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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다산학과 ‘근대’ 담론

지난 10월30일 수원시 경기문화재단 건물 3층 다산홀에서 <유배지에서 보내온 편지> 학술집담회가 열렸습니다. 그 자리에서 제가 한 축사 원고를 여기 올립니다. 다산연구소에서 내보내는 이메일 편지로 나갔습니다만, 홈페이지에는 안 올라서 링크를 못하고 제가 가진 원고 파일을 복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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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학과 ‘근대’ 담론
–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학술집담회를 축하하며
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 『창작과비평』 명예편집인)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학술집담회 개최를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축하를 받아야 할 분들이 참 많습니다. 무엇보다 2백년 넘어 전에 고난의 귀양살이를 하면서 이 편지들을 쓰신 다산 정약용 선생께 감사와 더불어 축하의 말씀도 드려야겠지요. 오늘의 대중이 그분이 남기신 방대한 문학적ㆍ학술적 성과에 쉽게 다가갈 통로가 만들어졌고 이 통로를 더욱 넓히는 행사가 열리고 있으니까요.

그 통로를 처음 열었고, 최초의 건설공사 이후 지난 40여년 간 한층 원전에 충실하면서도 현대인이 다니기에 편리한 길을 만들고자 네번에 걸친 대대적 보수공사를 해오셨으며, 오늘 행사의 주최기관인 다산연구소를 이끌고 계시는 박석무 이사장께도 각별한 축하인사를 드려야겠습니다. 아울러 공동주최를 해주시는 실학박물관, 그리고 다산연구소를 수원에 유치하여 지역의 품격을 스스로 높인 경기도에도 축하를 건넵니다.

책을 펴낸 (주)창비도 축하를 받을 만하겠지요. 그런데 애초의 안내자료에 저의 축사 제목이 「63쇄를 펴내면서」로 나왔기에 제가 원고를 보내면서 두 마디 토를 달았습니다. 첫째는 ‘63쇄’라는 숫자에 관해서였지요. 제가 가진 2019년의 개정3판 1쇄본의 판권란을 보면 초판이 13쇄를 찍었고 개정1판이 24쇄, 개정2판이 36쇄까지 발행된 걸로 나옵니다. 그것만 합계해도 73쇄려니와, 개정3판도 이미 3쇄를 찍은 모양입니다. 더구나 창비판 이전 최초의 시인사판도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최소한 5쇄를 찍은 물증이 확보되어 있다고 합니다.

저의 지적을 받고 주최측은 다음 안내자료에서 「81쇄를 내면서」라는 새 제목을 달아줬더군요. 사실은 81쇄도 전부가 아닙니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는 국방부에서 ‘진중문고’로 선정되어 창비사가 15,000부를 따로 제작해서 납품한 적이 있는데 이건 중쇄 계산에 안 들어갔지요. 한 쇄를 3천부씩이나 찍는 걸로 계산하더라도 추가분 다섯 쇄가 더 있는 셈입니다. 박 이사장께서 무슨 부정축재를 하신 것도 아니니 떳떳이 밝히셔도 될 겁니다.

제가 토를 달았던 또 한가지는 ‘~쇄를 펴내며’라는 제목이 마치 책의 발행자가 저인 것처럼 들린다는 점입니다. 최근 개정판의 펴낸이는 강일우 창비 사장이며 창비판이 처음 나오던 1991년 당시의 발행자는 정해렴 선생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1979년에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최초로 발행한 이는 박 이사장의 막역한 친구이던 고 조태일 시인이었습니다. 그가 당시로서는 거액의 선금을 주고 ‘입도선매’한 뒤 매일같이 역자를 닦달해서 시인사 초판본이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주최측이 준 제목 대신에 「다산학과 ‘근대’ 담론」이라는, 축사에 안 어울리는 거창한 제목을 지어 보냈습니다. 주최측에서 이걸 받아들여 자료집 본문에 실어주셨군요. 감사드리며, 관련된 모든 분들게 다시 한번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처럼 다산의 저작 중 우리말로 번역된 것조차 극히 일부밖에 못 읽은 인간으로서는 이 지점에서 말을 마치고 내려가는 것이 적절한 처신이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 뜻깊은 자리에 와서 발언할 소중한 기회를 얻은 김에,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나 다산사상 자체보다 현대 한국의 담론과 관련된 이야기를 잠시 해볼까 합니다.

아시다시피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다산 선생의 업적에 대한 인식이 점점 증대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 다산이나 실학 전반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끈질기게 나오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흔하며 일부 언론의 적극적 응원을 받는 주장이 다산을 포함한 실학의 ‘근대성’이 과장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근대야말로 문명개화의 시대이고 실학이든 무엇이든 근대로의 전환을 얼마나 선도했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좌우된다는, 전형적인 근대주의적 주장이지요.

이에 대해 다산 선생이 비록 ‘근대적’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근대 지향적’이었다고 응수하는 것은 다소 궁색한 변명으로 들리기 쉬우며 기본적으로 근대주의 사고의 틀, 이른바 저들의 ‘프레임’에 말려드는 일입니다. 다산이 당대의 적폐를 파헤치며 새로운 세상을 꿈꾼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를 지향했다는 것은 그의 사상을 외면하고 왜곡하는 결과가 되겠지요. 그는 당신의 표현으로(물론 유교 전통에 있는 표현입니다만) ‘도심(道心)’ 곧 수신을 통해 살린 인간 본연의 착한 성품이 지배하는 세상을 꿈꾸었지, 수양 없는 무리들의 탐욕을 포함한 일상적 감정 곧 ‘인심(人心)’을 예찬하며 심지어 작동의 원리로 삼는 자본주의 근대를 지향했을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물론 그의 사상에 근대의 어떤 특징들을 선취하고 예비하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런 요소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며 정확이 어느 정도로 오늘 우리의 근대적응을 도와줄 수 있는지를 규명하는 것도 다산학의 중요한 과제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못지않게 중요한 과제는 다산사상이 도저히 근대 세계체제와 양립할 수 없는 어떤 요소들을 지녔으며, 그러한 요소가 오늘날 무작정 이 체제에 순응만 하다가는 자멸하게 마련인 현대 인류에게 어떤 활로를 열어줄 수 있을지를 밝혀내는 일일 것입니다. 사실 그 두가지 과제는 별개가 아닙니다. 극복노력이 없는 적응만으로는 적응조차 결국 불가능하려니와, 적응은 안하고 극복만 하려는 노력 역시 실효를 거두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한마디 곁들인다면, 다산이 근대를 지향하거나 선취했다고 말하면서 그가 지향한 근대는 자본주의적 근대와 본질적으로 상이한 ‘대안적 근대’임을 강조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 취지는 이해합니다만, 저는 이것이 두가지 면에서 생산적인 담론이 못 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자본주의적 근대세계체제가 이미 전지구를 덮고 있는 세상에서 이 자본주의를 어떻게 할 것이냐는 관건적인 질문을 회피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자본주의를 그대로 둔 채 ‘대안적 근대’를 건설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일종의 자기기만이지요. 또한 ‘대안적 근대’의 비전을 제시하는 것만으로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다는 생각도 자본주의 무서운 걸 모르는 순진한 발상이 아닐까 합니다.

둘째로 자본주의 이후의 세상을 상상하고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면, ‘근대’와 ‘현대’를 구별 못하는 영어 등 서구어 사용자들과 달리 ‘대안적 현대’라는 말을 쓰는 게 적절하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서양의 언설에 너무 물이 들어서 항상 영어나 다른 서구어의 표현이 원문이고 그걸 번역하는 일이 우리 몫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역사상의 한 시기로서의 ‘근대’와 자기가 살고 있는 시기로서의 ‘현대’를 ‘모던’(modern)이라는 하나의 낱말로 통칭하는 것은 저들의 어휘부족일 뿐입니다. 그런 언어적 빈곤을 모르는 우리 동아시아인들이 자본주의시대를 넘어선 새로운 시대를 ‘대안적 현대’로 표현하고, 이걸 영어로 어떻게 번역할지에 대한 고민은 영어권 인사들에게 맡겨놓았으면 합니다.

따라서 저는 자본주의 근대에 적응하면서도 그것을 극복해가야 하는 우리 시대의 과제를 ‘대안적 근대의 추구’가 아닌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라고 표현해왔습니다. 딱히 그 표현을 쓰지 않더라도, 저보다 다산 선생의 저작을 훨씬 깊고 넓게 공부해오신 분들이 저의 이런 문제의식을 다소나마 수용하면서 연구와 토론을 해나가셨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을 저는 품고 있습니다.

오늘의 집담회가 그런 연구의 본격화를 위한 계기가 된다면 발표자와 토론자 그리고 주최자 모두에게 더욱 큰 감사와 축하의 인사가 쏠리겠지요.

 

202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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