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

[이중과제론] 근대의 이중과제란 무엇인가

*이 글은 『이중과제론: 창비담론총서 1』(창비 2009)의 서장입니다―편집자 주

 

이남주 李南周
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 정치학. 『창작과비평』 편집위원. 저서로 『중국 시민사회의 형성과 특징』 『동아시아의 지역질서』(공저) 등, 편서로 『이중과제론』 등이 있음.

 

1. 이중과제론의 전개와 구성

본서는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라는 화두를 던진다. 이는 꺼져가는 탈근대 논쟁의 불씨를 다시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랜 논쟁을 거쳤지만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더 많은 문제를 발생시켜온 탈근대 등의 개념을 차라리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고자 하는 것이다. 본서의 출발점은 근대 즉 자본주의 세계체제 속에서 국가 차원의 실천이든, 지역적 혹은 지구적 차원의 실천이든 대부분 실천들은 적응과 극복이라는 이중과제에 직면하고 있으나 이에 대한 이론적 탐색이 부족해서 여러가지 편향을 발생시키고 있다는 문제의식이다.

사실 남한사회를 계속 지배해온 것은 근대주의였고, 민중운동과 민족운동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1987년 종반부터 제기된 분단체제론은 명확하게 근대극복이라는 지향을 밝혔다. 이전의 일반적인 분단모순론에 비해 분단체제론이 새로운 점은 “분단현실이 부여하는 부정적 효과에 대한 강조를 넘어, 한반도 분단을 월러스틴이 제창한 세계체제론과 결합하여 분단현실을 체제로 규정하면서 분단을 극복하는 전망을 마련한 점인데, 그 장기적 전망이 근대극복론으로 발현된다”(송승철 228면, 이하 본서 인용 면수 표시)는 것이다.

1990년대 들어 남한사회에서 탈근대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당시 탈근대론은 근대주의 비판이라는 점에서 긍정적 역할이 컸으나 근대라는 역사적 단계를 지나치게 평면적으로 혹은 추상적으로 이해함에 따라 현실의 구조적 문제와의 대면을 회피하는 파편화된 실천 추구 경향이 강했다. 이에 따라 근대, 즉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위세가 한창인 현재를 ‘근대 이후’로 규정하거나 아니면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변화 없이 바로 근대 이후로 진입할 수 있다고 보는 탈근대론을 비판하기 위해 근대극복에 대해 더욱 체계적인 설명이 필요해졌다. 여기서 강조된 것은 근대극복에서 극복은 “어떤 대상을 극복하되 그 유효하고 값진 부분을 간직하면서 넘어선다는 취지”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1) 그리고 이중과제론을 처음 본격적으로 제기한 「한반도에서의 식민성 문제와 근대 한국의 이중과제」에서 백낙청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삶의 현실이 되어버린 근대 및 근대성을 제대로 감당할 줄 모르고서는 ‘근대극복’이 기껏해야 공허한 논의가 될 것이며, 심지어는 온갖 종류의 퇴행적인 정치적 입장이나 사회적 행위를 정당화하는 해로운 논의로 떨어질 수 있을 것”이라며 근대극복과 근대‘적응’ 혹은 ‘감당’의 과제를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제시했다(42면). 즉 근대극복론이 탈근대론과 상대하고 현실적인 근대극복의 전망을 찾는 과정에서 이중과제론으로 구체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중과제론적 인식은 그동안 분단체제론, 동아시아론, 그리고 최근 변혁적 중도주의론 등의 발전에 적극적인 역할을 해왔다. 그렇지만 이중과제론은 이러한 실천적 과제에 대응하기 위한 담론들 속에 녹아드는 방식으로 역할을 했으며, 이중과제론 자체를 이론화하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진행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2007년 대통령선거와 2008년 총선을 거치며 진보개혁세력 내의 균열이 심화되고 진보개혁세력의 진로를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중과제론을 발전시킬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창작과비평』 2008년 봄호에서 특집으로 ‘이중과제론’을 다룬 것이 본격적인 첫번째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본서는 이 특집을 기초로 엮은 것인데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이중과제론의 제기와 전개’란 주제하에 이중과제론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몇편의 글을 모았다. 『창작과비평』 1999년 가을호에 발표된 백낙청의 「한반도에서의 식민성 문제와 근대 한국의 이중과제」는 그전부터 사상적 저류에서 존재해왔던 이중과제론의 문제의식을 처음 본격적으로 제기한 글이다. 이남주의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한반도 변혁」, 백영서의 「동아시아론과 근대적응·근대극복의 이중과제」, 홍석률의 「대한민국 60년의 안과 밖, 그리고 정체성」 등은 『창작과비평』 2008년 봄호에 특집으로 실렸던 글을 보완한 것이다. 그리고 김영희의 「페미니즘과 근대성」은 본서를 위해 새로 집필한 글로 이 책의 문제의식을 한결 풍요롭게 해주고 있다. 이 글들은 각각의 관심분야에서 이중과제론의 구체화를 시도하고 있다.

제2부는 ‘이중과제론을 둘러싼 논쟁’으로 『창작과비평』 2008년 봄호 특집에서 이중과제론을 비판한 김종철의 「민주주의, 성장논리, 農的 순환사회」와 이에 대한 반론인 백낙청의 「근대 한국의 이중과제와 녹색담론」-본서에는 김종철의 재반론에 대한 백낙청의 비판이 담긴 ‘덧글’이 추가됨-을 묶었다. 이 글들을 통해 이중과제론의 실천적 함의를 더욱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제3부는 직간접적으로 이중과제론과 관련된 두 편의 글을 묶었다. 송승철의 「시민문학론에서 근대극복론까지」는 백낙청의 문학론을 역사적으로 검토하며 그의 근대극본론이 갖는 함의를 상세하게 분석한다. 최원식의 「세계체제의 바깥은 없다」는 『창작과비평』 1998년 여름호에 발표된 글로 근대완성이 근대 이후로의 이행 가능성을 봉쇄하는 딜레마를 소국주의에 대한 숙고를 통해 해결해가자는 주장을 담고 있는데 근대극복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해준다.

아래에서는 본서에 실린 글들의 주장을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가운데 이중과제론에서 논의되는 주요 개념들을 설명하고자 한다.

 

2. 이중과제론의 근대(성)에 대한 인식

탈근대담론은 대체로 근대를 총체성, 진리, 계몽의 체계로 본다. 리오따르는 “나는 이런 종류의 메타담론에 근거해서 스스로를 정당화시키고, 모종의 대서사에 공공연히 호소하는 모든 과학을 지칭하기 위해 ‘근대적’(modern)이라는 용어를 쓰겠다”며 근대를 정의하고 탈근대를 대서사에 대한 불신과 회의라고 주장했다.2) 근대(성)에 리오따르가 지적한 측면이 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지만 근대(성)을 내부에 이질적 요소가 없는 획일적 체계로만 규정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탈근대론은 근대(성)에 대한 성찰로부터 탈근대의 전망을 만들어가기보다는 탈근대에 대한 비역사적 규정에서부터 근대(성)을 구성했다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근대’라는 역사에서 균열하고 갈등하는 다양한 경향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본서에 수록된 김영희의 「페미니즘과 근대성」은 페미니즘 내에서 근대와 탈근대 사이의 다양한 긴장들을 추적하고 이를 이중과제로 연결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이른바 남성중심적인 근대적 개념이라고 비판받는 ‘이상’‘진리’‘주체’ 등을 재해석하려는 시도들이 계속되고” 있는 점을 주목한다. “이같은 시도는 (…) 근대성에 내장된 균열과 양면성에 주목하려는 흐름과 맞닿아” 있는 것인데, 김영희는 근대성을 단순한 폐기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성의 해방적 측면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에 기대를 표명하고 있다(133면). 송승철의 「시민문학론에서 근대극복론까지」도 백낙청의 근대성과 근대주의의 구분에 주목한다. 송승철은 이러한 인식이 근대성을 단순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질을 고양시키는 근대적 성취와 이데올로기로서의 근대주의를 구분해야 할 필요성”(233면)을 강조하는 것이며, 이는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ine)이 근대성을 ‘해방의 근대성’과 ‘기술의 근대성’이라는 이질적 함의를 같이 지니고 있다고 한 것과 맥을 같이하는 주장이라고 설명한다(227면).

물론 근대성의 억압적 측면을 극복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근대성이 갖는 복합적 측면을 고려하면 ‘근대성 극복’이라는 단순한 담론은 문제를 분명하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많은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따라서 이중과제론에서 ‘근대극복’이라고 말할 때는 근대성이 그 대상이 아니라 ‘자본주의 세계체제’라는 특정한 역사적 단계로서의 근대를 염두에 둔 것이다.3) 그리고 이 단계가 자본주의의 조기 멸망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동시에 ‘역사적 자본주의’가 언젠가는 수명을 다하리라는 신념에 기초한 것이라는 점에서 ‘근대극복’은 막연한 구호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근대를 견디며 근대극복의 가능성을 찾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 단계에서 필연적으로 제기되는 요구이다.

따라서 백낙청은 이중과제는 ‘두 개의 동시적 과제들’이 아닌 ‘양면적 성격을 지닌 단일과제’를 뜻한다고 강조하고 있으며 이중과제를 영어로는 ‘a double project’라고 표현했다.4) 이남주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한반도 변혁」에서 이중과제의 실천전략을 논의하면서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대한 대응방식을 추수, 탈출, 그리고 적응의 세가지로 구분하고 적응을 근대적 성취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극복이라는 의미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사용하자고 제안한다(57~61면). 이와같은 이중과제는 자본주의 세계체제하에서는 보편적 의미를 갖는 실천적 범주이지만, 실천의 구체적인 양상은 국가와 지역별로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따라서 ‘지금-여기’에서 근대에 적응하면서도 근대극복의 실마리를 찾는 것이 이중과제를 달성하기 위한 실천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3. 이중과제, 분단체제 그리고 복합국가론

분단과 통일은 미완의 근대적 과제로 여겨져왔다. 최근 한국에서 다양한 탈근대론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도 분단이나 통일 같은 민족서사에 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분단체제 극복이 극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를 달성하는 실천이라는 주장이 선뜻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분단체제의 극복이 근대극복의 실마리가 되는 것은 분단체제가 전후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한 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에 비롯한다. 사실 단순히 통일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분단체제 극복’을 제기한 것 자체에 이러한 인식, “한반도의 분단을 세계체제의 국지적 작용으로 이해”(백낙청 45면)하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분단체제를 극복한다는 것은 단순히 민족적 재통합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는 지역적·지구적 차원에서 변혁을 촉진시킬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길이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전일적 지배는 최근까지 줄곧 심화되어왔다. 그러나 그 지배는 지역간, 국가간 그리고 사회내 여러 균열 위에서 실현되는 것이지 매끄러운 평면 위에서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분단체제는 적어도 동북아에서 이러한 균열들이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작동을 위협하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해왔다. 따라서 분단체제의 극복은 당장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탈출하지는 못할지라도 신자유주의의 전일적 지배를 차단하고 민중의 요구가 더 적극적으로 반영되는 새로운 실험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평화체제 수립을 통해 동북아가 특정 패권국가가 지배하는 질서에 편입되지 않고 탈중심적인 협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들 것이다. 2000년의 6·15정상회담 이후 분단체제의 동요가 뚜렷해지면서 그 가능성은 점차 증가해왔다. 그리고 분단체제의 극복이 공상적 차원의 논의가 아니라 현실적 의미를 갖는 논의가 되고 있다.

분단체제가 무너진다는 것이 곧바로 어떤 더 좋은 체제의 등장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분단체제 극복은 단순히 남과 북이 모습 그대로를 유지한 채 통합해가는 것이 아니라 “남북의 점진적 통합과 연계된 총체적 개혁”의 과정이어야 한다.5) 이를 통해 분단체제를 더 좋은 체제로 변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홍석률의 「대한민국 60년의 안과 밖, 그리고 정체성」은 ‘선건설(혹은 선선진화) 후통일’ 같은 단계론이나 민족혁명 같은 통일우선론처럼 국민국가, 산업화, 민주화 등의 근대적 과제를 선후관계로 정립하는 것이 아니라 연관된 과제로 인식할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러한 총체적 인식이 근대극복의 가능성을 확장시킨다는 점이다. 즉 “평화적이고 타협적인 방식으로 통일한다면, 국가연합이든 체제를 달리하는 지역간의 연방제이든 최소한 기존 국민국가체제의 변형이 요구된다”(116면)는 것이다. “근대가 만들어낸 문제가 더 많은 근대성으로 해결되지 않을”(김영희 127면) 것이지만, 그렇다고 “‘탈근대’를 표방한다고 해서 그것이 근대 틀에 대한 진정한 극복이 되느냐는 또다른 문제”(김영희 130면)이다. 연합제나 연방제 같은 복합국가 구상이 근대에 대한 단순한 기각이 아니라 근대에 대한 적극적인 성찰을 통해 근대극복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한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복합국가가 근대적 과제를 완수하는 동시에 근대극복의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은 백영서의 「동아시아론과 근대적응·근대극복의 이중과제」에서 다시 강조된다. 이와 함께 그는 동아시아 차원에서 ‘이중적 주변의 시각’을 통해 이중과제를 진척시킬 수 있는 실마리가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이를 동아시아 공동체 논의로 진전시킨다. 그리고 복합국가는 “대만과 중국대륙의 이른바 양안(兩岸)문제나 오끼나와 문제를 포함해 일본(의 국민국가론)이 안고 있는 여러 난제를 해결하는 데 유용한 참조물”(97면)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복합국가론은 한반도의 개혁과 동아시아의 새로운 질서 형성을 연결시킬 수 있는 매개로도 주목을 받는 것이다.

 

4. 한반도 변혁에서 동아시아의 새로운 질서 형성으로

복합국가라는 발상이 동아시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동아시아의 대부분 국가들이 ‘국민국가에의 적응과 극복’(백영서 93면)이라는 이중과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에서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은 식민화과정을 거치며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현재 동아시아지역에서는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근대적 과제가 여전히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한반도의 분단, 중국대륙과 대만, 그리고 일본과 오끼나와 등 같은 하나의 국민국가를 지향하는 단위 내에서 발생한 문제들은 물론이고, 영토분쟁과 역사갈등 같은 국민국가들 사이의 문제들도 불행한 역사의 유산들이다.

이런 현실 앞에서 국민국가를 부정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 국민국가는 아직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근대적 성취와 계몽기획의 실현을 위한 유용한 수단이다. 특히 동아시아지역 차원에서는 국민국가들 사이의 정상적 ‘국제’관계 형성이 여전히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이다. 식민화와 냉전체제하에서 동아시아는 아직 한번도 정상적인 국제관계를 발전시키지 못했으며, 특히 한반도는 분단국가라는 두개의 기형적인 국민국가를 보유하는 상태에 머물렀다. 냉전체제가 해체된 이후에야 미완의 관제를 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이 비로소 열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국민국가의 완성, 국민국가간의 질서 형성이라는 것에만 매달려서는 문제를 악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최근 민족주의적 정서가 서로 충돌하여 국가간 갈등을 조장하는 것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더구나 지역내 교류나 협력도 국민국가간의 관계를 넘어서 다양한 수준으로 발전되고 있는 추세에서 국가 차원에서의 협력만으로 대응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동아시아 차원에서 ‘국민국가들간의 정상적 관계’를 만들어가는 동시에 ‘국민국가들간의 질서를 넘어서는 지역협력’을 동시에 발전시켜야 한다.6) 한반도를 포함해 각 국민국가에서 내부의 문제를 복합국가와 같이 국민국가에 대한 더 유연한 접근으로 해결해간다면 지역적 차원에서 국민국가간의 관계에 대한 압력을 약화시킬 수 있고, 이들 사이의 문제를 더 적절하게 처리할 수 있는 제도적·문화적 조건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과제를 더욱 발전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에서 국가정체성에 대한 발본적 성찰이 필요하다.

최원식은 「세계체제의 바깥은 없다」에서 ‘대국주의와 소국주의의 내적 긴장’을 견지함으로써 국민국가를 새로운 시대적 조건에 맞추어 새로 구성해갈 것을 주장한다. 즉 한반도로부터 내적 탈주를 기도하면서 민족주의라는 이름 아래 대국주의를 꿈꿔온 것이 한때는 가난을 뚫고 민족을 보위하고 민중의 생명력을 보존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해왔으나, 이제는 부국강병적 대국주의로 변해가고 있으며 IMF사태를 거치면서 그 폐단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국주의적 지혜를 발휘해 대국주의적 열망을 견제하고 전지구화, 지역화, 지방화라는 복합적 도전에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248~49면). 그리고 이러한 문제가 한반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의 충격 속에 잃어버린 자존을 회복하기 위해 대국굴기를 꿈꾸는 중국, 패전의 폐허를 딛고 이룩한 경제대국을 바탕으로 ‘보통국가’로 부활하려는 일본, 분단과 전쟁의 고통 속에서도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달성한 드문 경험을 먹이로 통일을 지향하는 한국, 세 나라 모두에 대국의 꿈이 비등한다”고 하면서 대국주의가 동아시아의 새로운 평화질서의 형성을 가로막는 가장 중요한 장애라고 지적하고 있다.7) 여기서 소국주의에 대한 숙고는 분단체제 극복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평화적 지역질서를 만들어가는 사상적 자원을 다지는 의미도 갖게 된다.

 

5. 이중과제론과 남한사회의 개혁

이중과제론이 분단체제 극복에서 동아시아로 시야를 확장한 이후 최종적으로 돌아올 곳은 다시 남한사회의 개혁과 발전이다. 앞에서 분단체제 극복을 “남북의 점진적 통합과 연계된 총체적 개혁”,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질서의 형성과정을 “동아시아를 구성하는 국민국가들간의 통합과 연동되어 개별 국가의 내부개혁이 진행”되는 쌍방향적인 작용과정(백영서 90면)이라고 설명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이중과제의 실천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장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간단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이중과제론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제기하는 김종철의 「민주주의, 성장논리, 農的 순환사회」는 본서의 논의에 활기를 주는 역할을 한다. 김종철의 여러 문제제기에 대해서는 백낙청이 「근대 한국의 이중과제와 녹색담론」에서 반론을 했고 다른 곳에서도 추가논의가 진행된 바 있으며 이 책에 글을 수록하면서 ‘덧글’을 추가하기도 했기 때문에 여기서 상세히 다룰 필요는 없다.8) 그러나 성장, 발전 문제에 관한 이중과제론의 입장을 문제삼은 김종철의 지적들은 이중과제론이 갖는 함의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다시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 부분이 세계관에서 여러 공통점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 구체적 실천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는 하나의 분기점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백낙청은 근대적응 방식의 하나로 ‘적당한 경제성장’‘자기방어적 성장을 꾀하는 전략’을 제시했다. 이는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견디고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특정시기 특정지역에서 이 현실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살고자 하는 처지에서의 ‘구체적’ 대응전략으로 제시된 것이다(179~80면). 반면 김종철은 ‘적당한 성장 개념’을 전면 부정한다. “사람들이 흔히 믿고 있는 것과는 달리, 경제성장은 민주주의의 발전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147면)거나, “실제로 경제발전은 민중의 ‘빈곤’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빈곤의 근대화’를 초래한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159면)는 인식에서 나온 주장이다.

이러한 인식의 격차가 쉽게 좁혀지지는 않겠지만 과연 어느 지점에서 차이가 발생하는지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양자의 차이가 애초의 출발점부터 다른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쉽고 논의가 생산적으로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먼저 자본주의하에서 경제성장이 불평등구조를 심화시킨다는 김종철의 주장은 백낙청을 비롯해 많은 필자들이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중과제론이 주목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모든 실천주체에 대해 전일적 지배를 실현할 수는 없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철폐하지는 못하더라도 자본주의의 부정적 영향을 제한하는 성장이 반드시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남주는 브로델(Fernand Braudel)의 자본주의에 대한 정의를 끌어와 그것이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님을 강조한다. 브로델은 자본주의가 시장경제와 구분되는 영역(독점적 영역)이며, 자본주의는 시장경제에 대한 배제가 실현되는 영역으로 반시장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시장은 평등화를 지향하는 일과 통할 수도 있다(63면). 시장경제가 자본주의를 통제할 수 있다는 낙관적 전망까지는 아니더라도 양자 사이에 ‘적응’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는 균열을 인식할 필요는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 활용이 쉬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현실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가 나타난다. 인위적 활동에 의해 추진되는 성장이 자연과 인간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상황은 반드시 자본주의에서만 발생한 문제는 아니며 농업사회에서도 그런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농업문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황허(黃河)의 경우 둑을 쌓아 치수를 하는 방식 때문에 둑 안의 하상에 토사가 누적되면 다시 더 높은 둑을 쌓는 과정이 수천년간 지속되어왔다. 그래서 현재 일부 지역에서는 강바닥이 둑 밖의 평지보다 20미터가 높은 곳이 있다. 그리고 끊임없는 계층분화도 대부분의 농업사회가 피할 수 없던 문제였다.

발전과 인간관계, 자연 사이의 부조화는 인류가 견디고 지혜를 발휘하여 대처할 문제이지 눈을 돌린다고 벗어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논어 ‘헌문(憲問)’ 편에는 공자를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려고 애쓰는 자”라고 칭한 대목이 나오는데, 이는 유가에 대한 도가의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자 역시 도가 행해지기 어려운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입세(入世)해 그것을 위해 애써야 한다는 내면적 요구를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물론 공자가 이룬 성취는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이중과제론의 현실에 대한 태도도 이와 같다. 즉 도가적 꿈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을 대면하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를 찾고자 하는 태도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더디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많은 사람과 함께 진전을 이루어가는 ‘중도’의 지혜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본서는 긴장과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현실에 더 적극적이고 과학적으로 대면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우리 사회의 중대한 전환기에 현실에 내재하는 긴장을 쉽게 해소하려 하지 않고 이러한 긴장들을 견디며 살아가는 것이 더 절실하게 요구된다는 점을 독자들과 함께 느낄 수 있다면 편자와 필자들에게 무엇보다 큰 격려가 될 것이다.

 

2009년 4월
엮은이 이남주

 

  1. 그 의미는 흔히 지양(止揚)으로 번역되는 독일어의 Aufheben의 의미와 같은 것이다. 백낙청 「민족문학론, 분단체제론, 근대극복론: 단상 몇개」, 『창작과비평』 1995년 가을호 19~20면.

  2. 장 프랑쑤아 리오따르, 유정완·이삼출·민승기 옮김 『포스트모던의 조건』, 민음사 1992, 33~34면.

  3. 백낙청·백영서·김영희·임규찬 「회갑을 맞은 백낙청 편집인에게 묻는다」(1997.12.23), 『백낙청회화록』 제4권, 창비 2007, 29면.

  4. 백낙청 「다시 지혜의 시대를 위하여」,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 창비 2006, 115면.

  5. 백낙청 「6·15시대의 대한민국」, 앞의 책 30~31면.

  6. 이남주 「동아시아협력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 백영서 외 『동아시아의 지역질서』, 창비 2005, 398~403면.

  7. 최원식 「대국과 소국의 상호진화」, 『제국 이후의 동아시아』, 창비 2009, 21면.

  8. 김종철은 『문학동네』 2008년 겨울호 대담 「“이것은 문학이 아니다”」에서 백낙청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을 하고 백낙청은 본서에 실린 「근대 한국의 이중과제와 녹색담론」에 덧글을 달아 이에 대한 추가설명을 했다. 그리고 이일영 「촛불의 경제학: 한반도경제의 미시적 기초」, 『창작과비평』 2008년 가을호 74~76면에서도 김종철의 농적순환사회론에 대한 비판적 논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