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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나는 문학평론가로 즐겨 자처하지만 정작 나의 비평가 생활은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는 느낌이다. 무엇보다 독서량의 절대 부족에 끊임없이 시달려왔다. 체력이 떨어지고 시력도 수상해진 노년기야 더 말할 나위 없으려니와, 한참 이것저것 주워 읽던 초・중・고교 시절에는 수준 높은 읽을거리를 구해보기가 워낙 힘들었고, 대학 시절은 당시 유학생활의 사정상 고국과 거의 절연된 상태로 여러 해를 보냈다. 그곳에서 외국문학을 전공한 덕에 귀국 후 일찍부터 교수직을 얻어 영문학을 읽고 가르치는 일이 생업이 되긴 했다. 그렇다고 영문학 하나만도 깊이 파고들지 못했고, 더구나 한국이나 동아시아의 고전은 물론 현대 한국문학에 대해서조차 제대로 된 교양을 갖출 기회가 제한되었다. 또한 나 자신의 문학관이 그렇기도 하고 시대현실이 강요하기도 해서, 나의 글쓰기는 점차 문학 이외의 분야까지 건드리게 되었고 나아가 문필활동 이외의 사회활동으로까지 번져갔다.

원래 부족한 역량을 이렇게 쪼개고 쪼개어 비평작업에 쏟고도 내가 문학평론가임을 내세우고 싶어하는 데는 그래도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데 필요한 인문적 교양의 기본이 일종의 문학비평적 능력이라 믿고 지금도 그 믿음에 따라 살고자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문학’은 좁은 의미의 문예물이 아니라 동서양의 전통에서 오랫동안 그랬듯이 좋은 글들을 두루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비평’은 이런 글을 읽으면서 생각을 하고, 생각한 것을 이웃들에게 말하는 작업을 뜻한다. 이렇게 읽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회화가 진행되는 일이야말로 문명사회의 필수조건 중 하나가 아닐까.

그렇다면 그러한 회화에 이바지하려고 진지하게 노력하는 한 비록 부족함이 많을지라도 문학평론가로 자처하지 못할 이유도 없겠다는 생각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되도록 많이 알아서 잘 보도록 하라는 다그침으로 주로 해석되고, 연부역강(年富力强)한 후학들일수록 그렇게 일러주고 싶다. 아니, 나 자신도 그 다그침을 아주 외면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읽어야 할 너무나 많은 것들을 못 읽고 지내는 날들에 익숙해진 지금, 스스로 이렇게 달랠 필요도 느낀다. ‘아는 만큼만 보자. 그리고 보이는 것만큼만 말하고 가자.’

여기에 ‘가자’가 덧붙은 데는 시간의 흐름을 인정하는 개인적 소회가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비평적 발언이란 어차피 잠정적 판정이요 중요한 것은 그런 발언들이 촉발하는 회화의 활력과 그 토양에서 꽃피는 문학이기에, 각자가 자기 할 만큼 하고 가면 된다는 소신이 바탕에 깔려 있다.

이처럼 약간은 안빈(安貧)하는 심경으로 또 한권의 평론집을 묶어낸다. 지난번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4』의 간행(2006) 이후에 쓴, 주로 한국문학에 관한 평론을 제1부로 삼았고, 영문학에 관해 1980년대 이래 써온 글들을 제2부에 모았다. 1, 2부의 소재가 많이 다른 것이 나의 비평가 생활이 감당해야 했던 내적 분열상을 반영한 것이라면, 일견 판이한 소재를 대상으로 어떤 일관된 관점에서 ‘문학비평’을 수행하고자 한 점이 내 나름으로 ‘일이관지(一以貫之)’를 꿈꿔온 징표라고 내세우고 싶다.

19세기와 20세기 초의 영국소설을 주로 다룬 제2부에서 정작 나의 전공인 D. H. 로런스에 관한 글은 제외했다. 아직도 계획으로 머물고 있는 로런스 관련 단독저서의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아껴둔 것이다. 이 계획은 아는 분들은 알고 있은 지 오래고 지금은 거의 조롱거리가 될 정도로 미뤄져왔다. 게다가 올해도 책이 나올 가망은 없고 오랜만에 작업에 다시 시동을 건 상태에 불과하다. 어쨌든 평론집을 내면서 그 작업을 더는 미룰 핑계거리를 없애기 위해 ‘마지막 재고정리’를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아무쪼록 앞으로 사회활동이나 정치운동을 하는 동지들이 장기적 저술에도 촌각을 아낄 필요가 있음을 이해해주었으면 한다.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이라는 책 제목은 근년의 평론 표제를 따온 것인데, 그 물음을 신실하게 계속 묻는 일이 문학하는 사람에게는 긴요하다는 믿음에서 택한 것이다. 더구나 문학평론이 인문적 교양의 기본이라고 한다면 그 중요성은 문명사회의 누구에게나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 물음이 중단될 가능성은 많고 실제로 중단되는 일이 너무도 흔하다. 중단하는 방법도 가지가지여서, 문학이 무엇이다라는 정답을 임의로 설정해서 더이상의 묻기를 끝내버리는 방식도 있고, 정답이 없음에 자족하고 마는 또다른 정답주의도 있으며, 작품을 실제로 읽고 생각하는 작업을 소홀히함으로써 묻기를 저버리는 경우도 있다. 1, 2부를 통틀어 그 어느 하나에도 빠지지 않으려는 저자의 고투를 독자가 읽어준다면 더없이 고마운 일일 테다.

부제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을 항상 고집할 필요는 없지만 이번 평론집에는 잘 어울린다고 보았다. 자칫 제1부가 ‘민족문학’, 제2부가 ‘세계문학’을 다뤘다고 도식적으로 처리될 가능성이 께름칙하긴 하다. 그러나 저들 개념을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검토했거나 1, 2부의 실제 내용을 들여다본 독자들이 그리할 위험성은 적다고 보며, 왕년의 민족문학론에 여러가지 자체점검과 자기수정 작업이 요구되는 지금이야말로 오히려 그 본래의 문제의식을 되새기고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을 함께 천착할 필요성이 절실하지 않은가 한다.

주제목과 부제목에서 다 빠졌지만 이 책의 또하나 여전한 열쇠말은 ‘리얼리즘’이다. 특히 그것은 1980년대에 집필된 영문학에 대한 평론에서 두드러진다. 이는 1990년대 들어 「민족문학론과 리얼리즘론」(1991,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에 수록)이라든가 로런스 문학에서의 ‘재현’ 또는 ‘전형성’ 문제에 대한 검토를 통해 한층 진전된 정리에 이르기 전의 일이지만, 리얼리즘론이 제기하는 문제의식이 얼마나 긴요한 것이며 동시에 ‘리얼리즘’이라는 낱말이 얼마나 함부로 내두를 것이 못되는지를 읽어내는 일이 가능하리라 믿는다. 시기적으로 한참 뒤에 오는 제1부의 글들을 이런 관점에서 잇따라 검토하는 일도 도움이 되지 싶다.

이번 책은 나의 첫번째, 두번째 저서를 한권으로 합쳐 다시 펴내는 합본평론집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1/ 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와 동시에 나오게 되어 나로서는 더욱 고맙고 감개가 깊다. 그만큼 실무를 맡은 창비 문학출판부의 노고가 컸고, 나의 평론활동 초기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음양으로 도와준 많은 분들의 은공을 상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번 평론집을 위주로 말한다면 그 내용상, 창비를 함께해온 편집진 동료들과 김윤수 고세현 전・현직 대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제2부에 직간접으로 기여한 영문학계의 제자와 동학들이 특별히 떠오른다. 여기에 일종의 상수(常數)로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명기한다면 독자들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다.

2011년 5월 효창동에서
백낙청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