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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읽기-쓰기와 인공지능시대

오연경 문학평론가(고려대 학부대 부교수)의 대학문제연구소 칼럼 “읽지 않는 독자의 탄생”을 공유합니다. 칼럼은 도서전시회 참여자들이 급증하는 데 비해 정작 책을 읽는 독자는 줄어드는 현상에서 출발하여 대학교육 현장에서 AI가 야기하는 문제점과 난제들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이어갑니다.
오교수는 계간 <창작과비평>의 비상임편집위원이기도 해서, 내부행사인 확대편집회의(2026.8.8)에서 “인공지능 시대의 읽기-쓰기”라는 제목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했고 동료 위원들이 활발하게 후속토론에 참여한 것으로 압니다. 대학문제연구소 칼럼의 발행 날짜로 보아 확대편집위 발표와 토론 이후에 대학교육의 현장 문제에 집중해서 한층 간결하게 정리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제가 이 칼럼을 링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일독을 권할 만하다고 생각한 데다 관련된 논의들을 저나름으로 정리해볼 의욕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는 오교수가 언급한 현상에는 훨씬 오래되고 뿌리깊은 원인이 있고 따라서 확대편집회의 발제문 제목을 뒤집어서 “읽기-쓰기와 인공지능시대”를 논제로 삼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읽지 않는 독자’라는 매력적이지만 사실상 자체모순(이른바 형용모순)에 해당하는 표현을 포기하는 대신, 읽기가 원래 ‘읽고 생각하기’이고 쓰기도 ‘생각하며 쓰기’라는 다소 올드한 개념에서 출발하자는 것이지요.
이 말이 꼰대스러운 잔소리에 그치지 않으려면, 생각없는 읽기-쓰기의 역사가 무척 오래되었고 나름의 세계사적 시운에 부응하여 오늘날 근대학문의 세계를 거의 장악하게 되었음을 통찰할 필요가 있을 거예요. 곧, AI가 있기 전에 (인문학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AI처럼 남의 말과 글을 답습하여 일정한 틀에 갇힌 언어를 사용하는 데 익숙해졌기에 비로소, 그 일을 인간 못지 않게 아니 인간보다 더 능숙하게 해낼 수 있는 기계가 개발되고 발달된 것이지요.
인간은 높은 지능으로 다른 동물들을 지배하기도 했지만 컴퓨터의 원리가 된 계산능력만으로 ‘만물의 영장’ 노릇을 해온 것은 아닙니다. 계산불가능한 것에 대한 생각 내지 인간 고유의 사유능력이 있었던 것이지요. 실은 인간이 몸으로 살아 있는 한 계산적 지능만을 완전히 분리시켜 행사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가령 바둑에서처럼 계산력으로 특화된 AI 바둑선수를 인간이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최근에 신진서 선수가 AI 바둑과 다시 대결해서 2승1패의 전적을 올렸습니다만 인간 고수들 간에는 말도 안 되는 2점 접바둑이었지요. 그런데 그렇게라도 2승을 거둔 기쁨은 신진서의 것이었지만, 두점을 접어주고도 이겼을 때의 기쁨은 AI의 것이 아니라 그 개발자의 것이었지요. 또 사람들은 인공지능보다 턱없이 낮은 수준인 줄 알면서도 바둑 두기를 계속하고 즐기기조차 합니다.)
확대편집회의에서 몇분이 언급한 하이데거는 근대의 특징이 과학의 발달 자체라기보다 ‘과학에 대한 과학적 방법의 승리’라는 니체의 말을 인용하며 지지합니다. 다시 말해 수리적 계산이 거의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학문이 적어도 17세기부터 유럽에 자리잡았고 오늘날 전지구적 지배력을 행사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인공지능 기술의 발달은 이러한 대세의 극점에 해당할 뿐입니다.
요즘은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 아닌 인간지능(human intelligence)을 들먹이며 양자를 비교하기도 하는데, 영국의 문학평론가 F. R. 리비스가 일찍이 강조했듯이 프랑스어의 l’intelligence와 달리 영어의 intelligence에는 ‘지능’뿐 아니라 ‘예지(叡智)’라는 뜻도 있지요. 그러나 ‘인간지능’이라는 번역에서는 당연히 그런 의미가 사라집니다.
동아시아 전통이 살아남은 곳에서는 ‘깨달음’이라든가 ‘마음공부’라든가 ‘도(道)’, 또는 노자의 ‘도법자연(道法自然,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는, 인공지능의 계산 범위에 들지 않는 사유가 그다지 낯설지 않습니다. (물론 인공지능이 그런 인간 고유의 사유가 낳은 언설들을 학습해서 발화하는 능력은 얼마든지 잘해내고 점점 더 잘하겠지요만.)
굳이 하이데거를 끌어대는 이유는, 인간의 계산적 지능을 절대시하는 학문풍조가 세계적인 대세가 된 경위와 논리를 그 내부적 흐름을 통해 확인하고 내부자의 언어로 설명하는 능력이 없이는 동양에서든 어디서든 사태 극복의 실마리를 찾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동아시아 전통사상과 하이데거를 둘을 동시에 호명함으로써 복잡한 논의를 이중으로 복잡하게 만드는 것 아니냐고 짜증을 내실 분도 계시리라 봅니다. 하지만 이게 오히려 ‘심플’한 해법일 수도 있어요. 동아시아 사상과 연결할 때 하이데거 사상의 전지구적 호소력이 오히려 커지고, 동아시아 사상이 오늘의 현실 속에 살아날 전망이 열리려면 하이데거처럼 근대와 근대 학문을 낳은 서양형이상학의 언어를 외면하지 말아야 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