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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록]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지식인’, 백낙청

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 『창작과비평』 편집인)

유정아(방송인)

2010년 6월 28일~7월 2일 세교연구소

*이 인터뷰는 KBS 제1라디오 「명사 초대석」에서 2010년 6월 28일~7월 2일 5회에 걸쳐 방송된 것이다.
 

1회(6월 28일)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지식인’, 백낙청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지식인은 누구일까요? 한 신문에서 각계 지식인 7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요, 74명 가운데 24명이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를 꼽았다고 합니다.1) 백낙청 교수는 학문 전공으로 보자면 서울대 교수를 역임한 영문학자이고, 문학활동으로 보자면 평론가로서 계간지 『창작과비평』을 창간해 44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끌고 있는데요, 최근에는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대표직을 맡기도 했었습니다. 민족문학론과 분단체제론을 정립한 이론가이자 실천가인 백낙청 교수. 비판적 지식인의 대표인 리영희 선생은 백낙청 교수에 대해, 우리 한국문학에 혁신을 가져온 청년이었다, 그리고 사회적 정의감이 부족할 때 대한민국의 빛이었다고 회고합니다.

안녕하세요? 「명사 초대석」 유정아입니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지성으로 꼽히고, 앞서 소개해드린 대로 영문학자이자 『창작과비평』 편집인으로 분단체제와 통일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를 해온데다 2005년부터 2008년까지 6·15공동선언실천민족공동위원회 남측 대표로 직접 통일현장에 참여한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가 이번주 저희 「명사 초대석」 초대손님입니다. 백낙청 교수는 여전히 활발한 활동으로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는데요, 백낙청 교수와 함께 이번 한주 동안 굴곡진 현대사와 인생에 대해 되짚어보고, 고조되고 있는 한반도의 위기와 우리 사회의 문제점은 무엇인지 진단해보는 시간 갖겠습니다.

유정아 백낙청 교수님, 저희 세교연구소에서 만나뵙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백낙청 예, 안녕하세요?

유정아 세교연구소의 고문으로 계신데요. ‘세교’라는 게 처음에 저는 세상을 가르친다는 그런 뜻이 담겨 있지 않나 했는데, 찾아보니까 ‘잔다리’라고 하네요.

백낙청 맞습니다.

유정아 어떤 곳인가요, 잔다리 연구소는?

백낙청 이게 지금 서교동에 위치해 있는데, 서교동의 옛날 이름이 세교동(細橋洞)입니다. 또 ‘잔다리’라고도 했고요. 처음에 우리는 사실 평범하게 ‘서교포럼’이라고 지을까 했는데 그런 단체가 이미 있더라고요. 그래서 ‘세교연구소’라고 지었고요. 세교연구소는 창비사에서 주동해서 설립한 연구소인데, 별도 법인입니다. 그리고 여기 참여하고 있는 분들은 『창비』 편집진뿐 아니라 따로 세교에만 들어와 계신 분들…….

유정아 학자들도 계시고요.

백낙청 학자, 문인, 시민운동가, 이렇게 좀 다양한 구성을 갖고 있다는 게 연구소로서는 특징이고 독특한 면이죠. 아직 연구소라고 할 만큼 본격적인 연구프로젝트는 많이 못하고 있습니다만, 주로 한달에 한번 모여가지고 같이 공부하고 토론하는 ‘세교포럼’ 작업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유정아 2006년에 만들어져서 5년째 활동하고 계신 건데요.

백낙청 2006년이 『창작과비평』 40주년 되는 해였어요. 그래서 그해 몇가지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는데, 하나가 세교연구소 설립이고 또다른 하나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창비주간논평』이라고, 우리가 내는 계간지나 단행본 외에 온라인으로 매주 주로 시사문제에 대한 논평을 내보내고 있습니다.

유정아 네. 세교라는 게 서교동의 옛 이름이기도 하지만 세상과 인간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 가느다란 다리가 되겠다는, 요즘 화두가 되기도 하는 소통의 본모습이 아닐까 생각이 드는데, 제가 너무 넘겨짚은 건가요?(웃음)

백낙청 아니에요. 해석을 참 잘해주셨군요.

유정아 고맙습니다. 지금 맡고 계신 직함을 제가 봤는데요, 아마 청취자 여러분께서도 들으면서 놀라실 것 같습니다. 세교연구소 고문 외에도 서울대 명예교수이시고요, 『창작과비평』의 편집인,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명예대표, 한반도평화포럼 대표, 그리고 김대중평화센터 이사, 그외에 시민방송 RTV 명예이사장, 백석문학기념사업운영위원회 위원장, 또 시민단체 ‘희망과대안’과 최근 ‘4대강사업 중단을 위한 각계 연석회의’에도 참석하고 계신데요. 저는 그냥 이렇게 말만 해도 숨이 찬데,(웃음) 이 직함들을 다 어떻게 소화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백낙청 예, 지금 열거하신 직함 중에서 ‘명예’ 자가 붙은 거, 그건 실제로 일하는 게 아니라 명예만 누리는 자립니다. 그래서 가령 6·15남측위원회 명예대표인데, 제가 상임대표하는 동안에는 몹시 바빴고 참 부담스러운 자리였지만 지금은 무슨 기념식 할 때 가서 격려사나 한번 해주면 되는 그런 자리고요. 명예교수도 실제로 가르치는 자리가 아니고, 시민방송 명예이사장도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그 ‘명예’ 빼고 그 대신에 열거 안하신 것도(웃음) 몇개 넣으면 숫자가 비슷하게 될 텐데, 뭐 이렇게 여기저기 많이 걸려 있는 게 자랑은 못 되지요.

유정아 그러면 지금 주력하고 계신 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시는 일은 어떤 건가요?
백낙청 전체적으로 저 개인으로는 문학평론가로서 또 영문학 연구자로서 책 보고 글 쓰는 일에, 충분히는 못합니다만 그래도 그쪽에 시간을 제일 많이 들이는 편이고요. 그다음에 『창작과비평』 편집인을 하고 있습니다. 거기는 계속 제가 정성을 쏟고 있지요.
유정아 사실 많은 직함과 일들이 있으셔서 책 보고 글 쓰는 일에 매진하신다는 게 조금 의외인데, 그 일들은 거의 못하시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거든요. 하루 중 어느 때 그 일들을 하세요?

백낙청 아, 틈틈이 합니다. 그래서 늘 아쉽고 그런 대신에, 주말부부가 더 사이가 좋다는 말도 있잖아요? 마찬가지로 저는 제가 원하는 것만큼 거기 몰두를 못하기 때문에 그런 시간이 생길 때마다 참 즐겁고요. 그런 작업에 대한 애정이, 뭐 처음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유정아 주말부부 비유를 하시니까 딱 들어오네요.(웃음) 그만큼 문학에 대해서 더 애틋하실 것 같은데, 사실 영문학을 전공하고 돌아와 강단에 선 문학자이시잖아요? 문학자이면서 끊임없이 사회참여적인 일들을 하게 된 어떤 계기가 있으신지요?

백낙청 글쎄요. 제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게 60년대 중반인데, 그때 좀 소신을 갖고,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쓰다보면 당국하고 부딪치기도 하고, 그런 계기들이 있었고. 또 본격적으로는 제가 1966년에 『창작과비평』을 창간해서 하다보니까 주위의 그런 분들도 만나게 되고 이런저런 일에 많이 관여하게 됐죠.

유정아 그리고 이제 주말부부 말씀하셨는데, 물론 가끔씩 만나는 그런 애틋함도 좋지만 자주 보고 매일 봐서 지지고 볶고 싸우면서 더 깊은 관계가 되는(웃음) 문학과의 그런 관계를……. 이런 좋은 문학자의 소양을 가진 인간이 다른 일에 소모해서 혹시 다 못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 아쉬운 소리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백낙청 어, 주말부부 그 비유를 했습니다마는 뭐 주말에만 하는 건 아니고요. 평소에, 평일에 만나서 싸우고(웃음) 지지고 볶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충분히 못했다는 데 대해서는 늘 저 자신이 아쉬움을 가지고 있지요. 그렇긴 한데, 다른 일 한 것을 그다지 후회하진 않아요. 왜냐하면 그 일 자체가 보람이 있는 것이기도 했고, 그런 일을 함으로써 제가 문학 할 시간을 많이 뺐기긴 했지마는 그 대신에 문학을 보는 시야랄까, 이런 게 넓어지고 문제의식도 더 좀 나아지고, 그런 면이 있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꼭 후회하는 것은 아닙니다.

유정아 제가 너무 집요하게 여쭌 것 같은데요.(웃음) 어떤 새로운 일, 내 앞에 다가오는 일들을 맡는 기준, 그리고 하지 않는 일이 더 많으실 텐데 그때 그 맡거나 맡지 않는 기준 같은 게 나중에 생각해보니 무엇이었더라 하는 게 있으신지, 아니면 처음부터 그런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시는지요?

백낙청 기준에 대해서는, 글쎄요. 우리 집사람은 그렇게 말해요. 두 가지 기준이 충족되면 하는 것 같다고. 하나는 골치가 아파야 하고, 둘째로 돈이 안 생겨야 한다.(웃음)

유정아 그럴 때 하신다는 거죠, 그러니까?(웃음)

백낙청 예, 그럴 때만 한다 이거죠.(웃음)

유정아 그렇게 아무튼 돈 안되고 골치 아픈 일들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오셨음에도(웃음) 제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한국 사회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친 지식인으로 꼽히신 건데요,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백낙청 아까 말씀하신 그 신문 써베이라는 건, 벌써 그게 몇년 됐나요? 하여간 여러해 전의 일입니다. 그리고 특정 신문이 자기들이 임의로 고른 학자들한테 설문조사를 해가지고 내놓은 결과니까, 요즘 흔히 말하는 대로 얼마나 신뢰성이 있는지도(웃음) 의문이고. 당시로서는 신뢰성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미 유효기간이 지난 판정 아니겠어요?
유정아 그렇다 할지라도 그때 표를 던진 분들의 여러가지 지혜를 생각하셔서(웃음) 한 말씀 해주신다면요?

백낙청 글쎄요. 우리 사회에 보면 한편으로는 관존민비 사상이 있어서 벼슬을 하고 있거나 또는 한번 했던 사람은 자동적으로 높이 대접받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또다른 한편에는 묘한 결벽증 같은 것이 있어서 그런 분들의 지식인으로서나 학자로서의 발언은 그다지 신뢰를 안하는 경향이 있어요. 사실은 신뢰할 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춘 분인 경우에도 그런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서울대학 교수라는, 그것도 일종의 벼슬이라면 벼슬이니까, 그런 공직을 가졌던 반면에, 다른 이런저런 학자로서나 문학자로서 외도에 해당하는 일은 많이 했지만 아주 이 세계를 버리고 관계에 들어가거나 정계에 들어가거나 그런 적은 없거든요. 그래서 그런 게 사람들의 신용을 얻는 데 조금 도움이 됐는지 모르겠어요.

유정아 학자나 지식인으로서 가지 않아야 할 길을 가지 않은 데 어쩌면 한 표를 던진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다고 생각하신 거군요.

백낙청 저는 학자나 지식인이 관계나 정계에 진출하는 것을 꼭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일이고요. 우리 전통에 비추어보면 유학자란 분들은 다 공부하는 분, 또 시 쓰고 하는 문인이죠. 그런 분들이 관직에 나갔다 물러났다 자유롭게 한 거고 그것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현대 우리 사회에서는 그런 것이 지식인으로서의, 독립된 지식인으로서의 영향력을 좀 감퇴시키는 경향이 있는 건 사실이죠.

유정아 네. 앞서도 잠깐 말씀하셨지만 2010년 6월은 6·15공동선언 10주년이기도 한데, 양측이 따로 행사들을 열고 백낙청 선생님이 앞서서 연설도 하셨잖아요? 어떤 내용의 이야기였습니까?

백낙청 이번 행사는 말씀하신 대로 남측은 단독으로 치렀는데, 대회 기념사는 현 상임대표께서 하셨고 저는 명예대표라서 격려사를 했습니다. 그 격려사의 요지는, 지금 6·15공동선언이 얼핏 보면 거의 효력을 상실한 것처럼 보이고 소위 6·15시대라는 게 위기에 처한 듯 보이지만, 사실 6·15공동선언이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이 워낙 크고 우리에게 깊이 체질화되어 있기 때문에 쉽게 폐기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6·15시대는 계속됩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죠. 격려사에 합당한 얘기를(웃음) 했다고 생각합니다.

유정아 1972년에 7·4공동성명이 있었고, 91년에 남북기본합의서가 있었고, 2000년에 6·15공동선언이 있었고, 그다음에 10·4선언이 2007년에 있었는데, 그 가운데 6·15공동선언을 가장 높이 평가하시는 이유는 어떤 건가요?

백낙청 10·4선언은 6·15공동선언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흔히들 그건 6·15의 실천강령에 해당한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10·4선언을 직접 만들고 그걸 지지하는 분들도 6·15가 더 기반이 된다는 데 대해서는 전혀 불만이 없으시고요.
그전의 두 성명, 그러니까 7·4공동성명과 남북기본합의서 중에서 7·4공동성명은 남북간 당국자의 최초의 합의문이라는 데 의미가 있죠. 그리고 통일의 3원칙인 자주·평화·민족대단결, 이것을 선포했다는 의미는 있는데, 그후에 금방 대결이 다시 첨예해졌고 그래서 별로 효과를 못 봤죠.

유정아 그렇군요.

백낙청 7·4공동성명은 그런 정도고요. 남북기본합의서는, 사실 그 문건 자체는 굉장히 훌륭한 문건입니다. 오히려 6·15공동선언보다 더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여러가지 교류협력에 관한 조항들을 마련해놨는데, 6·15공동선언에 비해서 몇가지 문제점이나 한계가 있다면요. 하나는, 6·15공동선언은 남북의 정상이 직접 만나서 대화하고 절충하고 또 둘이 서명을 한 그런 문건이죠. 어느 나라의 경우에도 그런 것은 중요하지만, 아시다시피 북은 이른바 유일체제 아닙니까? 그래서 거기서는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서명한 문건하고 안한 문건하고 아주 천양지차예요. 그래서 정상들이 직접 했다는 의미가 하나 있고요.
또 하나는, 그동안 남북간 여러 접촉을 하면서 늘 진전이 잘 안되는 이유가 북에서 말하는 소위 근본문제, 통일문제라든가 군사문제, 이런 것에 대한 합의가 없었던 거예요. 그런데 우리 남쪽은 원래 입장이, 그건 어려운 문제니까 뒤로 물려놓고 쉬운 일부터 해나가자, 교류협력하고 경제협력하자는 거였고요. 북에서는 아니다, 근본문제를 젖혀놓고 지엽적인 문제를 합의해봤자 그거는 안된다, 이래서 일이 막혀 있었던 겁니다.

유정아 예.

백낙청 그런데 남북기본합의서의 경우에 사실은 근본문제를 회피하면서 그래도 기술적인 협력 문제는 많이 합의를 했습니다. 그때는 북이 사회주의권이 무너지면서 굉장히 불리한 입장에 있었어요. 그래서 쫓기면서 합의한 느낌이 있습니다. 그러니 하고 나서 또 딴소리를 했죠. 그런데 6·15공동선언에서는 아주 애매모호한 형태로 절충을 했거든요.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원래 북측은 연방제인데 북에서 양보해서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고 표현을 고쳤어요—사이에 공통점이 있으니까 앞으로 그 방향으로 통일을 지향해나가기로 했다.’ 그러니까 6·15공동선언의 이 제2항은 사실 너무나 모호한 표현이지만 그런 식으로 처리가 되니까 그다음부터는 교류협력이 활발해진 겁니다. 그런 점에서 기본합의서보다 6·15공동선언이 훨씬 상급의 문서인 동시에 실제 효력에 있어서 기본합의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6·15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달라졌죠.

유정아 예. 그런데 이 6·15남북공동선언이 나온 지 10주년이 되는 올해에 여러 사람들이 한반도가 위기라고 보고 있는 거잖아요? 일단은 선생님께서 이것을 위기로 보고 계신지 여쭤야겠고요. 그다음엔 그 위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모두 다른 시각에서의 위기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 부분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백낙청 지금 위기인 건 틀림없죠. 개성공단을 빼고는 남북협력사업이 거의 다 중단 상태에 있고요. 천안함사건을 계기로 우리 남측 정부가 먼저 모든 교류를 중단하겠다고 선언했고, 아직 실시가 안됐습니다만 휴전선에서 확성기를 통한 심리전을 재개하겠다고 하는데, 나는 그 심리전을 실제로 재개하면 예측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 점은 우려를 합니다만 우리 정부가 거기까지는 가질 않았고, 또 제가 알기로는 미국 측에서도 우리 정부더러 그건 안하는 게 좋겠다고 계속 조언을 하고 있는 걸로 압니다. 그래서 이 고비를 넘기면요, 제가 6·15 기념식에서 말했듯이 6·15시대가 우리가 아는 것 이상으로 이미 굉장히 체질화되어 있어서 이걸 쉽게 옛날로 완전히 되돌리진 못할 것이고, 언젠가는 교류협력의 과정이 다시 출발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유정아 평생 분단체제 연구에 집중해오시고 분단과 통일에 대한 공부를 해오셨는데, 그리시는 통일의 모습이 어떤 건가요?

백낙청 지금도 통일 이야기를 계속 합니다만, 동시에 제가 강조하는 건 우리가 통일의 개념을 바꿔야 한다는 겁니다.

유정아 네.

백낙청 8·15 직후 분단됐을 때, 또는 우리가 통일이 안돼가지고 전쟁하고 그럴 때 어떻게 빨리 합쳐서 단일국가로 살 수 있을까 하던 꿈은 일단 좀 유보해놓고, 지금은 그런 식의 단일형 국민국가를 만들어내는 일보다 점진적인 통일과정, 이 통일 프로세스를 꾸준히 진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거고요. 그리고 현재 상태에서 조금 더 나아가서 남북이 아주 느슨한 형태로나마 연합기구라도 만들 수 있으면 그것이 1단계 통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그리고 느슨한 연합을 지향하는 통일작업을 진행하자는 것이죠. 그런데 갑자기 통일하자고 하는 이야기는 첫째, 아무런 현실성이 없고요, 또 하나는 오히려 통일에 장애가 됩니다. 그렇게 나가면, ‘그냥 그렇게 통일되면 나는 어떻게 되나. 나는 세금만 더 내는 거 아닌가.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요만한 안정된 생활마저 위협받는 게 아닌가’ 이런 걱정을 우리 남측 국민은 하게 될 거고요. 북측은 더 말할 것도 없죠, 체제 자체가 무너지는 상황이 되리라는 염려가 생기기 때문에. 그런 식의 통일 주장은 하면 할수록 어떤 의미에서는 분단체제를 굳혀주는 효과가 난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서로 교류하고 점점 가까워지다가, 어느정도 가까워지면 그때는 연합기구를 만들고, 그다음 일은 또 그때 하면 될 거고, 이렇게 하자는 거죠.

유정아 통일에 대한 아주 구체적인 이야기를 오랜만에 들어봅니다. 오늘 「명사 초대석」 백낙청 교수님과의 첫번째 시간이었는데 아쉽게도 오늘은 시간이 다 돼서요. 세교연구소에서의 첫날 인터뷰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백낙청 네, 고맙습니다.
 

2회(6월 29일) 6·15남북공동선언 10주년

분단과 통일 문제 해결에서 우리 사회에 가장 크게 기여한 정치가는 단연 고 김대중 전 대통령입니다. 김 전 대통령 못지않게 학계에서 분단현실과 통일정책에 큰 영향을 미친 이는 누구일까요? 사회학자들은 영문학자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를 꼽는데요.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대표를 맡기도 했던 백낙청 교수의 분단체제론에 대해, 한반도 상황의 특수성과 실천의 구체성을 고려한 이론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명사 초대석」 유정아입니다.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백낙청 교수와의 대담 이어집니다. 오늘은 직접 참여했던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장으로서 한반도의 위기를 어떻게 보는지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합니다. 끊임없이 사회에 화두를 던지며 분단과 통일에 대한 담론을 이끌어왔지만 직접 정치 참여를 하지 않던 백낙청 교수가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장을 맡았을 때 의외라는 반응이 많았는데요. 5주년 축전을 준비하던 당시의 뒷얘기를 들어보고 남북관계가 경색된 현재의 해법은 무엇인지 말씀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유정아 안녕하세요, 선생님?

백낙청 예, 안녕하세요?

유정아 어제에 이어서 서교동에 있는 세교연구소에 나와 있습니다. 분단체제에 대한 관심, 처음 어떻게 가지시게 된 건가요? 선생님께서는 평안도가 고향이시고, 그렇죠?

백낙청 예, 고향은 평안도인데 저는 고향에 많이 살지 않았고요. 아버님은 평안도신데 일찍부터 서울에 와서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6·25 때 아버지께서 북으로 연행이 되셨는데, 그후에 생사를 모르게 됐죠. 글쎄요, 그런 개인사적인 게 아무래도 무의식적이라도 작용을 했겠지마는, 뭐 꼭 그런 점보다도 우리 세대는 다 전쟁을 겪어서 통일은 당연히 돼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요. 그다음에 제가 문학을 하면서, 문학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남쪽이라든가 북쪽의 국가의 문제보다는 민족 전체의 문학을 생각하게 되잖아요?

유정아 그렇죠.

백낙청 그래서 민족문학론이란 걸 펼치면서 그 문제를 더 연구하게 됐고요. 분단체제라는 용어를 쓰고 거기에 대해 글을 발표한 것은 한참 뒤의 일입니다. 사회과학도들이 사회구성체 논쟁도 하고 여러가지 논의를 하는데, 우리 문학 하는 사람들의 실감으로 볼 때 분단문제에 대한 인식이 어떤 면은 너무 이론에 치우치고 어떤 때는 그냥 민족주의적인 감정에 치우치는 것 같아서, 거기에 대해 문제제기를 시작하다보니까 이게 점점 말려들어가 분단체제에 관한 책을 그사이 한 네권 쓰게 됐습니다.

유정아 인문학자로서 분단에 대한 글을 이렇게 쓰신 분은 거의 안 계시죠?

백낙청 예, 그걸 좀 이론적으로 탐구했다고 할까 하는 분들은 인문학자 가운데는 많지 않습니다.

유정아 인문학도로서 그렇게 사회과학도들이 분단체제에 이론적으로 접근하는 것에는 어떻게 스며드셨어요? 어떤 점들을 첨가하셨나요?

백낙청 그런데 원래 사회과학하고 인문학은 본질적으로 갈라지면 안된다는 게 제 생각이거든요. 서양의 경우를 보더라도 위대한 사회과학자란 분들은 다 인문학적인 소양과 기반을 갖고 출발해서, 그렇기 때문에 훌륭한 사회과학 업적을 낼 수 있었는데요. 우리는 대학 들어갈 때부터 사회대학, 인문대학 갈라서 들어가고 또 풍부한 교양교육 같은 걸 못 받고 하니까, 인문학 하는 분들 가운데는 사회문제는 사회과학도들이나 다루는 것이라 생각하고 젖혀두는 분들이 있고, 또 사회과학도들은 인문학적인 바탕이 없이 사회문제를 다루다보니까 제대로 된 원만한 이론이 안 나오고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인문학도로 출발해서 사회과학, 사회문제에까지 관심을 갖고 또 그 작업을 하게 된 것은 저는 인문학을 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유정아 평안도가 고향이지만 태어나신 곳은 대구 외가였다고요.

백낙청 예.

유정아 6·25를 맞은 게 12살 무렵일 텐데, 6·25는 언제 어디서 맞으셨나요?

백낙청 서울에서 맞았죠. 저희 선친이 일제시대 지방관리를 했기 때문에 여기저기 좀 다니다가 일제 말기에 고향으로 갔는데, 그때 이른바 소개(疏開)한다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인제 우리 한국 땅도 미군의 폭격을 받을지 모르니까 시골로 피난을 보낸 거죠. 그때 저희 아버지는 안 가시고 어머니랑 모든 가족이 고향에 가 있다가 거기서 해방을 맞았습니다. 그러고는 그해 가을에 배를 타고 38선을 넘어와서 서울에 계신 아버지와 합류를 했지요. 그리고 거기서 중학교 2학년 때 6·25를 맞았어요.

유정아 음, 그러면 아버님은 50년에 전쟁이 나자마자 바로 납북되신 거네요.

백낙청 네, 그해 6월에 전쟁 나고 아마 7월에 연행이 되셨을 거예요. 그러다가 9월에 후퇴하면서 그때 북으로 데리고 간 모양인데, 그러고는 일절 생사를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 가실 때 저희 집 형님이 특별수행단의 일원으로 참여하시게 됐어요.

유정아 친형님께서요?

백낙청 우리 형님이 지금 인제대학교 이사장 하시고 백병원 원장도 하신 분인데, 그때 국정원에서 그 수행단원들의 재북가족 상황을 모두 알아봐줬습니다. 그래서 봤더니 우리 5촌 조카에 해당하는 친구가 둘이 남아 있고, 선친에 대해서는 돌아가신 건 확실한데 언제 어디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는 확인이 안된다고 그랬어요. 당시에 정부 당국이 북측하고도 상당히 원활하게 협조를 해서 알아봤을 텐데 그런 결과가 나온 걸로 미루어봐서 저는 납북되신 초기에, 전쟁의 혼란기에 일찍 돌아가신 게 아닌가, 이렇게 추측을 하고 있죠.

유정아 저는 보통 전쟁으로 인해서 슬픈 가족사를 가진 우리 윗세대 분들의 경우에 공산주의를 아주 혐오하게 되고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생각들을 가지시기가 참 쉽다고 봤어요. 그리고 전쟁을 직접 체험하지 않은 후세대로서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경험에서 나오는 슬픔이라고 생각을 했는데요. 백교수님께서는 이후의 여러가지 행보로 볼 때 제가 지금 말씀드린 것과 어떤 점이, 무엇이 달랐을까요?

백낙청 글쎄요, 뭐 효성이 부족해서 그랬을 수도 있고요.(웃음) 저 나름으로 죽 성장하고 공부하고 생각하면서, 그런 개인사적인 비극하고 민족의 문제는 좀 구별해서 생각해야 한다, 아니 구별해서 생각해야 한다기보다도 오히려 민족의 큰 문제의 맥락 속에서 나 개인의 슬픈 사연을 이해해야지, 그게 거꾸로 돼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유정아 그러시군요.

백낙청 사실 그렇잖아요? 우리 민족이 분열되어 싸우는 과정에서 좌익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전부 우익수구세력이 되고, 또 우익 쪽에서 피해 입은 사람들은 전부 극좌세력이 되고, 그렇다면 그거야말로 너무 슬픈 일 아니겠어요?

유정아 인간이 자신의 경험이라든가 테두리를 넘어설 수 있는 힘, 그런 건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백낙청 아, 저는 우리 인간에게 그런 능력이 많이 있다고 봅니다. 그런 사례를 나도 주변에서 많이 알고 있고요. 그런데 잘못된 교육이 우리가 그런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게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에요.

유정아 잘못된 교육이 그것은 당연하다는 식으로 어떤 자기합리화를 할 수 있게끔 만든다는 말씀인가요?

백낙청 그렇죠. 그런 식으로 갈등을 조장하고.

유정아 그런 개인사를 겪고 나서 북에 처음 들어가신 건 2005년이었죠?

백낙청 금강산을 빼면 그렇죠. 그러니까 해방 전에 제가 이북에 잠시 한 6개월 살았고 그후에 금강산을 다녀온 적이 있지만, 평양에 들어간 것은 2005년이 처음입니다.

유정아 그게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대표로서요.

백낙청 예, 남측위원회 대표로 갔는데, 6·15행사 전에 그 행사를 준비할 겸 6월 초순에 먼저 다녀왔고, 그다음에 중순에 가서 그 공동행사를 잘 치렀죠. 그때는 우리 민간 주최 행사도 잘했지만 당국 대표단들이 옵서버로 참여를 했고, 우리 측 당국 대표단에서 정동영 당시 통일부장관이 남측 특사로 가가지고 김정일 위원장 만나서 북의 비핵화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다, 이런 발언도 끌어내고 그래서 6자회담을 다시 활성화시키는 데도 기여를 했고요. 굉장히 의미있는 행사였다고 생각합니다.

유정아 그때 평양에 가서 처음 만나본, 그러니까 직접 당국끼리의 실무적인 접촉을 하면서 만난 평양의 인사들과는 이야기가 잘 통하고 앞으로 일들이 잘될 것 같다, 그런 예감을 받으셨습니까?

백낙청 그런데 그전에 제가 미리 가서 절충을 했다 그랬잖아요? 뭐 안되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다행히 마지막 순간에 잘 풀렸어요. 6·15공동행사를 하는 도중에도 몇번 부딪쳤는데, 그때도 그랬지만 그후에 그런 경험이 좀 쌓이면서 한편으론 야, 이거 참 어려운 일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또 이게 안될 것 같은데 그래도 되기는 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유정아 예.

백낙청 그러니 앞으로도 우리가 그런 걸 감안하고 일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이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닌데 그렇다고 아주 안되는 일은 아니라는 그런 신념을 갖고 하면 조금씩 진전은 있으리라고 봐요.

유정아 네. 그런데 한편 그 당시부터 이어져온 실질적인 남북의 협력이, 우리가 햇볕을 펼쳤지만 그들은 코트를 벗지 않았다는 비난들도 받고 있는 게 사실인 것 같아요. 현 상황에서 과거를 진단하건대 어떻게 보시는지요?

백낙청 햇볕정책이라는 말은 그 이솝우화 그대로 따뜻한 햇볕이 코트를 벗긴다는 정책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북에서는 그 표현에 많이 반발을 했어요.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께서 아마 그런 식으로 옷 벗기고 흡수통일하겠다는 건 아니다, 우린 그럴 의지도 없고 능력도 없다는 걸 설득해서 이게 진행이 됐는데, 그러니까 코트를 벗긴다는 표현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성과가 있다 없다 그럴 수 있겠습니다. 남과 북 사이가 그동안 꽝꽝 얼어붙어 있던 것이 6·15공동선언으로 인해서 많이 녹은 건 틀림없잖아요?

유정아 그렇죠.

백낙청 금강산 관광이 되고, 철도 연결이 되고, 개성공단이 생기고, 많은 사람이 왕래하고, 또 평양이나 북쪽에 우리 중소기업이 직접 투자를 하기도 하고요.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남측하고 교류를 하고 또 남측에서 지원을 함으로써 북측 대중들, 평범한 사람들의 남쪽에 대한 감정이 아주 좋아졌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햇볕이 작용해서 얼어 있던 것을 녹인 거죠.
그런데 그게 아니고 북의 체제를 아예 바꿔놓는 것이 코트 벗기는 것이고 무장해제해서 우리가 접수하는 게 그거라면, 그것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죠. 또, 그게 단기간에 일어나는 것이 우리에게 좋은 일인가 하는 것도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그런데 북의 체제 내부에서도 상당히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고 봐요. 그게 꼭 햇볕정책 때문이라기보다 근본적으로는 소련 사회주의, 동구권 사회주의 다 무너지고 또 중국이 개혁개방 하고 남한하고 수교하고, 이러는 과정에서 북측이 동맹국을 거의 상실하고 경제적으로 굉장히 어려워졌죠. 그러다보니까 내부 통제 메커니즘이랄까, 배급체계를 비롯해서 그런 게 거의 무너졌습니다. 많이 무너졌어요. 거기에 따르는 인민 생활의 변화, 그게 인민의 복지를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변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완전히 국가로부터 통제를 받던 상태에서 각자가 알아서 먹고살아야 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는 점에서는 저는 그건 엄청난 변화였다고 보고요. 이럴 때 남쪽에서 도와주고 경제협력을 해주고 하면서 남북간에 정서적으로 더 다가오게 하고 또 실제로 만나고 소통할 기회가 더 늘어난 것은, 저는 장차 우리가 언젠가는 통일된 국가를 다시 만들 텐데 그걸 위해서 대단히 중요한 자산을 확보했다고 믿어요.

유정아 북한의 인민 생활을 말씀하셨는데 북한 인민들을 생각하는 또다른 시각들이 이 사회에 존재하잖아요. 저쪽의 체제변화를 이끌어내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좀 극단적으로 저쪽에 맞서야 한다는 얘기를 하는 경우가 있고, 우리가 같이 끊임없이 대화를 해야만 그 인민의 생활을 좀더 높은 쪽으로 끌어낼 수 있다고 보는 경우도 있고요.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을 하시나요?

백낙청 북의 인민을 걱정해서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서도 김정일 체제가 빨리 무너져야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그분들 나름으로 동포에 대한 충정을 갖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시다는 걸 제가 알고 있어요.
그런데 제가 그런 얘기 나올 때 되묻는 거는, 그럼 그 목표를 어떻게 해서 달성하겠다는 거냐 하는 겁니다. 우리가 쳐들어가서 김정일 정권을 무너뜨릴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미국도 압박을 하다 하다 못해가지고 손들고 다시 교섭을 하는 판에 그 자체가 허황된 꿈이고요.
또 하나는, 가령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해서 급변사태가 와서 저쪽이 무너진다고 할 때, 그게 우리한테 이로운 사태냐 하는 것도 따져봐야죠. 만약에 엄청난 혼란사태가 온다면 그건 우리 남쪽 경제를 위해서도 치명적이고 아마 중국이나 일본이나 주변 국가들한테도 굉장히 골치 아픈 일이 될 겁니다.
그리고 그게 그냥 혼란사태로 끝나는 게 아니라 누가 들어가서 그 혼란사태를 수습한다고 할 때, 지금 가장 강력하고 유리한 입장에 있는 것은 중국이지 한국이나 미국이 아닙니다. 물론 중국도 단독으로 수습할 능력은 없을 거예요. 미국의 양해를 얻는다든가 하겠지마는, 중국은 이북하고 지금 동맹관계에 있잖아요. 이미 많은 투자를 한 상태고, 국경선에는 엄청난 지상군을 배치해두었고요. 압록강, 두만강 넘어가는 건 간단합니다. 그냥 넘어가면 침략이지만 북쪽에 어떤 동조자가 있어서 좀 들어와서 도와주시오, 그러면 합법적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반면에 우리나 미군이 한미연합사에서 휴전선을 넘어서 들어간다면 그건 전쟁 일으키는 일이 되잖아요?
그래서 북측의 동포를 염려하면 할수록 정말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은 무엇이며, 또 지금 저 체제가 문제가 많으니까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큰 무리 없이 바꿔서, 흔히 하는 말로 쏘프트 랜딩(연착륙)을 시킬 것인가를 진지하게 연구해야죠. 그냥 저거 빨리 무너져야 하는데 너희들이 도와줘서 안 무너진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데는 저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유정아 그렇다면 북한 체제의 연착륙적인 변화를 유도해내기 위한 선생님의 방법론은 구체적으로 어떤 건가요?

백낙청 6·15공동선언 제2항에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공통점이 있다고 이미 합의가 돼 있지 않습니까? 제가 해석하건대 이것은 북에서 옛날에 얘기하던 고려연방제를 포기하고 남측의 국가연합제 안을 받아들이면서 체면용으로, 그러니까 연방제라는 말을 아주 뺄 순 없으니까 거기다 ‘낮은 단계’라는 수식어를 붙여서 썼다고 봐요.

유정아 그건 선생님께서 확신하시는 건가요?

백낙청 예, 그건 제가 확신할 뿐 아니라 거기 직접 참여했던, 가령 임동원 전 통일부장관의 회고록을 봐도 김대중 대통령하고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이에 그런 취지의 대화가 오갔다 그럽니다. 그리고 서로 그것이 명확한 합의가 아니더라도 세력의 균형이라는 게 있잖아요. 본인들의 의도와 관계없이 역사의 흐름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남쪽 제안이 받아들여지게 돼 있다고 봅니다. 만약 어느 한쪽을 선택한다 그러면요.
그래서 이 남북연합이라는 것은 상당히 느슨한 두 국가 간의 연합인데, 이것은 통일을 향하는 과정에서도 중요하지만 한반도라는, 분단이라는 이 대단히 위험하고 폭발적인 상황을 관리하는 장치가 되거든요. 남북이 어느정도 공동으로 관리할 수 있는 그런 통로가 되는 거죠.

유정아 예.

백낙청 그래서 저는 이 남북연합의 건설을 위해서 우리가 좀더 면밀히 연구해가면서 성의 있게 추진해나가는 것이, 이 위태로운 상황을 관리하고 북의 변화가 우리한테까지 위협이 될 정도로 그렇게 폭발적으로 진행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정아 네, 오늘은 백낙청 교수님과 6·15공동선언의 뒷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너무 일찍 끝나는 것 같아서 아쉽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내일은 백교수님이 창간하고 지금까지 이끌어오신 『창작과비평』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오늘 고맙습니다.
백낙청 예, 감사합니다.
 

3회(6월 30일) 계간 『창작과비평』 창간 44주년

계간 『창작과비평』에 대해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金龍澤)은 ‘내 문학과 삶을 갈고닦게 해준 학교’라고 기억합니다. 1966년 1월에 창간된 한국 최초의 계간지 『창작과비평』은 44년 동안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를 함께하면서 단순한 문예지를 넘어 한국 사회의 사상과 철학을 이끄는 담론의 장이 됐는데요. 『창비』 창간 당시 28살이었던 백낙청은 권두논문에서, 문학은 현실의 감추어진 진실을 드러내야 하고 현실구성원이 처한 위기를 반영해야 하며, 나아가 그 구성원 대다수의 복지를 위한 전망을 제시해야 한다고 새로운 문학의 시대를 선언했습니다.

안녕하세요? 「명사 초대석」 유정아입니다. 44년 전 백낙청 교수가 창간한 계간지 『창작과비평』은 당시 문학계와 사회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는데요. 쟁쟁한 문인들이 『창작과비평』을 통해 등단했으며 진보 지식인들이 사회에 화두를 던지는 공론의 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백낙청 교수와 함께하는 「명사 초대석」, 오늘은 그 분신과 다름없는 『창작과비평』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말씀 나눠보겠습니다.

유정아 안녕하세요, 선생님?

백낙청 예, 안녕하세요?

유정아 오늘도 세교연구소에서 세번째 인터뷰를 진행하겠습니다. 『창작과비평』이 44년 됐는데요, 그만한 세월이 지금 느껴지시나요? 어떠세요?

백낙청 예, 한 44년 반쯤 됐죠.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생각이 듭니다. 흔히 우리가 과거를 되돌아볼 때 먼 과거 일이 어제 같다 그러는데, 저도 그런 느낌이 물론 있죠. 하지만 그동안에 『창비』를 하면서 여러가지 사건도 많았고, 또 저 자신의 역할이 많이 축소되긴 했습니다마는 여전히 편집인으로서 현역으로 있거든요. 그래서 참 오래 해먹고 있구나(웃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유정아 물론 이게 정년이 있는 건 아니어서 그러시겠지만, 서울대 명예교수라든가 ‘명예’ 자가 붙어 있는 건 사실 일은 안하는 거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첫째 날에. 편집인에는 ‘명예’ 자를 본인이 안 넣고 계신 건가요?

백낙청 예, 이건 명예편집인이 아니고 편집인입니다. 다만 창비사에는 편집주간이 계신데, 그 편집주간은 단행본 편집 전체를 총괄하고, 계간지의 경우는 저하고 함께 합니다.

유정아 그렇군요.

백낙청 편집주간에 비해서 저는 계간 『창비』의 편집인만 하고 있습니다. 단행본 출판이라든가 회사 경영은 대표이사 사장이 맡아서 하고 저는 계간지 일만 하는데, 그것도 실무는 놓은 지 오래됐어요. 기획을 한다든가 그 내용을 가지고 서로 토론하면서 같이 공부하는 분위기를 만들어간다든가, 그런 정도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유정아 28살이던 1966년에 계간지 『창작과비평』을 창간하셨는데요. 어떻게 만드시게 된 건가요?

백낙청 제가 미국서 문학 공부를 했는데, 박사를 마치지 않고 돌아와서 서울대 교수로 취임을 했습니다. 전임강사가 됐는데, 미국 있을 때부터 내가 영문학 일을 하든 뭐를 하든 우리나라 문학에 대한 공부를 같이 하고, 거기에 관심을 놓고서는 제대로 된 문학 공부를 못하리라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늘 한국문학에 관심을 가졌고. 그러다가 내가 한국에 가면, 그때 좀 주제넘은 생각으로 품질이 좋은(웃음) 잡지를 하나 만들어보고 싶다…….

유정아 아, 유학시절에 생각을 하셨군요.

백낙청 예, 한국에 돌아올 무렵에 그런 생각을 하고 왔어요. 그러고 한두해 지나면서 친구들하고 의논해가지고 출발하게 됐는데, 제가 그때 서울대학교에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은 계간지 이상의 일은 하기가 어려웠죠.

유정아 네.

백낙청 월간지 같은 건 부담스러워 제가 감당을 할 수 없었고요. 재정적으로도 석달에 한번 정도라면 어떻게 돈을 좀 추렴해서라도 낼 수 있는데, 월간지라면 얘기가 달라지는 거지요. 또 품질 면에서도 그렇습니다. 당시로서 매달 잡지를 내야 되면 아무래도 품질 관리가 어렵지 않겠느냐, 그런저런 생각으로 계간을 하게 됐죠.

유정아 창간 비용은 어떻게들 대셨어요?

백낙청 그때 친구 서넛이서 한달에 만원씩 걷어가지고 한 석달 모으니까 기본 비용이 됐습니다.

유정아 한달 만원이면 요새 돈으로는…….

백낙청 그게, 그때 창간호가 70원이었거든요, 물론 얇았지만.

유정아 10만원씩은 내신 셈인 거 같은데요.

백낙청 최소한 10만원은 냈죠. 10만원이 넘었다고 봐야죠.

유정아 문학도들에게는 큰돈이잖아요?

백낙청 네, 그랬고요. 원고료는 그때 소설가 한두분께밖에 안 드렸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 안 줬고.(웃음) 그렇게 모은 돈으로 종잇값, 인쇄비를 댔고, 출판하고 판매하는 일은 아는 분의 출판사에서 대행해줬습니다. 또 잡지 보급하는 데도 도와주시고. 그러다가 판매부수가 좀 늘면서 형편이 펴는 바람에 원고료도 주게 되고 그랬어요. 정말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가능했죠.

유정아 당시에 방영웅(方榮雄) 선생의 『분례기』라는 소설이 실리면서 상당히 인기를 끌었다는데, 이 소설이 사실은 다른 데서는 계속 떨어진 소설이었다죠?

백낙청 다른 데 중편소설 응모에 나갔다가 거기서 떨어졌는데, 그 심사위원 중의 한분이 괜찮으니 여기서 검토해보라고 저에게 갖다주셨어요. 그래서 제가 읽어보니까 이걸 장편소설로 바꾸면 훨씬 낫지 않겠냐 하는 생각이 들어서 방영웅 씨를 만나 그 얘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그다음에 고쳐 왔는데 보니까 뭐 엄청나게 좋아졌더라고요. 그래서 그것이 나간 게 아마 『창작과비평』 6호쨀 겁니다. 1년간 나갔는데,2) 그 연재하는 동안에 그렇게 부수가 늘었습니다.(웃음)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다음호에 그거 나오냐? 나오면 내가 사고(웃음) 안 나오면 안 산다” 그러기도 했고요. 우리 잡지가 한번 도약했다 그럴까.

유정아 도약의 계기가 됐던 소설이군요.

백낙청 그랬습니다.

유정아 그 당시에 20대의 젊은 비평가, 평론가의 눈으로 본 『분례기』의 좋은 점은 무엇이었나요? 어떤 점을 보신 건가요?

백낙청 방영웅 씨가 이야기 솜씨나 묘사력이 뛰어나고, 특히 우리 농촌이나 소도시의 삶을 그려내는 데 탁월한 솜씨가 있는 작가예요. 아주 천분이 좋은 작가인데, 그후에는 계속 좋은 작품을 내진 못했어요.

유정아 그랬군요.

백낙청 그건 아쉬운데, 어쨌든 방영웅 씨 소설이 나온 게 1967년인데,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시골의 그런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재밌게 그리는 소설이 참 드물었습니다. 이상하게 도시화되고 외국 소설 흉내내고 그런 경향이 지배적일 때인데, 방영웅 씨의 그 소설은 독자들에게 아주 신선하게 받아들여진 거죠.

유정아 사실 지금까지도 창비에서 책을 내는 것이 문인들의 자랑거리일 만큼 창비에서 한번 책을 내고 싶어하는 문인들이 많은데요. 창비에서 책을 내거나 내지 않는 선별의 기준은 무엇인지요?

백낙청 예전 같으면 우리가 어차피 장사는 안되는 거니까…….

유정아 이것도 또 돈이 안되는 건가요?(웃음)

백낙청 그냥 좋은 작품이냐 아니냐, 그것만 가지고 냈어요. 그런데 요즘은, 저는 그런 고민을 별로 안하는데 지금 사장이나 주간은 대중성 또는 상업성하고 문학성, 아니면 사회과학 서적 같으면 사회과학 서적으로서의 수준이나 의의, 이런 거를 잘 조화시키려고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할 겁니다. 그런데 저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좋은 책을 내는 게 중요하지만 많이 읽히도록 만드는 것도 책을 위해서 필요하고, 또 창비가 하나의 회사니까 그걸 유지하기 위해서도 책 팔아서 돈을 벌어야 하고, 그래서 그 면을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다만 그게 우위에 가버리면, 그게 우선적인 고려가 돼버리면 곤란한 거죠. 저는 지금 우리 회사 사원들도 그렇고 또 편집주간이나 대표이사도 그 점에서는 저하고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그런 신뢰를 갖고 있습니다.

유정아 그렇군요. 제주 4·3항쟁에 대한 이야기도 사실은 『창비』를 통해서 처음 사회에 나오게 됐다고 하고요. 그런 사회참여적이랄까, 사회현실을 보는 시각이 담긴 책들을 특별히 창비에서 많이 내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백낙청 한편으론 『창비』가 창간 때부터 사회・문화 문제나 현실문제를 외면하고 문학만 따로, 순전히 문학적인 무엇을 추구하는 것이 문학의 정도는 아니다 하는 문학관이 있었기 때문이고요.
또 하나는, 70년대 들어가면 그런 생각을 하는 작가가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들춘다거나 했을 때 그걸 발표할 지면이 『창비』 말고는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그 시절이 『창비』 편집자로서는 행복한 시절이었죠. 황석영(黃晳暎) 씨가 「객지」나 「한씨연대기」 이런 소설을……. 요즘은 황석영 씨 소설 가지고 여러 출판사에서 서로 모셔가려고 싸우는데,(웃음) 그때는 황석영이 그런 소설을 쓰면 『창비』밖엔 들고 올 데가 없었어요.

유정아 그렇군요.

백낙청 현기영(玄基榮) 씨의 「순이 삼촌」은 70년대 말에 나왔는데, 이분이 처음에는 서양 모더니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가 점차 자기 고향 제주도의 한 맺힌 이야기를 어떻게든지 작품으로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래서 아주 작심하고 쓴 게 「순이 삼촌」이고요. 여기저기서 부분적으로야 4·3 얘기가 나왔겠지만 많은 대중들에게 그 진실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나는 「순이 삼촌」을 통해서였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현기영 씨가 「순이 삼촌」 썼을 때에도 그거 내줄 데는 『창비』밖에 없었어요.(웃음) 그러니까 우리는 앉아서 쉽게 좋은 작품 발표하고, 그런 거 하다보니까 당국으로부터 당한 것도 있지만 큰 품 안 들이고 남의 칭찬 듣고 또 책도 팔고 그럴 수 있었죠.

유정아 네.(웃음) 44년 전 창간한 『창작과비평』에 대한 얘기 중심으로 이번주 「명사 초대석」 백낙청 선생님 함께 만나고 있습니다. 창비를 운영하면서 힘들 때가 많으셨죠? 오늘 이렇게 편안하게 웃으면서 말씀해주시지만, 역사의 굴곡이 많았잖아요?

백낙청 제가 창비 사장으로 직접 경영한 것은 70년대 말에 대학에서 해직되고 나서 딱 2년 동안이었어요. 그전에는 발행인은 대개 딴 분이 하셨지요. 그때는 규모가 작아서 크게 문제는 안됐는데, 제가 사장 할 때쯤은 제 대학 직장도 없어지고 그러니까 출판을 좀 제대로 해보자고 해서 책도 많이 냈고요. 또 그때 계간지 영인본이란 걸 찍어내서 벌여놨는데, 특히 그 영인본 월부장사 같은 거는요, 팔려도 수금하는 게 더 어려웠어요.

유정아 네, 그랬군요.

백낙청 그때 우리는 은행 계좌도 없어서 친척 형님이나 친구의 어음을 빌려다가 쓰고 그랬는데, 쓰고 나서 날짜가 되면 갚아줘야죠. 안 갚아주면 그쪽에서 부도가 나게 되는데, 수금이 안되니까 그런 부도가 날 뻔한 적이 많습니다. 그럴 때 가슴 졸이고 했던 게(웃음) 제가 경영하면서는 제일 어려웠고요. 제가 경영 일선에서 손을 떼고 그다음에는, 김윤수 선생님 있죠?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하시다가 지난번에 해임돼서 재판 걸어서 이기신 분. 그분이 저하고 같이 『창작과비평』 편집위원이고 제가 존경하고 가까이 생각하는 친군데, 80년대 중반에 그분이 사장 노릇 할 때, 아 그때는 『창비』 잡지는 없어진 후인데 출판사까지 등록취소를 당했어요. 그때는 출판사가 꽤 커져서 직원들도 많고, 또 출판사가 없어진다는 게 개인이 그냥 죽어버리는 것하고(웃음) 달라가지고 여기서 책을 낸 모든 분들의 책이 하루아침에 절판되는 거죠. 다시 찍을 수 없게 되
니까.

유정아 그렇지요.

백낙청 그런 엄청난 사태인데, 그때 이걸 다시 출판등록을 얻어내기 위해서 한 1년 동안 우리가 버티면서 외부에서 서명운동도 해주시고, 또 김윤수 선생은 김윤수 선생대로 당시에 문공부(문화공보부) 당국자하고 협상도 하고 그랬지요. 그때 제일 고생한 분은 김윤수 선생이었지만 그 옆에서 지켜보고 또 같이 일하면서 저도 꽤 힘든 시기였습니다.

유정아 사실 그게 80년대고 20년도 넘은 일이긴 하지만, 너무나 담담하게 말씀하셔서 저는 굉장히 놀랍거든요. 그때의 격분 같은 것들은 마음에서 좀 많이 삭이셨나요?

백낙청 80년 5·17쿠데타 나고 나서 저쪽에서 잡지를 없앴을 때는 아쉽긴 하지만 오히려 좀 담담했어요. 그런데 그후에 출판에 더 힘을 쏟아가지고 출판사도 키워놓고 무엇보다도 많은 종업원들이 거기에 생계를 걸고 있는데, 이거를 하루아침에 문공부에서 등록취소라는 형식으로 없앴을 때는 굉장히 곤혹스럽기도 했고 분개했죠. 그때 국제적으로 항의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 덕분에 ‘창작과비평사’는 거기서 ‘비평’을 빼고 ‘창작사’라는 이름으로 1년 후에 등록을 다시 받아줬어요. 그것도 뭐 따지고 보면 굴욕적인 타협이고 주변에서는 차라리 자폭을 하지 왜 그거 받아들였느냐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김윤수 선생이나 저 자신은 그렇게라도 계속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지요. 고은 선생 같은 분도 거기에 적극 동조하셔서 『만인보』 1, 2, 3권은 ‘창작사’에서 처음 나왔습니다.

유정아 그렇군요.

백낙청 그러다가 87년 6월항쟁이 있고 나서, 88년 초에 『창작과비평』이 복간이 되고 ‘창작과비평사’라는 출판사 이름도 되찾았죠.

유정아 그렇게 참 어이없는 일을 정권으로부터 당했을 때, 어느정도의 합의에 의해서 ‘창작사’로라도 이름을 살리자는 타협선 같은 것들을 백낙청 선생님은 어떻게 결정하셨는지요?

백낙청 그런 문제는 당시 창비 대표이고 또 직접 협상에 나섰던 김윤수 선생하고 저하고 협의해서 결정을 했는데, 그러니까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출판사가 자폭을 한다는 게 개인이 자살하는 거하고 또 다르거든요. 거기 딸린 종업원들의 생계가 다 끊어질 뿐 아니라 우리에게 책을 주신 모든 저자의 저작 발표권을 일단은 가로막는 게 되지요.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든지 계속하는 것이 옳다고 봤고, 또 하나는, ‘창작과비평사’는 안되고 ‘창작사’는 된다는 게 좀 유치하잖아요? 그래서 뭐 쟤네들하고 그거 가지고 아웅다웅하고 싸울 필요가 뭐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유정아 너희들이 나보다 아래다라는 편안한 느낌 같은 거요?(웃음)

백낙청 예, 예.(웃음) 그리고 백낙청이는 창비사에서 손 떼라고 했는데, 그때 나는 편집위원밖에 아니던 사람이니까 손 떼라 해서 그런다고 그랬고. 또 이시영(李時英) 씨가 주간을 하고 있었는데, 처음엔 이 사람을 내보내라 그랬어요. 근데 이시영 씨는 나하고 달라서 거기서 월급을 받는 사람인데 내보낼 순 없으니까 그럼 업무국장을 시키겠다, 그랬더니 뭐 그건 좋대요.(웃음) 그래서 그렇게 했고. 그때 『창비』 잡지는 없었지만 어쨌든 주변의 필자들이 전부 나하고 동지들인데, 내가 손을 떼면 얼마나 떼겠어요. 그쪽에서도 하도 비판을 많이 받고 국제적으로도 문제가 되니까 퇴로를 찾은 거예요. 좋다, 뭐 그렇게 하자, 그랬죠.

유정아 그 숱한 문학작품들을 읽고 선정하고 편집하시면서, 나도 한때 문학도였는데 나도 여기에 글을 쓰는 문인이고 싶다,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으셨는지요?

백낙청 아, 창작이 아닌 평론을 쓰는 문인으로서는 나도 지금 현역입니다.

유정아 네, 알고 있습니다만 소설이나 그런…….

백낙청 아주 젊을 때야 다들 소설이라든가 시를 쓰고 싶은 생각을 하고 또 써보는 경우도 있겠지만, 평론을 시작한 이후로 저는 평론가도 문학에서 아주 중요한 존재라고 보고요. 그렇다고 평론가가 특별한 존재라고 보지는 않습니다만.
평론가의 권위는 오히려 그가 독자의 한 사람이라는 데서 나온다고 봐요. 작가가 아무리 잘나도 독자가 안 읽어주면 그만 아녜요? 그래서 독자하고 작가는 똑같이 중요한 존재이고, 어떻게 보면 문학의 양대 축이라고 할 수 있죠. 그 독자의 일원으로서 발언하는 것이 평론가고, 그러나 그가 글을 써서, 문장을 통해서 독자로서의 소감이나 판단을 전달한다는 넓은 의미에서는 작가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존재인데, 그 나름으로 긍지를 갖고 할 만한(웃음)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유정아 네, 이런 사적인 질문은 내일로 이어가서 선생님의 개인적인 생활, 삶에 대한 이야기들 많이 들어봤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창작과비평』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이야기 나눠봤는데요, 선생님 오늘 고맙습니다.

백낙청 예, 감사합니다.
 

4회(7월 1일) 한국 사회의 담론을 이끌어가는 활동가

“이 사람 없었던들/60년대의 이른 자각인들 그렇다 치고/70년대 그 고행과 더불어/현실참여의 문학/우리 문학/어쩔 뻔했겠느냐//일찍부터 자기 자신에게 엄밀한 사람/남에게 한 가닥 감정 보이지 않아/지난날/아버지가 납치된 사실조차/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사람//(…)미국 동부 브라운대 졸업생 답사를 한 이래/하바드대 어디에서 머물 수도 있지만/그는 돌아와 한국 사람으로 살아왔다/꿈속에서/영어로 말하는 것을/꿈 깨어 뉘우치며/그의 민족문학론은 단계마다 올라섰다”.
고은 시인의 『만인보』 12 가운데 「백낙청」 편의 일부입니다.

안녕하세요? 「명사 초대석」 유정아입니다. 온화한 얼굴로, 언제나 웃는 낯으로 사회에 일침을 가하는 백낙청 교수. 날카로운 사회담론을 제시하고 논쟁을 이끌어내기를 즐기는 백낙청 교수의 개인적인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이른바 엘리트 코스를 지내고 진보 이론가가 된 배경과, 또 가족과 그의 인생에 대해서 허심탄회하게 얘기 나눠보겠습니다.

유정아 안녕하세요, 선생님?

백낙청 예, 안녕하세요?

유정아 오늘 네번째 시간을 맞아서 선생님의 통일관, 또 『창작과비평』에 대한 이야기에 이어서 이제 개인적인 삶으로 깊숙하게(웃음) 들어가려고 하는데요. 어제 말미에 제가 소설을 쓰고 싶진 않으셨느냐고 여쭤봤더니 문학평론가도 괜찮은 거다, 그렇게 말씀하셨거든요. 어릴 때 모습은 어떠셨어요?

백낙청 어릴 때는 제가 문학에 취미가 있고 소설책이야 뭐 많이 읽었지마는, 제가 문학을 하리라고는 생각 안했어요. 우리 선친께서 그때 출판사도 하시고 또 그 출판사에 딸린 서점을 갖고 계셨는데, 거기서 책들을 공짜로 많이 읽었죠. 그런데 그 출판사에 작가분들이 많이 드나드셨어요. 「별을 헨다」라는 단편을 쓰신 계용묵 선생이 편집장이셨고요. 여러분이 드나드셨는데 저는 그때 그분들의 그 초라한…….(웃음)

유정아 행색이요?

백낙청 뭐 그런 후줄근한 모습,(웃음) 이런 걸 보면서 나하고는 관계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을 했죠. 문학을 전공하기로 한 것은 미국 가서 대학에 들어간 이후였어요. 미국 대학은 과별 모집을 안하니까 들어가서 3학년 때 전공을 결정하거든요. 아마 그때 가서 문학을 하기로 결심을 했을 겁니다.

유정아 어린 시절 책은 정말 맘껏 읽으셨을 텐데, 어떤 책을 주로 끄집어내서 읽으시게 되던가요?

백낙청 그땐 난독이었죠 뭐. 그러니까 김내성(金來成), 방인근(方仁根) 같은 탐정소설도 많이 봤고 또 이광수(李光洙), 김동인(金東仁) 이런 소설도 많이 봤고요. 그때 부친이 하신 출판사는 ‘수선사(首善社)’였는데, 거기서 책을 내신 계용묵 선생, 정비석(鄭飛石) 씨도 그중에 들어 있고, 하여간 이것저것 많이 봤습니다.

유정아 경기중, 경기고를 나오시고 나서 사실은 그때 보통의 코스면 서울대 법대를 가는 거잖아요, 문과에서 그렇게 공부를 잘하셨으면?(웃음) 어떻게 바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시게 됐는지요?

백낙청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미국에, 지금은 없어진 신문이지만 『뉴욕헤럴드트리뷴』지라는 게 있었습니다. 지금은 국제판만 살아남아 있죠. 그 『뉴욕헤럴드트리뷴』지가 주최하는 세계고등학생토론대회가 있었어요. 이 대회에 제가 한국 대표로 선발돼서 가게 됐어요. 그런데 그게 그냥 가서 토론회만 한번 하는 게 아니라 미국서 생활도 하고 그러고 나중에 토론회를 하고 돌아오는 건데, 그걸 하다보니까 대학 입학시험 시기에는 제가 국내에 없었습니다.

유정아 그랬군요.

백낙청 그래서 제가 서울 법대를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상황이었고요.(웃음) 거기에 참가 신청을 할 때부터 미국 유학을 간다는 생각은 했죠. 그런데 당시에는요, 미국 유학을 간 것이, 가려고 한 게 저뿐만 아니고 아마 우리 고등학교 동기 한 3분의 1쯤은 미국에 갔을 겁니다.

유정아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바로요?

백낙청 예, 그때가 한국전쟁이 휴전된 직후여서 주변 환경도 안 좋고 황폐화되어 있으니까 다들 떠나고 싶어했고요. 그래서 미국 유학 갈 생각을 품은 게 제가 남다른 건 아니었고, 또 제 경우에는 다른 대학은 몰라도 가령 서울대학 같은 데는 시험 안 치르고는 못 들어가는 형편이었고요. 그때 브라운대학에 마침 고등학교 선배가 먼저 가 계셔서 거기 원서를 내게 됐죠.

유정아 그렇군요. 대학에 가셔서 문학을 전공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계기는 어떤 게 있었나요?

백낙청 처음에 관심은 인문학 전반에 대해서, 우리 전통적으로 말하면 문사철(文史哲)에 두루 관심이 있었는데, 미국 대학, 적어도 그 대학의 학풍으로 봐서는 철학이나 역사학은 내가 관심을 가진 방식하고는 아주 다르더라고요. 그러니까 철학은 언어분석이라든가 분석철학 이런 쪽에 치중해 있고, 역사학은 아주 실증적인 작업이고. 그래서 문학에 더 관심을 갖게 됐는데, 철학에 대한 관심도 여전히 있고 해서 처음에는 영문학하고 독문학을 같이 했어요, 학부 졸업할 때까지는. 그러다가 대학원을 하바드로 가면서는 영문학으로 굳혔죠.

유정아 유학 자금 같은 건 어떻게 마련하셨어요? 어릴 때 부유한 편이셨어요?

백낙청 제가 고등학생 한국 대표를 했다는 그런 경력이 있고, 또 브라운대학의 저희 선배도 저보다 한해 앞서서…….

유정아 토론대회 출신이시군요.(웃음)

백낙청 예, 토론대회 대표로 갔던 분이에요. 제가 제4회 대표였는데, 그분이 먼저 가서 잘하셨어요. 인정을 받은 거지요. 그러니까 한국에서 어느 고등학교 나오고 이런 경력을 거쳐서 온 친구라면 잘하겠구나 해서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유정아 그렇게 하시고 미국에서 자리 잡은 동기들이나 선후배들도 많으시죠? 외국에서 유학하고 나서 군대도 적당히 피하고 그러는데,(웃음) 다시 돌아올 결심은 어떻게 하신 건가요?

백낙청 처음에 유학 갈 때는 군대 안 들어가려고 간 사람이 많아요. 우선 외국에 나가고 보자, 그러고 나갔죠. 저는 물론 하바드에서 석사 마치고 박사과정에 입학이 됐기 때문에 일없이 미국에 남아 있는 상태는 아니었지만, 어린 나이에 미국 가서 계속 거기 있다는 게 참 지루하고 싫고 한국에 와보고 싶고 그랬어요. 요즘하고 달라서 그때는 편지 왕래 외에는 할 게 없고, 국제전화 한번 한다는 것도 무슨 특별한 일 있을 때 1년에 한두번 할까 그랬고, 교민사회가 큰 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완전히 고립된 생활을 하는데, 한 5년 그렇게 하고 나니까 정말 더 있기 싫어서 뭐 군대 문제는 한국 가서 가게 되면 간다, 그러고 그때 귀국을 했죠.

유정아 돌아오셔서 군대를?

백낙청 군대를 갔는데, 일부 신문에서는 그걸 아주 극적으로……. 언론계에서 흔히 그러잖아요. 그야말로 스토리를 만들어가지고 군대 가기 위해서 하바드 대학원생이 자진입대하러 왔다고 그랬는데, 그건 아니고요.

유정아 너무 미화된 얘기라 이거죠.

백낙청 그때 4·19 후에 왔는데요, 와서 보니까 군대 안 가곤 뭐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그래서 군대를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징집영장이 나오려면 몇달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안되겠다 싶어 구청의 아는 분한테 부탁해(웃음) 자원입대를 했죠.

유정아 음, 빨리 가야 되겠으니까.

백낙청 빨리 가서 빨리 나오자, 그래서 군대를 갔는데 이게 미화된 기사로…….

유정아 현역으로 3년 복무를 하신 겁니까?

백낙청 아녜요. 현역으로 졸병으로 갔는데, 군대 가서 보니까 이게 정말로, 하여간 하루빨리 벗어나야 할 데더라고요.(웃음)

유정아 맞진 않으셨을 것 같아요.(웃음)

백낙청 그야말로 누구는 체질에 맞아서 가는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나는 이건 체질에 안 맞고.(웃음) 그런데 그때 어떤 제도가 있었느냐면, 그때만 해도 유학생이 그렇게 많지가 않을 때라서 국가에서 유학을 장려하는 의미에서 문교부하고 외무부 시험을 다 통과한 사람은 귀휴(歸休)조치라는 걸 취해줘요. 말하자면 장기휴가죠. 그러니까 문교부 시험을 통과하면 유학 허가가 나오고, 외무부 시험을 또 쳐야지 여권이 나오고 그랬습니다.

유정아 귀휴조치요?

백낙청 귀휴, 집에 보내주는 거예요. 집에 보내주는데, 유학 간다는 전제로 보내주는 겁니다. 그래서 6개월 이내에 유학을 떠나면 제대가 되고 안 떠나면 다시 원대로…….

유정아 군대로 돌아가야 하고요. 그런데 유학을 다녀오신 거잖아요, 이미?

백낙청 다녀왔지만, 하바드대학의 박사과정에 입학 허가를 받았는데 제가 거절을 하고 왔었거든요. 그래서 재신청을 했어요. 나 하바드에 다시 가겠다.

유정아 네.(웃음)

백낙청 그랬더니 다시 입학 허가서가 온 겁니다. 그래서 그걸 가지고 신청을 했죠. 그리고 문교부 시험도 치고 외무부 시험도 치고. 그래 합격을 해서 군대에서 1년 조금 넘게 복무하고서 귀휴조치를 받았습니다.

유정아 그랬군요.

백낙청 그래서, 6개월 전에 출국해야 하니까 9월까지 기다릴 수 없어서 3월에 미리 갔어요. 저는 동부 해안에 가야 하는데 서부 해안에 저희 사촌누님이 계셔서 거기 가서 빈둥빈둥 놀기도 하고, 또 그 집에 계속 머무를 수는 없어서 쌘프란시스코에 나가서 혼자 자취하며 살기도 하고. 그렇게 여름 보내고 가을에 하바드로 되돌아갔죠.

유정아 그 미화된 얘기가 신문에 실렸을 때 정말 약간 낯이 뜨거우셨겠네요. 그러니까 청취자 여러분께서는 더이상 그 얘기는 안해주시면 좋겠네요.(웃음)

백낙청 낯 뜨겁고 그랬는데, 그러나 그 덕은 봤습니다. 논산훈련소에 갔더니 신문의 그 얘기가 소문이 좍 퍼져 있고 소장이라는 장군부터가 입소한 우리들을 모아놓고 훈시를 하면서 이런 훌륭한 젊은이도 이번에 들어왔다,(웃음) 뭐 그러니까 그때부터 내무반 생활이니 이런 거 참 편하게 했죠. 뿐만 아니라 약삭빠른 친구들은 제 옆에 줄을 서기도 했는데, 왜냐면 저 친구 있는 반에 들어가면 큰 고생 안하겠다,(웃음) 이렇게 생각한 거죠. 함부로 다루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저로서는 덕분에 논산훈련소에서 비교적 편하게 지내고 왔습니다.

유정아 그래서 하바드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셔서 서울대 영문과 교수가 되셨는데요. 이것도 뭐 편견일 수 있지만 보통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들어온 학자인 경우에, 친미・반미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는 없더라도 미국에 우호적인 쪽으로 남는 경우가 참 많잖아요? 그런데 선생님이 걸어오신 길에서는 그런 흔적은 찾아볼 수 없는데, 그런 부분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요?

백낙청 나는 미국에 친구도 많고, 또 미국 대학에서 장학금도 받았고 여러가지 혜택을 받았기 때문에 친미적인 면도 많습니다.

유정아 가령 어떤?

백낙청 아니 뭐 미국에 대해서 여러가지 우호적인 감정도 가지고 있고, 또 미국 사회에서 우리가 본받을 점도 많다고 믿고요. 다만 미국 정부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지지하는 일보다 비판하는 일이 더 많을지 모르겠고, 특히 미국의 대한(對韓) 정책 또는 한반도 정책은 그동안에 잘못된 것이 잘된 것보다 훨씬 많다고 봅니다. 독재시절에 그 독재정권 지지한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그래서 그런 것을 비판하고 반대하고 또 그런 분들하고 가까이 지내고 그러니까 완전히 반미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나는 자신이 외골수 반미주의자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유정아 70년대에는 학교에서 파면당하는 고초를 겪으시기도 하고 80년대에는 『창작과비평』이 폐간되는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87년에 민주화 항쟁으로 인해 사회가 뭔가 달라지는 분위기를 느꼈을 때 감회가 남다르셨을 것 같습니다. 어떠셨어요?

백낙청 87년 6월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길거리에 나섰죠. 그땐 평범한 쌜러리맨들까지 나와서 넥타이 부대 출동이니 그런 말까지 나왔는데, 정작 나는 길거리에 나가본 적이 6월 한달 동안에 몇번 안돼요. 왜냐하면 창비라는 일터, 일감이 내게 있었고요. 더군다나 창비가 85년에 등록취소가 됐는데, 사실은 문공부가 무리한 조치를 취한 거지만 우리가 약도 좀 올렸어요. 80년에 폐간된 계간 『창비』를 복간시켜달라고 여러번 신청을 했는데 안해주니까. 그때 무크(mook)라는 부정기간행물이 많이 나왔잖아요? 잡지 비슷하게 만들어 내는데 정기적으로 내는 건 아닌 거요.

유정아 예.

백낙청 무크는 등록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출판사에서 그냥 내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창작과비평』이라는 무크를 냈는데, 모양이나 이런 걸 옛날 『창비』하고 아주 비슷하게 만들어서 냈어요. 그러니까 문공부에서 허락 없이 이런 정기간행물을 발행했다고 해서 출판사 등록을 취소시킨 겁니다.
어쨌든 그랬다가 86년에 창작사로 다시 시작을 했고, 87년쯤 가서 우리가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한 거죠. 그래서 야 이거 뭐 출판사 다시 열어줬다고 해서 감지덕지하고 가만있을 게 아니고 무크 한번 더 내자. 다만 옛날하고 똑같이 냈다간 또 당할 게 뻔하니까 ‘창작과비평’이라 하지 않고 ‘창비 1987’이라는 제목으로 해서 『창작과비평』 비슷한 무크를 냈습니다. 그거 만드는 작업을 87년 5월, 6월 내내 했어요. 그 작업 할 때는 이거 내고서 한번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각오를 하고 있었죠. 그러다가 6・29선언이 나오는 바람에 『창비 1987』 가지고 얻어맞을 일은 없겠구나 하고 안도하기도 했어요.

유정아 그후에 김대중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 정부 시절에 입각 제의도 많이 받으신 걸로 아는데, 다 고사하신 이유는 무언가요?

백낙청 그 입각 제의라는 게, 왜 우리가 지상발령이란 말이 있잖아요? 신문기자들이 제멋대로 써가지고 나는.

유정아 신문지상의 발령요.

백낙청 예, 신문지상의 발령. 그런 게 많습니다, 저와 관련해서는.

유정아 그럼 실제 전화를 받지 않았는데 씌어진 경우인가요, 또 그 미담같이?(웃음)

백낙청 아니요. 뭐 아주 없었던 건 아니지만 지상발령이 더 많았어요.

유정아 그렇군요.

백낙청 그런데 제가 시민운동 하면서 정치적인 데서 일을 좀 하기도 하고 또 제 문학평론이나 사회평론이 정치문제를 다루기는 하지만, 제가 직접 정치를 하거나 고위관직에 나가는 건 정말 체질에 안 맞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보면 과(科)가 다른 짐승을 가지고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해봤자(웃음) 그거는 안되는 일이죠.

유정아 선생님은 어떤 과의 짐승이신데요?(웃음)

백낙청 저는 그러니까 그런 건 못하고 말로 떠들거나 글로 쓰거나, 아니면 어쨌든 독립된 지식인으로서 행동을 하는 과죠.

유정아 정부 안에서보다는 정부를 바깥의 시각으로 비판하고 들여다보는…….

백낙청 그렇죠.

유정아 선생님은 낙천적인 편이세요? 본인의 기질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백낙청 어, 그렇죠. 낙천적인 쪽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웃음)

유정아 어떻게 생각하면 정부를 향해서 약간의 일종의 장난 같은 것들을 거는, 그러니까 이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땐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그런 장난기 같은 것도 있어 보이시는데, 어떠세요?

백낙청 그렇게 봐주시면 그건 귀엽게 봤다는 얘기니까 듣기가 좋군요.(웃음)

유정아 소년의 이미지가 있으세요, 돌팔매질하고 뭐 그런.(웃음) 부인이신 한지현(韓智現) 선생님을 비롯해서 가족들은 여태까지 선생님께서 살아오신 행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들을 하시는지요?

백낙청 내가 꼭 해야겠다는 일을 그 사람이 반대한 적은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는 100% 지지인데, 그 내용을 보면 한 50%는 비판적 지지고 한 30%는 냉소적인 관망이라고 할까.(웃음) 그리고 나머지 한 20% 정도가 실제로 열렬한 지지라고 할 수 있겠죠.

유정아 또다른 색깔의 부창부수가 아닐까요?(웃음) 어떻게 생각하면 선생님과 많이 닮아 있는 반려자를 만나신 거기도 하겠죠?

백낙청 아니, 그 대신에 저도 그쪽에서 일방적으로 내리는 지령을 한 90% 순종하니까요.

유정아 그 지령들은 대체로 생활에 관련된 것들인가요? 아침에 일어나서 여기를 좀 치워라 같은.(웃음)

백낙청 생활에 관련된 것도 있고 조금 더 큰 규모의 지령도 있어요.(웃음)

유정아 요즘 받으신 지령 중에 기억나는 게 있으시면요?

백낙청 아유, 하도 지령이 많아서 뭐…….(웃음)

유정아 네, 오늘 선생님의 개인적인 이야기,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함께 나눠봤는데요, 4회에 걸쳐서도 못다 한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서 내일 다섯번째 시간도 짧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인사드릴게요. 고맙습니다.

백낙청 예, 감사합니다.
 

5회(7월 2일) ‘변혁적 중도주의’가 한국 사회에 대안이 될 것

“자본주의가 위세를 떨치면서 젊은이들의 사회의식이나 기백을 제거하는 온갖 장치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대학 입시로 줄 세우고 대학에 들어가면 취업, 연봉, 승진 등을 미리 고민하도록 길들이고있지요. 하지만 ‘후천성분단인식결핍증후근’이 치유되기 시작하면, 남북통합 과정에 젊은이들이 잠재력을 발휘하는 방안이 얼마든지 눈에 들어오리라고 봐요. 우리 세대보다 전문성이 높으니까 현실담론을 이끄는 것도 앞세대보다 훨씬 더 착실한 수준을 보여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3)
6·25 발발 60년. 세대가 지나면서 삶의 고달픔에 전쟁, 분단, 통일 문제는 점차 잊혀져가고 있는 듯합니다. 이런 현상을 백낙청 교수는 ‘후천성분단인식결핍증후근’이라고 진단하고 있는데요. 그래도 통일에 있어 한국 젊은이들이 큰 역할을 할 것이라며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이번주 「명사 초대석」 백낙청 교수님과 함께하는 오늘 마지막 시간인데요, 이야기를 나눌수록 우리 사회에 대한 고민도 조금씩 희망으로 바뀌어가는 듯한 느낌도 나고, 한 개인에 대한 궁금함이 더욱더 깊어집니다. 오늘도 백낙청 교수님의 우리 사회에 대한 진단, 그리고 못다 한 이야기 기다리고 있습니다. 백낙청 교수님 만나보시죠.

유정아 선생님, 안녕하세요?

백낙청 네, 안녕하세요?

유정아 오늘도 세교연구소에서 진행하고 있는데요. 여기가 서교동 뒷골목이다보니까 이렇게 방송하면서 물건 파는 아저씨도 지나가고, 오토바이 소리도 아주 정겨운 골목입니다. 앞서서 제가 잠깐 말씀드린 후천성분단인식결핍증, 젊은이들의 어떤 부분을 그렇게 진단하신 건가요?

백낙청 우선 후천성분단인식결핍증, 또는 더 좀 현학적으로 표현하면 결핍증후군인데 이거는, 에이즈(AIDS)라는 병 있잖아요?

유정아 예, 후천성면역결핍증이죠.

백낙청 몹쓸 병 아녜요? 후천성분단인식결핍증은 이 후천성면역결핍증에서 따와 제가 약간 독설을 구사한 건데, 젊은이들을 주로 염두에 두고 만들어낸 말은 아니고요. 우리나라의 소위 진보적 지식인이라든가 진보적 학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의 글 중 상당수가, 우리 한국이 분단된 독특한 사회라는 사실을 아주 잊어버리고 외국의 분단 안된 사회에서 만들어낸 진보적인 이론들을 열심히 갖다가 적용하면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게 좀 못마땅해서 그런 표현을 썼던 겁니다.
우리는 엄연히 분단된 사회이고 분단 때문에, 최근에 우리가 특히 실감합니다만 여러가지 문제가 많이 발생하고 있잖아요? 그걸 이런 돌발사건, 천안함사건이라든가 남북의 긴장이 고조된다든가 하는 사태가 났을 때 이외에는 잊어버리고 있는 겁니다. 한반도가 이 분단문제를 당장에 해소는 안하더라도 완화해가면서 분단을 잘 관리하고 재통합의 과정을 추진하지 않고서 무슨 선진국가가 된다든가 평화국가가 된다든가, 그럴 수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을 제가 지적한 거죠.

유정아 그렇군요. 사실 그 해야 할 일보다는 잘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잘할 수 있는 일보다는 좋아하는 일을 하라, 그런 얘기를 저도 제 제자들이나 젊은이들에게 하지만, 요즘 청년들이 이 각박한 취업전선에서 참 불쌍하게 끼여 있는 것 같거든요. 선생님께서는 여태까지 살아오시면서 하고 싶은 일, 즐거운 일을 하셨나요, 아니면 해야 할 일을 하셨나요?

백낙청 저는 그 점에서는 아주 축복받은 인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죽 했고, 또 젊은 나이에 대학교수가 돼서 안정된 직장을 가졌고요. 물론 그 중간에 쫓겨나고…….

유정아 고초가 있으셨지만요.(웃음)

백낙청 예,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만, 그 직업 자체는 65세까지 정년이 보장될 뿐 아니라 사회적인 지위도 보장되는 것 아닙니까. 게다가 제가 정년퇴임할 무렵에 가서는 대학이 달라지기 시작했는데, 그전까지만 해도 대학교수가 참 편하고 좋은 자리였어요.

유정아 그랬나요?(웃음)

백낙청 요즘 교수님들은 아마 안 그러신 모양이죠.(웃음) 그래서 교수직을 가지고 다른 활동도 할 수 있었고, 문학평론 작업도 하고 영문학도 좀 자유롭게 이것저것 가르치고 할 수 있었던 점에서는 저는 참 행복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요즘 젊은이들보고 무슨 충고를 하라고 할 때 조금 미안한 생각이 있어요. 저는 65세까지 좋은 직장에서 잘 있다가 나가놓고, 지금 젊은이들이 직장 구하려고 아등바등하는 거에 대해서 너무 그러지 마라, 이렇게 충고하려다보니까. 그래도 어차피 우리 인생이라는 건 한번 사는 건데. 나이 어려서는 좋은 고등학교 가려고 하잖아요. 좋은 고등학교, 좋은 대학 가려고 아등바등 입시 준비하고, 좋은 대학에 가면 그다음에는 졸업하고 좋은 직장 얻으려고 스펙 쌓고, 좋은 직장 얻는 데 성공하면 사실은 그때부터 어떤 의미에선 노예생활이 시작되는 거 아녜요?

유정아 그렇죠.

백낙청 그러다가 또 상당히 많은 경우에는 얼마 안 가서 폐기처분당한단 말이죠. 그런 인생을 위해서 좋은 머리를 들이고 그토록 노력해가지고 그렇게 살 필요가 뭐 있나, 하여간 그런 충고를 해주고 싶긴 해요.

유정아 어떻게 생각하면 선생님께서는 스스로 말씀하셨듯 굉장히 행운의 인간이었고 또 한편에서는 정규적 엘리트 코스를 밟아오셨는데, 이런 진보적인 사고를 하는 지성이 우리 사회에 있다는 게 저희에게 큰 안도감을 주거든요.
그런데 리영희 선생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이렇게 쓰신 적이 있어요. “나처럼 힘겹게 살아온 사람의 눈에는, 처음 만난 그 편집인은 그 창간사의 필자일 수 없어 보였다. 말하자면 귀공자풍의 백면서생이요,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대표적 부르주아 계층이다. 내가 조금은 경멸하고 많이는 부정하는 소위 미국 대학 출신이라. 그의 집안 내력과 현재 상황 또한 그가 굳이 그런 깃발을 들고나설 아무런 이유가 없는 터였다.”4) 여기서 말한 ‘깃발’은 아마 다들 아실 텐데, 이런 깃발을 휘날리는 게 과연 그가 가지고 태어나고 자라온, 그런 것으로서 휘날리거나 휘날리지 않는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있습니다.

백낙청 아, 좋은 문학잡지를 만들고 그런 잡지를 통해서 사회에 기여하고 사회에 대해서 가급적 올바른 발언을 하겠다 하는 깃발이라면, 그건 그 사회에서 혜택받고 자라난 사람이 당연히 들어야 할(웃음) 깃발이죠. 그게 뭐 이상할 건 없다고 봅니다. 또 우리나라 선비의 오랜 전통이기도 하고요.

유정아 그런데 주변에 그런 친구분들이 많이 계신가요, 같은 경기고등학교 동창들 중에?

백낙청 아, 경기고등학교라는 데는 조금 특별한 데죠.(웃음) 저도 그런 얘기를 하고 황석영 씨도 얘기했지만, 그 점에서는 저는 경기고등학교 야간부 출신인 셈이에요.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 주변이나 우리 현대사를 보면 혜택받은 집안에서 태어나 비판적인 지식인의 길을 걸은 사람들이 부지기수죠. 특히 유교전통이 강한 집안, 그런 큰 유가 집안에서 운동가도 많이 나왔고 비판적인 학자들도 많이 나왔죠.

유정아 지난해 말 올 초에 우리 사회를 관통한 화두가 ‘중도’였다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그러니까 정치권에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중도 쟁탈전이 있었다는 얘긴데, 백낙청 교수님께서는 일찍부터 ‘변혁적 중도주의’를 강조하셨습니다. 이게 정확히 어떤 개념이고 어떤 내용인가요?

백낙청 정치권에서 너도나도 중도 찾는 거는 왜 그러는지 쉽게 짐작이 가죠. 선거에서 이기려면 자기 고정표만 가지고 안되잖아요? 중간에 있는 부동층을 잡아야 되니까. 그런데 중도라 그러면 고정 지지층은 지지층대로 찍어주고, 또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아, 저 사람 그래도 좀 중도적이니까 우리하고 가깝다고 찍어주고. 제일 유리한 선거전략이니까 그런 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걸 중도 마케팅이라고 부르지요.

유정아 네.

백낙청 제가 말하는 중도는 변혁적 중도주의인데, 우선 변혁이 뭐냐? 분단된 상태에서도 대한민국은 많은 걸 이룩해왔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발전은 특히 최근에 올수록 분단상태, 대결상태가 완화되는 일하고 맞물려서 진행이 돼왔어요. 그리고 이게 더 진전이 되고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려면 분단체제 전체가 변하는 변혁, 그런 의미의 변혁하고 같이 가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제가 변혁적 중도주의라고 할 때의 변혁은 분단체제의 변혁입니다.

유정아 그렇군요.

백낙청 이건 그러니까 남한 사회에서 무슨 혁명이 일어난다는 얘기도 아니고, 남한만 변혁한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이걸 중도주의라고 하는 이유는, 그런 관점에 우리가 일단 서게 되면요, 이 대결을 전제로 하는 극단적인 주장들, 또 아까 말한 후천성분단인식결핍증후군의 하나로 남북분단이 있는데도 마치 없는 듯이 우리가 굉장히 진보적인 사회를 만든다든가 남한만이 독자적인 진보를 이룩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고, 자연히 극단적인 진보노선도 분단체제 변혁에 안 맞는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양 극단을 제외한 중간의 많은 세력이 폭넓은 연대를 이뤄서 중심을 잡고, 그래서 분단체제도 바꾸고 그 작업의 일환으로 우리 남한 사회도 더 개혁하고 선진화할 수 있다는 거지요. 그걸 변혁적 중도주의라고 말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현재로는 분단체제 변혁에 반대하는, 또는 관심이 없는 세력이 워낙 크기 때문에, 제가 이런 얘기를 하더라도 아직은 중간의 많은 분들의 지지를 받기보다는 저 친구는 진보 쪽으로 치우쳐 있다, 이런 얘기를 듣게 되죠.

유정아 예.

백낙청 그 사실을 제가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게 지금 일시적인 현상이고, 저는 세월이 흐를수록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더 공감을 해서 분단체제를 변혁하는 중도세력이 형성될 수 있으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유정아 그래서 지난해 발족한 ‘희망과대안’을 통해서 이런저런 모색을 해오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지난 6·2지방선거에서 야권연대, 민주개혁세력의 정치연합을 강조하신 바 있는데, 이번 선거를 그런 세력들의 성공이라고 보시나요?

백낙청 ‘희망과대안’이나 시민사회에서 추구한 것은 전국에 걸친 포괄적인 야권연대였어요. 그 목표에 비추어보면 사실은 이번에 시민사회가 실패한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희망과대안’을 포함한 시민사회 사람들이 냉정하게 평가하고, 또 자성할 건 자성해야 한다고 봅니다.

유정아 그렇게 보시는군요.

백낙청 그런데 일반 국민이 보기에는요, 그 포괄적 연대가 실패하면서도 여기저기서 단일화가 많이 이루어지고, 또 지역에 따라서는 포괄적인 연합이 이루어지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희망과대안’이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쨌든 이번 지방선거에서 지난 2년 반 동안 한쪽으로 너무 나가고 또 많은 사람 보기에는 거꾸로 많이 간 것에 어느정도 제동을 걸었다는 점에서는 저는 성공했다고 보고요, 굉장히 의미있는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유정아 주변에서 백낙청 교수님은 낙관주의자다, 긍정주의자다, 이런 얘기도 곧잘 듣게 되고, 저도 닷새 동안의 인터뷰를 통해서 뵈니까 이렇게 계속 웃으면서 살아오셨다면 누구한테든 사랑만 받고 사셨겠다 싶거든요.(웃음)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해맑게 웃으셨나요? 그 웃음의 동력은 뭔가요?

백낙청 요전 시간에 저보고 낙천적이냐 물으셨을 때 대체로 그렇다고 답을 드렸는데, 낙관주의는 조금 다른 거예요. 낙관주의, 어떤 사태를 낙관하느냐 비관하느냐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내일 날씨가 맑을 거냐 비가 올 거냐 하는 일기예보식의 판단이죠. 낙천적이라는 건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좋고, 해가 나면 해가 나는 대로 좋다는 그런 태도지요.

유정아 미래를 마냥 밝게만 보시는 건 아니군요.

백낙청 예, 미래가 내 뜻대로 잘되리라는 판단하고는 조금 다릅니다. 저는 되도록이면 어쨌든 실패하더라도 후회가 없는 일을 하려고 노력하고, 일단 시작을 하면 일이 되도록 만들어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옳다고 믿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기왕이면 웃으면서 즐겁게 일하자는 쪽이지, 제가 하는 일마다 성공한 것도 아니고, 앞으로 꼭 그러리라는 긍정적인 신념이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유정아 말씀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낙관주의자는 아닌 낙천주의자처럼 무서운 인간은 없다는 생각이 드는데요.(웃음) 이길 자가 없는 거예요. 어떤 것이든 즐겁게 받아들이는 것까지 포함해선지 모르겠지만, 백낙청은 너무 완벽해서 주변 사람들한테 자책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얘기들을 하더군요.

백낙청 글쎄요. 제가 제 나름대로 평가하고 해석할 때, 어떤 일에는 무지하게 완벽하려고 그래요. 그러다가 또 어떤 일에는 엉뚱하게 허술하거나 돌출적인 면이 있다고 봅니다. 모르겠어요. 저의 그 완벽주의적인 일면을 보고서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 받은 사람, 자책감을 느낀 사람이 물론 있겠지만, 그게 저의 전부는 아니라고(웃음) 생각합니다.

유정아 그런 분들을 허술한 상황에서 좀 부르시지 그러셨어요.(웃음) 어떤 상황에서 허술해지시는데요? 술 드셨을 때?

백낙청 예. 요즘은 특히 건강을 관리하려고 애쓰니까 많이 안 들지만 옛날에는 많이 취한 적도 있고 실수한 적도 있는데, 꼭 술 먹어서가 아니라 제 기질이 그런 게 있어요. 어떤 때는 좀 돌출적입니다.

유정아 전혀 상상이 되질 않아서요. 어떤 걸 완벽하게 해나가시다 갑자기 그냥 탁 놓으시는 경운가요?

백낙청 제가 70년대 정부에 대한 비판을 할 때나 창비 일 할 때도 그냥 불쑥 저질러놓고 볼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유정아 인생에서 가장 귀한 사람, 어떤 사람인가요?

백낙청 가족 빼고요?

유정아 음, 가족 포함해서 한 말씀, 가족 빼고 한 말씀.(웃음)

백낙청 제가 어쨌든 사적인 문제에 대해서 잘 답변을 안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저 사람이 이중생활을 하다보니까 입이 무거운가보다 하고 말하기도 하는데, 제게 가족은 대단히 중요해요. 가족이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에 자연히 이중생활은 자제하려고 하는 편이죠.(웃음)
그밖에 소중한 사람이 참 많습니다. 그 소중한 게 각각 달라요. 옛날 어릴 때부터 정으로 묶인 친구는 그래서 소중하고, 또 나이 먹어서 뜻을 같이해서 친해진 사람, 동지가 된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중요하고요. 제자들, 자식 못지않게 중요한 존재들이죠.

유정아 앞으로 꼭 이루고 싶은 일, 개인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두가지 다 말씀해주시겠어요?

백낙청 개인적으로는, 제가 문학이나 저술 활동을 제대로 충분히 못했다는 말씀을 전에 드렸잖아요? 좀 늦긴 했지만 2007년에 시민방송 이사장 그만두고 그다음에 2009년 초에 6·15남측위원회 상임대표 임기 끝나고 그러면서 이제부터 문학도로서, 문필가로서 복귀해야겠다는 마음을 다졌고, 옛날에 비하면 조금 더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그 작업을 인제 더 많이 했으면 좋겠고, 특히 제가 사실은 박사논문 쓸 때부터 관심을 가져온 작가가 영국의 소설가 로런스(D. H. Lawrence)인데, 그에 대한 개별 논문들은 좀 발표했습니다만 아직까지 단행본을 못 내고 있어요. 제가 여러 사람 앞에서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저 친구 이제 저 책 내기는 틀렸지, 할 때쯤 되면 그 책 나올 테니까 반드시 지켜봐달라고요.

유정아 그러시군요.(웃음)

백낙청 개인생활을 떠나서 말한다면, 우리가 6·15시대란 말을 흔히 쓰는데 보통 6·15공동선언 나온 이후를 6·15시대라고 하지만, 저는 더 구체적으로 6·15공동선언이 나오고부터 그 제2항에 있는 국가연합이 달성되는 시기까지가 6·15시대라고 봅니다.

유정아 아직 남아 있는 거죠?

백낙청 아직 남아 있지만 이게 너무 오래가서는 모두가 불행해진다고 저는 생각을 하고, 우리 남쪽 국민이 조금 더 잘하면 당장은 아니지만 너무 멀지는 않은 장래에 6·15시대가 끝나고 그다음 국가연합의 시대가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인데요. 6·15시대 이후 남북국가연합이 달성되는 시기를 되도록 빨리 봤으면 하는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유정아 이거는 낙관이시네요.(웃음)

백낙청 소망이죠, 소망.

유정아 사실 그와 관련해서 마지막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 생각이 같지 않을 경우에 우리는 친구가 되기 참 힘든 시대에 살고 있는 듯해요. 생각이 다를 때 말 섞어서 어떤 이야기들을 창출해내고 어떤 합의를 도출해내기가 참 어려운 것 같은데요. 선생님은 그런 점에 대해서 젊은이나 후학들에게 어떤 얘기를 해주고 싶으신가요?

백낙청 소통하고 대화하는 데 제일 중요한 것은 남의 말을 듣는 거라고 봅니다. 남의 말을 듣는 능력이 제일 중요하고요. 그러고 나서는 자기 의견을 말할 때 그 말을 적절하게 하는 기술도 필요하죠. 그러나 이건 기술의 문제는 아니고, 남의 말을 잘 들으면서 그 상황 전체를 판단해가지고 어디에 공통의 기반이 있는가를 제대로 인식하는 능력이 필요한데, 그러려면 공부를 해야죠. 학교 공부의 공부가 아니고 인생공부도 하고 또 책 공부도 해야 하고, 자기 마음공부도 해야 합니다. 그런 것 없이 모여서 뭐가 될 것처럼 대화만 하면 오히려 싸우고 헤어지는 수가 많고, 아니면 건성건성 얘기하고 나서 대화했다며 자기만족해서 돌아가는데 지나놓고 보면 아무것도 이뤄진 게 없고,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유정아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그 소망에 대해서, 지금 마지막에 말씀하신 그런 방법으로의 소통들이 계속 이루어지는 사회가 되기를 기대하겠습니다. 닷새 동안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백낙청 예, 감사합니다.

 

  1. 『경향신문』 특집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의 설문 결과, 『경향신문』(2007.4.30.).

  2. 『분례기』는 『창작과비평』 1967년 여름호(6호), 가을호(7호), 겨울호(8호)에 연재되었다.

  3. 이 책 30면 참조.

  4. 리영희 「『창작과비평』과 나」, 『창작과비평』 1991년 봄호. 특집 ‘창간 25주년에 말한다’ 가운데 한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