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문

[창비 책머리에] 세계 속의 분단체제를 알자

올림픽의 열기에 다수 눌려 있기는 하지만 요즘 나라 돌아가는 형편에 대한 국민들의 짜증은 쌓일 만큼 쌓였다.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 관한 정부의 명백한 실정법 위반을 두고 국회의 개점휴업밖에 다른 해결책을 찾지 못하는 정치판이 그렇고, 건설현장에서부터 경제분야에 이르기까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무너지는 소리들도 ‘사람탓’이 주원인이라는 울분이 앞선다. 많은 사람들이 밤잠을 설쳐가며 올림픽 경기 중계를 지켜보는 것 자체가 반드시 집권층의 우민정책에 놀아나서만은 아니다. 스포츠만큼 신명과 진정성을 담은 구경거리조차 우리 둘레에서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국민들이 88서울올림픽의 단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5공비리와 광주사태의 진상을 캐며 집권층의 속셈을 크게 거슬렀듯이, 이번 올림픽 중계로 위기를 넘기려던 사람들의 계산 역시 국민들의 누적된 분노 앞에서 빗나가버리는 바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88년 가을에 비해 불리한 여건이 많다. 첫째 그때 국정감사와 청문회를 결행한 ‘여소야대’ 국회를 우리는 갖고 있지 않으며, 정치 그 자체에 대해 냉소하고 체념하는 분위기가 지난 4년 사이에 엄청나게 불어났다. 게다가 당시에는 아직도 ‘재야운동권’이라는 실체가 6월항쟁 승리의 여파와 새로 드높아진 통일운동·노동운동의 위세로 엄연한 활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여기에 실제로는 그 무렵 이미 숨넘이가 임박하던 동구권의 존재가 가세한 것은 오랜 폐쇄성의 증상이요 우리들 몇몇이 내세우던 ‘제3세계적 인식’과 본질상 무관한 것이었지만, 어떻든 그것도 현실적인 힘은 힘이었다.
이런 변화들을 생각하다 보면 정부와 여당이 작년에 광역선거에서처럼 아예 모든 것을 휩쓸지 못하는 게 의아스러울 때도 있다. 그런데 휩쓸기는커녕 거의 하는 일마다 죽을 쑤는 실정이다. 그 꼴을 보고 있자면 이번에는 야당이나 재야가 당장에라도 잡을 것 같은 환각마저 생긴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환각이다.

이처런 산뜻한 정리가 안 되고 헷갈리는 것이 눈앞의 정치상황만은 아니다. 어쨌든 괄목할 만한 경제의 성장이 후진국 수준으로도 남부끄러운 정치·군사적 종속성과 병존하는 현상도 일종의 변칙이며, 6월항쟁 후 정권교체조차 못 해내고도 필리핀이나 남미의 몇몇 문민정권 아래서보다는 오히려 실속있는 변화를 이룩해온 점도 역설이라면 역설이다. 이 점은 남북한 관계에서 그간 일어난 엄청난 변화를 감안할 때 (그것을 추진한 정권측의 속마음이 무엇이었든) 더욱이나 그렇다.

어떤 이론이건 현실을 완벽하게 설명하지는 못한다. 또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본지는 처음부터 현실의 ‘설명’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문학’을 주업으로 삼은 일을 자랑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현실을 최대한으로 설명해내는 이론의 중요성도 우리나름으로 강조해왔으며 우리나름으로 그런 이론 작업에 공헌하려는 노력도 기울여왔다. 한국 현실에 대한 이론이 무엇보다도 남북한을 망라하는 한반도 ‘분단체제’에 대한 이론이어야 한다는 주장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남한 내부의 변화가 남북관계의 변화와 어떻게 불가피하게 맞물려 있으며 북한의 실상 또한 본디부터 얼마나 분단이라는 현실의 일부로서 형성·전개되어왔는가에 대한 체계적인 인식이 아니고서는 그날그날의 구체적 정세를 구체적으로 진단하고 대응하는 데 이바지하는 이론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해온 것이다.

이제 ‘분단체제’라는 용어 자체는 제법 널리 쓰이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어떤 의미로 하나의 ‘체제’에 해당하며 실제로 어떤 성격의 체제인가에 대한 별다른 생각 없이 쓰이는 경우가 더 많지 싶다. 그러나 모호한 수사법으로써 이론을 대신하지 않으려면, 어째서 남한과 북한의 현실 모두가 각기 하나의 독자적인 체제로는 해명되기 힘들며 어떤 의미에서 남북의 그토록 이질적인 현실들이 하나의 단일한 체제로 파악될 수 있는지를 밝혀야 한다. 동시에 ‘분단체제’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떤 더 큰 체제의 일부로서 존재하는지도 알아야 한다. 가령 ‘냉전체제’와의 밀접한 관계는 누구나 인정하지만, 동서냉전체제가 무너진 오늘까지 분단체제가 존재하는 것이 단순히 냉전의 ‘유물’로서인지 아니면 세계체제 속에서 냉전 이외의 다른 핵심적 요소도 복합된 좀더 독특한 하나의 하위체제로 존속하는지도 연구해야 할 고비에 온 것이다.

그러자면 우리는 남한의 현실에 우선 주목하면서 남북한을 동시에 보는 눈이 필요하듯이, 한반도와 그 주변 상황을 응시하는 가운데 세계 전체도 시야에 넣는 묘리를 터득해야 한다. 예술작품의 본디 변증법적인 성격이 그래서 더 중요한 것이며, 작품의 구체적 인식에 걸맞는 현실설명의 새로운 틀을 학자와 이론가들에게서 요구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지난 봄호의 지상토론 ‘사상적 지표의 새로운 모색’에 이어 이번호에 ‘변화하는 정세, 통일운동의 전망’이라는 특집을 꾸민 취지 역시 그러하다. 말하자면 저번 지상토론의 설문 3 ‘통일의 전망과 민족민주운동의 역할에 대해서’를 좀더 집중적으로 추궁해보자고 한 것이다. 딱이 민민운동의 역할에 치중할 필요는 없다고 보았지만, 그렇다고 민민운동에 의한 문제제기를 처음부터 외면하는 속편한 논의가 분단체제를 넘어서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는 믿기 힘들다. 이처럼 분단현실과의 타협에 안주하는 논리와 기존 운동권의 타성에 끌려가는 논리를 동시에 거부하려다 보면 이론 및 실행상의 남다른 어려움을 겪게 마련이다. 그 점을 우리는 이번 특집의 필자를 선정하고 승낙을 얻어내는 과정에서 뼈저리게 느꼈다. 하지만 국내외 다섯 분 필자의 진지한 논의를 실음으로써 기왕의 토론수준을 다소간 높이는 데는 성공했다고 자부한다.

특집과 직접 연결되면서 ‘세계 속의 분단체제’를 아는 데 도움이 될 글로는 ‘재일’ 학자 정장연씨의 「‘NIEs 현상’과 한국자본주의」 그리고 영국의 『뉴 레프트 리뷰』지 주간 블랙번의 「동구권 몰락 이후의 사회주의」를 들 수 있다. 전자는, 우리 현실을 ‘세계 속’에서 본다는 것이 자본주의 세계경제와의 연관에서 보는 동시에 그 구체적인 지역적 – 동아시아라는 특정 지역의 – 맥락에서 보는 일임을 감안할 때 분단한국의 자본주의를 바로 아는 데 값진 기여가 될 것이다. 후자는 자그마한 단행본 한 권이 될 법한 대논문을 이번호와 다음호에 나누어 싣기로 한 것인데, 이처럼 파격적인 지면을 할애할 만한 무게와 시의성이 충분하다고 본다. 맑스주의의 위기라든가 그 대안 등이 요즘 우리 주변에서 부지런히 토의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불만은 시각의 진부함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관련된 논의의 다양하고 풍부한 전통에 대한 지식의 절대량 부족이 아닐까 한다. 이런 불만을 다소나마 해소하기 위해 본지는 번역논문이나 외국 지식인들과의 대담에도 힘을 쏟고 있거니와, 블랙번 논문의 게재는 그러한 노력의 한층 야심적인 일례인 셈이다. 아울러 최근 로스앤젤레스 사태와 관련하여 유학중인 전규찬씨의 시론을 얻게 된 것도 뜻깊게 생각한다.

문학에서의 리얼리즘 논의가 문학을 전공하지 않는 독자들에게도 관심사가 되는 이유 중에는, 그것이 항상 구체적인 현실에 관한 인식을 점검하는 논의이면서 현실을 인식하고 변형하는 인간 능력의 최고 수준을 탐구하는 논의라는 점을 꼽음직하다. 이번호에서는 일찍부터 우리 평단의 리얼리즘 논의에 앞장서온 구중서씨가 후배들에 의한 최근 논란까지 검토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새로이 정리한 오랜만의 회심작을 보태주었다. 지난호로 본지 연재를 마친 장편 『들』에 관한 신진 평론가 김성호씨의 글은 본격적인 작품론인 동시에 그나름의 리얼리즘론이기도 하다. 설준규씨의 「잘 팔리는 번역소설의 상업성과 ‘문학성’」 역시, 단순히 널리 읽히는 읽을거리들을 흥미진진하게 거론하고 있다는 차원을 넘어, 진행중인 리얼리즘 논의에 이바지하는 평론가의 기여로 받아들일 만하다.

서평란을 독자에게 각별히 사랑받는 지면으로 만들려는 우리의 노력은 아직 흡족한 성과와는 거리가 멀지만 이제 조금씩 열매를 보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한다. 시집 서평은 이번호부터는 이시영 시인이 3회에 걸쳐 고정 집필해주기로 했는데, 창작자이자 편집자로서의 경험이 녹아든 그의 비평이 독자들의 관심을 당연히 모으리라 본다. 소설집 두 권을 평한 권성우씨는 본지 지면에는 처음이지만 신예 평론가로서 적잖은 주목을 이미 받은 터인데, 민중문학과의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진지한 애정을 잃지 않는 그의 이번 서평은 다양한 독자들의 폭넓은 공감을 살 것이다. 그밖에 이오덕 선생의 저서들에 관한 한글학자 정재도씨의 서평, 소장학자들의 한국사 개설서를 다룬 강만길 교수의 글과 원로 서양사학자의 논문집이 제기한 문제들을 자신의 과제로 수용하고자 하는 소장 사학도 김인중 교수의 글, 그리고 노신과 노먼 베순 두 인물의 전기를 평하면서 역사 속의 삶의 길을 고민하는 이욱연씨의 서평 들이 이번호의 성과이다.
오랜 장편연재가 끝남을 계기로 오랜만에 단편들을 푸짐하게 선사하고 싶었고 현기영·유시춘·류양선·공선옥 네 분의 옥고를 얻어 웬만큼 뜻을 이루기도 했다. 그중 공선옥씨는 작년 겨울에 중편 「씨앗불」을 투고하여 등단한 신인인데, 「목숨」에서 한층 진전된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나머지 세분 중 특히 현기영씨는 새삼스러운 소개가 필요없지만, 작금의 포스트모더니즘 논의에서 강조되는 기법 문제와 관련하여 한마디 한다면, 「쇠와 살」 같은 단편이야말로 기법의 참신성이라는 면에서도 곱씹어봄직하지 않을까 싶다.

이번호 시란은 지역에 머물며 자신의 시세계를 알차게 일궈나가고 있는 열두 명의 시인으로 꾸며보았다. 전국적인 명성이 이미 확고한 분들보다는 지역에 거주함으로써 다소 가려진 분들을 골랐고, ‘창비시선’이나 본지를 통해 소개된 바 있는 시인들은 일차적으로 제외했다. 지면의 제약과 편집자의 불찰로 여전히 소홀히된 역량있는 분들이 각지역에 많겠지만, 본지로서는 보통 이상의 성의를 기울였고 또 적잖은 보람을 느끼는 기획임을 밝히고 싶다.

끝으로 투고작 중에서 시인 한 사람을 골라 독자들께 선보인다. 최병해씨의 섬세하면서도 진정어린 시편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소개말이 필요없으리라고 본다. 그만큼 그는 서정시의 본령에 다가가 있으며 민족문학의 시인들이 애써 간직하고자 노력해온 이땅 전래의 건강한 정서를 살리고 있다. 오히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덧붙이고 싶은 점은, 싫든 좋든 우리 삶에서 그 비중이 더 커져가는 도시인의 새로운 감수성을 정직하게 표현한 투고작들을 본지가 고대하는 열의도 누구 못지않다는 것이다. 아니, 최병해씨 자신도 자기의 고유한 세계를 견지할대로 견지하면서 아직 그의 시에 생소한 도회적인 현실들까지 먹성좋게 소화하여 오늘의 독자들을 좀더 힘차게 사로잡는 시인으로 성장하기를 부탁하는 바이다.

 

『창작과비평』1992년 가을호 책머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