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문

[창비 책머리에] ‘김일성 이후’의 분단체제

지난 89년 노태우정권이 문목사 방북사건 등을 빌미로 한창 공안정국을 펼칠 무렵, 본란(65호 ‘책머리에’)은 “분단체제는 본질적으로 공안체제이며, 적나라한 공안정국과 눈가림하는 공안정국이 대거리하면서 유지되는 체제”임을 지적했다. 동시에 그때로서는 마치 항구적으로 지속될 듯한 느낌도 주던 ‘적나라한 공안’ 국면은 그다지 오래 지속되지 않으리라 내다보았다. 실제로 당시의 탄압국면은 89년 말의 ‘5공청산’ 합의와 90년 초 3당합당의 사전 정지작업이었다.

김일성주석의 사망으로 가장 불안하고 허전한 것은 북한측이련만 엉뚱하게 남쪽에서도 누구 못지않은 신경불안 증세를 보이고 있다. 주사파가 온통 나라를 뒤흔들고 있다는 식의 호들갑으로 시작하더니 온갖 ‘불온사상’을 아침에 ‘발본색원’해 뿌리뽑아야 한다고 난리들이다. 학문과 사상의 자유라든가, 죄형법정주의라든가, 증거에 의한 형벌 등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조차도 일거에 실종된 느낌이다. 이들 원칙이 전에는 잘 지켜졌대서가 아니라, 김영삼정권의 초기 개혁이 진행되면서 최소한 이러저러한 일들만은 다시 없겠지 싶던 꼴들이 그대로 재연되고 있는 것이다.

분단체제가 본질적으로 공안체제라는 관점에서 이런 사태도 결코 놀라운 것이 아니다. 남북대결 상황의 타개가 수반되지 않는 내부 개혁은 언제든지 역전될 수 있는 것이 분단체제의 한 속성이기 때문이다. 의아스러운 점은, ‘김일성 이후’의 남북간 역관계는 종전보다 더욱 남쪽에 유리해진 게 분명한데 어째서 이런 퇴행현상이 두드러지느냐는 것일 터이다. 그러나 분단체제의 기득권세력에게는 이쪽이 너무 유리해져서 통일이 되는 것도 겁나는 일이며, 통일의 과정에서 분단체제에 도전해온 민중의 개입이 커지는 것은 더욱 못 참을 일인 것이다.

분단체제의 무리없는 관리·운영이 집권층의 최대 목표인 한, 이번의 ‘신공안정국’도 영속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걸 허용할 만큼 우리 국민이 미개하지도 않으려니와, 대통령부터가 개혁의 깃발을 아주 내던져서는 ‘권력 누수’ 현상을 스스로 앞당기는 결과밖에 안 되며, 넓은 의미의 기득권세력 중에는 남북관계의 호전에 따른 실리를 기대하는 경제계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더구나 북한 문제에 관해서는 여전히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이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추구하기로 결심했다면, 한국 정부는 ‘북한 핵폭탄 다섯 개 보유’ 식의 돌출행동을 극도로 자제하지 않으면 안될 터이다. 그러므로 남한의 ‘신공안정국’은 북쪽의 후게체제 정비에 상응하는 한시현상으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물론 이 기간에 극우세력은 그동안 좁아졌던 저들의 입지를 최대한 넓혀놓으려 할 것이며, 온건 보수세력도 갑작스런 정상회담 합의로 분단체제 운영에 떠올랐던 예측하기 힘든 변수들을 가급적 제거해놓고 다음 남북 접촉에 임하려 할 것이다. 이에 대해 그동안 개혁과 통일을 추구해온 이 사회 민주세력의 대응이 단호하고도 슬기로워야 함은 더말할 나위 없다.

남한 내부의 개혁이 남북관계에 크게 좌우된다는 인식과 더불어, 개혁의 진전 자체가 공안체제의 구체적 작동양상을 규정하는 측면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최근의 반공소동에서 군부가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점이나, 여당 자체는 일사불란한 강경자세에 미달한 점, 심지어 안기부조차도 왕년의 위력은 발휘하지 못한 점 등은 그나마 ‘문민개혁’의 효험으로 꼽아야 할 것이다. 반면에 그동안 개혁의 무풍지대였던 대형 언론기관들이야말로 이번의 반공선서 행렬을 주도하고 있으며, 누구 말마따나 ‘공안기관의 민영화’에 앞장을 섰다. 여기에 대학당국이 일조한 것도 같은 논리인데, 역설적이지만 한총련 지도부의 개혁을 모르는 친북노선과 군사문화적 운동방식도 함께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북에서든 남에서든 ‘김일성주의’가 분단체제에 대한 본질적인 도전이 못 되고 오히려 그 구성이념의 하나일 수 있음이 다시 확인됨 셈이며, 남한의 극우반공주의가 북측의 체제정비에 일조함으로써 스스로 수명을 연장해가는 구조도 차제에 더욱 뚜렷해졌다. 분단체제를 바로 읽음으로써 남한사회의 민주개혁과 분단체제 전체의 혁파를 일관되게 추구하지 못하는 비판세력·변혁세력이 현실 속에서 힘을 쓰기 어려움이 실감된다.

계간지로서 그때그때의 정세에 발빠르게 대응하는 데 한계가 있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이런 때일수록 평상심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신념에서, 본지는 ‘김일성 이후’나 ‘신공안정국’ 같은 정세변화를 두고 특별한 기획을 하지 않았다. 「분단시대의 최근 정세와 분단체제론」이라는 글도 지난호 손호철씨의 비판문을 계기로 분단체제에 관한 이성적 논의를 진전시키는 데 치중하고 있으며, 설준규·최윤·김태현·성은애 네 분의 권두좌담은 서양의 명작 또는 고전으로 알려진 소설들을 어떻게 읽고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일견 ‘한가한’ 주제를 다루었다. 물론 그 문제의식은 ‘국제화’와 더불어 문학의 상품화, 나아가서 독서행위 자체의 퇴화가 거론되는 ‘지금 우리’의 것이고자 했고, 뜻있는 독자들의 호응을 받음직한 내용을 담았다고 믿는다.

유재건씨의 「맑스의 과학적 사회주의와 현실적 과학」 역시 맑스의 고전적 저술에 대한 치밀한 검증으로 되돌아가지만 그 문제의식은 어디까지나 현재적이요 오늘의 학계와 논단에 수많은 긴요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18세기 조선과 일본간의 문화교류 및 그에 힘입은 실학자들의 새로운 일본관·시국관 정립의 노력을 다룬 임형택씨의 논문도 중요한 학문적 공헌인 동시에 오늘 이곳에서의 실천적 개입이라는 성격이 짙은 글이다. 그밖에 지난호 본지의 ‘국제화’ 특집에 직접 언급한 박형준씨의 기고, 월러스틴의 「자유주의의 고뇌」 및 사회과학·역사 분야의 여러 서평들도 우리 현실에 관한 토론의 폭을 넓히고 깊이를 더하는 데 기여하리라 본다.

문학평론 분야에서는 황광수씨의 「진실 드러내기와 숨기기」에다 김규동 시인의 독서수상, 독문학자 김용민씨의 논평 들을 얻은 것이 큰 보람이다. 아울러 회를 거듭할수록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다음호까지의) 고정 서평자 김명수씨의 「원로시인들의 어제와 오늘」을 비롯하여 김정란·김정환·이현석·강미숙 제씨의 문학관련 서평·촌평이 다채롭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신진평론가들의 본격적인 참여를 기다려온 본지로서는 이번에도 그 점에서 아쉬움을 남기며 훗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이 되었다. 불원 역작을 주기로 이미 약속한 몇 분들의 건투를 기원함과 동시에, 편집진 스스로 더욱 분발할 것을 약속드린다. 또한 오는 9월 15일로 마감하는 제1회 창비신인평론상(119면 찬조)을 통해 평단에 새 바람이 불기를 기대하는 마음 각별하다.

이번호의 시란은 민영·김지하·배창환·이문재·이진명·최영숙 여섯 분이 지면을 빛내주었고, 소설에서는 송기원·윤정모·김영현의 ‘호화 캐스트’에다 역량있는 신인까지 발굴하여 오랜만의 풍작을 자랑하게 되었다. 이상권씨의 투고작 「눈물 한번 씻고 세상을 보니」는 이문구의 문체를 연상시키는 바가 너무 눈에 띈달 수도 있지만, 그것이 선배작가의 영향만이 아니고 자신의 체질과 특기를 살린 결과임을 읽는이는 금세 납득할 것이다. 답답한 농촌의 현실을 답답하지만 않게 그려낸 솜씨가 단순한 솜씨 이상의 신선한 힘을 느끼게 한다.

서평·촌평 그리고 영화평 등 짧은 글에 본지가 남다른 정성을 쏟고 있음은 어지간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는 되도록 많은 독자들께 읽을거리를 제공하려는 당연한 노력의 일환이지만 그 이상의 뜻도 담고 있다. 때로는 난삽하고 잡다하기까지 한 지적 산물에 대해 일반 독자를 상대로 간명하게 이야기하는 능력은 건전한 학문풍토와 민주적인 토론문화를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토막글의 청탁을 싫다 않고 받아주신 필자들께 새삼 감사드린다.

 

『창작과비평』1994년 가을호 책머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