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문

[창비 특집] 기념호를 내면서

계간 『창작과비평』이 30년 전에 첫 호를 냈을 때 주변의 관심과 호응은 잡지의 조그만 규모와는 비할 수 없이 큰 것이었다. 하자만 그 잡지가 오늘까지 살아남고 이만큼 성장하리라고 예상한 이는 드물었을 것이다. 나 자신 창간호에서 “먼 길을 어찌 다 가며 도중의 괴로움을 나눠줄 사람은 몇이나 될까? 오직 뜻있는 이를 불러 모으고 새로운 재능을 찾음으로써 견딜 수 있을 것이요, 견디는 가운데 기약된 땅에 다가서리라 믿는다”라고 다소 비장한 어조로 권두논문을 끝맺었지만, 서른 해가 지나도록 이 사업에 매달리겠다는 계획이나 구체적인 각오를 가진 것은 물론 아니었다. 단지 그 순간에 어울릴 만큼의 다짐에다 약간의 젊은 치기도 곁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도중의 괴로움”도 다분히 수사적인 표현으로, 살아남기 자체가 실제로 힘겨워질 고비고비와 여러 해 동안 아예 불가능해지기조차 할 상황을 예감했을 리 없다. 그런데도 온갖 고비를 넘기고 오늘을 맞은 것은, 뜻있는 이들의 가세와 성원기대에 어김없이, 아니 기대를 훨씬 넘어 제공되었음을 말해준다. 또 그렇게 되기까지는 우리에게 괴로움을 가한 사람들의 행위도 적잖은 몫을 했으니 이래저래 세상의 은혜가 막중함을 깨닫는다.

조그만 대세와 큰 대세

아무튼 이제 ‘창비’라는 약칭이 귀에 익어진 『창작과비평』지 및 창작과비평사는 지식인사회의 한 거점으로 당당히 자리잡았을 뿐 아니라 어떤 의미로 우리 문학과 사회 전반에 걸쳐 하나의 조그만 대세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조그만 대세’라는 좀 모순된 표현을 쓴 것은, 지난날의 곤궁한 처지에 비하면 분명 ‘대세’라 부름직한 어떤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지만, 날로 넓어지고 소용돌이치는 세상에서는 여전히 조그만 한 구석을 차지할 따름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 어찌 보면 초창기보다 더욱 세상의 대세를 거스를 각오가 필요한 상황인지도 모른다. 당시의 약세는 사업주체의 절대적 역량 부족에다가 우리가 지향하던 ‘창조와 저항의 자세’에 관한 논의조차 인위적으로 봉쇄되기 일쑤인 외부조건 탓이었지만, 그런 만큼 ‘창비’의 사업에 대한 지식대중의 잠재적 욕구는 쉽게 동원 가능한 상태로 퍼져 있었다. 그에 비해 지금은 상대적으로 엄청나게 늘어난 인적 자산과 튼튼한 물질적 기반 및 사회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창비’가 뜻을 둔 과업과 제기하는 문제들을 지식인사회와 독자대중 스스로가 외면하는 풍조가 당시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풍조는 흔히들 지적하듯이 1990년대 들어 자본주의의 전지구화에 가속이 더해지면서 눈에 띄게 불어났다. 그러나 생경한 운동권 논리들이 판을 치던 80년대에도 ‘창비’를 가장 주목한 것은 오히려 정부 당국이었고 운동가들은 운동가들대로, 일반 대중은 대중대로 ‘창비’가 주류문화에 너무 가깝다거나 너무 멀다는 각기 다른 이유로 외면하는 풍조가 이미 시작됐었다. 게다가 87년 유월항쟁은, ‘창비’에 대한 당국의 봉쇄를 완화하고 계간지의 복간을 가져올 만큼의 민주화를 달성했으나 곧바로 문민정권을 창출하고 과거청산에 들어가는 데는 실패했기 때문에, 위의 각기 다른 이유에 따른 외면 풍조가 지속되는 데는 오히려 더 알맞은 분위기를 조성하는 계기가 된 면도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전지구화는 어제오늘 시작된 대세가 아니며, 더구나 ‘창비’가 형성한 조그만 대세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자본주의 경제발전이 허용한 물질적 여유와 그 과정에서 얻어낸 시민적 자유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런 뜻에서 ‘조그만 대세’를 짓누르는 ‘더 큰 세’를 마치 억울하게 당한 일처럼 여기는 것은 정확한 인식도 현명한 대응도 아니다. 이 더 큰 대세는 우리가 덮어놓고 부정해도 망하게 마련이고 고분고분 순응한다 해도 한갓 상품으로 소모될 운명이 면제되지 않는, 그야말로 ‘대세’의 이름에 값하는 현실인 것이다. 따라서 이 현실에 일면 적응하며 일면 거슬러가는 곡예 말고는 달리 정도가 없으며, 그 점에 대한 기본인식만은 창간 당시의 미숙한 상태에서도 어느정도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우리가 거슬러야 할 눈앞의 대세가 궁극적인 차원의 대세는 아니라는 것도 예나 이제나 우리의 변함없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역사의 일직선적인 진보에 대한 신앙과는 애초부터 무관한 것이었고, 이른바 변증법적 또는 나선형의 진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우리가 맹목적인 신뢰를 주어본 적은 없다. 나사못꼴이든 정·반·합 3박자 가락이든 그것이 민중 한 사람 한 사람의 커다란 깨우침을 기계적으로 예정한 진보인 한에는 ‘변증법’ 역시 또 하나의 미신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연구자의 진지한 의심과 실행인으로서 시시각각의 결단을 수반하는 믿음이다. 그런데 당장에 불리한 실행을 결단할 각오가 조금이라도 되어 있고 눈앞의 현상을 꿰뚫어볼 약간의 연구심만 있다고 해도, 지금 세상을 휩쓸고 있는 대세라는 것이 궁극적 차원의 대세가 될 수 없음은 분명하지 않은가. 인류의 멸망이 예정된 사항이 아닌 다음에야 모든 것을 돈으로 사고파는 세상이 이대로 지속될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며, 혼탁의 전지구화가 인류문명의 전지구적 쇄신을 준비하는 과정이라 믿는 것이 차라리 합리적이 아니겠는가.

‘대세’를 이렇게 다시 대·중·소로 나누는 일이 부질없는 말장난처럼 들릴 수도 있다. 다만 창간 30주년을 맞아 그동안 우리가 이룩한 것에 대한 정당한 긍지와 그 한계에 대한 냉철한 인식 사이의 균형을 잃지 않는 하나의 방편으로 ‘조그만 대세’를 말해본 것이며, 이를 최대한으로 활용할 지혜를 찾기 위해 우리가 거슬러야 할 대세와 믿고 키워야 할 또다른 대세를 동시에 생각할 필요를 상기해보는 것이다.

몇 개의 고비

30주년을 맞은 소감을 말해달라는 주문을 요즘은 자주 듣는다. 위에 적은 토막생각들도 소감에 해당한다면 여기서는 이미 주문에 어느정도 응해버린 셈이지만, 과거를 회상하며 ‘남다른 감회’를 술회하기에는 이제까지 늘 그랬듯이 지금도 그날그날의 일과가 너무 벅차고 앞날에 대한 믿음과 의심이 똑같이 너무 절박하다. 그래도 금년에는 언론사의 면담 요청에 응해서건 『창비문화』가 기획한 대담들을 통해서건 이런저런 개인적 회고담이 얼마간은 나오게 되었는데, 이 글에서는 그와 좀 다른 차원에서 그간 ‘창비’가 겪어온 몇 개의 고비를 짚어볼까 한다.

창간호 권두논문의 ‘젊은 치기’를 위에 잠깐 언급했지만 좀더 구체적으로 그것은 논문 내용 자체의 엘리뜨주의 및 전통경시 성향으로 기록에 남은 일면 외에도, 사업주체로서 실무의 부담에 대한 안일한 계산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다행히 뜻있는 이들의 북돋움이 기대를 넘어 사업은 비교적 순조롭게 자리를 잡아갔다. 특히 나 개인으로서는 안일한 계산들이 하나둘 빗나가는 실무체험을 통해 구체적인 일과의 처리가 모두의 큰 일이자 곧 발심한 사람의 자기 일임을 배우게 되었으며, 창간 당시의 편향된 생각에 대해서도 ‘시민문학론’(1969)을 쓸 무렵에는 부분적으로나마 자체교정이 가능해졌다. 그러고 나서 나는 ‘창비’ 사업에서 일시 손을 떼고 유학의 길에 다시 올랐는데, 삼선개헌을 앞두고 정국이 날로 험악해가던 싯점에서의 그 결정이 용기있는 일이었다고는 지금도 자신할 수 없다. 어쨌든 이를 계기로 ‘창비’는 창작과비평사의 독립이라는 새로운 계기를 맞지만, 또 한 차례의 안일한 계산도 가세하여 국내에 남은 벗들과 잡지 자체에 모진 시련을 안겨주게 되었다.

3년에 걸친 이 고비를 성공적으로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일차적으로 염무웅씨를 중심으로 ‘창비’ 사업에 직접 나선 동지들의 공로이다. 그러나 이 또한 수많은 뜻있는 이들이 알게 모르게 도운 덕분임은 더 말할 나위 없다. 이로써 ‘창비’는 처음 3년 반과는 다른 성질의 견딤을 성취했으며 단순히 견뎌낸 것만이 아니고 미국 유학생 출신의 영문학도가 주재하는 상황에서는 아마도 힘들었을 체질개선을 수행했다. 신경림·황석영·김윤수·강만길 등등의 ‘새로운 재능을 불러 모은’ 것이 이때였으며 지면에 등장한 것은 아직 뒷날 일이지만 김지하 시인이나 박현채씨와의 인연도 그때 비롯되거나 깊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발전에 대해 나 자신이 내세울 점은, 귀국 후 그들이 이룩해놓은 바를 이어받아 함께 키워나가는 일이 아무런 마찰 없이 진행되었다는 것 하나다. 바로 그러한 순조로운 합류와 이에 따른 또 한번의 자체정비가 수행되었기에, ‘창비’는 1974년 1월 긴급조치 1호의 선포로 시작된 본격적인 수난의 시대를 아슬아슬하게 넘기면서 1980년 7월, 내란세력에 의한 강제폐간 때까지 연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폐간 이전의 여러 고비에 대한 언급은 여기서 생략한다. 독자들 중에는 그 고비들을 함께 넘긴 기억이 생생한 분도 적지 않을 것이고, 이번호에 실리는 ‘창비와 나와 우리 시대’ 기고문이나 본지 연혁을 통해서도 상기되는 바 있을 것이다.

폐간 후에도 시련이 멈추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창비’에 한정된 일도 물론 아니었다. 다만 우리의 경우, 잡지의 폐간을 단행본 출판사업 확장의 계기로 삼으면서 ‘창비’의 본디 노선을 고수하고자 했을뿐더러 복간을 위한 구체적인 시도를 다각적으로 전개한 점이 남다른 시련을 자초하는 원인이 된 것이 사실이다. 알려졌다시피 가장 극적인 사건은 1985년에 『창작과비평』 ‘통산 57호’ 형태로 무크지를 발간함으로써 출판사마저 등록을 취소당한 사태인데, 또 한번 나라 안팎 각계각층의 뜻있는 이들이 모여들어 도와준 덕에 이듬해 가서 ‘창작사’라는 이름으로나마 다시 출판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창작사에서는 87년 여름 군사정권과의 싸움이 한창일 때, 『창비 1987』이라는 (전번보다는 많이 조심한) 제목으로 또 한권의 무크를 냈다. 이 책이 출간되기 전에 ‘6·29선언’이 나왔기에 망정이지 우리로서는 꽤 마음 졸이면서 감행한 일이었다.

‘법고창신(法古創新)’

이런 사실들을 새삼 되새기는 것은 안하겠다던 회고담을 새로 늘어놓자는 것이 아니다. 88년 초 드디어 복간이 허용되었을 때 본지가 8년 가까운 공백을 큰 무리 없이 메우고 오늘의 ‘조그만 대세’를 만들어온 데에는 강요된 공백을 공백으로 남겨두지 않으려는 우리 나름의 끈질긴 노력이 있었음을 말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복간 이래는 나 자신의 지론에 의하건대 현재도 지속중인 ‘민족문학의 새 단계’에 해당한다. 즉 민족문학은 종전과는 무언가 크게 다른 방식으로 대응할 시기를 맞았으되 민족문학의 개념과 대의 자체는 엄연히 견지되어야 할 때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민족문학이 특별히 주목해온 분단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 민중의 실생활에 대한 좀더 자상하면서도 총체적인 이해, 리얼리즘론의 전면적 쇄신을 통한 세계문학 및 예술성 자체에 대한 심화된 통찰, 나아가 자본주의적 근대의 전지구화 대세 속에서 한민족 및 동아시아인으로서의 주체성에 바탕하되 세계적인 위력을 갖는 대응방안의 모색 등이 당면과제로 떠오른 것이다. ‘창비’는 이런 과제들을 감당하기 위해 복간 이래, 아니 적어도 57호 무크지 이래로, 우리 나름의 연마와 쇄신을 거듭해왔다. 그런데도 요즘은 ‘창비’를 낡은 잡지로 치부하는 소리가 심지어 우호적 인사들한테서조차 들리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그 모든 것이 다 잘못된 세상 탓이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몰이해 탓이라고 받아넘긴다면 ‘창비’는 그야말로 구제불능의 낡은 잡지가 될 터이다. 인간이면 누구나 가진 역량의 한계 말고도 ‘창비’는 앞단계의 고비들을 힘겹게 넘기면서 생긴 타성이라든가 다양한 기회의 박탈에 따른 낙후성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해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위에 열거한 중요 과제들 가운데 ‘근대성’이나 ‘동아시아적 시각’ 등 유행적 담론과 표면상 합치되는 일부를 빼고 ‘창비’가 집착하는 대부분의 주제를 때 지난 일로 치부하는 것은 분명 그릇된 시류라는 것이 우리의 신념이다. 또한 생태계 문제라든가 여성해방 문제, 과학기술 문제 등을 발빠르게 다루지 못했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우리는 한편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뼈아프게 반성하면서, 다른 한편 ‘창비’ 70호(1990년 겨울)에 이미 생태계의 위기를 권두좌담으로 다뤘고 여성문제에 관해서는 일찍이 70년대 말(52호)에 첫번째 권두좌담을 한 바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발걸음이 느리다는 인상을 준 데에는 이들 문제를 ‘창비’가 처음부터 견지해온 민족적·계급적 시각을 배제하여 단순화할 위험을 경계한 신중성의 결과이기도 함을 항변하고 싶어진다.

아무튼 ‘한결같되 날로 새로운 잡지’ ‘나날이 새로워지되 한결같은 잡지’가 우리의 일관된 목표이자 거듭된 다짐이다. 이는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치로 따지건대, 한결같음이 없는 변화는 진정한 새로움이요 창조이기보다 낡은 것들의 손쉬운 변형에 불과할 터이며, 끝없는 쇄신 없는 ‘한결같음’은 화적의 굳음이지 생명체의 일관성일 수 없다. 이번에 창간 30주년을 축하하며 이우성 교수가 휘호해준 연암 박지원의 글귀 ‘法古創新’의 의미도 바로 그런 것이라 믿는데, 이참에 ‘옛것’이 처음 생길 때는 무엇을 법 삼아 생겼을까라는 의문을 화두로 붙들고 궁굴려봄직도 하다.

‘창비’의 새 단계

복간 이래 우리 문학과 사회는 지금도 크게 보아 동일한 단계를 거치는 중이라고 말했지만, ‘창비’ 자체로서는 30주년을 맞은 올해가 새로운 단계의 시작이 아닐 수 없다. 30주년을 맞았다는 사실 자체가 어쨌든 본인들에게 특별한 자기점검의 계기가 됨은 물론이려니와, 이런저런 기념행사를 치르며 기념호를 만드는 과정에서 직접간접으로 여러 분들의 충고와 조언을 듣고나서도 무언가 획기적인 변모와 비약이 없다면 ‘한결같되 날로 새로운 잡지’는 빈말임이 입증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 사회 전체로도 작년에 일어난 여러가지 변화가 곧바로 87년 6월 이래의 단계를 마감했다고는 볼 수 없으나 중대한 새 국면을 펼친 것만은 분명하며 그 귀결의 윤곽이 올해 결정될 공산이 크다. 지금 언론의 관심은 대통령의 이른바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과 맞물린 4월 총선 전망에 온통 쏠려 있고 실제로 15대 총선의 역사적 중요성은 막대하다. 그런데 대통령이 5·6공의 (부분적) 청산을 결단하기까지는 노태우 비자금 사건 이전에 5·18내란혐의자 불기소처분에 대한 범국민적 항의운동이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되며, 국내의 이 소용돌이 속에서 충분한 주목을 못 받았지만 1994년 10월 미국과 북한 간 ‘기본합의문’의 발효에 따른 북·미관계의 진전과 95년 북한의 대홍수로 인한 새로운 한반도정세의 전개도 새해에 어떤 변화로 이어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작년에 유독 많았던 대형사고들도 단지 특정 교량이나 공사장 또는 백화점이 무너진 사건으로 볼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한 걸음 더 나가 ‘우리 국민의 대충주의’와 ‘세계화의 수준 미달’의 사례들로 보는 것으로는 족할까? 나름대로 정확한 진단이긴 하지만, 들을 귀가 있는 자는 그보다 더 깊은 것을, 낡은 세상이 무너져내리면서 새로운 세상을 향해 사람들이 깨어나기를 재촉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런 대목일수록 헛것을 듣고 엉뚱한 미망에 빠질 위험이 크다. 하지만 과학의 이름에 기대어 드러난 현상에만 집착하는 것도 또다른 헛것을 보는 일이니, 지금이야말로 각자가 신심과 의심을 다그치며 공부길을 잡을 때이다.

선거의 결과도 중요하고 한반도 주변 및 세계 정세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민중 각자의 공부와 깨우침을 통한 새 세상의 열림에 모든 것이 달렸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한 구석에서나마 조그만 대세를 형성해온 ‘창비’ 같은 잡지의 몫이 남다름을 느낀다. 실은 선거 자체도 하나의 속임수가 아니려면, 유권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각기 조그만 정성을 모은 끝에 홀연히 나라의 큰 운명을 판가름 내는,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을 매번 연출하는 작업이라야 한다. 아직껏 우리 현실의 선거는 이런 기적보다 속임수에 훨씬 가깝지만, 규칙의 공정성으로나 국민의식의 수준으로나 지난날에 비해서는 월등히 선거다운 선거를 해볼 가능성이 마련된 상태다. 따라서 다가오는 총선과 내년의 대선을 좀더 낫게 치르기 위해서도 그렇고 선거의 결과가 어찌 되든 이를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서도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 시대의 흐름에서 거스를 것과 순응할 것을 알며 그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현실적 힘을 정확히 인식하는 주체가 이 사회에 광범위하게 자리잡는 일이다. 이러한 주체의 형성 및 확산 과정에서 파란 많은 30년을 견디며 ‘조그만 대세’를 이루고 그 과정에서 ‘더 큰 대세’와 ‘궁극적 차원의 대세’를 함께 읽는 법을 익혀온 잡지가 또 한번의 자기쇄신에 성공한다면 그 규모에 비교가 안 될 엄청난 폭발력을 지닐 수 있으리라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자 믿음이다.

사실은 ‘규모’ 즉 잡지의 발행부수나 출판사의 물적 토대로도 ‘창비’는 국내외 동료들, 특히 선진국을 자처하는 미국과 서구, 일본의 지식인들이 선망하여 마지않는 상태다. 이는 현재 2만부가 채 안 되는 부수가 절대적으로 많아서라기보다 그만큼 선진자본주의 나라들의 문화 풍토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뜻이겠지만, 여하튼 ‘창비’ 정도의 수준을 지닌—흔히 욕먹듯이 ‘어려운’―잡지가 그만큼 팔린다는 사실이 저들에게는 거의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하기는 시집이 몇십만 부씩 팔리는 것도 저들에게는 놀랍고 부럽기만 한 현상이다.) 그러므로 ‘창비’의 새 단계를 여는 구체적인 전략의 첫번째는 이 복된 풍토에서 공들여 이룩한 소중한 기반을 더욱 키워나가는 독자 확대 작업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 현재 진행중인 정기독자배가운동 같은 캠페인성 노력 외에 더 장기적으로 편집진과 필진, 취급하는 주제와 접근방식 등 모든 면에서 더욱 새로워질 것을 다짐하고 있다.

동시에 우리는 앞서 밝힌 대세관대로 ‘창비’가 날로 새로워지되 그것이 한결같음에 뿌리 둔 새로움인 한, 그리고 계간지의 성격을 유지하는 한, 발행부수가―특히 서점을 통한 판매부수가―갑자기 껑충 뛸 수 있는 세월이라는 환상은 갖지 않는다. (90년대 들어서도 필화사건 덕에 그런 일이 있기는 했지만 그게 바람직한 길이 아님은 물론이다.) 오히려 한국 역시 ‘창비’만한 잡지가 대중성을 얻기에는 나날이 불리해지는 전체적 상황임을 직시하고 있다. 그러나 ‘창비’만한 거점이나마 확보되었다는 행운이 있는데다가 ‘궁극적인 대세’에는 못 미치는 ‘눈앞의 대세’가 한반도에서는 남달리 불안정하고 유동적인 성질임을 알기 때문에, 수준저하 없는 꾸준한 기반확대라는 야무진 꿈을 꾸어봄직하다고 믿는 것이다.

‘어려운 잡지’에 관하여

‘창비의 새 단계’를 위한 몇가지 구체적 조치는 뒤에 언급하기로 하고, ‘창비’가 너무 어려운 잡지라는 귀에 익은 비판을 잠시 생각해볼까 한다. 내 글도 다른 누구의 글 못지않게 이런 비판을 듣는다는 사실이 내가 이 문제를 생각하는 데에 권위를 더해주는지 아니면 결격사유가 되는 건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런 비판을 버릇처럼 듣는 나 자신이 읽어도 어려운 글이 ‘창비’에 실리는 일이 있으니 문제가 심각하기는 심각하다. 한데, 이쯤 되면 ‘창비는 너무 어려운 잡지다’라는 점에 관해서만은 이야기가 끝났다 싶으련만, 다시 말을 맞춰보느라면 사태가 그리 명료치만도 않다. 정작 내가 어렵다고 생각한 글은 아무렇지 않게 여기면서 내 나름으로 쉽게 풀이해놓았다고 자부(!)하는 글에 대해서는 어려워서 못 읽겠다고 고개를 젓는 이들을 심심찮게 만나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 문제에 관한 한 내게 결격사유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을 전제한 채로 이 문제를 한번 곱씹어볼 때, 무엇이 어려우냐 쉬우냐는 것이 결코 간단히 말해질 성질이 아님을 상기하게 된다. ‘창비’가 너무 어렵다는 비판에 대해 나 자신은 그것이 상당부분 사실이고 개선의 여지가 많다는 점을 부인하려는 게 아니라 이 문제를 좀더 진지하게 대면하기 위해서 한두 가지 성찰을 더해볼까 한다. 먼저, 다소 아전인수격이지만, 그러한 비판이 ‘창비’에 대해 유독 많이 쏠리는 것이 ‘창비’가 예컨대 다른 계간지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어려워서라기보다, 그만큼 다양하고 많은 독자들이 더 큰 관심과 애정을 갖고 ‘창비’를 읽어주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대체로 우리나라에서 일정한 지적 수준을 겨냥하는 잡지(특히 계간지나 여타 학술지)들은 두 가지 상이한 의미로 어려울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 하나는, 그 다루는 소재가 대개는 우리에게 생소할뿐더러 실제로 토의수준이 높을 때도 흔한 서양의 논의에 맥을 대고 있기나, 아니면 바로 동양 또는 한국의 전통과 닿은 것인데 그 전통 자체가 때로는 서양 것보다 더욱 멀어진 게 우리의 실정이기 때문에, 아무리 쉽게 써도 독자에게 일정한 준비와 노력을 요구하지 않을 만큼 쉬워질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또 하나는 쓰는 사람이 잘못 썼기 때문에 어려워지는 경우다. 불행하게도 우리 지식계에는 이런 경우기 너무나 많고 ‘창비’도 예외가 아니며, 개인으로 말하면 나 자신을 포함한 어느 누구도 그 점에 관해 큰소리칠 입장은 못 될 터이다. 다만 이 점에 관해서만은, 앞으로 필자 및 소재의 선정뿐 아니라 선정된 필자와의 협의, 원고의 편집·교열 등 모든 과정을 통해 전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독자에게 다가가는 노력을 기울일 것을 약속할 수 있다.

그러나 ‘창비’의 어려움을 두고 이런 일반론으로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는 측면도 있다. 어려운 문제를 최대한 쉽게 정리했지만 어쩔 수 없이 어려운 데가 남았다거나 누가 봐도 필자의 역량부족으로 어려워졌으니 장차 필자 또는 편집자의 노력으로 바로잡으면 되리라고 인정되는 대목 말고도, 과연 어려운 문제를 그나마 쉽게 풀어놓은 건지 아니면 쉬운 문제를 공연히 어렵게 풀어가는 건지 아리송한 경우가 아마 다른 잡지보다 ‘창비’에 더 많으리라 짐작되는 까닭이다. 예컨대 근대의 긍정도 부정도 아닌 ‘근대성의 성취와 극복의 이중과제’ 운운하는 것도 그렇고, 때로는 다 아는 이야기의 지루한 되풀이 같고 때로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이 복잡하고 공허한 논리 같기도 한―두 가지 비난이 동시에 나오는 경우도 있다!―‘분단체제론’이라는 것도 그렇다. 그리고 바로 이 대목에 이르면 나 자신은 객관적 판단자로서의 결격사유가 있음이 분명하다.

결격사유의 있고 없음을 떠나 지금이 분단체제론을 길게 논할 계제는 아니다. 다만, 글의 ‘어려움’이라는 것이 앞서 말한 필자의 능력이라든가 소재 또는 주제의 ‘객관적’ 난해성이라는 요소 외에 독자의 관심에 얼마나 부합하느냐라는 또 하나의 중대한 변수에 좌우되는 것이니만큼, 예컨대 분단체제론은 어떤 관심사와 어떻게 합치되는 것인지를 한번 살펴봄직하다. 본지를 통해 거듭 논의되었듯이 분단현실에 대해 ‘창비’ 편집진이 대체로―물론 ‘대체로’일 뿐이지만―합의하는 점은, 남북한 각기가 엄연히 다른 사회지만 ‘분단체제’라고 부름직한 어떤 공통의 구조에 얽혀들어 있으며 이는 한반도의 특수한 현상이되 세계체제의 긴요한 일부로 작동하고 있다는 인식이다. 이에 따라 남한 민중 자신의 그날그날의 노력으로 풀 일이지만 분단체제의 변혁과 무관할 수 없으며, 후자는 다시 세계체제 변혁의 전망 및 전략을 전제함으로써만 원만하게 수행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분명 절대적으로도 꽤나 복잡한 구도려니와, 여기에 딸린 여러 가지 구성요소와 실천과제 중 어느 하나에도 관심이 없거나 희박한 독자에게는 공연히 쓸데없는 사항을 끌어들여 이야기를 어렵게 만든다는 느낌을 주게 마련이다. 예컨대 세계혁명이나 남한혁명 또는 조국통일 그 자체에만 관심이 쏠리고 남북한 각기의 내부개혁은 부차적인 문제로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우리의 일차적 과제를 남한사회의 개혁에 둔 ‘분단체제 변혁’론은 수상한 말장난으로 들릴 것이요, 남한 자체의 개혁에 열중하더라도 한국사회가 분단체제 및 세계체제에 편입된 상태임을 외면하거나 그런 발상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 역시 쓸데없는 개념들을 끌어들여서 대세를 잘못 읽고 개혁의 촛점도 흐려놓는다는 불만을 풍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느 쪽인들 우리가 현실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을 더 알기 쉽게 정리해주는 것일까. 김영삼정권 초기 개혁이 실종되는 과정에서도 우리는 남한사회의 민주화와 남북관계가 얼마나 불가분하게 얽힌 것인지를 실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분단체제론은 개혁의 표류와 실종이 정권의 무원칙한 대북정책과 돌출적인 반북 언동에 직결됨을 밝히는 데 머물지 않고, 분단체제가 한반도 전체를 포괄하는 만큼 책임을 어느 한쪽 정권에만 돌릴 수 없음을 지적하며, 동시에 분단체제가 세계체제의 일환인 이상 한반도 외부세력―이 경우 누구보다도 미국―의 이해관계가 중요하게 작용함을 간과하지 않는다. 1995년 말엽에 뒤늦게나마 개혁작업이 재개된 데에도 대통령의 개인적 결단과 돌파력 외에 군사독재의 잔재 청산에 대한 국민의 열망이 결정적으로 작용했음은 물론이지만, 94년 10월의 북·미간 핵문제 타결이 없었으면 적어도 현정권하의 개혁재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어렵사리 재개된 개혁작업의 장래는 극히 불투명하다. 무엇보다도 총선에서 수구세력의 약진과 개혁진영의 가중된 혼란이 염려되는데, 여기에 우리 사회의 고질화된 지역분열이 위협적인 변수로 작용하고 있음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다. 그럼에도 이에 대한 적절하고 결연한 대응을 못하는 이유 가운데는, 극우의 논리는 분단이데올로기로 규정하면서도 지역분열 및 지역맹주구조는 분단과 다른 차원의 문제로 파악하는 소박한 분단현실인식이 있다. 그에 반해 분단체제라는 개념은 극우적 반공논리가 남한에서는 가장 대표적인 분단이데올로기임을 인정하지만 북한에서는 전혀 다른 논리가 유사한 기능을 수행할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으며, 분단체제 전개과정의 일정한 단계에 가면 남한 내에서조차 분단이데올로기의 다양한 형태 중 극우이념이 차지하는 비중이 현저히 줄어들 가능성도 통찰케 해준다. 지난호 본지 머리말에서 지적되었듯이 현단계에서 “극우반공이데올로기나 지역감정은 분단체제 및 정권 유지의 쌍두마차격”인 것이다. 그렇게 보면 극우적 군사독재가 한풀 꺾인 1987년이 이른바 지역감정 악화의 새 기원을 그은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며, 95년 말에 재개된 개혁작업에 대한 최대의 위협이 (정권 자체의 지역주의를 포함한) 지역할거주의로 나타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결국은 분단체제의 복잡 유연한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는 민중적 주체의 확립·확산만이 국민의 개혁열망과 민족의 통일염원을 폭발적인 실력으로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통권 91호와 그 뒤

정치에서든 잡지 만들기에서든 어려운 것은 실행이다. 30주년 기념호로 공들여 만든 이번 91호의 경우도 계획대로 안 되는 일이 생기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특집 ‘『창작과비평』 30년을 말한다’에는 임홍배, 김동춘 두 소장 학자가 각기 문학과 사회과학 분야에서 ‘창비’의 성과를 애정어리면서도 냉철한 눈으로 평가한 논문을 써주었고, 박형규·박완서 등 원로로부터 ‘창비’와 동갑내기 66년생 및 그보다도 어린 독자에 이르기까지 열다섯 분이 다양한 감회와 충언, 회상 들을 부담없이 읽히는 짤막한 글로 보내주었다. 게다가 또 한명의 66년생인 권성일씨는 ‘창비’ 정기구독자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일부러 실시하여 그 결과를 분석했는데, 독자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할뿐더러 편집자들에게는 격려와 경고를 겸한 많은 생각거리를 제시했다.

25주년 기념호 때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기념 신작소설집을 따로 만드는 바람에 본지에는 소설을 싣지 않았다. (기념소설집은 정기독자와 오는 2월 27일 자축연에 오시는 손님들께 증정될 예정이다.) 그 대신 시란을 대폭 늘여 ‘32인 신작시선’을 또 하나의 특집으로 꾸몄다. 특집이 두개가 들어가는 바람에 문학평론을 ‘특집 I’ 중의 임홍배씨 글과 이번호부터 임규찬씨가 한동안 맡게 될 계간소설평으로 한정시키고도 책이 꽤나 두꺼워졌다. 제작비도 제작비지만 독자들의 부담감을 덜기 위해서도 잡지 면수를 줄이자는 결정을 이미 내린 바 있는데, 이번호만은 기념호니만큼 ‘특대호’로 봉사하는 것도 뜻있는 일이라 생각되었다.

특히 논문들은 각기 다른 소재를 다루지만 모두가 본지의 각별한 관심사를 반영하는 것으로 마음먹고 골랐다. 정약용과 심대윤 두 유학자들의 진지한 사상적 탐구를 고찰한 임형택씨의 「19세기 서학에 대한 경학의 대응」, 맑스·브로델·월러스틴 등의 비교 검토를 통해 우리 시대의 사상적 모색을 계속하는 유재건씨의 「맑스와 월러스틴」, 작년의 민주노총 출범을 계기로 국민경제 속의 산별노조의 역할을 점검한 이은진씨의 글이 모두 그러한 펀집의도의 결실이다. 게다가 줄리언 스탤러브라스의 「싸이버스페이스의 탐험」 번역은 다소 어렵고 길더라도 기왕에 외국 글을 소개할 바에는 국내 필자가 감당하기 힘든 몫을 채우도록 하자는 종래의 방침에 따른 것인 동시에, 부단히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나가려는 우리의 의지를 입증한 예라고 믿는다. 진지한 일독을 권하며 앞으로 이 첨단분야에서도 ‘창비’ 특유의 대응이 있을 것임을 알린다.

서평·촌평들에 대한 독자나 필자의 반응은 아직도 일정치가 않다. 편집자의 지속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성과가 고르지 못한 탓도 있고 실제로 이룩된 성과조차 일반적인 타성으로 간과되는 면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바람직한 독서풍토를 만들고 ‘창비’가 종합적인 독서정보지의 일면도 갖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이 분야에 남다른 공력을 계속 쏟을 작정이며 이번호에도 그랬다. 또 그 정과가 이우성 교수의 학문세계를 짧은 지면에 폭넓게 짚은 이기백 교수의 「고전적 교양과 근대적 예지」를 비롯한 다섯 편의 서평과 유홍준 교수를 포함한 아홉 분의 촌평으로 나타난 것을 흐뭇하게 생각한다.

독자들이 주목했는지 모르겠으나 본지는 한동안 싣던 ‘영화평’을 지난호부터 ‘영화수상’으로 바꾸면서 좀 새로운 접근을 해보기로 했다. 즉 영상전문지나 신문의 연예면에 흔히 나옴직한 영화평보다 ‘창비’ 독자들의 지적 관심에 폭넓게 호소할 수 있는 수상문이 더 효율적인 지면활용이 되리라는 생각이었다. 이번호 천지현씨의 글도 그런 의도의 소산으로 독자들의 호의적 반응을 기대해본다. 아울러 본지는 영상매체가 우리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하여 ‘영화수상’ 외에도 본격적인 영화론·비디오론 들을 수시로 실을 방침이며 미술·음악 등 ‘전통적’ 장르에 관해서도 수준 높은 문학독자의 구미에 맞을 평론을 찾아 싣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호를 집어든 독자는 내용을 보기 전에 먼저 표지에서부터 변화를 항한 우리의 의지를 실감했을 것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너무 파격적인 변화라는 반응에서부터 ‘창비’는 기껏 변한다는 게 겨우 이거냐는 데까지 각양각색이리라. (본사 사원들의 내부 검토과정에서도 그 점은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우리는 자기쇄신에의 의지와 더불어 지나친 표변을 피하는, 어떤 점에서는 복간 이래의 체재보다 오히려 폐간 이전의 옛 모습을 상기시키는 바 있는 표지를 전문가의 솜씨를 빌어 만들었으며, 무엇보다도 이 결정에 담긴 취지를 잡지의 내용을 통해 살려나가는 것이 중요함을 알고 있다.

성패는 기념호 자체보다 기남행사 뒤에 평상을 되찾고 다시금 한권 한권 쌓아가는 과정에서 갈릴 것이다. 이를 위한 우리의 준비는 재작년에 회사의 법인화를 결행하고 작년에 젊은 층의 편집위원 및 편집자문위원을 영입한 데서도 이미 시작되었거니와, 금년 초에는 (주)창작과비평사의 내부 인사를 통해 실무책임자들 중심의 운영체제가 강화되었으며, 잡지의 경우는 그동안 일종의 편집인 직할체제이던 것을 최원식씨의 주간 취임과 더불어 젊은 편집위원들의 참여도가 대폭 증가된 양두체제로 바꾸었고, 이는 다시 주간이 이끄는 소장세대 위주의 체제로 점차 이동해야 하리라는 것이 나 개인의 소신이자 개인이 거슬러봤자 자기만 볼썽사나워지는 당연스러운 추세이다. 자문위원 구성에서도 그동안 과학 분야를 맡아 애써준 김영식 교수 자신의 강력한 주장으로 이필렬(李必烈) 교수로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그밖에 대외적인 직함이 없는 상태로 ‘창비’의 사업과 다분히 공식적인 관련을 맺고 참여하는 젊은 학자·평론가들의 수효가 늘고 있음을 독자들께 귀띔해드린다.

끝으로 30주년에 이르기까지 ‘창비’를 지켜주고 키워주고 밀어주신 수많은 분들의 은혜를 새삼 되새기며, 특히 나 개인으로서 입은 은혜를 도무지 어떻게 다 갚을지 모르겠다. 세상 전체로부터 받은 은혜라 치고 세상과 천지에 보은하면 되지 일일이 은인들을 찾아다닐 수도 없지 않느냐고 스스로 변명하기도 하지만, 때로 너무도 무심한 인간으로 비친 적이 많음을 모르지 않는다. 이 자리를 빌어서라도 삼가 머리 숙여 죄송하고 감사한 뜻을 표한다. 앞으로 30년 아니 그 이상의 세월 동안 나 개인이 아닌 ‘창비’에 몇 곱의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창작과비평』1996년 봄호 특집 ‘창작과비평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