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4
문학평론집을 마지막으로 묶어낸 지 꽤나 오랜 세월이 흘렀다.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3’이라는 부제를 단 『민족문학의 새 단계』가 간행된 것이 1990년, 이듬해에는 평론선집이 한 권 나왔다. 그러고는 문학분야에서 단행본이 없었으니 무척 오랫동안 게으름을 피운 셈이다.
90년대 중엽까지는 그런대로 평론활동을 하면서 다음 평론집은 전작 단행본을 한 권 낸 뒤에나 내리라고 욕심을 부렸었다. 그러다가 96년에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직을 맡은 것을 필두로 힘에 부치는 사회활동의 폭을 조절하지 못했고, 다른 사정과 일감이 겹쳐 한때 문학평론가로서 개점휴업 상태에 들기도 했다. 최근에 와서야 어렵사리 평필을 다시 들게 되었는데 묵은 글들이 더 낡기 전에 엮어내려면 이때가 기회다 싶었다. 평론집을 냈으면 하는 충동이야 줄곧 느끼고 있었지만 순전히 묵은 글만으로 책을 내는 것은 면목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작년과 금년의 글이 몇편 실렸다고 해서 썩 체면이 서는 형국은 아니다. 더구나 전작 단행본은 여전히 대기중이다. 하지만 그런 체면까지 다 차리려다간 또 어찌 될지 모르는데다, 오랫동안 준비해온 D.H. 로런스 관련 저서가 이제는 몇달의 집중적 작업만 더하면 완성될 단계에 왔고 아직은 그런 집중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평론집을 정리하는 것이 효율적이겠다는 계산이 선 것이다.
평론집을 서두른 또 한가지 이유는 통일시대 한국문학에 이바지하고 싶은 내 나름의 소망이다.
남북분단이 엄연히 지속되고 있는데도 벌써 통일시대가 왔다고 말하는 것은 공연한 말장난으로 들릴지 모른다. 나 자신 처음에는 ‘통일시대’라고 따옴표를 붙여 쓰는 조심성을 보였었다. 그러다가 2000년 6·15공동선언을 지켜보고서는 ‘분단시대 겸 통일시대’라는 일견 모순된 표현을 내놓았다.
공동선언 5주년이 되는 2005년을 넘기면서는 많은 사람들이 ‘6·15시대’를 다시 실감하게 되었다고 본다. 6월에 평양에서 열린 6·15공동선언 5주년기념 민족통일대축전과 서울에서의 8·15민족대축전 등 대규모 공동행사의 성공, 7월에 100명 가까운 남측 문인이 북녘땅을 찾아 벌인 민족작가대회 등으로 화해의 물결이 크게 일었고, 국제무대에서는 4차 6자회담에서 나온 9·19공동성명으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 한 걸음 다가왔다. 한반도에 ‘분단체제’라 일컬음직한 구조가 있는데 그것이 흔들리기 시작했다고 몇해 전부터 주장해온 나 자신은 예의 분단체제가 동요기를 넘어 드디어 해체기에 접어들었고 오늘 이땅에 사는 우리는 ‘분단시대를 겸한 통일시대’라는 남들이 못해본 경험을 하고 있다는 신심을 굳히게 되었다.
이런 가슴 설레는 시대의 우리 문학을 논할 때 전 같으면 ‘민족문학’이라는 말을 앞세웠을 것이다. 그렇게 아니 하는 취지, 동시에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4’라는 부제를 고수하는 취지는 ‘서장: 민족문학, 세계문학, 한국문학’을 통해 전해지리라 믿는다.
서장을 뺀 나머지 내용이 모두 활자나 인터넷으로 발표됐던 글들이라는 점이 아닌게아니라 마음에 걸린다. 그러면서도 교정을 보고 잔손질을 가하는 과정에서 이들 논의가 아직은 통일시대에 이바지하고 통일시대 한국문학에 기여할 여지가 남았다는 믿음 비슷한 것을 얻었는데, 이것이 착각이요 망상이라면 독자 여러분의 너그러운 용서를 빌 뿐이다.
그와 다른 차원의 또 한가지 믿음에 대해서는 너그러움보다 진중한 고찰과 검증을 부탁드린다. 곧,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이라는 제목이 말하듯이 나는 한국문학이 온갖 문제점과 미비점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식’ 통일과정의 독특함과 무관하지 않은 활력을 유지하고 있음이 비록 산발적인 독서를 통해서나마 확인된다고 믿는 것이다. 물론 ‘문학의 위기’ 또는 ‘국내 작품의 위기’에 대한 잦은 논의가 모두 상업언론의 뜬소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문제는 ‘위기냐 아니냐’는 단순논리로 접근할 일이 아니라, 한편으로 모든 참다운 예술, 특히 문학다운 문학을 위협하는 세계적인 대세가 엄연하고도 엄중함을 인식하면서, 다른 한편 이 대세 속에서 동(북)아시아 지역이 어떤 처지에 있고 그중에서도 독특한 통일과정을 밟고 있는 한반도와 한국의 문학에는 어떤 틈새가 열려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점검하는 방식으로 풀어갈 문제이다. 이 책이 그 문제에 답을 제공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러한 점검의 과정에 다소의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제1부에서 「지구시대의 민족문학」과 「‘통일시대’의 한국문학」은 시대상황에 대한 분석과 문학작품 읽기가 뒤섞인, 원래 내가 즐겨 채택해온 평론 형식이다. 여기에는 이론적 탐구가 다소간에 끼여들기 마련이라 더러는 ‘이론비평’으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나 자신은 수긍하기 어려운 규정이다. 다만 90년대 중반 이후로는 점점 이런 형식의 글쓰기가 힘들어져서 제1부의 나머지 두 글은 이론적 담론의 성격이 두드러지는데, 그렇더라도 문단과 일반사회의 현실에 발을 디딘 담론이기 바란다.
제2부에는 한국문학의 구체적인 작품들을 논한 글을 주로 모았다. 총론적이면서도 작품들에 대한 각론을 겸한 글쓰기가 힘에 부치게 되면서 평론을 쓸 때면 차라리 한두 작품의 치밀한 분석에 집중하고자 했지만, 제대로 모양새를 갖춘 작품론은 몇개 안 되는 점이 스스로 아쉽다.
제3부는 일종의 부록이랄지, ‘계륵’이라고도 할 것이 다수 들어간 잡다한 내용이다. 그중 첫머리의 「민족문학론과 리얼리즘론」은 80년대 평단을 휩쓸었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논의에 대한 내 나름의 철저한 검증 시도라는 점에서 ‘계륵’이라고 자기비하를 할 까닭은 없다고 본다. 그러나 어느 학계 원로의 퇴임기념논문집에 처음 발표된 이후 나의 평론선에도 실린 바 있기에, 본서의 민족문학 및 리얼리즘 논의의 충실을 기해 또 한번 수록은 하되 ‘부록’의 위치로 돌린 것이다. 나머지 글들은 대개가 단상이나 각종 토론회에서의 논평 등으로, 어엿한 체모를 갖춘 평문이라 보기 어렵지만 닭갈비도 모아놓으면 그런대로 반찬 한 접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에 비해 끝머리의 「비평과 비평가에 관한 단상」은 나의 비평관을 요약하는 의미도 있기에 발표연도와 상관없이 이렇게 배치한 것이다.
오랜만에 책을 내는 기쁨과 함께 이 일을 가능케 해준 많은 분들을 고마운 마음으로 떠올리게 된다. 특히 올해로 창간 40주년을 맞는 계간 『창작과비평』 및 출판사 창비의 존재는 내 작업의 변함없는 근거지이다. 계간지 발행인으로서 오늘도 조용한 공덕을 베풀고 있는 김윤수 선생, 편집진의 최원식, 이시영, 백영서 등 여러 동료들, 회사 경영의 힘든 짐을 떠맡아 헌신하고 있는 고세현 사장과 창비사의 여러 식구들께 평소의 감사하는 마음을 새삼 전하고 싶다. 그중에서 이 책의 편집과정을 직접 챙겨준 김정혜님에 대한 고마움이 각별함은 더 말할 나위 없다.
그런데 이번 책에서의 마지막 감사표시는 사적인 곳으로 돌릴까 한다. 내 글의 특별히 열성적인 독자는 아니지만 그 생산과정에 한결같이 든든한 의지가 되어준 아내에게, 몇달 안 남은 결혼 40주년 기념 선물로 미리 이 책을 증정한다.
2006년 1월
백낙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