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
한반도의 분단체제를 중요 주제로 삼은 나의 네번째 책이 간행되는 현재 상황은 세번째 저서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을 내던 2006년 5월과 무척 다르다. 당시에도 매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 전해의 9·19공동성명을 통해 남북관계뿐 아니라 동북아시아 평화체제 건설에 중요한 주춧돌이 일단 놓인 참이었고, 북측이 아직 장거리 미사일 발사시험이나 핵실험을 행하기 전이었다. 개인적으로는 2005년 초에 6·15공동선언 남측위원회 대표를 맡아 그해 6월과 8월의 민족공동행사를 치르면서 남북관계가 큰 발전을 이룩하는 것을 지켜보았으며, 광주·전남지역에서 열릴 6·15공동선언 발표 여섯돌 기념행사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후 3년 남짓 지난 오늘, 한반도 상황은 이명박정부 출범 당시 우려했던 것보다도 훨씬 악화되어 있다.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이라는 명제가 도대체 성립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나올 법한 형국이다. 이에 대해 나는 여전히 그렇다는 주장을 펼치고자 이 책을 세상에 내놓지만, 변화된 상황에 눈 감은 채 같은 주장으로 ‘초지일관’ 뻗대는 것은 공부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닐뿐더러 독자를 설득하지도 못할 것이다. 차분한 상황점검과 냉엄한 자기성찰이 필수적인바, 이 책을 위해 새로 쓴 「서장: 시민참여 통일과정은 안녕한가」는 내 나름으로 그런 노력을 기울인 결과다.
서장의 점검작업이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다. 적어도 북의 첫 핵실험이 이루어진 2006년 10월 이후로 미흡하나마 지속적으로 진행했던 일이며, ‘시민참여형 통일’의 주체가 될 시민사회와 시민운동의 공부길 잡기는 거의 항시적인 주제였다. 그 점에서 이번 책은 분단문제에 집중한 첫 저서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1994)의 제목에 담긴 주제어들–‘분단체제’‘변혁’ 그리고 ‘공부길’–로 되돌아갔달 수도 있다. 다만 그 사이 ‘길’은 ‘중도(中道)’라는 낱말로 이어지고 ‘변혁적 중도주의’가 새로운 주제어로 등장한 것이 진전이라면 진전이겠다.
동시에 두번째 저서 『흔들리는 분단체제』(1998)의 제목도 여전히 하나의 기조(基調)를 이룬다. 분단체제의 ‘흔들림’ 또한 요즘은 새삼 의심의 대상이 되는 것 같다. 남북관계가 대결의 시대로 돌아간 듯한 현실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비교적 안정된, 그런 의미로 ‘고착화’된 대결상태로의 회귀가 결코 아니다. 분단체제가 거의 고장(故障) 상태에 이르러 그 어느 때보다 위태롭게 요동치는 국면인 것이다. 분단체제는 남에서건 북에서건 다 고장현상을 보이고 있다는 게 나의 인식인데, 다만 남쪽의 민간사회라는 ‘제3당사자’가 얼마간의 수리(修理) 능력을 지녔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자 한국 시민으로서의 자부심이다. 그러나 분단체제 속에 사는 한반도인으로서 남과 북의 (각기 상이한 형태의) 고장에 대해 깊은 책임의식과 자괴감을 동시에 느끼지 않는다면 그 자부심은 허황된 자만심일 따름이요 ‘제3당사자’로서의 임무수행에 무참히 실패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고장수리 작업은 또한 분단체제 자체의 변혁을 겨냥하면서 전지구와 동아시아지역, 한반도와 남한 내부 등의 여러 차원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다원(多元)·고차(高次) 작업이라야 한다. 물론 나 자신은 그중 극히 일부를 감당할 능력밖에 없고, 그중에서도 또 일부 사안만 이 책에서 다루어졌다.
서장에 이어 제1부와 2부는 남북관계나 국내 정치상황에 관해 지난 3년간 쓴 글들 가운데서 열세 편을 추린 것이다. 남북문제와 국내문제 논의가 확연히 구별되지 않는 것은 분단현실에 관한 나의 개념이 그런 구분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1부는 2006년과 2007년, 2부는 2008년과 2009년의 산물이며 시기순으로 배열했다.
제3부는 원불교 청중을 대상으로 한 강연 두 편이다. 청중과의 소통을 위한 원불교적 표현들 외에도 원불교 교리에 대한 나의 깊은 공감이 담긴 내용이지만, 어디까지나 원불교의 문외한이 일반독자의 호응을 기대하며 집필하고 수록한 글들임을 상기시키고 싶다. 제4부는 주로 대학과 학문에 관련된 글로서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 이후 겨우 3편을 건져 싣게 된 것이 자못 부끄럽고 민망하다. 좁은 의미의 공부 즉 학문연마에도 좀더 분발해야겠다.
지난날의 글들을 묶으면서 또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은 중복되는 내용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물론 나의 생각이 풍성하지 못한 탓이 가장 크다. 그런데 이 문제와 관련해서 탐구자와 활동가의 입장에 차이가 나기도 한다. 탐구자는 새로운 이야기가 없을 때는 입을 다무는 게 원칙인 데 반해, 활동가는 당면목표의 달성에 필요한 만큼은 같은 이야기라도 부지런히 되풀이하는 게 오히려 미덕일 수 있다. 나 자신은 그간 ‘공익근무’에 징집된 인간을 자처하면서도 어쨌든 탐구자의 자세를 잃지 않고자 애써왔는데, 활동가의 발언으로서 불가피했던 내용의 중복이 이런 논의를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 일종의 친절이 되면서 익숙한 독자들을 너무 식상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실린 글의 상당수가 6·15남측위원회 활동과 관련된 발언이거니와(물론 개인 자격의 발언이지만), 상임대표로서 두 차례 임기를 마칠 때까지 이끌어주고 밑받침해주신 남측위 선배·동료들의 원력이 남북문제에 관한 생각을 정리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창비와 세교연구소의 동학들은 스스로 알건 모르건 내 작업에 변함없는 이바지를 해주고 있다. 두루 감사드린다. 끝으로 편집과 교정의 실무를 맡아준 안병률형과 창비 인문사회출판부의 각별한 노고를 치하한다.
2009년 8월
백낙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