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문

[창비 책머리에]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시작된 십년 세월이 어느덧 낡은 것으로 되어가고 있다. 돌이켜 볼 때 80년대는 ‘서울의 봄’을 맞아 새 움이 한창 트려다가 5·17정변으로 전혀 다른 ‘새 시대’가 선포되면서 한껏 어수선하게 출발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80년대의 벽두를 앞시대와 갈라놓은 것은 광주의 5월이었다. 그 진상을 알아야겠다는 국민적인 함성이 전국에 울리기까지만도 7년 넘어 걸렸지만, 그 전에도 이미 5월이 요구한 새로움에 부응코자 하는 민중의 몸짓들이나 5월을 묻어두고자 부지런히 이런저런 새것들을 변통해온 집권층의 행색이 모두 전에 없던 열기와 긴박함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5월의 진상이 아직도 대부분 가려져 있다는 사실이 말해주듯이, 진정으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려는 80년대의 노력이 결코 흡족스러웠달 수는 없다.

어쨌든 80년대의 마감이 코앞에 왔다. 우리 사회에서 점점 위력을 더해가는 대중매체들의 속성으로 볼 때, 1990년에 무슨 획기적인 일이 벌어지건 말건 새로운 10년대의 새로움을 들먹이는 소리가 요란해질 것이 뻔하다. 더구나 야당들조차 한두 공직자가 사퇴하면 광주문제가 ‘처리’될 듯이 맞장구를 치고 있는만큼, 80년대에 어렵사리 이룩한 새로움조차 다시금 덮여버릴 위험도 만만찮다. 그리하여 80년 5월도 묻어두고 ‘5공 비리’도 감춰두고 6공의 정체도 가려놓기 위해 동원된 거짓 새겻들만 좋은 때를 만날 염려도 없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90년대로의 해바뀜이 매체들이 마음대로 주무르도록 고분고분할는지는 의문이다. 89년 막바지의 시점에서 새것과 낡은 것이 뒤섞인 형국은 무언가 또한번의 전환을 부르고 있다. 집권층이 금년 들어 공안정국으로 짭짤한 재미를 보았다지만 이제는 그 위세가 많이 시들었고, 그렇다고 후련하게 매듭을 지을 능력도 없는 듯하다. 반면에 민족민주운동 쪽에서도 확실한 설계와 전망을 못 내놓기는 마찬가지다. 바로 이런 어수선한 판세에서 형식적인 ‘5공청산’으로 개량된 6공체제와 민중들 사이에 피곤한 소모전이 90년대 초·중반까지 이어질 가능성을 걱정하게 된다. 진정한 의미의 파국은 이런 소모전의 끝없는 연장일 것이다.

파국을 막기 위해 우리는 이제까지와 또다른 치열하고도 냉엄한 자세로 우리가 살아온 80년대의 삶에서 무엇이 새롭고 무엇이 낡았는지를 가려내지 않으면 안된다. 너무나 뻔하게 낡은 것들이 너무나도 턱없이 판을 치던 시절에 그 횡포를 규탄하는 일만으로, 또는 약간의 새로움을 남보다 먼저 부르짖는 것만으로 어떤 이바지가 되던 시기는 지난 것이다.

복간되고 두 해를 채우는 본지의 경우도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이 뒤섞인 상태임을 우리들 스스로 느낀다. 한편으로 우리는 60년대에 창간하여 70년대에 뿌리를 내린 잡지라고 해서 80년대의 새로움에서 뒤질 이유는 없다고 보며 우리의 ‘70년대적’ 낡음에 대한 논란에는 부당한 이야기가 많았다고 본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번호에 80년대의 문학을 정리하는 본지 편집진측의 작업이 불발한 데서 특히 실감되듯이, 90년대를 감당할 대대적인 자기쇄신이 필요함은 더 말할 나위 없다.

권두좌담 「민주주의의 이념과 민족민주운동의 성격」도 90년대의 새로움에 값할 새로운 인식과 이념을 찾는 노력의 일환으로 마련했다. 이런 문제에 관한 그간의 많은 토론을 볼 때 어느덧 일정한 틀이 만들어진 느낌이 없지 않다. 즉 운동권의 테두리 안에서 일정한 전제와 그들만의 용어를 공유하는 토론 또는 논쟁이 아니면, 민족민주운동의 입장을 외면하거나 우습게 만드는 논의가 되기 십상이었다. 따라서 본지는 몇가지 기본적인 명제에 대해서부터 생각이 다른 참석자들이 모여 서로간의 인식을 새로 점검하는 자리를 만들고자 했다. 그러다보니 그 나름의 한계도 있고 혼란도 있었지만, 독자들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고 주체적인 모색에 나서는 데 도움이 되는 좌담이었다고 믿는다.

때마침 동독의 세계적인 맑스주의 학자 쿠친스키씨가 내한함으로써 그러한 정리와 모색에 또 하나의 값진 기회를 얻었다. 촉박한 시간에 대담을 성사시키고 번역·정리까지 해주신 김홍명교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게다가 이번호에는 지난호 구승회씨의 글에 뒤이어 이기홍씨가 그간의 ‘역사법칙논쟁’을 반성하는 새 논문을 보태주었고 김용기, 박정호씨들이 연관된 주제의 서평을 해준 까닭에 한결 뜻깊은 기획이 되었으며 프랑스혁명의 해석에 관한 김인중씨의 검토도 쉽사리 이어지는 글이다. 한편 몇 달 전에 작고한 일본의 한국사 연구가 카지무라씨가 남긴 강연록은, 원래 그가 본지에 약속했던 본격적인 사회구성체 논의는 아니지만, 고인을 기리는 뜻을 겸하여 많은 독자들의 관심을 모으리라 믿는다.

우리가 당면한 현실을 바로 알고 바로 대응하는 데 가장 시급한 일 가운데 하나는 뭐니뭐니해도 북한에서의 삶을 우리 눈으로 보고 우리 자신의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들 대다수는 아직도 직접 가볼 길이 없는 실정인만큼 황석영 같은 빼어난 작가가 솜씨껏 들려주는 그의 여행담을 듣는 것은 여간 소중한 기회가 아니다. 현재 독일에 머물면서 집필중인 책에서 450매가 되는 큼직한 대목을 보내준 작가에게 특별한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다만 한가지 유념할 점은, 본지 게재분은 어디까지나 전체 저서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요, 또한 처음부터 저자의 의도가 북한 사회를 일단 그곳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출발하려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저자도 그렇지만 독자 개개인으로서도 주체적인 판단과 비평작업이 따로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이 글의 게재는 우연히도 황석영씨의 『무기의 그늘』에 대한 제 4회 만해문학상 수상 발표와 겹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작가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과 애정을 재확인하고 얻을 것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포용력과 지혜를 발휘하는 데 일조가 되기 바란다.

문학평론 분야의 기획들이 많이 어긋난 가운데 김명인씨가 진행중인 리얼리즘 논의를 실을 수 있게 된 것이 무척 반갑다. 게다가 이번에는 연극과 텔레비전 드라마에 대한 논문·서평·시평들이 갖춰진 것이 흐뭇하다. 작품으로는 소설에서 양귀자씨의 역작을 얻은데다가 신예 정도상씨와 중국 연변에 거주하며 현재 방한중인 『격정시대』의 작가 김학철선생의 글을 함께 실을 수 있ᄋᅠᆻ다. 시에서는 이미 『만인보』를 제 9권까지 탈고하여 머지않아 출간할 고은씨가 「임진강 하류에서」라는 긴 시를 기고한 외에, 최근 시집 한 권 분량의 「기차를 위하여」라는 연작시를 완성한 김정환씨가 그중 12편을 선뵈도록 해주었고, 김준태·이기철·도종환 시인의 근작들도 잘 어우러졌다고 믿는다.

잡지의 폐간에서부터 출판사의 등록취소, ‘창작사’로의 편법 등록, 계간지 복간, 출판사 명칭환원 등을 두루 겪은 80년대의 마지막호 머리말을 몇자 적으니 감개가 새삼스러운 바 있다. 아무쪼록 독자 제현의 보살핌과 다그침이 나날이 더해지시기를!

『창작과비평』1989년 11월 봄호 책머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