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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 D. H. 로런스의 현대문명관

나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 재직 중이던 1969년, 학교로부터 말미를 얻어 박사학위를 마치고자 미국에 다시 갔다. 당시 창간편집인으로 활동하던 계간 『창작과비평』 일도 지금은 고인이 된 신동문(辛東門) 선생과 동학 염무웅(廉武雄) 평론가에게 넘기고 떠났다. 결과적으로 두 분, 특히 염선생이 심한 고초를 겪었지만 잡지 내용을 쇄신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학위논문을 D. H. 로런스에 관해 쓸 생각은 진즉부터 하고 있었다. 1960년대의 문리대는 오늘의 대학 현실과는 판이하게 자유로운 분위기였고 강의자의 선택권이 넓어서 어느 해는 장편 『무지개』 하나만 갖고 두 학기를 연달아 수업한 적도 있다. 말하자면 학위논문을 위한 선행학습이 어느정도 된 상태였다. 그러나 박사과정 복귀 후의 첫해는 학점취득 의무를 마저 하는 데 보냈고 이듬해는 논문제출 자격시험을 준비해서 통과해야 했으므로 실제로 논문을 작성하는 기간은 빠듯했다. 집필은 그런대로 순조로웠던 셈이나 완성본을 만들어 제출하는 작업이 만만찮았다. 6월 졸업시기를 넘기고 나니 우선 아르바이트를 하는 전문타자수들 거의가 여름휴가 또는 휴업에 들어가 케임브리지 시내에서 사람을 구할 수가 없었다. 당시는 컴퓨터도 없고 전동타자기도 드문 때였다. 원고는 결코 쉬운 내용이 아닌데다가 대학측은 원본과 함께 내는 복사본을 먹지를 사용해서 작성해야 한다는 완고한 방침을 견지하고 있어서, 시외 인근지역에서 겨우 구한 주부 타자수도 고생이 여간 아니었지만 나도 수시로 그 집까지 왕래해야만 했다.(당시는 내가 승용차를 몰던 시절이라 그나마 감당이 되었다.) 제출본 타자를 마친 뒤에도 별도의 복사본을 준비할 필요는 남았는데, 복사 기술이나 소요시간 또한 요즘과는 판달랐다. 겨우 제본을 마친 논문을 학교에 제출한 것이 케임브리지시를 떠나던 날 아침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미국 대학에 자리잡은 사람이라면 후속 과제는 논문의 출판이었을 것이다. 원고를 여러 대학출판부에 일단 보내서 어느 한 곳과 계약 또는 가계약을 맺은 뒤 수정작업을 거쳐 단행본을 내고, 그걸 바탕으로 더 나은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귀국하기가 바빴고, 귀국 후 두 달도 안 돼 ‘10월유신’이라는 이름의 친위쿠데타가 일어났으며 『창작과비평』의 편집인이자 실질적 경영자로 복귀한 데 따른 부담도 상당했다. 1974년부터는 시국문제에 깊이 간여하는 형국이 되었고 그해 11월에 대학에서 해직되기에 이르렀다.

논문을 두어 군데 보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중 하나가 하바드대학출판부인데, 지도교수이던 로버트 카일리(Robert Kiely) 교수는 처음부터 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았지만 ‘Second Reader’라 불리는 심사위원 워너 버토프(Warner Berthoff) 교수가 강력히 권유했었다. (논문 작성과정에서 나는 카일리 교수의 친절한 배려와 탁월한 글쓰기 지도에 큰 은혜를 입었지만 논문 내용에 대해 열렬히 공감하고 지지해준 분은 버토프 교수였다. 그는 전공이 미국문학이면서도 연구실에 로런스의 짧은 시 한 편을 출력해서 붙여둘 만큼 남다른 분이었다. 시의 제목도 적혀 있었는데 지금은 정확히 기억이 안 나고 그후 확인해보지도 않았다. 다만 ‘돈 중심의 세계 대신에 사람 중심의 세계로 바뀌어야 한다’는 취지의 후기시였던 것 같다.)

아무튼 접촉했던 출판부들은 모두 거절 통보를 해왔다. 나는 애당초 ‘아니면 말고’ 식으로 보냈던 터라 별로 개의치 않았다. 사실 나는 석사학위 취득 이후 박사과정 입학허가 나온 것을 포기하고 귀국하던 1960년대 초부터 한국에서 한국 독자들을 위해 발언하는 일을 내 삶의 중심에 두기로 결심했었다. 따라서 객관적으로 후속작업이 힘든 상황이 아니었더라도, 영어로 된 학위논문을 손질해서 출판하는 일은 내게 우선순위가 한참 밀리는 과제였다. 한국어 번역의 단행본으로 낸다는 생각은 더구나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바란 것은 논문 내용을 일부 활용하거나 논의의 범위를 다소 확장하는 글들을 우리말로 계속 써서 한 권의 단행본을 내는 것이었다. 그 작업 또한 원활하게 진행하지 못했지만, 몇편만 더 쓰면 되겠다는 생각을 (때이르게) 품은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나의 영문 학위논문을 국내에서라도 출판해서 소수의 동학들에게라도 읽히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보았다. 그래서 그사이 친분이 생긴 영국의 마이클 벨(Michael Bell) 교수에게 사본을 보내주면서 혹시 출판을 할 경우 서문을 써주겠냐고 물었다. 그리하겠노라는 반가운 답을 받았지만 그것도 지금은 여러 해 전의 일이고 약속의 시효가 지났지 싶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한 것 자체가 논문 내용의 시효가 다하지는 않았다는 내 나름의 자기평가가 있었던 셈이다. 사실 한동안 내가 발표한 글들은 학위논문의 어느 부분을 재활용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논문에서 눈에 띄게 진전된 논의는 못 되었다. 어느 후학은 “백선생님은 학위논문 이래 별로 향상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라고 공개석상에서 지적한 일도 있다. 그때 나는 그 말이 농반진반이랄까, 무조건 공격만은 아니라고 느꼈기에 “향상이 없는 걸 나는 자랑으로 생각한다”고 받아넘겼다. 발언의 당사자가 이번에 자원해서 번역작업에 참가한 것을 보면 공격만은 아니라는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무튼 한국어 저서는 지지부진하고 번역서는 생각도 않던 참에 나의 팔순을 앞둔 어느날 옛 제자 두 사람이 찾아왔다. 팔순 기념으로 나의 학위논문을 번역해서 내면 좋겠다고 동학들 간에 의논을 모았는데 동의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팔순이라고 무슨 행사를 하는 건 반대인데다 학위논문 번역은 생각도 못 하던 일이었지만, 번역작업이라도 함께 해보겠다는 것을 굳이 말리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책을 낸다 낸다 하면서 못 내고 있는 마당에 번역서만 덜렁 나가는 것은 너무나 ‘쪽팔리는’ 일이니, 팔순이 아닌 만 80세가 되는 해를 목표로 두 책의 동시출간을 기해보자고 합의했다.

그때부터 저서작업에 더 열심히 매달리기는 했지만 80세 된 해를 넘기도록 완성을 보지 못했다. 번역진은 번역진대로, 뒤늦게 끓는 국맛을 보았는지 시간이 늦춰지는 것을 별로 싫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어떻든 설준규·김영희·정남영·강미숙 네 후학의 협동과 노고로 번역작업이 원만히 마무리되고 새 저서와의 동시출간이라는 목표도 희한하게 달성하게 되었다. 교정작업 단계에서 역자들이 ‘감수본’이라는 이름으로 원고를 보내주었는데, 나는 저술의 막바지에 내 코가 석자라서 전부를 살펴볼 시간도 없었지만, 워낙 꼼꼼하고 정성스럽게 번역한 탓에 특별한 ‘감수’가 필요없다고 판단하여 그들이 제기한 질문들에 답하는 정도로 그쳤다. 그런데 그토록 고생을 한 역자들이 작업을 마치면서 협업과 학습의 기회가 감사했다고들 하니, 나로서는 한층 더 감사하고 ‘도학과 과학을 병진’할 공부거리를 내가 부지중에 제공하지 않았을까 하는 흐뭇함마저 느낀다.

끝으로 상업성이라고는 전무한 번역서 출간을 결단해준 강일우 사장, 편집실무를 맡아준 강영규 부장 등 인문출판부 여러분과 정편집실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린다.

2020년 6월
백낙청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