉 다물고 수십년을 지냈어요. 그러다가 2007년 『백낙청 회화록』을 낼 때 책 뒤에 연보를 쓰면서 유신 때, 어려울 때 김우중이 도와준 적이 있다는 정도로 밝힌 바가 있죠. 그러고는 한 20년 멀리 지내다가 작가회의 회장 할 때 불쑥 찾아갔어요. 아무래도 돈을 좀 마련해놓아야 내가 임기 마치고 풀려날 것 같은데 큰돈 만들 길이 없었거든요. 그가 선뜻 5억원을 주겠다고 했는데, 얼마 후 IMF사태가 터지는 바람에 지체되기는 했지만 결국 약속을 이행했어요. 그참에 창비도 은행 융자 3천만원을 그의 주선으로 받아서 위기를 넘겼고요. 그래서 박윤배나 김우중이나 돌아가신 사촌형님이나 다 잊을 수 없는 분들이에요.

이렇듯 경영 때문에 어려움이 심했고, 또 하나는 다른 성격의 어려움이었어요. 80년 봄에 내가 서울대로 복귀했는데, 사실 70년대에 창비를 그만큼 활발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박정희가 나를 짤라준 덕이기도 하죠.(웃음) 물론 그때 해직교수협의회 활동도 하고 그랬지만 어쨌든 창비 일에 주력할 수 있었는데, 80년대에 학교에 돌아가니까 정말 힘들어진 거예요, 육체적으로나 시간상으로. 그러다가 전두환이 나를 도와주려고 그랬는지 모르지만 『창비』를 폐간시켰어. 우리 지성사에서는 큰 불행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나를 살려준 거야.(웃음) 그래서 잡지 대신에 단행본 사업을 키우면서 그나마 영문과 교수직하고 병행할 수 있었는데, 지금 50주년을 맞아 온통 창비가 화제지만 그때 나한테는 교수직이 생계가 걸린 직업일 뿐 아니라 원래 영문학이 내 전공이자 내가 좋아하는 학문이기도 해서 창비 일만 할 수는 없었지요. 더구나 복직했을 때 나는 이게 국민들이 나를 위해 되찾아준 직장이다 하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이었는데, 그러려니까 참 힘들었습니다. 두가지 다 하기가 힘든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창비에서도 내가 더 열심히 할 수 있는 일을 못한 게 많지만, 학교에서도 늘 그랬죠. 왜, 맞벌이하는 부모가 자식 보면서 안타까운 거 있잖아요? 조금만 더 도와주고 돌봐주면 엇나가지 않을 자식이 엇나가기도 하고……. 제자들 볼 때도, 아이고 내가 강의 끝나자마자 창비로 뛰어가지 않고 쟤들하고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그러면 훨씬 더 잘 키워줄 수 있겠는데…….

백영서 지금 말씀은 처음 듣습니다.

백낙청 그러다가 88년에 잡지가 복간되고 나니까 더 힘들어졌습니다. 기쁜 일이기는 하지만 한동안 제가 신체적으로도 무척 힘들었고요.

백영서 편집위원 제도를 도입하는 것도 관계가 있었나요?

백낙청 편집위원 제도는 어차피 하는 거였지만, 그때 여러 사람이 도와줬기에 가능했죠. 그러다가 이걸 나 혼자서는 계속 못하겠는데 어떡할까 하다가 결국에 최원식 씨를 발견한 거예요. 물론 내가 처음 발굴한 인물은 아니지만 오래 같이 일하면서 맡겨도 되겠다 생각한 거죠.

한영인 다음 질문은 답변하시기 곤란한 것일 수도 있는데요. 외부에서 창비를 박하게 평가하자면 백낙청이라는 중심 또는 뿌리가 있고, 그 사람의 뜻이 에피고넨들에 의해 관철되고 반복, 강화되는 담론공동체다, 이런 시선이 있습니다. 이런 세간의 반응에 대해 창비 내부에도 여러 이견과 갈등이 존재한다고 수차례 언급하신 적이 있는데, 그런데도 여전히 이런 관점과 비판이 불식되지 않는 걸로 봐서, 창비는 그렇지 않은데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오해한다, 이렇게만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최근 사태와 관련해서 창비에 대한 이런 인식이 다시 반복, 강화되고 있고요.

백낙청 이번 일을 겪으면서 창비는 백아무개의 에피고넨들이 한다, 이런 시각이 강화된 면도 있겠지만, 자발적으로 따라주는 경우하고 강력한 1인체제를 구축하고 있기 때문에 감히 거역을 못하는 것하고 다르잖아요. 그런데 후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죠. 창비가 저렇게 나쁜 짓을 하고 후진 동네가 됐으면(웃음) 자진 폐간을 하거나 휴간을 하거나 최소한 편집위원 몇이라도 뛰쳐나와야 되는데 워낙 1인체제가 강력하다보니까 이탈자가 하나도 없다는 거였지요. 그런데 1인체제가 강력하면 이탈자가 더 많이 생긴다는 걸 우리가 김정일, 김정은(金正恩) 체제를 보면 압니다.(웃음) 강력한 유일체제를 갖고 있기 때문에 탈북자가 오히려 많이 생기는 거예요. 창비에서 그런 일이 안 생긴 것은, 나는 우리가 내부에 여러 이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치열하게 토론해서 어떤 공통분모를 찾아냈기 때문에, 끝까지 완전한 의견일치는 없었지만 이 정도 선에서 대응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걸 양해한다, 여기까지는 합일이 된 거예요. 그래서 내가 퇴임 인사말에서도 “우리는 무엇보다도 공부하는 집단이 되고자 했고 내부에서 서로 비판하고 토론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왔다. 그리고 위기를 맞았을 때의 결속력은 거기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말을 했던 거지요. 나는 그렇게 해석하는데, 이걸 두고 밖에서 또 “그러니까 에피고넨들이지”라고 말하면, 대한민국에는 최소한 그런 언론자유는 있는 나라니까(웃음)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고요. 에피고넨이라는 말은 괜히 사람 기분 나쁘게 하는 말이지만, 어떤 학파가 형성되고 거기에 중심적인 인물이 있다고 할 때 그 사람의 기본 노선에 동조하니까 그 근처에서 놀게 되는 거고, 그러면 그 노선을 함께 발전시키고 자기도 그걸 추구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는 것이 공부하는 도리 아니겠어요? 우리 옛날 선비들이 다 그랬고요.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나는 사실 우리 창비 동료들에 대해서 좀 불만이야. 나를 좀더 따라주지 않고,(웃음) 내 글도 건성으로 읽는 사람이 많고……. 그러지 말고 공부 좀더 해서 에피고넨이라는 소리를 듣건 말건 한층 철저히 동조를 해줬으면 하는데,(웃음) 그게 부족한 게 나는 오히려 불만이죠.

한영인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또 한가지가 백낙청 이후의 창비일 것 같습니다. 계간지 편집인을 드디어 내려놓게 되셨는데요. 그런데 이것이 큰 변화의 계기가 되리라는 기대보다는 얼마나 달라지겠느냐, 냉소하는 풍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말씀하셨지만, 아까 백영서 선생님이 연속성이라고 부른 그것들이 내부적으로 잘 구축되어 있어서, 혹은 외부에서 보기에는 그 나물에 그 밥일 수도 있기 때문에 별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보는 의견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내가 물러남으로써 창비가 뭐가 달라지면 좋겠는지가 있으면 함께 말씀해주시죠.

백낙청 그게 어떤 나물이고 어떤 밥이냐부터 제대로 알고 논의를 하면 좋겠어요.(웃음) 그동안에 괜찮은 밥을 지어왔고 괜찮은 나물을 무쳐왔다면 기본적으로 그걸 계승하면서 새로운 걸 시도해야지, 무조건 단절하는 게 좋은 일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내가 편집인을 물러난다고 해서 전체 창비 사업에서 완전히 손 떼는 건 아니라고 인사말에서도 밝혔어요. 창비의 대주주라는 사실을 떠나서도, 내가 50년 동안 『창비』 잡지를 해왔는데 앞으로 새로운 사람들이 이걸 끌고 나가더라도 잘되기를 바라면서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도와줘야겠다 하는 생각을 먹는 게 자연스럽지 않나요? 그거까지 다 차단해야 된다고 하는 사람들의 그 억하심정이 뭔지…….(웃음) 어쨌든 계간지에 대해서는 칼같이 끊겠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처음부터 시작한 게 계간지이고 특히 근년에는 주로 계간지 일을 해왔거든요, 다른 일은 거의 다 손 놓고.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백아무개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아질 우려가 있었어요. 실제로 그렇게 말하는 분들도 많이 계셨고요. 아무튼 그 누구도 영원히 편집인을 할 수는 없으니까 이 시점에서 그만두면서, 백낙청이 없는 계간 『창비』를 해가는 실험을 이제부터 해보라는 거죠. 그 도전을 그들이 감당하는 게 중요하지요. 그러려면 내가 세교연구소나 창비학당 같은 다른 분야에서는 조언도 하고 그럴 테지만 계간지만은 하여간 완전 손 놓을 테니까 한번 해봐라, 이게 중요하다고 봐요. 그러니까 내 나름대로는 영향력을 행사할 여지가 있고 영향력이 반드시 나쁜 거는 아니지만, 계간지에 관해선 일단 끊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해서 그렇게 했어요.

백영서 저도 한 말씀 드리면, 저도 에피고넨이네 하는 그런 얘기를 듣죠. 항간에서는 ‘백낙청과 그 아이들’ 그러기도 하고. 그 아이들 중에 장자가 될지 차자가 될지는 모르지만,(웃음) 저도 처음에는 민망했다가 언짢았다가 하다가 나중에 이렇게 생각을 바꿨어요. 그게 뭐가 문제인가. 아까 학파를 얘기하셨는데, 저도 연세대에서 국학연구원장을 맡으면서 학파를 만들어보고 싶었는데 그게 제도 안에서는 잘 안되더라고요. 보직을 그만두고 나면 다 없어져버리다시피 하니까. 또 외국의 유명한 학자의 학파는 수용하려고 하면서 한국에서 자생적으로 일어난 사상에 대해서는 그 학파가 형성되는 걸 왜 문제 삼는가 한번 생각해보자, 그렇게 말이죠. 창비의 앞날을 생각하면 백선생님이 물러나시는 게 위기지만 또 기회일 수도 있다. 아까 분단체제론을 포함한 창비의 기존 담론에 대해 왜 공부를 더 안하느냐라고 백선생님이 불만을 표현하셨는데, 저는 오히려 앞으로 더 잘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 사는 거다, 이렇게 봅니다. 안 계시는 데서, 부재한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공부를 해서 자기들의 담론으로 소화하고 각론을 만들어내고 발전하면 사는 건데, 그런 점에서 저는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백낙청 선생님 가시면 우리는 어떻게 해요, 이렇게 울고 나와야지.(웃음)

심진경 아니, 안 계셔도 계시는 거죠.(웃음) 아까 말씀하신 공부하는 집단이라는 그 말씀이 인상적이었고, 결국 창비를 둘러싼 많은 얘기들이 창비 담론에 대한 공부가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나올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좀더 많은 공부들이 뒤따라야 할 테지요.

한영인 저도 한국에는 학파 전통이 부재한 상황이라 이런 현상을 지식인들이 낯설게 본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선생님 말씀을 들어보니 그 연원도 꽤 깊겠구나, 일종의 식민주의적 콤플렉스일 수도 있겠고 더 면밀하게 살펴볼 문제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이제 마무리 질문을 드립니다. 창비는 이제 구멍가게 시절과는 너무나 다른, 일종의 복합그룹처럼 운영되고 있는데요. 선생님께서도 그렇고 다른 관심 있는 분들이 늘 염두에 두고 있는 게 사업성과 운동성이죠. 전문경영인 체제도 말씀하시고 했지만, 창비는 비판담론의 생산지인 동시에 경영으로 꾸려가는 회사이기 때문에 그것의 결합 문제, 이것이 저는 앞으로 창비가 대중에게 어떻게 인식되느냐에 있어 중요한 문제라고 봅니다. 이와 관련된 전망이나 바람이 있다면 말씀해주시고요. 이제 50년 반환점을 돌게 되는데, 앞으로 또 한번의 50년까지 창비가 어떤 역할을 하면 좋을지 전망도 들어보고 싶습니다.

백낙청 또 한번의 50년은,(웃음) 그건 알 수가 없고요. 다만 가령 계간 『창비』나 창비에 모이는 지식인집단이 한 10년, 20년 후에 어떤 모습이 될지는 앞으로 몇년 사이에 드러날 거라고 봅니다. 거기엔 여러 요인이 작용하겠지만 가장 큰 것 중의 하나는, 정말 백아무개 없는 계간지를 만들어가면서 그걸 중심으로 한 지식인집단이 얼마나 치열하게 공부하고 운동을 하느냐, 요게 몇년 사이에 드러나지 않겠어요? 처음에 한두해는 잘나가는 것 같다가 나중에 안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처음에만 좀 삐걱거릴 수도 있고 그렇지만, 아무튼 한 1년 지켜보면 윤곽이 드러날 거라고 봐요. 그리고 회사가 지금 엄청 커져 있습니다. 물론 아직 단행본 출판사 중에서도 아주 큰 곳은 못돼요. 가령 민음사, 시공사, 문학동네보다 규모가 훨씬 작지요. 창비는 주식회사 창비가 있고 미디어창비, 창비교육이 있고 또 돈 쓰는 연관 단체들이 있잖아요.(웃음) 그중 하나가 세교연구소, 다른 하나가 이번에 창립된 창비학당. 그룹 전부가 돈 버는 회사라면 아마 외형도 훨씬 더 커질 텐데 세개의 돈 버는 회사가 열심히 벌고 또다른 두군데서는 쓰기에 바쁘고.(웃음) 게다가 계간지라는 것도 대단히 고비용 구조죠. 그렇기 때문에 사업성에 어떤 한계가 있는데, 이걸 운동성과 결합하는 문제는 사실 창비가 사업기반이 어느정도 생기면서부터 계속 고민해왔어요. 전문경영인 체제로 돌아선 것이 99년이고 처음 사장이 된 사람이 고세현 씨죠. 고세현 씨는 운동의 동지라고 할 만한 사람인데, 사실은 경영능력도 발휘했죠. 물론 90년대 창비를 비난하는 사람은 그때 이미 창비가 맛이 갔다 그러지만 우리로선 오히려 그걸 결합하려는 의지가 강했고, 지금 고세현 씨 뒤를 이은 강일우 사장은 학생운동권 출신은 아니에요. 그러나 원래 편집사원으로 들어온 사람을 고사장이 발탁해서 영업을 비롯해 각 분야의 훈련을 시켜가지고 사장직을 물려준 인물인데, 그렇기 때문에 창비의 문화랄까 이념에는 충분히 동화가 된 사람이지요. 적어도 그런 최고경영자나 후배들의 뒷배를 봐줘야 하는 내 입장에서, 그리고 이제까지 주간을 하던 백영서 선생이나 아니면 다음 주간을 맡을 한기욱(韓基煜) 선생이나 모두 운동성과 사업성을 결합할 필요에 대해서는 절실히 느끼고 있어요. 이걸 어떻게 잘해나가느냐가 지혜를 발휘할 대목인데, 아까 나를 가리켜 문학평론가이자 사상가이자 경영자, 그런 얘기도 했잖아요. 그런데 나는 우리 시대에 경영이라는 게 무척 중요하고, 지식인들이 경영에 대한 인식을 다소나마 가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물론 문학 하는 사람이 손수 경영자가 되는 일은 드물지만요. 사실 옛날 우리 개념으로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고 해서 선비하고 제일 먼 게 상인이에요. 나도 창비를 구멍가게 시절부터 운영하면서 그렇게 양자를 멀리 둔 게 당연하구나 하는 걸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둘을 병행하기가 특별히 어려웠어요. 특히 초기에는 글을 읽고 쓰는 선비의 일을 해야 할 때는 장사 생각이 나고, 장사를 하려고 하면 지식인으로서 할 일이 생각이 나고,(웃음) 집중이 안되고 굉장히 혼란스럽고 힘들었어요. 그런데 내가 농사는 안 지어봤지마는 선비가 농사를 지으면 그런 갈등은 적을 것 같아요. 공인(工人)이 되더라도 덜할 거고요. 그런데 상인이 되려면 머릿속이 완전히 달라지거든요. 하지만 현대세계에서 경영이라는 것이 나는 옛날식으로 말하면 병학(兵學)에 해당한다고 봐요. 옛날 선비들이 으레 병서를 읽고 또 그중에는 실제로 야전에 나가서 전쟁을 지휘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병학을 중시했는데, 현대의 병학이라면 물론 사관학교에서 배우는 군사학도 여전히 필요하지만 그보다 오히려 경영학이 더 거기에 해당되지 않느냐 싶어요. 오늘날 진짜 큰 싸움은 돈 싸움이거든요. 세계에서의 싸움이 자본의 싸움이고 기업의 싸움이고. 그런 차원에서 생각하면 옛날 선비들이 글 짓고 경서 읽고 하면서도 병서도 읽어야 했듯이 오늘의 지식인은 순전한 지식작업만이 아니고 경영을 통해서 얻는 현실에 대한 지식, 인식과 감각, 이런 것들을 갖춰야 제대로 된 발언을 하고 현실을 올바로 진단해서 대응책을 제시할 수 있지 않겠냐는 거지요. 그래서 나 개인의 경우에는 사농공상 중 거리가 제일 먼 사(士)와 상(商)을 결합시키고 그때그때 집중력을 발휘하는 시도를 오랜 시간에 걸쳐 했는데, 물론 전문성이라는 게 따로 있죠. 기업 경영의 전문가가 있고 담론이나 창작의 전문가가 다 따로 있지만, 양자를 원천적으로 분리하는 사고방식이나 생활방식은 넘어서는 공부를 해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입니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개발한 감각을 앞으로 창비가 운동성과 사업성을 잘 결합하는 데 조금이라도 보태겠다, 이렇게 말하면 또 거봐라, 손 뗀다는 게 말짱 헛소리 아니냐,(웃음) 그럴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건강이 유지되고 판단이 흐려지지 않는 동안은 그런 경험을 가진 사람으로서 옆에서 눈에 띄는 게 있으면 말해주는 게 나의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단, 계간지에 관해서는 전략적으로(웃음) 내가 손을 떼겠다는 것이고, 나하고 같이 물러나는 백영서 주간이 그래서 더 잘될 거라고 하셨는데 나도 앞날을 밝게 봅니다.

백영서 이 정도로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창비 50년사를 쓰는 데 여러 사람들이 동참해 서술하고 인터뷰도 하는 바람에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는데요, 그러다보니 서로 사실관계의 충돌도 있고 그런 걸 바로잡기도 하면서 또 연결시키는 작업이 중요한데, 오늘 모임이 그런 의미가 있겠다 싶어요. 음악에 비한다면 50년사의 하모니를 이루는 데 오늘 선생님 말씀이 주선율을 이룰 것 같아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수고해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이렇게 마무리하겠습니다.

 

  1. 인터뷰 당시는 편집인이었고 2016년 1월을 기점으로 명예편집인이 되었다.

  2. 2015년 6월 16일 소설가이자 시인 이응준이 온라인매체 『허핑턴포스트 코리아』에 소설가 신경숙의 단편 「전설」 일부가 미시마 유끼오(三島由紀夫)의 단편 「우국(憂國)」의 표절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전설」이 실린 작품집을 출간한 창비와 신경숙 문학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상업성과 문학비평의 관계, 문학권력 논란이 벌어졌다.

  3. 제2회 서울국제문학포럼 발제문 「한반도에서 화해와 평화 찾기: 황석영 소설 『손님』의 경우」(2005); 「황석영 장편소설 『손님』」으로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수록.

  4. 1977년 출간. 이 책의 저자 리영희와 함께 반공법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