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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록] 3권 해설

하늘은 높으시나 나초 들으시는지라

최원식
 

1. 신언서판

청사(晴蓑)선생을 뵌 지 벌써 30년이 넘었다. 창비 복간 때 편집위원으로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청사께 본격적으로 일을 배운 지도 어느덧 20년이 가까워온다. 세월이 적지 않다보니 한결같지 아니할 적도 없지 않았지만 또 어쩌다 특히 큰일 당해 뵈오면 옥했던 마음이 봄눈 녹듯 사라지곤 한다. 연전 어머니 상사시 청사가 조문 오셨을 때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더워졌고, 얼마전 청사 자당 빈소를 찾았을 때 초췌하지만 늠연(凜然)한 모습으로 시립한 모습을 뵙고 어느결에 또 손이 따듯해졌다.

복 중에 으뜸이 인복(人福)이거니와 나만큼 인복을 누리는 자도 드물 것이다. 기라성 같은 선배들의 권애(眷愛)를 입었지만, 특히 청사의 은혜는 깊다. 분수를 모르는 채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는 나를 알게모르게 다듬어 이만큼의 쓰임새에 충당하게 한 것도 청사인데, 그만큼 청사께 감복하는 바 크기 때문이다.

청사는 잘난 분이다. 신언서판, 인금을 매길 때 기본으로 삼는 전통시대의 요목들 즉 체크 리스트(check list)인데, 요새라고 꼭 버릴 것은 아니다. 신(身)은 몸이다. 사람을 평가할 때 먼저 그 몸을 봤다는 것인데, 재미있다. 전통사상을 무슨 정신주의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천만의 말씀이다. 단적으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서도 그 첫단계 ‘수신’이 ‘몸을 닦는 것’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정신과 육체를 칼같이 분리하는 서구형이상학과 달리 둘이되 하나로 파악하는 몸철학이었던 것이다. 몸 밖에서 마음을 찾는 것이 아니니 마음의 화육(化肉)인 몸을 닦는 것이 곧 마음밭을 가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마음밭이 받쳐주지 않는 요즘의 경박한 외모주의와는 물론 차별되지만, 이목구비(耳目口鼻)를 비롯해 풍채를 중시했다. 이 점에서 청사의 풍채는 어느 자리에서도 돋보인다. 관옥(冠玉) 같은 얼굴에 몸피도 알맞고 키가 후리후리해서 단연 군계일학(群鷄一鶴)이다. 둘째로 언(言) 즉 말의 조리다. 알맹이 없이 겉만 번지르한 청산유수(靑山流水)는 군자가 꺼리는 바인데, 그렇다고 선비가 숭상하는 눌(訥)이 졸가리없는 횡설수설은 결코 아니다. 조동일(趙東一) 김학준(金學俊) 김흥규(金興圭), 이 세 분은 내가 아는 한 이 방면 최고의 프로다. 말이 곧 문장이 되는 그 언변에는 정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그런데 문어체 말이 지니는 작위성이 때로는 억색하기도 한데, 문어를 바탕으로 하되 그를 구어로 녹여내 듣는 이의 마음을 빼앗는 데는 청사를 따를 이가 많지 않을 것이다. 다만 주장의 일이관지(一以貫之)가 도드라져, 자주 듣는 자들에게는 질리는 면이 없지 않지만 청사는 최고의 고수다. 얼마전 내가 잠깐 외국에 나가있을 때 청사 큰자제 결혼식이 있었다. 내자와 딸아이가 거기 다녀와서 어쩌면 가족인사를 그렇게 잘하시냐고 칭송이 자자하다. 명스피치를 듣지 못한 게 아쉽기 짝이 없는데 그래도 위안이 되는 건 청사가 소싯적부터 그랬던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다. 내가 청사의 말씀을 먼 발치에서 처음 접했던 게 대학 2학년 때(1969)다. 문리대 소극장에서 열린 문학강연회에서 청사가 ‘시민문학론’을 주제로 발제했다. 당시 내가 그쪽에 무지한 탓도 있겠지만 청사의 말솜씨는 썩 인상적이지 않았다고 기억된다. 실천 속에 닦인 사유의 훈련 속에서 일취월장하여 이제 청사의 말솜씨는 가히 귀신의 경지에 들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셋째 서(書) 즉 필체다. 청사의 필체는 졸(拙)에 가깝지만 ‘서’가 꼭 필체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에 바탕한 내공의 드러남으로서 ‘서’를 평가한바, 지하형님처럼 필체와 문장, 양자가 함께 가면 더할 나위 없거니와, 하나만 택한다면 전자보다는 후자가 단연 웃길이다. 문장으로 논할진대 청사는 일류의 산문가다. 서양학문에 무지한 자가 감히 용훼할 바가 아니지만 청사의 산문은 양학(洋學)을 ‘지금 이곳’의 현실주의에 즉해 탈구축·재구축한 우리 문장의 신경지라고 나는 믿는다. 아마도 후세에 당송팔가(唐宋八家)에 준하는 조한팔가(朝韓八家)를 뽑는다면 청사를 제외하기 어려울 것이다. 넷째 판(判) 즉 판단이다. 청사는 우리 시대의 지적 거인이다. 청사를 그리 지목하게 만드는 최고의 덕목은 무엇보다 그의 탁월한 판단력이다. 문학평론가로서 청사는 정말 작품을 귀신같이 잘본다. 평론가의 자질은 화려한 담론이 아니라 구체적 작품에 대한 판단에서 결판나는 법이니, 좋은 작품을 알아주는 안목이야말로 종요롭다. 아는 사람은 아는 일이지만 청사는 음식맛에 관해 매우 날카롭고 섬세한데, 작품맛을 보는 데도 사실은 까다롭다. 청사에 대한 나의 존경은 작품을 알아보는 훈련된 직관에 대한 신뢰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런데 청사의 문학적 판단은 정치적 판단과 불가분리로 맺어진다. 여기서 정치란 물론 좁은 의미가 아니다. 우리 앞에 닥쳐온 크고 작은 사태에 직면하여 그 고갱이를 드러내 명쾌한 대응책을 짚어내는 청사의 지혜로운 판단들에 나는 얼마나 빚지고 있는가? 우전(雨田)선생은 생전에 “원식이가 좋은 나라에 태어났으면 훌륭한 학자가 됐을 텐데…”하고 추어주셨지만 이 말씀은 청사에게 꼭 맞을 것이다. 아마 청사가 그냥 미국에 있었다면 세계적 학자가 되어 천하를 종횡했을 터인데, 할일 많은 나라에 돌아와 대소 수십전을 치르면서 몸소 터득한 최고의 정치적 판단력으로 그는 복무의 댓가로 우리 시대의 현자가 되었다. 새옹지마(塞翁之馬)다. 무엇보다 내가 진심으로 경탄하는 바는 청사의 실무감각이다. 보통 지식인들은 실무에 약한 것을 은근히 자랑삼는 경향이 없지 않은데 나 역시 그랬다. 실무에도 강한 게 진짜 선비다. 허생을 보라. 한갓 책상물림으로 알았더니 한번 세상에 나서자 천하의 부를 거머쥐지 않았던가? 우리가 흔히 아는 선비, 생활에 무능한 샌님은 하강기의 반쪽 선비에 지나지 않는다. 군자불기(君子不器). 이를 요즘 말로 바꾸면 ‘진짜 선비는 멀티플레이어(multi-player)다’쯤 될 것이다. 선비가 글을 읽는 것은 세상을 경륜하기 위해서니. 실무에 약해서는 일을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청사의 실무감각은 바로 일 중심에서 오는 실천이성의 발로다. 청사는 몸으로 가끔은 말씀으로 둔마를 일깨운다. 언젠가 무슨 얘기 끝에 지나가는 듯이 “지도자는 힘들다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이 말이 내게 보석처럼 박혀 내 삶의 지침이 되었다. 고통치레는 생색내기와 붙어 있기 마련이라 주변에서 이런 사람 보면 은근히 낮춰 보게 된다. 청사가 몸으로 보여준 또하나의 비전(秘傳)은 ‘지도자는 희망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청사라고 왜 비관이 없겠냐마는 그럼에도 항상 의연한 모습을 짓는 데는 매양 흉내내려 하지만 족탈불급(足脫不及)이다. 청사는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컨대 자강불식(自彊不息)의 군자가 아닐런가.
 

2. 극기복례

청사가 올해 고희를 맞으셨다. 그를 기념하여 후학들이 청사의 말씀들을 결집한 회화록을 준비했다. 내가 해설을 맡은 것은 3권인데, 『창비』의 생태좌담(1990)에서 『히효구우깐(批評空間)』의 문학좌담(1998)에 이르기까지, 1990년대의 좌담 대담 인터뷰 등 총 12편을 모았다. 돌이켜보면 1990년대는 오늘날 우리가 겪는 어떤 혼란이 슬그머니 얼굴을 내민, 어쩌면 매우 어정쩡한 시대라고 할 수도 있다. 6월항쟁(1987)이 노태우정권의 출현으로 귀결된 당혹감 속에 치러진 88올림픽, 90년대를 준비한 이 기이한 연쇄는 민주세력의 독자적 정권교체를 제약하는 분단체제의 실존을 실감케 하였다. 노태우정권 자체가 기이하다면 기이하다. 군부독재의 계승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해체의 결정적 단계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분단체제의 동요를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양면성은 결국 문민정부(1993)의 탄생과 국민의정부(1998) 출범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우리 정치사의 분수령을 이룬 이 두 정부의 출현도 군부세력과의 일정한 타협 위에 성취되었다는 점을 잊을 수 없다. 한국사가 자기를 실현해가는 이 갈지자 행보 속에서 민주세력은 일종의 아포리아에 직면하게 되었다. 영웅적 승리와 비극적 패배로 요약되는 한 시대가 거(去)하고, 지루한 성공으로 가는, 복잡계에 즉하면서도 투철한 비전을 모색하고 그 비상한 실천을 탐색하는 회색의 시대가 내(來)했던 것이다. 새 시대의 도래에 책임을 나누면서도 비판적 자세를 포기하지 않는 이중성을 어떻게 견지할 것인가? 넓어진 합법적 공간을 활용하는 개혁의 축적 속에서도 어떻게 그에 매몰되지 않고 변혁의 계기를 놓치지 않는가? 시민운동의 화려한 대두 속에 전통적 민중운동을 어떻게 혁신할 것인가? 새로운 국면에 즉응한 의제들을 어떻게 개발하여 여하히 재배치할까? “하늘은 높으시나 나초 들으시는지라.”(『인현왕후전』) 이 근사한 말씀처럼 청사는 ‘결연하게 싸우는 일과 좋게 활용하는 일’을 아울러야 할 새 시대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그에 걸맞은 비전과 실천방안을 누구보다 앞장서서 개척했으니, 분단체제론의 정비와 민족문학론의 쇄신은 이 과정에서 숙성해 갔던 것이다.

제3권에 실린 회화들은 대화 속에서 이루어진 사상적 행보의 자욱들을 생생히 보여주는데,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흥미로운 것은 대립되는 주장들을 조정하는, 뭐랄까, 유연하고도 통합적인 사유방식, 본연의 변증법이다. 가령 “거대하면 좋다든가 거대하면 나쁘다든가, 이럴 것이 아니라 중앙집권할 것은 중앙집권하고 분산할 것은 분산하면서 나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좌담 23, 1990) 전통적 혁명론과 새로운 생태론, 또는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의 대립 사이에서 생활하는 상식으로 양변(兩邊)을 가로질러 문득 통합하는 이런 곳에 청사 특유의 사유가 빛난다. 페미니즘에 대한 논란도 청사의 눈길을 거치면 쟁점이 또렷이 부각된다. “남녀간의 차이를 인정하는 문제하고, 여성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는 문제 이 둘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대담 32, 1996) 차이와 차별의 구분을 명쾌히함으로써 여성해방론을 제대로 대접하는 혜안이 놀랍다. 분별할 것은 철저히 분별하면서 그를 통해 오히려 통합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그의 균형적 사고는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유론(有論)과 무론(無論), 이 두 가장자리 한편으로 쏠리기 일쑤인 세론을 넘어설 수 있는 힘은 최악의 부정적인 것 속에서도 긍정의 씨앗을 찾아낼 줄 알고 최고의 긍정적인 것 속에서도 부정의 한계를 보아내야 하는 비평기계가 청사의 몸 속에 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김영삼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을 정권재창출 카드로 활용하려 한다는 세간의 의혹에 대해 청사는 말한다. “세계 어느 정권이든 큰 선거를 앞두고 극적인 외교협상이라든가 우리 경우에는 남북간의 문제를 정략적인 계산의 대상으로 안 삼는 예는 없다고 봅니다. 그건 정치세계에서 당연히 인정하는 집권층의 프리미엄 같은 거지요. 문제는 그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고 민족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활용되느냐, 아니면 반대로 되느냐 하는 것”(좌담 33, 1997). 의표를 찌르는 쾌도난마(快刀亂麻)의 정론이다. 이런 남다른 안목을 가능하게 하는 청사 사유의 원초적 자질은 남 탓하지 않고 자기 안으로 문제를 돌려볼 줄 아는 반구저기(反求諸己)의 정신이다. 가령 식민지시대를 파악하는 대목에서 이런 면모는 약여하다. “한국인의 불행에 대해서 일본인이 책임이 있듯이 일본사회가 건전하게 발전하지 못한 데에는 우리 한국 사람들이 너무 약했다는 책임이 없지 않다고 봅니다.”(대담 27, 1994) 반성하는 양심적 일본 지식인을 만나서 막무가내로 일본의 책임을 질타하는 한국 지식인들의 통상적 방식이 아니라 일본의 책임은 책임대로 물으면서 우리 안의 문제에 대해서도 자기비판하는 이런 식의 제기가 훨씬 성숙한 한일 지식인 사이의 대화를 끌어낼 수 있다는 실용의 측면에서도 그렇지만, 내탓을 점검하는 것이 의젓한 것이다. 문명사회 또는 문명인의 가장 중요한 징표의 하나가 자기비판력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청사 사유방식의 독특함은 말이 행동을 돌아보고 행동이 말을 돌아보는, 즉 담론의 실천가능성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경세가의 곡진한 자세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그 바탕에 청사 득의의 공부법이 존재한다. “저는 어린 나이에 외국의 명문대학으로 유학 갔기 때문에 오히려 공부는 뜨내기공부로, 그러나 제 식으로 해왔습니다. 이건 겸손이 아니고 일종의 긍지에 가깝습니다만, 학문에 관한 한 다른 건 몰라도 뜨내기로 살아온 자의 강점 하나만은 가졌다고 자부하는 터입니다.”(좌담 25, 1992) 공부법에 의양지학(依樣之學)과 자득지학(自得之學)이 있다고 이른다. 스승의 발걸음을 충실히 밟아나가는 것이 전자라면 스승 없이 아니 온 중생을 스승으로 삼아 스스로 터득해가는 것이 후자다. 청사의 ‘뜨내기공부’는 후자일 터인데, 양학의 정통에서 자라났으면서도 그에 매몰되지 않고 자기를 세워 나가는 아웃복싱이 이렇게 가능했던 것이다. 한창 포스트모더니즘이 맹위를 떨치던 시절, 참으로 종작없는 씨나락이 횡행하던 때, 청사는 그 의의를 인정하는 데 인색하지 않으면서도 포스트모더니즘 귀신을 한마디로 매조지했다. “그것이 자본주의적 근대에서 벗어난 새로운 시대를 설정하는 한에 있어서는 전혀 근거없는 낭설이고 혹세무민하는 이론입니다.”(좌담 24, 1991) 이런 발언으로 우리가 직면한 어떤 혼란이 마치 햇빛에 쏘인 드라큘라처럼 사라지는 경험이 지금도 새롭다. 청사의 ‘뜨내기공부’, 그 공덕은 내게 지대했던 것이다. “의심이 믿음으로 끝나기를 요구하는 것이 전통적인 종교의 입장이라고 한다면 믿음에서 출발해서 의심으로 가는 게 오히려 정당한 공부법이라고 봐요. 다만 이때 의심은 노력을 포기하는 불신이 아니라 더욱 탐구에 정진하는 자세라야지요.”(회화 [백낙청 편집인에게 묻는다], 1998) 대단한 공부의 심법(心法)이다. 청사는 천상, 학인(學人)이다. 요즘 청사는 자기가 좀 강해지는 느낌이다. 평생을 한결같이 학인의 길을 온몸으로 걸음하신 선생이시여, 모쪼록 극기복례(克己復禮)하소서!

崔元植|인하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