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문

[창비 책머리에] 다시 5월과 6월을 맞으며

6공화국의 시국관련 구속자 수가 5공 시절을 넘어선 상태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정부쪽에서는 그래도 ‘정치범’은 한 명도 없다고 했다가 워낙 ‘물정부’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민주적이다보니, 기강이 너무 흐려져서 ‘단호한 대처’를 안할 수 없다고 변명하기도 한다. 하기는 구속자 수효가 인권상황의 절대적 지표는 아니다. 87년 이후로 민중운동이 훨씬 거세어져서 정부가 과거에는 구속 안하고도 억누르던 사람들을 이제는 잡아넣어야 겨우 통제가 되는 세상을 변한 것이 사실이다. 그만큼의 ‘민주화’가 되기는 된 셈이다.

하지만 구속자의 양산이 과연 ‘물정부’에 맞선 민중들의 ‘불같은’ 욱대김 때문만일까? 이 정권이 유독 부정을 척결하고 재벌을 규제하며 자체내 강압기구들을 개혁하는 데서나 물같았기 때문에 국민의 희생이 두 배 세 배로 늘어난 것이 아닐까? 이유가 어찌 되었건 구속되고 수배당하고 무참히 얻어맞는 당자들의 고통은 매한가지인데, 지난 몇주 사이에 보듯이 공권력에 의한 타살을 포함하여 시국관계로 목숨 자체를 잃는 일이 5공 때보다 더 많아졌다면 문제의 심각성은 또다른 차원에 이른다. 물이냐 불이냐 하는 논란도 이미 한가로운 이야기요, 그야말로 좌시할 수 없는 상황이 닥쳐온 것이다.

실제로 5월 들어 대도시는 물론이요 지방의 시·군 지역으로까지 펴진 항의시위는 이 상황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국민들의 결의가 87년 6월의 수준에 거의 육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6월항쟁의 지도자 중 하나가 그사이 집권당의 대표로 변신했고, 야당의 지도자로 남은 다른 한 분은 아직 87년 상황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왕년의 지도급 인사들 가운데 적지않은 수효가 이런저런 명분을 내세워 아예 민주화의 대열에서 이탈하기조차 한 상황에서 벌어진 사태이니만큼 더욱더 놀랍다면 놀라운 진전이다. 그러면 이렇듯 뜨거워진 5월은 또하나의 6월로 이어질 것인가?

마감에 쫒기며 이 글을 쓰는 현재(10일) 작금의 그 함성이 어떤 결말을 낳을지는 예측할 수 없다. 앞서 말한 지도층의 변화를 딛고 일어선 민중들인만큼 당국이 줄곧 강경진압으로 대처한다면 87년을 능가하는 폭발적 상황이 올 것임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당국’인들 그렇게 우매한 단세포구조는 아니기 쉬우며 총리경질을 포함한 몇가지 외형적 조치로 일단 만족해버릴 세력이 아직은 무시 못할 비중이 아닐까 싶다. 그 점에서 헌법을 바꾸고 공화국의 번호를 바꾼 4년전과는 아무래도 달라질 공산이다. 하지만 공화국만 갈고 집권세력은 고스란히 대물림시켜준 당시와 ‘차별성’을 갖는 일이 결코 부질없지만은 않으리라는 점 또한 명백하다.

아무튼 한동안 그 건재를 의심받기도 했던 우리의 민족민주운동이 단지 개편의 진통을 겪어왔을 뿐 일방적 쇠퇴의 길로 들어선 것이 아니었음을 이 5월은 입증했다. 동시에 민민운동의 일차적 과제는 여전히 남한사회 내부의 민주화이며 이것이 무슨 관념상의 자유민주주의 또는 인민민주주의의 문제가 아니라 다수 민중의 생활상의 문제 – 시위학생과 노동자를 포함한 대다수 시민들의 신체의 안전과 자유, 그날그날 마시는 물과 일하는 환경과 살아가는 생계비들을 포함한 원래 의미의 민생문제 – 로 제시될 때 대중 자신의 과제가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번 5월과 6월을 통해, 당며의 민주화운동·민생운동이 민족주체적이자 민중주체적인 통일이라는 좀더 장기적인 변혁의 전망, 더 나아가 인류사의 새시대라는 더욱 원대한 전망과 실답게 결합됨으로써만 충분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교훈도 새로 배우게 될지 모른다.

이런 급박한 세월 속에서 우리는 계간지 창간 25주년을 기념하는 일련의 행사와 사업들을 무사히, 아니 성대하게 마쳤다. 협조하고 지원해주신 여러분들게 거듭 감사말씀을 드린다. 다행히 본사의 사업기반도 25주년을 고비로 한결 튼튼해지는 형세라, 이제 우리로서는 성원에 보답하는 자기갱신과 용맹정진의 소임만이 남은 셈이다.

내부의 인적 정비는 그간의 바쁜 일정에다 여타 사정도 겹쳐 조금 늦춰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인원의 확충을 포함한 몇가지 계획을 추진 중이며, 지난번 기념호의 지면이나 그밖의 계제에 받은 여러 가지 고마운 제언을 새겨듣는 노력도 계속하고 있다. 특히 좀더 일반 독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창비』가 되어달라는 많은 분들의 주문을 우리는 뼈아픈 지적으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좀 엉뚱하다면 엉뚱한 자랑거리로 삼기도 한다. 뼈아픈 것은, 소수의 불가피한 경우를 빼고는 글의 수준이 높아서보다 미흡해서 어려워지기가 십상이요 따라서 편집자의 능력과 성의가 모자란 탓이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픈 데를 찔리고도 자랑스러운 것은, 그나마 『창비』니까 그처럼 많은 독자들이 분야가 다른 글들을 애써 읽어가며 그 어려움을 호소해오는 것이요 이는 곧 해독하는 즐거움도 심심찮게 맛본다는 증거가 아니겠느냐는 자부심도 들었던 까닭이다. 이것이 근거있는 자부심이라면 책임은 그만큼 더 무거워질 터이다.

이런 책임을 다하는 한가지 길은 문학평론을 포함한 온갖 논의들이 더욱 우리의 현실에 밀착되면서 우리 주변의 기존 논의에 한층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논쟁적’ 성격을 강화하는 것이라 믿는다. 그런 점에서 김명인·윤지관·김재용 등 소장 평론가들의 저서를 평한 최원식씨의 「생산적 대화를 위하여」나 박완서문학을 둘러싼 여성해방비평 내부의 최근 논쟁에 참여한 전승희씨의 「여성문학과 진정한 비판의식」, 그리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둘러싼 또 하나의 공헌이 될 임홍배씨의 「현실주의 논쟁의 교훈과 노동소설의 진로」는 모두, 신경림·손경목·이주형씨의 서평들과 더불어 이번호의 문예비평란을 풍성하게 만들었다고 믿는다.

사회과핚 분야에서도 계급론 연속기획에 해당하는 임영일씨의 논문이나 『자본론』 번역의 문제점들을 세밀하게 따진 박유허씨의 ‘단평’이 둘다 논의의 수준을 낮추기보다 독자들의 현재적 관심에 충실하는 가운데 좀더 널리 읽힐 수 있는 글이 되었다고 본다. 좌담 「냉전시대 이후의 평화운동」은 첨예한 내부논쟁을 자랑하기보다는 절박한 현실문제를 알기 쉽게 정리하는 데 치중한 편이지만, 그 자체가 고정관념을 거스르는 논쟁적 기여가 될 것이다. 이근식씨의 「한국경제의 위기 : 그 원인과 전망」 역시 문외한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글로서, 그의 간명한 처방이 어째서 채택될 기미조차 안 보이는지에 대해서는 글쓴이와 더불어 우리 모두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최석호씨의 「불교의 세계관에서 본 환경문제」는 제목 그대로 환경문제의 논의이자 불교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는 글이다. 동시에 진정으로 과학적인 세계관의 정립과 실천적인 활동가의 자기수련을 위해서도 시사하는 바 적지 않다. 환경관계 서적들을 다룬 최재현씨의 서평, 구갑우씨의 「우리시대 ‘혁명’의 의미」, 그리고 김인걸씨의 『조선정치사』 서평과 함께 보람있는 읽을거리가 될 것이다.

본지로서는 수준을 견지하면서 대중성을 더해나가는 첩경은 무엇보다도 좋은 작품을 많이 싣는 길일 것이다. 말처럼 쉬운 일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소설에서 박완서선생의 단편을 오랜만에 얻은 데다 김주영씨의 작품, 그리고 윤정모씨의 지속적인 분발을 고맙게 여기며, 병상에 계신 초정(艸丁) 김상옥선생께서 옥고를 주시고 박경석·조정권·고정희·이도윤·임동확·김주대 등 여러 시인들도 함께 해주신 데에 충심으로 감사드린다.

 

『창작과비평』1991년 5월 여름호 책머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