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문

[창비 책머리에] 창간 25주년을 눈앞에 두고

내년 1월의 계간지 창간 25주년을 앞두고 본지와 도서출판 창작과비평사는 여러 가지 기념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91년 봄호를 특집호로 꾸미는 일 말고도 신작단편집을 준비중이며 기념호가 나온 직후에 몇가지 자축행사도 가질 생각이다. 또한 이 모든 것에 앞서, 이번호와 더불어 대대적인 정기독자 확장운동을 시작한다. 이 운동의 의의를 우리는 단순히 잡지가 얼마 더 나가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인식하고 있기에, 책머리의 귀한 지면을 빌어 우리의 뜻을 독자에게 알리려 한다.

‘창비’의 오래된 독자들은 익히 아시듯이 지난달 우리는 당장의 재정적 어려움을 넘기기 위해 여러 사람의 지원을 호소한 적이 몇차례나 있었다. 물론 그럴 때의 재정적 어려움은 대개 정권에 의한 탄압행위와 무관하지 않았으므로, 번번이 쏟아져온 뭇사람의 도움은 그야말로 물심양면의 지원이 되었다. 다 그 덕에 창간 25주년을 눈앞에 두고 이런저런 사업을 설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마지막으로 다시 비슷한 호소를 낸 것은 잡지가 복간되고 1주년을 맞은 89년 봄호의 권두에서였다고 기억한다. 그때 역시 많은 분들의 성원은 가슴 뿌듯한 것이었다. 이에 힘입어 우리는 당시 약속했던 내부정비와 자기쇄신의 노력을 다그쳐왔고, 금년 들어서는 출판 사업에서의 다소 유리한 계기도 주어져, 이제 더 이상 다급한 도움을 부를 까닭은 없는 형편임을 자부하게 되었다. 잡지 사업 자체도, 한때 어지러울 정도이던 비슷한 매체들의 창간이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지속적인 성취의 차원으로 옮겨가면서, ‘창비’만의 굳건한 자리가 확연해진 바 있다.

하지만 이런 시점이야말로 독자 여러분과 우리 자신이 오히려 더욱 힘을 모아, 이 사회에 그토록 아쉬운 튼실한 문화적 구심점을 확실히 세워놓을 시기이다. 한 나라의 건강한 문화생활을 위해서는 선의의 경쟁을 하는 수많은 매체들이 필요한 동시에 일정한 수준과 사명감을 지닌 독자들이 함께 읽고 만나는 지면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우리의 일관된 지론이었다. 이미 어느정도 ‘창비’의 몫이 되어 있는 그러한 복된 짐을 우리는 창간 25주년을 계기로 더욱 묵직히 지고자 하는 터이며, 독자들이 그 점도 늘여주고 짐질 힘도 보태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는 것이다. 이번호 400면에 소개하는 ‘창간 25주년기념 정기독자배가운동’도 그런 취지로 적극 지원하고 참여해주시기 바란다.

사실 화급한 어려움이 없다고 하지만, 냉철히 보면 ‘창비’ 같은 잡지에는 이 세월 자체가 항구적인 위기상황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한다. 우리가 아무리 애써서 커간다 해도 눈부시게 대형화·국제화하는 시류를 따라잡기는 힘들게 되어 있다. 힘세고 돈많고 발넓은 사람들의 호의보다 뜻있는 독자들의 뒷받침에 끝까지 의존하려는 것이 우리들 스스로 그어놓은 한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명의 완수에 필요한 만큼의 성장은 어떻게든 해내고자 하며, 그러기에 독자 여러분의 각별한 관심과 애정에 모든 것을 걸고 있다.

이번호에서 우리는 무엇보다 권두좌담 「생태계의 위기와 민족민주운동의 사상」을 통해 부단한 개척을 또 한번 시도한다. 물론 공해나 생태계 문제에 본지가 눈돌리는 것 자체는 만시지탄을 낳을지언정 ‘개척’과 거리가 멀다. 그러나 문인들과 사회과학자·여성운동가·보건의료인 들이 한자리에 모여 문제를 이만큼이라도 깊이있게 논의한 일은 우리 주변에서 (불행하게도) 아직 없었다고 믿는다. 특히 논의의 초점이 민족민주운동의 사상적 자기점검과 진전에 두어졌는바, 비록 미진한 점이 많으나 90년대 들어 본격화 할 생태계운동과 또다시 거듭납을 요청받고 있는 민민운동의 장래에 긴한 이바지가 되기 바란다.

좌담의 미진한 점 가운데 하나는 생태계운동을 평화군축운동과 연결시키는 토론이 아쉬웠던 일이다. 바로 그런 미비점을, 핵무기가 제기하는 위기의 성격으로부터 미·소 핵군비경쟁의 역사와 미국 핵전략의 본질 그리고 평화운동·민주화운동의 과제에 이르기까지 소상히 밝혀준 이삼성씨의 장편논문 「핵의 위기」가 적절히 보충해준다. 또한 좌담이 처음부터 생태계 위기 실상의 전문가적 분석보다 ‘문외한’들의 토론이기를 선택했던 점을, 환경학자 이추경씨의 서평이 보완해주는 바 있늘 것이다. 좌담의 주제가 워낙 넓다보니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다른 글도 많다. 계급론 연속기획의 4회째가 되는 황태연씨의 「‘맑스주의의 위기’와 계급이론의 재건」은, 그간 일부 곡해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그의 ‘지식프롤레타리아트’ 개념에 대한 회심의 해명인 동시에 본지 68호의 좌담이 제기했던 현존사회주의 문제에 관한 그나름의 새로운 정리이기도 하며, 바로 이번호 좌담의 일관된 관심사와도 직결된다. 게다가 독일에서 보내온 또하나의 논문 「동독의 몰락과 사회주의 리얼리즘」도 비슷한 주제를 문학의 분야에서 다룬 셈이다. 동유럽의 변화에 대해서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관해서나 앞으로 더욱 다양한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흔히 제목만 들먹여지던 동독문학의 대표적 작품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지난호의 「엥겔스의 발자끄론」에 이어지는 좋은 토론거리가 될 것이다.

평론집 『민족문학의 새단계』를 힘들여 분석·비판한 최원식씨의 논문에 대해서는 본지 편집진에서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70년대 이래 본지는 민족문학론의 본거지로 인식되어왔고 또 우리나름으로 그렇게 자처하기도 했는데, 다만 80년대 들어서 우리들끼리의 활발한 이론적 마주침은 부족한 편이었다. 「‘강압의 시대’에서 ‘지혜의 시대’로」는 물론 평단 전반에 거린 민족문학 논의의 활성화에 공헌하리라 믿지만, 우리들 스스로 상호비판하고 탁마하는 기풍을 진작하는 데도 중요한 계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강영주씨의 「『장길산』과 역사적 진실성의 추구」는 내년초에 간행될 한국 역사소설 연구서의 일부로 그가 최근에 탈고한 장장 550여매의 『장길산』론 중 일부분을 미리 선보이는 것이다. 면밀한 역사학적 탐구와 작품을 보는 엄격한 안목을 겸한 논문으로서 역사소설 일반에 관한 논의수준을 한 계단 높여주는 동시에, 『장길산』의 참값을 매겨가는 공동토론의 과정에 하나의 이정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짤막한 서평들이지만 송영·정도상의 장편소설들에 대한 구중서씨의 평과 세 사람의 비교적 덜 알려진 시인들의 신간 시집들을 자상하게 짚어준 신경림씨의 글은 둘다 중진의 관록을 물씬 풍긴다. 신경림시인의 경우는 여름호에 소개한 대로 약 1년간 고정 서평자로 봉사할 것을 약속해준 상태인데, 다만 가을호에는 좌담에 참여하는 바람에 서평을 거르게 됐었음을 뒤늦게 설명드린다.

이진섭씨가 리영희교수와 고 민병산선생의 산문을 다룬 또하나의 서평 「분단시대를 산 두 사람의 통일논객」과 한겨레신문 기자로서 지난달 평양을 방문한 안정숙씨의 문화시평 「‘범민족통일음악회’에 다녀와서」는 서로 뜻이 통하는 글이면서, 무게있는 논문들 틈에서 반가운 변화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이성형씨의 「멕시코혁명 80주년에 부쳐」 역시 우리가 몹시 궁금해하는 현대사의 한 대목과 부담없이 만나게 해주는 글이다.

작품 면에서 이번호의 수확으로는 아무래도 윤정모 장편 『들』의 연재가 시작됨을 꼽아야겠다. 두루 아다시피 윤정모씨는 「님」, 「빛」 등의 문제작을 쓴 뒤 신동엽창작기금을 받았고 장편 『고삐』로써 인기작가의 자리마저 굳혔는데, 이번에 그 어느 때보다 실답게 대중성과 예술성을 결합하려는 다짐으로 연재를 시작했으며, 호조의 출발을 보여주었다고 믿는다. 그밖에 귀한 단편을 주신 조성기·이남희 두 분, 시를 써주신 박정은·김종철·박석수·김해화·오봉옥 님들께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동안 눈을 끄는 작품이 적잖게 쌓여온 신인투고작들 가운데서는 이번에 김영산씨를 뽑아 독자들께 선보이기로 했다. 뜨거움과 부드러움을 두루 갖추고 상당한 숙달도 보여주는 이 젊은 시인이 앞으로 한껏 더 자라기를 기대해본다.

 

『창작과비평』1990년 11월 겨울호 책머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