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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록] 제1~5권 후기

‘인생칠십 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말은 이제 한갓 옛이야기가 되었지만 주변의 벗들로부터 선물을 받아 챙기는 구실로는 아직도 쓸모가 없지 않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백낙청 회화록』이라는 거의 전집 규모의 책을 갖게 되었으니 고희 덕을 톡톡히 보는 셈이다.

상업출판을 하는 회사가 판매전망이 밝지 않은 이런 대규모 기획에 착수하려면 실제로 특별한 구실이 필요하다. 게다가 집단적 작업인 회화(會話)의 기록을 모아 만든 책에 개인 이름을 다는 것도 고희를 축하해준다는 핑계가 없다면 심히 면구스러운 일이 될 게다.

아무튼 이 회화록의 간행은 오랫동안 내가 소망하던 사건이다. 개인 저서에 대한 애착이야 나도 누구 못지않지만, 그간 편집자로서 또는 현장활동가로서 분주히 살면서 저술에 몰두할 시간이 부족했던 대신에 이런저런 회화의 자리를 기획하고 참여할 일이 유난히 많았다. 그것이 혼자만의 글쓰기와는 또다른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작업이라는 믿음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 성과물은 대부분 신문, 잡지 또는 방송매체에서 접해지는 것으로 끝난 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상태였다.

이처럼 흩어지고 다분히 잊혀졌던 기록들이 ‘백낙청 회화록 간행위원회’의 노력으로 모아지고 보니 고맙고 흐뭇한 마음 더할 바 없다. 나 개인의 업적을 넘어 한 시대의 지성사를 담았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이는 특정인이 출연한 대담·좌담들을 중심으로 그려진 하나의 단면도(斷面圖)에 불과하지만, 그 점을 감안하며 읽는 독자에게는 그런대로 지난 40년간 우리 역사와 담론현장을 증언해주리라 본다. 『백낙청 회화록』의 편집기준을 처음에는 본인의 참여도가 최소한 4분의 1은 되는 것으로 한정했다가, 나중에 5인 또는 6인 좌담마저 일부 포함하는 쪽으로 바뀐 것도 그런 역사적·문헌적 가치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역사는 분투와 성취의 자랑스러운 역사였다. 분단과 독재와 갖가지 식민성에 시달리면서도 우리 사회는 자주력과 민주주의를 키워왔으며 그 과정에서 지식인과 문학인들의 치열한 이바지도 적지 않았다. 그 틈에 끼여 나 또한 내 나름으로 연마하고 분투했다는 자부심을 굳이 숨기고 싶지 않다.

그런 까닭에 2천 7백 페이지에 가까운 교정지를 읽는 일이 결코 지루하지 않았다. 지난 40년의 현대사를 돌이켜보는 공부가 되기도 했고, 이미 고인이 된 여러 선배들의 육성을 다시 대하는 남다른 감회도 맛볼 수 있었다. 자신의 발언들에 관해서는 ‘아, 그때는 아직 거기까지밖에 못 갔었구나’ 하는 아쉬움과 함께, 더러는 ‘그때 벌써 이런 소리를 했다니 제법이로군’ 하는 자기만족에 젖기도 했으며, 말들의 나눔과 다툼을 통해 생각이 여물어가는 현장을 목격하는 즐거움도 느꼈다.

그런데 이 기록을 읽는 오늘의 독자들에게 한 가지 바라는 바가 있다. 언표된 내용만 보지 말고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감안해서 읽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유신시대는 유신시대대로, 1980년대는 80년대대로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숨막히는 억압의 세월이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가냘픈 한마디 발성이 듣는 이에게 우레 같은 충격이 될 수도 있고, 에둘러 말하는 ‘노예의 언어’가 곧바로 저항의 언어로 번역될 수 있는 시대이기도 했다. 가령 어느 역사학자의 ‘민족주의적 내셔널리즘’이라는 동어반복적이며 요즘 젊은 세대에게는 아무런 공감도 못 줄 용어가 실은 ‘민중적 민족주의’의 조심스러운 대용어였고 ‘민중’과 ‘민족’은 하나같이 가슴 조이는 도전을 담은 언사였던 것이다.

다행히도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 하지만 1990년대 이래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이 대폭 완화되었다고 해서 ‘감안해서 말하고 감안해서 읽는’ 습성이 불필요해진 것은 아니다. 사안의 복잡성에 충실하면서도 발언의 전파력과 실효성에 유의하는 자세는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의 항시적인 부담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근년에 올수록 대등한 토론보다 일방적인 회견이 잦아지고, 특히 6·15민족공동위원회 남측대표를 맡은 이래로는 공인으로서의 명료한 입장표명을 요구받는 일이 늘어났다. 그러나 이 또한 감안해야 할 또다른 현실이며, 이 현실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나 자신과 씨름하는 공부를 포기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있다. 물론 나의 가장 큰 소망은 하루빨리 이런 처지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저술과 한층 대화적인 토론에 더 몰두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개인 저서가 아닌 방대한 집단작업이라는 점에서 이 책의 출간을 맞아 실감하는 세상의 은혜는 그 어느 때보다 크다. 실제로 절반을 훨씬 넘는 지면이 회화에 동참해준 수많은 분들의 발언으로 채워졌거니와, 각자 자기 이름을 걸고 참여했던 대담이나 좌담이 ‘백낙청 회화록’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는 것을 흔쾌히 응낙해주었으니 그들의 은덕을 먼저 꼽지 않을 수 없다. 간행위를 구성하여 간행사와 해설의 집필을 분담한 염무웅·임형택·최원식·백영서·유재건·김영희 위원들은 모두 창비사업의 오랜 동지로서 내가 그들에게 빚진 바가 이 책의 간행에 한정되지 않음은 물론이다. (해설에 관해 한마디 덧붙이자면, 덕담이 과한 대목이 내 눈에도 들어오지만 고희기념용이라는 ‘장르적 성격’을 독자들이 감안하여 읽어줌으로써 필자들께 누累가 미치지 않기 바란다.)

간행위원들 이외에 창비 동료들에 입은 은혜도 일일이 거명하자면 한이 없다. 다만 한때 창비사의 대표를 맡았고 지금도 계간 『창작과비평』의 발행인인 외우(畏友) 김윤수 선생과 어려운 회사의 살림을 맡아 훌륭히 꾸려가고 있는 고세현 사장에게 특별한 고마움을 표하며, 회화록 편집의 실무작업에서는 유용민, 염종선, 안병률 제형을 비롯한 인문사회출판팀 여러 분이 엄청나게 고생했음을 밝힌다. 끝으로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의 오랜 고독과 망극한 은혜를 되새기면서, 40년 넘게 시어머니를 모신 아내의 공덕도 기억하고자 한다.

이래저래 고마움 가득이다.

2007년 10월 백낙청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