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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유재석에 대한 칼럼

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의 이슈페이퍼 현안과정책 제32호 “유재석은 어떻게 예능계를 건축하며, 그곳에 거주하고 있나”를 공유합니다. 어떻게 링크할지 방법을 몰라 ‘복붙’으로 해결했습니다. 게시물이 좀 길어졌지요.

저는 예능계와 가깝게 살지는 않지만 유재석을 모를 정도의 동굴인간은 아닙니다.^^ 반면에 필자 홍경수 교수는 모르는 분이네요. 유재석만큼 유명하지 않다고 서운해하지는 않으시겠지요.
보통은 제가 하이데거 같은 사람 끌어대서 대중에게 어려운 이야기 하는 걸 안 좋아합니다만(대중적 글쓰기가 아닐 경우 곧잘 끌어대는 사상가가 하이데거이긴 해요) 이 글에서는 그것도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일독을 권합니다.

현안과 정책 제362호

유재석은 어떻게 예능계를 건축하며, 그곳에 거주하고 있나?
홍경수 (아주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대상 수상시 예능 홀대 논란이 있었지만, 유재석의 수상소감과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행보를 돌이켜보면 무시할 만하며, 왜 그가 대상수상자임을 보여준다. 그는 수상소감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진행자가 아니라 개그맨이며 앞으로 웃음에 집중하는 예능으로 살아가겠다는 다짐과 선조들의 유구한 전통문화를 소중히 간직해야겠다는 생각을 밝혔다. 하이데거의 사방 개념으로 볼 때, 유재석은 개그계, 혹은 예능계라는 땅 위에, 제작메커니즘의 섭리라는 하늘아래 놓여있으며, 신적인 존재인 대중의 시선 앞에서 언젠가는 죽을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죽을 것을 아는 그는 자신의 한계를 알기 때문에 겸손해 질 수 있고, 끊임없이 성찰할 가능성이 생긴다. 또한 유재석은 개그계와 예능계를 본질 안으로 놓고, 간직하고, 울타리로 둘러싸왔으므로 진정으로 예능계에 거주한다고 말할 수 있다. 방송이 시청자의 마음으로부터 멀어지는 흉흉한 시기에 유재석의 선전은 방송에 희망을 놓지 않을 작은 근거가 되었다. <놀면 뭐하니>에서 다양한 부캐를 선보이며 이른 바, 유니버스의 세계를 보여준 유재석의 다재다능함도 돋보였지만, 코로나 시기에 <유퀴즈 온더 블록>을 통해 시청자들의 고립감을 다독여준 것은 특기할 만하다. 방송이 지상파 중심에서 종편과 OTT로 분화하면서 방송은 따라하기 강박증에 시달리는 듯하다. 이런 카오스의 시기에, 개그맨이자 희극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예능 생태계와 우리 사회에 대해 고민을 해온 유재석의 대상수상은 더욱 의미가 크다. 자기다움을 간직하고, 자신의 안위가 아니라 생태계를 염려하고도 성장할 수 있다는 교훈을 개그맨 유재석이 방송 미디어에 보여주고 있다.

유재석이 57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대상을 받았다. 데뷔 30주년을 맞이한 그가 TV부문의 모든 장르와 사람을 통틀어 정점에 선 것이다. 물론 8년 전에도 대상을 받았기에 감흥이 떨어진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8년 전과 현재의 대중문화 경쟁의 정도는 비교할 수 없이 격화되었다. 2019년만 해도 한 해 동안 90편의 미니시리즈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나라가 한국이다. 2020년부터는 백상 심사 대상에 네플릭스, 카카오TV 등 OTT의 오리지널 콘텐츠까지 포함되었으므로 유재석의 대상 수상 의미는 더욱 크다. 코로나로 위축된 영화 제작환경을 고려한다면, 대중문화에서 유재석이 차지한 비중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필자는 이번 백상예술대상 TV 부문 심사에 참여하여 후보작들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대상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고민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이번 백상시상식을 계기로 예능 생태계의 변화와 유재석에 대한 이야기로 방송에 대한 고민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유재석이 대상을 받은 이유

이번 백상 시상식은 몇 가지로 화제가 되었다. 유재석의 TV 부문 대상 수상 당시 객석의 연기자들이 기립하지 않고 앉아서 축하한 일이 예능인 홀대 논란으로 이어졌다. 이는 영화 부문 대상 수상자 발표 시 나왔던 기립박수와 대조됨으로써 증폭되었다. 시상식에서 상영한 동영상이 예능 콘텐츠가 누락된 채 드라마 중심으로 편집된 것도 마찬가지다. 다만 필자는 유재석의 수상소감을 보면서 앞서 있었던 논란에 굳이 역정을 낼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감지했다.

대상 수상자 발표가 나자 유재석은 차분하게 걸어 나와 수상소감을 이야기했다. 소감을 전하는 태도와 소감의 내용은 유재석이 어떻게 대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우회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우선, 자신의 염치없음을 말했다. “ 제가 그 작년에 큰 상을 받으면서 7년 후에 뵙겠다고 얘기를 드렸는데, 1년 만에 또 이렇게 염치없이 큰상을 받게 돼서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실명으로 누구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하는 대신, 작품을 만든 제작진과 게스트 그리고 개그맨 선후배들과 함께 상을 나누어 받고 싶다고 밝혔다.

그의 소감은 두 가지다. 먼저, 개그맨으로서의 정체성. “저는 사실 그 요즘은 tv 진행자도 또는 MC로 이렇게 불러주시는데요. 저는 사실 91년도에 데뷔한 개그맨입니다. 앞으로도 제 직업 말 그대로 희극인의 그 이름처럼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많은 즐거움이 있지만 조금 더 웃음에 집중을 해서 많은 분들께 웃음을 드릴 수 있도록 노력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웃음에 집중하는 예능인으로 살아가겠다는 선언이다. 그의 발언은 드라마와 영화 중심의 백상 시상식이어서 묘한 울림을 주었다. 많은 연기자와 적은 희극인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의 본분에 천착하겠다는 말은 예능인의 자부심으로 보였다. 그의 당당한 선언은 예능상이 상대적으로 적은 백상의 구조적 한계나, 기립하여 축하하지 않은 배우들의 무심함을 뛰어넘은 것이다.

그의 발언에는 1990년대부터 예능인으로 살아온 그의 궤적과 예능의 궤적이 함께 엿보였다. 한국 대중문화계에서 예능인의 위치는 변화를 거듭해왔다. 진지함을 숭상해온 문화 탓인지, 텔레비전 안에서도 글과 이성을 독차지한 뉴스와 다큐멘터리가 재미와 웃음을 담보하는 드라마와 쇼 오락에 비해 우월한 위치를 차지해왔다. 특히 1990년대의 쇼 오락 제작자들의 직업적 정체성은 혼돈스러웠다. 방송사에 막대한 수익을 가져다주었지만, 앞에 내세우기는 적절하지 않은 장르의 주인공이었다. 방송사의 중요한 정책 결정 과정에서도 쇼 오락 제작자들은 소외되었다. IMF 당시 쇼 오락 프로그램을 폐지하거나, 코미디 프로그램을 줄인 것도 ‘국가도 어려운데 무슨 웃음이냐’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웃음이란 어려울 때 더욱 필요한 것 아닐까라는 의문이 남는다. 최근 김영희 PD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1990년대 말 천대받던 쇼 오락이 ‘버라이어티’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하고, 그 후에 ‘예능’이라는 이름으로 변화되어간 계기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쇼 오락은 ‘예능’이라는 이름을 달고서야 비로소 다큐나 교양, 드라마와 어깨를 겨눌 수 있게 되었으며 제작자들의 자부심도 함께 성장했다. 여기에 종사하는 직업인으로서의 예능인의 정체성도 함께 성장했다. 따라서 유재석이 첫 번째 소감으로 밝힌 예능인으로서의 자부심은 대중문화의 변화와 조응하고 있다.
유재석의 두 번째 소감은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선조들로부터 내려온 문화와 전통에 대해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한국의 대중문화의 근원에는 유구한 한국의 전통문화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고 환기했다. 중국의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한국의 고유문화를 중국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흐름이 등장하고, 중국 비빔밥이 드라마에 PPL로 등장했다가 여론의 철퇴를 받는 시기라 더욱 울림이 컸다. 예민한 학생들은 중국의 플랫폼인 틱톡의 지원을 받는 백상예술대상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종합하면, 그가 시상식에서 보인 소감 내용과 태도는 그가 왜 대상 적격자인지를 보여주었다. 그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희극계, 예능계 더 나아가 우리 대중문화와 사회에 대한 관심과 염려로 소감을 채운 것이다. 소감이 와 닿는 이유는 그가 코미디 프로그램이 사라지고 있는 환경 속에서 후배들의 생존을 고민하는 다양한 실천을 해왔기 때문이다. 방송을 조금이라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2020년 MBC 연예대상 시상식에서 했던 수상소감, “후배 개그맨들이 꿈을 꿀 수 있는 조그마한 무대가 하나 생겼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입니다”를 기억할 것이다. 후배 조세호를 공동 진행자로 <유 퀴즈 온더 블록>(tvN, 이하 유 퀴즈)을 진행하거나, 이용진을 기용하여 함께 <컴백홈>(KBS)을 만들거나, 코미디 프로그램이 없어지고 유튜브로 활동무대를 옮긴 후배들을 출연시키기도 했다. 후배들의 입을 통해서 등장하는 미담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는 개그계라는 생태계에 대한 책임을 가진 예능인임이 틀림없다.

유재석의 대상 수상의 더 궁극적인 근거는 끊임없는 변화에 있을 것이다. 대상을 받는 유재석은 새로운 유재석이 되어 있었다. 아니다, 유재석은 대상을 받기 전부터 유재석이었을 것이다. 그 유재석은 데뷔 이래 하루도 같은 유재석이었을 리가 없다. 유재석이 대상을 받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오늘의 유재석이 어제의 유재석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왜 콘텐츠를 소비할까? 정보를 습득하고, 재미를 추구하기 위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 위해, 시간을 보내기 위해 등 다양하지만 이 이유들을 퉁치면 “변화하기 위해서”로 바꿔 말할 수 있다. 무지한 나를 유식한 나로 바꾸기 위해 뉴스와 다큐를 보며, 지루하고 무기력한 나를 활기찬 나로 바꾸기 위해 예능을 본다. 지겨운 현실을 바꿔보기 위해 환상적인 드라마를 보며, 나른한 정신을 바꾸기 위해 스포츠 경기도 관람한다. 모든 콘텐츠 소비의 궁극적인 동력은 바로 변화하기 위해서다. 변화를 추구하는 시청자가 계속 사랑하는 예능인이 있다면, 그는 대중의 변화에 대한 욕구보다 반 발짝 앞서 변화해 왔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만약 변화하고 싶은 대중의 욕구에 부합하지 못한다면, 그는 곧바로 잊혀지게 될 것이다. 2000년대 초반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개그콘서트>가 어느새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진 것처럼. 유재석이 끊임없이 변화해 왔으며, 지금도 변화하고 있고, 중단 없는 그의 변화와 성장은 대중에게 기분 좋은 힘을 불어넣고 있다.

예능계를 건축하고 그곳에 거주하다

유재석의 수상소감과 행보를 보며 하이데거(Heidegger)의 ‘건축함, 거주함, 사유함’이라는 글이 떠올랐다. 하이데거는 누구보다 언어의 중요성에 대해 주장한 철학자이고, 유재석의 언어 역시 분석 대상으로 적합하다. 철학자란 누구인가? 그는 사물이나 관념을 다르게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벤야민(Benjamin)이 스토리텔러를 ‘이야기를 반복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 것에 비추어보면, 철학자는 이야기를 반복하는 대신, 다르게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다르게 이야기하는 철학의 효용은 무엇일까? 사물이나 관념에 대해 다르게 이야기함으로써 바라보는 관점을 넓혀주는 것 아닐까? 다양한 방식으로 다르게 이야기하다 보면, 사물과 관념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오토바이의 공랭식 엔진의 냉각핀이 공기와 닿는 표면적을 넓힘으로써 열을 빨리 발산하는 것처럼 철학자의 다른 관점들을 접하면서 세계에 대한 생각의 폭이 넓어질 것이다.

하이데거가 제시한 ‘사방’(das Geviert)은 땅, 하늘, 신적인 것, 죽을 자들 4가지 요소가 하나로 포개지는 것을 말한다. 인간이 땅 위에서, 하늘 아래에서, 신적인 것들 앞에 머물러 있는 한, 오직 인간만이 죽고 정확히 말해서 늘 죽는다는 것이다. 이를 유재석에 적용하면 그는 개그계, 혹은 예능계라는 땅 위에, 제작 메커니즘의 섭리라는 하늘 아래 놓여있으며, 신적인 존재인 대중의 시선 앞에서 언젠가는 죽을 존재인 것이다. 죽을 것을 아는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알기 때문에 겸손해질 수 있고, 끊임없이 성찰할 가능성이 생긴다.

하이데거는 건축한다는 고대 독일어 “buan”이 거주함을 의미하며, 돌본다(hegen), 보호한다(pflegen)는 의미를 가진다고도 말한다. 그는 ‘인간이 그가 거주하는 한에서 있다’고 말하며, 단순히 집을 소유하며 머무는 것과 그곳에 거주하는 것을 구별했다. 즉 아끼고 사랑하며 소중히 보살필 때에만 진정으로 거주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재석은 개그계와 예능계를 본질 안으로 놓고, 간직하고, 울타리로 둘러싸왔으므로 그는 예능계에 거주한다고 말할 수 있다. 두 가지를 종합하면, 유재석은 사방세계 안에 존재하는 개별자로서 자신의 한계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으며, 자신의 소명과 책임 또한 명료하게 이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는 예능계를 건축하며, 그곳에 거주하는 것이다.

방송에 희망을 놓지 않을 근거, <유 퀴즈>와 유재석

최근 한국의 방송은 갈피를 종잡을 수 없을 만큼 폭발 중이다. 드라마는 사이코 패스의 연쇄살인과 양극화된 계층 혐오로 가득하고, 예산 부족을 핑계로 다큐는 태업이라도 하는 듯 지리멸렬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업이 판매할 음식 메뉴 개발을 핑계로 기업 홍보하는 예능이 공영방송에서 방송되고, 조작된 가족관계를 내세우다가 탄로 난 예능이 종편에서 방송됐다. 거짓 정보를 뉴스라고 보도하는 파렴치한 뉴스는 말할 것도 없다. 방송에 뜻을 둔 학생들은 “요즘 드라마가 너무 무서워서 못 보겠다”고 말했다. 사이코패스의 연쇄살인 드라마가 끊임없이 방송되는 것을 보고, 우리 사회가 많이 아프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형편없는 예능을 보고는 방송사가 참 많이 아프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작년 가을 한 네티즌이 올린 글이 화제가 되었다. “예전에는 가난하고 어렵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 장애도 치료해주거나 집을 고쳐주는 방송도 있었다. 요새는 연예인들이 방송사 돈으로 국내외 여행가고 먹고 마시거나 준재벌 3세의 수십 억대 아파트 소개하거나 가난하지 않은 연예인들 집 정리를 도와주는 방송들이 나온다. 방송들이 낯설다” 시대가 바뀌었기에 가난한 사람을 돕거나 치료하고 고쳐주는 방송을 계속할 이유는 없다. 다만, 다양한 시청자를 위로하는 희망을 주는 방송이 몇 개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방송이 시청자의 마음으로부터 멀어지는 흉흉한 시기에 유재석의 선전은 방송에 희망을 놓지 않을 작은 근거가 되었다. 물론 <놀면 뭐하니>(MBC)에서 다양한 부캐를 선보이며 이른바, 유니버스의 세계를 보여준 유재석의 다재다능함도 돋보였지만, 코로나 시기에 <유 퀴즈>를 통해 시청자들의 고립감을 다독여준 것은 특기할 만하다. 세상 대화를 이어가기 어려운 어린아이부터 까탈스러운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전문적 지식을 쉽게 풀어내는 능력은 탁월하다. 그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평범함에 의미를 불어넣고, 어려워 보이는 지식을 쉽게 끌고 내려오는 능력을 지닌 듯하다. 여러 인터뷰에서 밝혔듯, 그는 방송을 위해 철저하게 일정을 관리하며, 사전 조사를 통해 습득한 정보로 출연자와 인간적인 신뢰(라포)를 형성한다. 이와 같은 자기 관리와 지식 습득이 반복되며 그 결과는 축적된다. 그리하여 그의 진행은 지적인 면모까지 띠게 된 아닐까.

<유 퀴즈>가 방송된 수요일 이후부터 온라인 오프라인의 담론을 지배한 것은 누가 출연해서 어떠한 이야기를 했냐는 것이었다. 연예인의 패션이나 집 자랑 혹은 먹방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방식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작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했다. 신문에 보도되면 대중들이 입에 올리는 말 그대로 회자되는 시대가 있었다. 신문이 수행하던 그 기능을 지금은 <유 퀴즈>가 수행하고 있다고 말하면 과언일까? 언론학자 베렐슨(Berelson)은 1945년 6월 30일 뉴욕시의 8개 메이저 신문의 배달원들이 파업함으로써 17일간 신문 배달 중지된 시기에 시민들을 대상으로 신문이 없어진 삶이 어떠한지를 조사했다. “끔찍한 뉴스를 접하지 않아 맘이 편하다”라는 답변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답변은 “물을 나온 물고기 같았다, 길을 잃고 신경질적이 되었다.” “내 삶에서 무엇인가 빠진 듯 고통스러웠다”, “잠들 수 없다. 지하철에서 멍하니 앉아있다”와 같은 것이었다. 베렐슨은 미디어가 공공적인 일과 그것의 해석에 관한 정보 제공의 기능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도구로서, 휴식, 사회적 위신, 사회적 접촉을 제공하는 기능을 수행한다고 주장했다. 베렐슨의 주장을 적용한다면, 코로나 시기 <유 퀴즈>는 사회적 접촉을 가능하게 하고, 담론의 질은 높여준 기능을 수행한 것이다. 그 핵심적인 역할에서 유재석이라는 미디어를 떼어놓을 수가 없다. 우리는 유재석을 통해 우리가 고립되어 있지 않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어려움을 어떻게 견디고 넘어가야 하는지 확인한 것은 아닐까. 그 덕분에 한국의 시청자들은 방송이라는 미디어와 간신히 교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따라하기를 멈춰야 희망이 시작된다

방송이 지상파 중심에서 종편과 OTT로 분화하면서 방송은 따라하기 강박증에 시달리는 듯하다. 10여 년 전 종편에서 시사 토크쇼를 쏟아내자, 유사한 시사 토크쇼가 지상파 방송사에서도 나오기 시작했다. 몇 년 전 유튜브가 지상파보다 더 높은 신뢰도를 갖는다는 설문조사 결과가 나오자, 이번에는 유튜브 따라하기에 나섰다. 유튜브 식 짧은 영상을 만들고, 유튜브 콘텐츠를 그대로 담아내기도 하는 제작방식이 곳곳에 등장했다. 종편에서 트로트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얻자, 지상파들도 이에 질세라 트로트 프로그램을 우후죽순 격으로 편성했다. 넷플릭스의 구독자가 늘어나고 한국 드라마 제작에 투자하여 전 세계에 유통시키자, 넷플릭스가 드라마의 표준을 세우는 것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이번에도 방송사들은 넷플릭스를 기준점으로 질주하고 있다. 넷플릭스가 만든 <인간수업>이나 <스위트 홈>이 주는 자극적인 이야기 방식에 익숙해진 시청자의 눈높이에 부응하려는 시도였다는 변명도 예상할 수 있다. 그러는 사이 몸값 높은 연기자의 출연료를 위해 과도한 PPL이 횡행하고, 기대 이상의 ‘끔찍함’과 놀랄 만한 ‘사치스러움’을 끊임없이 과시하는 방식의 제작방식이 확산되었다.

방송콘텐츠의 총체적 혼돈은 미디어 폭발시대에 각각의 미디어가 ‘자기다움’을 잃어버리고 새로 출현한 플랫폼의 표준에 자기의 표준을 맞추어 가려는 욕망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닐까. 공영방송다움을 잃어버린 공영방송, 지상파임을 잊어버린 민영방송, 종합편성다움을 망각한 종편. 오로지 최신의 플랫폼인 OTT만이 최고의 기준인양 질주하는 방송의 문화. 이런 카오스의 시기에, 개그맨이자 희극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예능 생태계와 우리 사회에 대해 고민을 해온 유재석의 대상 수상은 더욱 의미가 크다. 자기다움을 간직하고, 자신의 안위가 아니라 생태계를 염려하고도 성장할 수 있다는 교훈을 개그맨 유재석이 방송 미디어에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유재석을 유심히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2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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