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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

책 제목을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로 하자는 말에 창비사 편집부가 꽤 시끌시끌하다. 듣기가 좀 무엇하다느니 그래가지고 책이 팔리겠냐느니, 여러 가지로 마음들이 쓰이는 모양이다. 하기는 두 번째 문학평론집을 낼 때 그냥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Ⅱ’로 하자고 고집을 피웠다가 판매에 관한 영업부의 염려가 적중하는 꼴을 본 경험이 있다. 물론 그게 딱히 제목 탓이었는지 아니면 내용 탓이 더 컸는지는 분명치 않다. 어쨌든 결과가 신통치 못했다.

하지만 이번 제목에서 특히 ‘공부길’이라는 낱말을 껄끄럽게 느끼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면서 또 한번 고집을 부릴 생각이 난다. ‘공부’는 물론이고 ‘공부길’도 원래는 우리의 언어생활에서 무척이나 친숙한 낱말이 아니었던가. 지금도 ‘공부길을 잡는다’는 말처럼 가슴 깊숙이 울림을 주고 설렘을 안겨주는 표현이 몇이나 될까.

‘공부길’이 저항감을 일으키는 까닭이 요즘 세월에 그 단어가 생소해져서만은 아닐 것이다. 공부라는 말 자체가 입시 준비 등 온갖 시험공부, 점수따기 위주의 학교공부로 때묻을 대로 때묻고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버린 탓일 게다. 이런 판국에 분단체제를 변혁하는 사업까지 공부에다 갖다 붙이니, 달갑잖은 느낌이 들 법도 하다. 그러나 ‘학교에는 졸업이 있어도 공부에는 졸업이 없다’는 속담처럼 학교에 들어가고 나가는 일을 떠나 평생 동안 하는 것이 공부요, 비록 한자에서 왔을지언정 더없이 낯익은 우리말이 되어버린 (그래서 가령 일본어의 ‘쿠후우(工夫)’와도 전혀 어감이 다른) 낱말이 ‘공부’인 것이다.

논란의 소지로 치면 ‘분단체제’가 훨씬 더하다. 별다른 뜻이 없는 말치장으로 ‘체제’라는 단어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엄밀한 개념으로 사용하려는 것이 다년간 내 뜻이었고 이 책의 주된 목표이기도 하다. 얼마나 성과가 있었는지는 물론 독자들이 판단할 몫이다. 여기서는 그간의 논의과정에서 떠오른 생각을 한두 가지 적어볼 따름인데, 우선 밝혀둘 점은, 이 개념을 제대로 정립하고 실증적 자료를 통해 점검하는 작업이 나 개인으로서든 우리 학계 전체로서든 극히 초보적인 단계에 있다는 사실이다. 개념화를 제창한 나의 취지는 남북으로 갈라진 우리나라의 현실을 좀 더 총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인식하자는 것이었지만, 나 자신은 분단현실의 분석을 체계화할 의지도 능력도 애초에 모자랐던 데다, 체계적인 사회분석이 전공일 듯싶은 분들로부터 질정을 받을 기회마저 드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분단현실의 극복이 우리의 진지한 목표이고 그것이 어느 정도 체계적인 현실인식이 없이는 불가능한 난제라고 한다면, 분단체제 개념을 둘러싼 논의를 활성화할 숙제는 나 개인만이 아닌 모든 동학들의 숙제요 동시대인의 공통된 일감이라 하겠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종전보다는 조금 더 집중적으로 그 논의를 제기하는 것이 어떤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이를 위해 바라건대, ‘체제’ 또는 ‘체계’에 대한 일정한 낱말풀이에 집착하는 논리보다는 분단된 한반도와 이를 둘러싼 세계가 각기 어떤 의미로 ‘체제’의 성격을 띠고 있는지?다시 말해 정확히 어떤 차원의 체계적 인식을 요구하는 현실인지?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좀 더 나은 현실로 바꿀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중지를 모으는 논의가 벌어졌으면 하는 것이다. 나 자신은 한반도의 분단체제를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한 독특한 하위체제로 파악하고 있음을 본문 이곳저곳에 피력하고 있으며, 차원이 다른 그 두 체제의 상호관련이라든가 분단체제 안에서 남북한 사회라는 또 다른 차원의 하위체제들이 존립하는 방식에 대해 이 책에 미처 못 밝힌 어렴풋한 생각들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남북 어느 쪽도 완결된 체제가 아니며 동시에 극복되어야 할 현실이라는 합의를 출발점으로 더 토론하고 공부하는 일이 아닐까 한다.

분단체제론의 진전이 미흡한 데는 학문적 노력의 부족보다 더 큰 원인이 있다. 분단체제극복의 과제를 떠맡은 남북한 민중(및 뜻있는 해외동포)의 공통된 실천의 장이 아직껏 제대로 열리지 않은 것이다. 물론 분단상황이 지속되는 한 공통의 장이 열린다 해도 완전히 단일한 마당은 아닐 터이며 남쪽 민중에게는 남한이, 북의 민중에게는 북한이, 그리고 해외동포는 각각 자기 사는 해외의 그곳이 우선적인 일터가 되어 마땅하다. 다만 이들 각자의 일터가 실질적으로 연결되지 않고서는 각각의 국지적 문제해결에조차 한계가 그어지게 마련이라는 것이 분단체제 개념의 골자인 것이다. 그런데 남북한 민중 사이에 도대체 어떤 연대운동이 가능할지가 막막하게 느껴지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기도 하다. 남한 민중운동의 일부 지도적 인사와 북한 지도층 사이의 교류를 민중들 자신의 연대운동과 동일시하지 않는 한 실제로 ‘연대운동’의 이름에 값하는 움직임은 거의 없는 실정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분단체제론의 실천적 요구가 오히려 현실 전략의 부재를 드러내는 증거로 비칠지 모른다. 그러나 분단체제의 어느 한쪽 당국도 민중의 적극적 개입 없이 분단체제극복의 당사자로 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공유되는 곳에 이미 실천적 연대의 싹이 트게 마련이거니와, 우리가 입버릇처럼 들먹이는 ‘격변하는 세계’ 속에서 어제 확실하던 일이 오늘 허물어지고 오늘 막막하던 일이 며칠 뒤에 발등의 현실로 닥친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더구나 남북을 아우르는 ‘공통의 장’이란, 분단체제를 운영하는 자본가나 권력자 들에게는 구체적 계획의 대상이 되고 심지어 행동의 장이 된 지가 오래 아닌가.

책 제목에 관해 설명을 하는 김에 ‘변혁’이라는 말을 쓴 취지도 잠시 언급할까 한다. 80년대에 이 단어는 주로 ‘혁명’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방편으로 쓰였고 지금도 얼마간 그런 셈이다. 실제로 ‘개혁’보다는 무언가 더 근본적인 뒤바꿈을 뜻하는 단어임이 분명한 만큼 그러한 용법이 아주 틀렸달 수도 없다. 더구나 ‘혁명이냐 개량이냐’의 양자택일이 강요되던 풍토에서는 ‘변혁’이 ‘개량주의’가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혁명’의 동의어가 되기에 충분했다. 또, ‘혁명’도 정의하기 나름이므로 두 단어의 동일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대체로 ‘혁명’이라고 하면 특정 기간의 폭력적 충돌을 수반하는 변혁을 연상하게 마련이고, ‘변혁’의 경우는 변화의 발본성이 전제되기는 하되 폭력사태의 개입이 낱말의 뜻매김 자체에 포함되지는 않는 것 같다. 적어도 분단체제의 변혁을 말할 때 나는 그 과정의 폭력성에 대한 예단을 일단 유보한 채 그 결과가 단순한 체제개혁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한반도의 통일이 전쟁의 형태로 성취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의미에서 분단체제의 변혁은 일단 평화적인 과정으로 보아야 옳다. 또, 레닌주의 혁명 또는 유사한 형태의 민중봉기가 남한에서 성공함으로써 통일로 이어지리라는 구상을 부정해온 점에서도 나의 분단체제변혁론은 폭력혁명론과 거리가 있다. 반면에 남북 각기의 내부가 변하고 양자의 상호관계가 변하는 과정에 어떤 폭력사태가 벌어지고 민중의 입장에서도 얼마나 강력한 대응이 필요한 상황이 올지는 예측할 수 없다. 다만 평화가 그 자체로서 바람직하다는 원칙론뿐 아니라 한반도처럼 미묘한 판국에서는 돌발적 변수를 극도로 경계해야 한다는 현실론에 비추어서도, 변혁은 가급적 평화적인 변혁이 되게끔 우리의 공부를 다그쳐야 할 것이다. 동시에 불가피한 고비를 맞아서는 무기를 든 저항도 불사할 준비가 없이는 변혁을 잃을뿐더러 평화도 잃기 십상인 것이 우리 공부의 어려움이기도 하다.

공부와 변혁사업이 이렇게 뒤얽혀 있다는 것이 나의 기본 입장인지라, 제1부 ‘분단시대와 분단체제’로부터 구분해놓은 제2부 ‘대학과 공부길’의 내용이 표면상의 소재만큼 다르지는 않는다고 믿는다. 분단체제의 변혁을 위해 공부길을 잡는 일이 늘상 문제되듯이, 큰 배움의 터로 자처하는 대학이 제 구실을 하고 사람을 사람답게 길러내기 위해서는 분단체제 및 세계체제의 변혁을 겨냥한 학교 안팎의 움직임이 함께 진행되는 일이 필수적인 것이다.

수록된 글들을 쓸 때나 책에 제목을 붙일 때의 취지는 대강 이러하지만, 정작 담아놓은 ‘물건’은 실로 여러 해에 걸쳐 틈틈이, 대개는 숨가쁘게 얽어낸 토막글이 대부분임에 겸연쩍은 느낌을 금하기 어렵다. 책의 대체적인 성격은 문학평론 이외의 글을 주로 모으고자 했던 나의 두 번째 저서 『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와 비슷한 셈인데, 적어도 그때보다는 한결 일관된 내용을 갖추었다고 자위해본다. 수록문 가운데 「90년대 민족문학의 과제」 한 편은 문학평론집에 더 적합한 글이지만, 원래 나의 분단체제론이 민족문학론의 일환으로 전개되었을 뿐더러 실제로 문학평론 여기저기에 끼어들어 있는 것이 많은 만큼 그쪽과의 연결고리?내지는 연결의 필요성을 환기하는 자료?로서 일부러 포함시켰다. 또한, 제1부에 「보론: 분단체제 논의의 진전을 위해」와 제2부에 「‘국제경쟁력’과 한국의 대학」을 새로 집필하여 조금이라도 일관된 저서의 모양에 근사하게 만들고자 했다. ‘부록’은 표제 그대로 ‘주로 신상발언’인데 1, 2부의 논의를 보충하는 의의도 전혀 없지는 않을 듯하다.

배열은 1부 중 가장 최근에 쓴 「분단체제의 인식을 위하여」와 그 보론을 첫머리에 둔 것 말고는 각 부마다 연대순을 따랐다. 그러다보니 80년대 벽두 또는 심지어 70년대 중반까지 거슬러올라간 이야기로 시작하게 되어 다소 거리감을 느끼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간의 현재성을 지닌 글들이라는 나의 판단이 전적인 착각이 아니라면, 쓰인 순서를 따라 읽을 때 얻어지는 바도 없지 않을 듯하다. 그보다는 선행작업에 대한 아무런 지식 없이 서두의 두 편을 대하는 독자들의 반응이 걱정스럽기도 하다. 더러 생소한 이야기가 별다른 설명 없이 나오더라도 1부의 나머지 글들을 통한 보완을 기대하며 읽어주기를 부탁드리고 싶다.

교정을 마치면서 제목에 ‘공부’라는 말이 들어가야 할 또 한가지 이유가 실감된다. 본디 공부와 사업이 둘이 아니고 하나지만, 분단체제 변혁의 사업을 말하기에는 누구보다 나 자신부터 구체적인 경륜과 실력이 태부족이다. 대학인이라는 직분을 차치하고도 우선 공부길을 잡기에 더 힘써야겠다는 생각이다. 물론 이때의 공부가 개인적 수양이나 단순한 지식의 축적에 국한되지 않고 실행을 아우르는 원만한 공부이어야 함은 「물질시대 개벽의 공부길」에서 강조한 대로다.

변변치 못한 책이지만 이번에도 많은 이웃과 벗들 그리고 하루하루 나에게 사랑과 관용으로 힘을 주는 가족들의 은덕으로 가능해진 것임을 되새길 때 감회가 자못 새롭다. 또한, 실제로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교열실무를 맡아 세세한 표현에까지 신경을 써준 고은명 씨의 노고가 컸음을 밝힌다.

1994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