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문

[창비 책머리에] 88년 8·15를 넘기고

복간 3호째인 이번호는 8월 15일 좀 지나서 책방에 나갈 예정이다. 금년 8·15는 무엇보다도 학생들이 재차 계획한 남북학생회담 날짜로서 지금 한창 논란을 모으고 있다. 회담이 정부쪽의 어떤 극적인 태도변화로 성사가 될는지, 아니면 지금 추세대로 나가서 당국과 학생들의 또 한번의 대결로 무더운 이 여름을 더욱 무덥게 만들려는지에 대해서는 여기서 굳이 점쳐볼 생각이 없다. 어느 편이 되든 이 88년의 8·15는 분단시대의 우리 민족이 두고두고 새겨볼 각별한 뜻을 이미 지녔고 또 새롭게 남길 것이 분명하다.

각별한 뜻이래야 ‘88올림픽 앞으로 33일’이라는 것 말고 따로 뭐가 있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으리라. 아니, 학생회담을 어째 하필이면 올림픽을 앞두고 하겠다는 거냐고 역정내는 당국의 본심도 바로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또 바로 그 생각을 ‘국민적 합의’로 만들기 위해 제도권의 온갖 매체가 총동원되고 있는 듯도 하다. 지난 1974년의 이른바 문세광사건 이후 두어 해 동안은 광복절이 ‘영부인 기일’의 뒷전으로 밀려나는 느낌이었는데, 올해는 매사를 ‘올림픽 전 몇째 날’로 치부하려는 움직임이 요란스럽다.

그러나 1988년 8월 15일에 제 43회 광복절보다 더한 기념일이 있기는 있다. 광복절과 겹치는 정부수립기념일이 올해로서 마흔세번째, 그러니까 ‘건국 40주년’이라는 좀더 똑 떨어지는 숫자의 기념일이 88년의 8·15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우리가 기념한다는 ‘건국’의 의미를 새로이 묻는 일이야말로 올해의 특별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일제의 총독정치를 삼팔선 이남에서 승계했던 미국의 군사통치가 공식적으로 끝난 날은 마땅히 기념하고 경축할 날이다. 다만 1945년의 8·15가 일제로부터의 해방인 동시에 삼팔선의 시작이었듯이, 48년의 건국은 분단국가체제의 출범으로 그사이 3년간 적잖은 피마저 흘리며 진행된 통일국가수립운동의 패배가 확인된 날이기도 했다. 이로써 예약된 것이 6.25의 참극이었고 열전 3년, 휴전 35년의 그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어 있다. 정전협정밖에 없으니 법적으로도 그렇지만, 53년 이후로도 수없이 벌어져온 동족과 자국민에 대한 억압과 박해와 살상은 우리가 본디부터 특별히 야만적인 족속이 아니라면 ‘전시’라는 정황으로밖에 해명할 길이 없는 것이다. 이 피어린 전쟁터에, 그것도 이 피눈물 역사의 마흔 돌이 되는 해에, ‘세계인의 축제’요 ‘평화의 제전’이라는 올림픽이 열린다는 데에 우리의 고뇌가 있고 적지않은 분노가 있다.

올림픽을 통해 동족의 분열을 더욱 굳히고 손님 접대를 핑계로 자기 식구를 더욱 학대하려는 무리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분노 그것일 뿐이다. 하지만 정작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릴 수 있게 된 것은 그들의 애당초 계획보다도 작년에 우리 민중이 거둔 승리의 덕분이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지금 올림픽은 무슨 올림픽이겠는가. 외국에서도 시가전 취재기자 말고는 아나 올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88 올림픽은 분노의 대상인 동시에 부분적으로는 우리들의 축제이기도 한 까닭에, 우리의 대응은 그만큼 더 간단치가 않다. 기왕에 벌어진 잔치니 이제는 당국에 협조하는 길밖에 없다는 노예근성이 올바른 대응이 아니듯이, 무작정 분노한다 해서 될 일도 아니다. 끝까지 민족이 화해하는 올림픽을 만들고자 애써야 하고, 그러는 가운데서 올림픽 이후의 장구한 세월을 내다보며 우리의 인식을 심화하고 시야를 넓혀 나가야 할 것이다.

『창작과비평』의 부활 역시 6월 항쟁의 한 성과라는 점은 복간사에서 이미 밝혔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단계의 민족·민주운동이 요구하는 인식의 시화, 시야의 확대에 기여할 것을 자임하고 출발했다. 다만 계간지의 성격상, 우리의 작업은 그때그때의 정세를 자세히 분석하고 즉각적으로 반응하기보다 좀더 본질적인 논의와 문학을 통한 창조적인 정리에 주력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88년의 8·15를 넘기는 시국의 중대성에 비춰 이번호에는 「민족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 」이라는 다분히 시사성을 띤 권두좌담을 특별히 마련했다. 그렇다고 이 좌담이 현상분석에 머문 시사해설 좌담은 아니다. 『창비』 57호 이래로 우리가 지속적인 관심을 쏟아온 한국사회성격논쟁과도 이어지는 논의인데, 독자들의 정세판단에 도움이 되면서 기왕의 난삽한 이론적 쟁점들을 좀더 알기 쉽게 재조명한다는 좌담의 의도가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긴다. 어쨌든 이 좌담과 이영희교수의 「핵무기 신앙에서의 해방」은 그럴듯한 상호보완을 이루면서 충분히 일독에 값하리라고 자신한다.

잡지의 내용들이 되도록 모두 직접간접으로 이어지도록 꾸미는 것이 우리의 목표지만, 문학적으로도 탁월한 성과인 고은시인의 연작시 42편이 권두의 좌담이나 논문과 그대로 걸맞는 것은 편집자로서 여간 흐뭇한 일이 아니다. 민족·민주운동의 열사들에게 바친 이 시편을 통해 살아남은 자들의 빚이 다소나마 갚아짐과 동시에, 열사들의 죽음이 열어준 바 살아서 일하고 싸워서 이기는 시대가 좀더 굳건히 자리잡히기를 기대해본다.

일본인의 입장에서 일본의 이야기를 전해준 와다 하루끼 교수의 글에서도 우리 역사의 새로운 전개와 무관하지 않은 진지한 자기점검이 수행되고 있음을 본다. 진정한 연대의식에서 나온 이런 식의 자기점검과 상호비판은 그 자체가 연대의 강화에 기여할뿐더러, 우리가 뜻하는 인식의 심화에 꼭 필요한 일부일 것이다. 그런 뜻에서 본지는 앞으로도 일본( 및 여타 외국) 필자들로부터 특별기고를 계속 받아볼 계획이다. 이번에 「일한연대운동의 사상과 궤적」을 써준 와다씨는 이미 국내에도 알려진 대로 러시아사·소련사의 권위 있는 연구자이며 한국의 민주화운동과의 연대에 남다른 정열을 쏟아온 인물인데, 갑작스런 청탁에 흔쾌히 응해준 성의에 독자와 더불어 깊이 감사드린다.

복간호의 유재건씨 글에 대한 지난호의 반론은 국내 최초의 공개적인 ‘사적 유물론 논쟁’으로 널리 화제에 올랐다. 논쟁이라는 사실 자체에 쏠린 얄팍한 흥미도 없지 않았겠지만, 이제 「역사법칙 재론」이 나감으로써 논의는 진지성과 깊이를 더하게 되었다고 믿는다. 앞으로 딱이 동일한 필자들이 아니더라도 이 문제에 대한 활발한 토론이 지속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현재 소련의 변혁운동에 대해서도, 비록 최근에 국내 보도가 적지 않았지만 본격적인 논의는 이번호 황태연씨의 글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유물론 논쟁이나 국내 저자의 『자본론』 연구서에 대한 서평과 더불어, 오랫동안 쌓여온 우리의 지적 갈증을 달래주리라 믿는다. 또한 김상호씨의 글은 일견 오늘의 현실과 동떨어진 듯한 고조선 문제에 관한 기왕의 논의를 정리하면서 이를 새로운 시각과 관심으로 보게 해줄 것이다.

여러 방면으로 시야를 확대해가는 중에도, 민족문학의 작품을 소개하고 그 이론을 발전시키는 일이야마로 여전히 창비의 주된 작업으로 남는다. 시에서는 연작시편에 파격적인 지면을 할애하다보니 조태일·박철 두 분 외의 작품은 더 실을 수 없게 한정되었지만, 소설에서는 「분지(糞地)」의 작가가 오랜만에 내놓는 새 단편과 윤정모씨의 역작 「빛」, 그리고 투고신인 중 공지영씨의 「동트는 새벽」을 얻음으로써 그런대로 균형과 풍성함을 얻었다고 생각된다. 비평분야에서도, 김종철씨의 이용악론과 조정환씨의 장문의 평론은 필자의 연배와 관점, 논의의 대상과 방식이 모두 좋은 대조를 이루면서 민중·민족문학 논의의 진전에 함께 기여하는 바 있으며, 여기서 김영희씨의 「여성문학의 비판적 검토」가 또 다른 방향에서 거들고 있다. 국내 작품들에 대한 서평 계획이 혹은 필자 사정으로, 혹은 지면의 제약 때문에 모두 빠진 것이 유감이나, 이시영씨의 ‘문학계동향’이 중요한 두 신간을 다루었고 신경림·김흥규 두 분이 각기 다른 형태로 보여주는 ‘서평의 맛’이 그러한 아쉬움을 보상할 수도 있겠다.

필자쪽의 사정이라면 몰라도 공들여 써주신 원고를 지면 때문에 뒤로 미룰 때 편집자의 난감하고 송구한 심경은 형언하기 어렵다. 아직 계간지 편집의 감각이 미숙한 탓인지, 이번호에도 부득이 밀린 원고가 적지 않았다. 필자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어쨌든 복간되고 처음 두 호가 모두 왕년의 최고 부수를 훨씬 웃돎으로써 편집자들로서는 가장 걱정되던 재출발의 첫 고비를 생광스럽게 넘긴 셈이다. 그케 용기를 얻어 이번호는 더욱 알차게 만들고자 애써보았고 4호·5호에 관해서도 한껏 꿈에 부풀어 있다. 독자 여러분의 더욱 뜨거운 북돋움과 더욱 냉철한 일깨움을 바랄 뿐이다.

 

『창작과비평』1988년 가을호 책머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