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문

[창비 책머리에] 지구시대와 ‘국가경쟁력’

천만다행으로 요즘은 ‘국시(國是)’라는 말을 듣는 일이 극히 드물어졌다. 정부나 어느 특정인들이 제멋대로 ‘반공’이니 ‘조국근대화’니가 국시라면서 백성들을 울릉대지 않는 것이야말로 스스로 민주공화국임을 헌법에 선언한 대한민국에 국시가 있다면 진짜 국시일 터이다. 그런 점에서 세상이 약간은 좋아졌음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만큼의 개선을 위해서도 우리 민중은 실로 얼마나 피눈물을 흘려야 했던가. 하지만 오늘날 ‘민주화’와 ‘개혁’을 외쳐대는 사람들 중에 그 피눈물의 공덕을 아닌 이는 과연 몇이나 될까.

과거의 공적을 알아주고 말고보다도, ‘국시’라는 말만 안 쓸 뿐 지금 또 하나의 국시가 실질적으로 생겨난 듯한 현실이 문제이다. 요즘 너도나도 앞다투어 들먹이는 ‘국가경쟁력’이라는 것, 이것이야말로 국시 아닌 새 국시 아닌지? 대통령이 선포하고 정부와 언론과 재계가 일제히 맞장구치고 심지어 야당까지도 딴소리를 못하는 표어가 바로 ‘국가경쟁력’이다. 이런 식의 ‘국민총화’가 강조될 때 우리는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불과 수년전까지만 해도 누가 어떤 식으로 투쟁하고 희생해왔는가를 새삼 되새길 필요를 느낀다. 옛날처럼 그걸 비판했다고 당장 잡아가는 ‘국시’는 없지만, 차라리 잡아갈 가치도 없는 촌놈 취급이요 실속있는 자리에서 따돌림받는 신세가 되는 형국이라면 이것이 과연 순리인지 따져볼 일인 것이다.

하기는 내용상으로도 ‘국가경쟁력’은 종전에 국시 행세하던 구호들만큼 기만적이고 퇴행적인 성격은 아니다. 무한경쟁을 기본원리로 삼는 자본주의가 ‘사회주의 진영’ 붕괴 이후 그야말로 전지구적 위력을 확보하게 되었으며, 작년 말에 타결된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은 우리 국민 개개인이 그 위력을 생활상의 문제로 실감하게 만들고 있다. 그런데 이런 현실에서 당연히 초미의 관심사가 되는 국제적 경쟁력의 문제가 어느새 ‘국가경쟁력’이라는 낱말로 흡수통일되고 말았다. 물론 ‘국제경쟁력’이건 ‘국가경쟁력’이건 일차적으로 그것이 자본주의 세상의 논리로는 어느정도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다. 그러나 이를 한마디로 ‘국가경쟁력’이라 부르는 데는 그나름의 기만과 퇴행이 따라오게 마련인 것이다.

‘국가경쟁력’이라고 하면 이론상으로도 마치 ‘국가’라는 한덩어리의 실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고색창연한 국가론을 떠올릴뿐더러, 세계화와 지역화의 대세에도 어울리지 않는 사고방식을 조장하기 쉽다. 현실적으로는 기업의 경쟁력을 국가의 경쟁력과 동일시함으로써 정·경유착을 끊겠다는 당면의 개혁목표에도 역행할 수 있으며, 노동자계급을 포함한 다수 대중의 권익을 신장하고 주체적인 시민을 양성하며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산천과 문화를 보존하고 개선함으로써 진정으로 경쟁력있는 인간이 되고 주민집단이 되려는 다양한 노력을 봉쇄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때일수록 잠시 정신을 가다듬고서, 한번 살펴볼 필요를 느낀다. 그중에서 국제화의 경륜도 있고 그 과정의 불가피한 희생자들에 대한 지극한 애정도 품은 이가 과연 몇이며,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던 시절, 아니 그 훨씬 전부터 국시 찬양의 단골손님으로 살아온 이들은 누구누구며, 왼쪽 오른쪽을 힘 안들이고 왕래하는 지식인적 병폐를 면면히 계승한 자는 또 누구인지, 한번씩의 검색이 있을 법하다. 물론 그 검색은 자신의 행태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해야 옳다.

그런데 본지 이번호 좌담에서도 깊이있게 논의되듯이, 개화파의 일반적 경박성과 비주체성에 맞서 ‘위정척사’를 부르짖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대안일 수 없다. 하지만 요즘 ‘국가경쟁력’ 논리를 거부하는 입장들 가운데는, 표면적인 내용만 ‘진보적’이고 심지어 ‘서구적’인 이념을 담았을 뿐 정작 그 행태는 위정척사파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오늘의 시점에서 1894년을 다시 보는 이 좌담에서 우리가 또 생각게 되는 것은, 농민전쟁으로 입증된 당시 민중의 저력조차도 독자적으로 ‘국제경쟁력있는’ 국민국가를 세우기에는 수준미달이었다는 점, 하지만 농민군과 일부 개화파의 연합이나 개화파와 동도서기파의 연합 가능성이 개항초부터 봉쇄됐었다고 단정할 이유는 없다는 점, 그런데도 실제로 이런 연합을 성취시킬 경륜과 실무능력을 갖춘 집단을 찾다면 다시 막연해진다는 점 등등이다. 좌담 자체는 1894년을 다시 보는 데 주력하고 1994년의 현실을 길게 논하는 바 없지만, 참가자나 기획자의 머릿속에 오늘의 문제가 묵직히 자리하고 있었음은 더말할 나위 없다.

자화자찬 같지만 급격히 전지구화하는 시대에 주체적으로 대응할 광범한 연합세력의 형성, 이를 실현할 경륜과 능력의 함양, 그중에서도 특히 지적·문화적 자기쇄신이야말로 근년에 본지가 한층 열성을 기울여온 작업이다. 원래 ‘민족문학’의 개념 자체가 열국체계로 구성된 세계체제 속의 민족적 경쟁력과 세계문학의 일원으로서의 문학적 경쟁력을 동시에 추구한 것이려니와, 민족문학운동은 남한의 국가경쟁력 문제를 한반도 분단체제의 극복 문제 및 남북한 민중의 세계사적 경쟁력 문제와 결부시킴으로써 ‘국가경쟁력’ 개념이 근시안적 기득권층의 또다른 자충수가 되는 일을 예방코자 했다. 또한 지구시대일수록 자기를 지키는 일이 절실해지는 것이며 동시에 무엇이 ‘자기것’이고 ‘나’와 ‘남’의 경계선이 어떻게 그어질지는 항상 새로 확인되고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인식이었다.

이런 노력의 실제 성과에 대해서까지 우리가 자화자찬만 할 일은 물론 아니다. 다만 그러한 뜻을 품고 이번호도 우리나름의 성의를 다해 꾸려낸 것은 사실이며, 진지한 내용의 잡지들이 하나같이 어려움에 부딪친 상황에서 본지는 정기구독과 점두판매가 다같이 꾸준히 늘고 있음을 볼 때, 우리의 성의와 문제의식에 적극 호응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는 든든함을 느낀다. 이에 보답하는 우리의 구체적인 방식은 무게있는 논문 및 작품들과 독자가 쉽게 접근할 읽을거리를 동시에 제공하자는 것으로 지금도 일관하고 있는데, 후자와 관련해서 우리는 최근 들어 특히 ‘독자의 편지’와 ‘촌평’란이 활기를 띠게 된 점을 무엇보다 기쁘게 생각한다. 사실 독자편지의 경우 한때는 본격적인 서평 비슷하게 안 쓰면 안되는가 해서 참여가 저조했었고, 촌평은 필자에게 토막글을 청탁하는 일이 실례가 되는 듯한 분위기도 없지 않았다. 이번에는 여덟 편의 다양한 기고를 얻어낸 김에 촌평의 위치를 훨씬 앞쪽으로 끌어내어 편집자가 이 기획에 싣는 무게를 강조해보기까지 했다.

좌담 및 이영호교수의 연구사 정리 논문과 함께 특집을 구성하는 이상경씨의 『녹두장군』론은, 임규찬·서영채씨의 문학평론과 어울려 오랜만에 현역작가들의 신작에 대한 활발한 토론장을 마련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서지학 연구를 다루어 일견 전혀 생소한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는 이종숙교수의 「민중편집자로서의 셰익스피어 관중」은, 정작 읽고나면 우리 평단의 민족·민중문학적 관심과도 상통하는 바 많은 외국문학 평론임이 금세 드러날 것이다.

재일조선인 문제를 다룬 번역논문도 이번호의 자랑거리다. 필자와 내용에 관한 편집자의 말이 본문에 딸려 있지만, 이번호의 특집과 더불어 이 논문이 본지가 작년부터 관심을 쏟아온 ‘동아시아’ 논의를 계속하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싶다. 아울러 까갈리쯔끼의 ‘러시아통신’도 우리나름의 국제화 노력의 한 성과이며, 독일에서 정인회씨가 일부러 투고해주고 재미 불교학자 박성배교수가 지난호 법성스님의 글에 논평해주신 것도 그런 점에서 한결 더 감사한 일이다. 그밖에 고은선생의 독서숭상과 유홍준씨의 문화시평, 그리고 여러분의 서평, 영화평, 시론 등 책머리에 따로 언급할 값어치가 충분한 글들이 많다. 하지만 그러잖아도 모자라는 지면을 아끼기 위해 그때그때 나오는 간단한 필자소개로 대신하기로 한다.

창작의 경우는 작자의 신원보다 작품 자체로 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원칙에 따라 신인 외에는 일체 소개말을 않는 것이 본지의 방침인데, 독자들 중에 불만과 궁금증을 표해온 분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예의 원칙 자체는 고수하는 것이 옳다고 보고, 다만 수록시인 중 이학영(李學永)씨는 일찍이 권만기라는 필명으로 1984년 실천문학사의 신인작품집 『시여 무기여』를 통해 등단한 바 있으며, 신인 이대흠씨는 현재 건설현장에서 노동하는 시인으로 현장의 실감뿐 아니라 농촌출신다운 건강성과 결코 투박하지 않은 언어감각을 겸비한 점이 촉망되는 바 있어 편집위원들의 합의로 선발했음을 알린다.

잡지나 간행도서의 내용뿐 아니라 본사의 체제도 좀더 ‘경쟁력있는’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특히 올해 들어 본격화되고 있다. 그 하나는, 일부 언론에도 보도되었듯이 머잖아 본사를 주식회사 체제로 전환하는 작업이 진행중이다. 아마 다음호는 새로 설립된 법인의 명의로 발행될 것이다. 법인이 된다는 것은 어느 개인의 거취에 상관없이 그나름의 지속성을 갖게 됨을 뜻하는 동시에 업무방식의 여러 가지 변화를 자동적으로 수반하는 일인데, 우리는 이 계기를 적극 활용하여 또 한차례의 비약을 이룩할 결의를 다지고 있다.

그런 태세의 일부로 편집진용에도 이미 연초에 변화가 있었다. 그동안 조사연구실장 겸 편집위원회 간사로 실무에서 한걸음 물러서 있던 고세현씨가 편집국장으로서 잡지 및 단행본 편집작업을 통괄하게 되었고, 고형렬 부장은 근년에 엄청나게 늘어난 제작업무를 전담하기로 했다. 또한 편집자문위원회를 대폭 보강하여, 그동안 교양문고 편지위원으로 역할이 한정됐던 과학사회학자 김영식(金永植)교수와 그밖에 영문학자 설준규(薛俊圭)교수, 문학평론가 김사인씨와 임규찬씨를 새로 모셨다. 이렇게 결집된 지혜를 실제 간행물로 만들어내야 하는 편집부원들로서는, 무엇보다 내고 싶은 책은 많고 일손은 모자라 지금 고생들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나 차츰 새로운 업무체계가 자리잡히고 인원보충과 작업의 전산화도 진행되면서 독자들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는 열매를 내놓으리라 믿는다.

창간 28주년을 맞은 이번호를 계기로 더욱 열성적인 북돋움을 주시기 바란다.

 

『창작과비평』1994년 봄호 책머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