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변혁적 중도의 때가 왔다
작년(2024) 말 윤석열의 불법적 비상계엄 선포가 실패하고 그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했을 때 나는 한껏 부푼 마음으로 “‘변혁적 중도’의 때가 왔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이재명정부의 출범까지는 무려 6개월이 넘게 걸렸고 그사이 국민들의 마음고생, 몸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나 또한 노년에 허풍쟁이로 낙인찍힐 위험을 자초했을 수 있는 정황이었다. 그러나 윤석열정권이라는 우리 헌정사의 ‘변칙적 사태’가 종국을 앞둔 상황이라는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내가 어떤 특별한 예지력이 있어서 그런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반세기가 훨씬 넘도록 우리 현대사의 흐름을 지켜보았고 더러 그 안에서 부침하기도 하는 동안 내 마음속에 우리 국민과 민족의 행로에 관한 일정한 서사(이른바 ‘스토리’)가 형성된 바 있는데, 윤석열정권의 임기완주를 그 서사의 일부로 넣어줄 길이 애당초 안 보였던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윤석열과 그 일당 역시 정상적인 완주 씨나리오가 도저히 실감이 안 나서 헌정파괴 반란을 일으키기에 이른 정황이 지금 밝혀지고 있다.)
사람은 ‘이야기 들려주는 동물’(story-telling animal)이라는 말도 있듯이 복잡다단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평면적인 그림뿐 아니라 시간상의 전개를 서사화하는 작업도 필요로 한다. 이는 거의 본능적인 욕구인 것 같다. 윤석열의 어이없는 작태가 정신을 차리기 힘들 만큼 연속 발생하는 상황을 장악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 어이없고 전례 없는 시기를 4·19 이후 내가 겪어온 민주항쟁의 역사 속에 자리매기는 작업을 나름으로 수행했다. 또한 그런 ‘스토리텔링’의 현실인지 능력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그 서사가 항쟁의 역사뿐 아니라 건설의 역사도 포괄할 필요성을 느꼈다. 동시에, 내가 직접 겪지 못한 더 먼 과거의 역사와 연결하면서 세계 전체의 역사, 적어도 우리가 지금 그 일부로 살고 있는 자본주의 (내지 ‘물질개벽’) 시대의 서사로 확장하는 시도를 이어갔다.
4·19가 이승만 독재에 대한 저항일 뿐 아니라 이승만정권의 무능과 무책임에 대한 국민적 심판이었다는 점은, 박정희의 개발독재가 먼저 있었기에 한국의 민주화가 가능해졌다는 주류 담론에서 흔히 간과하는 사실이다. 또한 한국 민주주의와 ‘변혁적 중도주의’가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와 그의 ‘다시개벽’ 사상을 계승한 강증산, 박중빈 등 종교지도자들, 3·1운동 이후 도산 안창호, 몽양 여운형 같은 독립운동가들의 사상과 실천에 이미 그 뿌리가 있었다는 사실도 점차 분명해지고 있다. 다른 한편, 한국과 한반도에 대한 서사의 세계사적 맥락에 관해서는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라는 틀로 이해하려고 시도해왔는데, 이 책 자체로 충분한 설명을 제공하지는 못하지만 ‘변혁적 중도’의 스토리텔링에는 그 서사도 포함되어 있음을 밝혀둔다.
아무튼 윤석열의 조기퇴진은 ‘변혁적 중도’의 필요조건이지 ‘때’의 도래를 담보하는 충분조건은 아니다. 다만 나는 2016~17년 촛불대항쟁의 현장에서 시민들이 비록 ‘변혁적 중도’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낡고 익숙한 구호나 이념을 넘어서는 새로운 사상과 노선에 대한 갈증을 드러냈다고 믿는다. 이번에 촛불과 응원봉을 들고 촛불혁명의 힘찬 재출범을 주도한 군중에게서는 그 점이 더욱 두드러진 것 같다.
이들과 합세하여 내가 실제로 해낼 수 있는 일은 아쉽게도 한정되어 있다. 그래도 ‘변혁적 중도의 때가 왔다’고 큰소리를 친 만큼 후속 노력에 나름으로 동참할 책임이 있음은 분명하다. 그 책임의 이행을 위해 생각한 것이 본서의 발간이다. 일종의 ‘변혁적 중도주의 독본’을 독자들에게 제공함으로써 시대가 요구하는 공부와 사업에 이바지했으면 하는 것이다. 2013년체제에 관한 글은 기존에 펴냈던 책에서 주로 재수록했으며, 글들을 묶으면서 최근의 상황을 반영한 제2장을 새로 집필했다. 그밖에 윤석열 파면 이후에 진행된 두개의 대담을 정리해 제4부로 실었고, 중간의 2~3부는 ‘변혁적 중도주의’ 개념을 처음 제출한 제3장과 변혁적 중도와 개벽사상을 연결한 4장에서부터 최근의 칼럼들까지 ‘때’가 오기까지의 경위를 짚어주는 길고 짧은 발언들을 모았다.
돌이켜보면 ‘2013년체제’ 구상을 밝힌 5장부터는 기존의 87년체제를 뛰어넘을 새로운 체제에 대한 기대와 절박감이 두드러졌던 것 같다. 이후 세월호참사 직후에 쓰인 6장 「큰 적공, 큰 전환을 위하여: 2013년체제론 이후」와 촛불혁명 시작 이후의 일련의 글들이 어떤 식으로든 그런 절박감을 담고 있다. 하지만 지난 10여년간 현실의 진행은 2017년 박근혜 퇴진 이후의 두어해를 빼고는 실패와 좌절의 시간이 성취의 기쁨보다 많았다. 어쩔 수 없이 국민들 사이에도 냉소의 분위기가 번졌으며 윤석열의 몰상식하고 무식하며 몰염치한 작태를 지켜보면서 아예 절망하고 (실은 지속이 불가능한) 현실에의 안주를 택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냉소와 절망과 손쉬운 안주를 끝내 뿌리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힌 것이 세계가 감탄한 한국의 민주시민들이다. 다행히, 어쩌면 당연히, 그런 국민을 믿고 끈질기게 싸워온 정치가도 배출되었다. 덕분에 ‘변혁적 중도의 때’를 염원해온 나의 지론을 ‘2025년체제’라는 새 표현마저 들먹이며 한껏 내세울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다.
본서의 내용은 긴 세월에 걸쳐 작성된 만큼 음양으로 도움을 주신 분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가장 크게 도움받은 집단이라면 아무래도 창비의 역대 동지·동학들을 꼽아야겠고, 최근에는 백낙청TV의 기획팀과 ‘공부길’ 방문객들 그리고 ‘초대석’의 출연 손님들로부터 각별한 배움을 얻고 있음을 밝힌다. 창비 인문교양출판부의 정소영 부장과 실무진이 편집과정을 챙겨주었고, 책임편집자 이선엽 팀장의 노고가 컸다. 신채용 형이 외부 편집자로서 교정에 도움을 주었으며, 신나라 디자이너가 멋진 표지를 도안해주었다. 조판부의 신혜원님, 마케팅부의 강서영, 한수정 님께도 감사의 뜻을 전한다.
염종선 사장에게는 앞서 두권의 좌담집을 낼 때 사업적 전망이 밝지 않은 책을 내주는 데 대한 감사와 위로의 말을 전하곤 했는데, 이번에는 좀 말투를 달리해보려 한다. 종이책 출판이 점점 힘들어지는 환경이지만 ‘변혁적 중도의 때’가 온 이상 본서의 출판으로 이윤도 좀 남겨보라는 ‘아니면 말고’ 식의 덕담을 보태려는 것이다.두루 감사하는 마음이다.
2025년 7월
백낙청 두손 모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