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미디어

[페이스북] 한겨레 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제안

지난 3월 한겨레신문 주주총회를 앞두고 ‘창간 원로’에 해당하는 몇몇 인사가 한겨레 지배구조개선에 대한 제안을 회사측에 제출했습니다. 저도 서명자의 하나로 참여했지요. 한겨레 김현대 사장이 자신의 선거공약과도 일치하는 이 제안을 사원들과 공유하고 주총에서도 보고했는데, 관련된 기사가 <미디어오늘>에 나왔군요. 참고들 하시기 바랍니다.

지배구조개선은 한겨레의 장기적 발전을 위한 하나의 출발점에 불과하고 시대와 언론환경의 변화, 언론인 체질의 변화 같은 더 근본적인 과제가 있습니다. 이는 장기적 대응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지배구조개선 이전에도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할 문제입니다. 그러려면 신문사 내부의 치열한 토론은 물론 사회적 공론화도 필요할 텐데 <미디어오늘> 기사가 그에 일조하기를 기대합니다.

참고로 제안서 전문도 복사해 붙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

한겨레신문 지배구조 개선을 제안합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새로운 기로에 서 있습니다. 촛불시민들의 힘으로 되살려낸 민주주의는 사회적 불평등과 양극화의 심화, 권력기관 개편과정에서 빚어진 갈등 그리고 그런 갈등을 조장하며 적극 활용하는 적폐세력의 반격 앞에서 흔들리고 있습니다. 신냉전이 운위될 정도로 심화된 미국과 중국의 대립 및 악화된 한일관계, 그리고 새로운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남북관계도 우리의 안위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전지구적인 팬데믹과 기후위기로 상징되는 생태위기는 더욱 근원적 위협을 제기하며 끊임없이 성장만을 추구해온 기존의 발전모델에 대한 성찰과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상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미증유의 위기에 대처해 우리 사회가 나아갈 올바른 방향을 찾아가는 데 언론이 해야 할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분석해주고, 시시비비를 명확하게 가리며, 건강한 공론의 장을 열어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함께 대안을 찾고 사회적 합의를 이뤄갈 수 있게 하는 일이야말로 사회적 공기인 언론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언론이 그런 사명을 다하고 있다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역대 최고 수준의 언론자유를 누리면서도, 가장 낮은 신뢰를 받고 있는 우리의 언론 현실이 그 방증입니다. 바로 이런 언론 현실은 한겨레신문의 책임을 무겁게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한겨레신문은 단순히 여러 매체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언론 본연의 사명을 방기한 채 사익추구에 매진해온 기존언론에 실망한 시민들이 “진실로 국민 대중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참된 신문을 갈망한 나머지 없는 호주머니 돈을 털어” 만든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신문이기 때문입니다.

1987년 민주화운동의 귀중한 결실로 탄생한 한겨레신문은 이제 5월이면 창간 33주년을 맞습니다. 여러 가지 응축된 모순이 해결을 기다리고 있는 2021년 현재의 시점에서, “비뚤어진 민족 언론사의 정통성을 바로 잡아 계승”하고, ”언론의 정도를, 언론의 진실과 용기를 이 땅에 새로 구현”하며, “오로지 국민 대중의 이익과 주장을 대변하는 참된 국민신문”이 되겠노라 자임했던 한겨레신문의 지난 33년이 과연 그 약속에 값하는 시간이었는지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해볼 필요가 있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민주주의적 가치의 온전한 실현, 민중의 생존권 확보 그리고 분단의식 극복 및 민족통일이란 한겨레가 추구해온 핵심가치를 제대로 지켜왔는지, 그리고 언론기업으로서 자본의 압력에 흔들리지 않고 추구하는 핵심가치를 지켜갈 수 있을 정도의 물적 토대를 구축했는지 등에 대해서 말입니다.

물론 한겨레인들이 빈약한 물적기반의 한계를 가진 채 어려운 대내외적 환경에 맞서 고투를 벌이며 33년간이나 이 신문을 지켜왔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평가할 만한 일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한겨레의 논조에 실망하기도 하고 때론 안타까워하면서도, 한겨레 창간에 밑돌을 괴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래도 한겨레’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것은 한겨레인들의 그런 고투와 희생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지난 33년간 한겨레는 상시적인 경영위기에 시달리며 앞으로 나아가기보다는 그 자리에 맴돌거나 부분적으로는 퇴행하면서 창간 당시에 약속한 ‘참된 국민신문’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지 못했다는 게 냉정한 평가일 것입니다. 그렇게 된 원인에는 디지털 시대의 도래로 상징되는 미디어를 둘러싼 기술환경의 급속한 변화와 금권세력의 지배력 확대처럼 전통적인 언론매체들이 공통으로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동시에 한겨레만의 고유한 문제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한겨레의 질적 도약을 가로막은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지배구조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지배주주가 없이 6만여명의 소액주주로 이뤄진 한겨레신문에선 창간 초기부터 최고경영자를 뽑는 시스템을 둘러싼 논란이 거듭되어 왔습니다. 창간위원회 추천제와 경영자추천위원회를 통한 간선제를 거쳐 90년대 후반부턴 사원들에 의한 사장 직선제가 운용되고 있습니다. 사장 직선제는 사내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의미부여되어 왔지만, 선거과정의 편가르기로 인해 내부 갈등을 야기하고 매 2~3년마다 대표이사가 교체됨으로써 안정적 리더십을 창출하지 못해 회사의 장기적 발전전략을 세우는 것을 어렵게 만들어온 것 역시 사실입니다. 또 대표이사의 잦은 교체와 그에 따른 편집국장의 더 잦은 교체는 한겨레 구성원들이 장기적인 편집방침이라 할 창간정신을 공유하고 유지·계승·발전시키는 일을 어렵게 만들었고, 그것이 지면의 논조를 둘러싼 갈등을 야기했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사내 주주에 의한 사장 직선제의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주주총회에서 사내주주들이 선출한 사장을 인준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형식에 그칠 뿐이고 실제로는 최고경영자 선정과정에 80%가 넘는 사외주주들의 의견을 반영할 정당한 권리를 침해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특히 창간 당시의 주주들은 출자자로서뿐 아니라 사외인사인 경우에도 한겨레의 후원자, 보급자, 필자 등으로 누구 못지않게 기여한 분들이 많고 여전히 한겨레가 소중히 여겨야 할 자산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발언권을 못 가지다시피 되었습니다.

한겨레 내부에서도 직선제 등 현재의 지배구조가 내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그 대안을 찾기 위한 노력이 전개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창간 30주년을 맞아 발간한 사사 <진실의 창, 평화의 벗>은, 2007년 지배구조 개선을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됐던 서형수 사장 이래 역대 대표이사들은 물론 노동조합에서도 지배구조 개선방안을 다양하게 검토해왔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추천위원회 제도에서부터 시민선거인단 제도 그리고 한겨레신문사를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고 외부에 사외이사 추천권을 배분하는 방안 등 다양한 방안이 대안으로 제시되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한겨레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해선 현재의 사장 선출제도를 비롯한 지배구조를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식에 대한 광범한 공감이 실질적인 제도 변화로 이어지지 못한 채 10수년의 세월이 흘러가버렸다는 점입니다. 그 사이 한겨레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는 갈수록 떨어져 ‘그래도 한겨레’라며 지지하고 성원했던 분들의 마음조차 사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지배구조 개선만으로 현재 한겨레가 당면한 모든 문제를 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배구조 개선 없이는 한겨레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습니다. 예컨대 종이신문의 쇠락이라는 대세 속에서 한겨레의 ‘디지털 전환’ 또는 ‘디지털 강화’의 대안이 거론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한겨레 자체의 쇄신과 지면의 내실화 없는 디지털화는 클릭수에 목을 매는 황색신문으로의 전락 아니면 존재감의 상실로 이어지기 십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현대 사장도 사장 선거 당시 지배구조 개선을 공약으로 내세웠던 것으로 압니다. 이제 기업으로서의 한겨레의 지속가능성은 물론이고, 한겨레의 창간정신을 지키고 새로운 시대에 발맞추어 더욱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서도 더 이상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이번 주주총회에서 우리는 김현대 사장에게 스스로 공약한 지배구조 개선을 논의할 단위를 시급히 구성하고 늦어도 2022년 주주총회 전까지 그 구체적 개선방안을 제시해주도록 요청하는 특별결의 채택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그 구체적 방안에는 대표이사 선임에 사내 주주뿐만 아니라 외부 주주의 의견을 반영할 장치와 장기적 전망에 바탕한 경영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가 포함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이번 논의가 또 한 차례의 논의로만 끝나지 않고,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질 수 있는 방안 역시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제안을 하는 까닭은 그것이 “진실로 국민 대중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참된 신문을 갈망한 나머지 없는 호주머니 돈을 털었던” 민주 시민들이 만들어놓은 우리 사회의 귀중한 유산인 한겨레를 한겨레답게 만들고, 그 한겨레가 오래도록 우리 사회의 나침반의 역할을 해나갈 수 있는 힘을 만들어갈 수 있는 길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모든 신문매체가 위기에 빠진 지금이야말로 한겨레가 오히려 도약할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한겨레신문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2021년 3월 16일

제안자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 김중배 (언론광장 상임대표·전 한겨레신문 사장), 임재경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초대 한겨레신문 부사장), 장윤환 (초대 한겨레신문 편집위원장·논설주간),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염무웅 (영남대 명예교수), 현기영 (소설가) 함세웅 (신부·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신인령 (이화여대 명예교수·전 이화여대 총장)
권태선 (전 한겨레신문 편집인), 김서중 (성공회대 교수·민언련 상임대표), 김정헌 (화가·416재단 이사장), 김형배 (한겨레 사우회장), 김호철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박석운 (진보연대 상임대표), 박우정 (한겨레 전 논설주간·도서출판 길 대표), 백승헌 (변호사·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회장), 성한표 (전 한겨레신문 부사장) 신홍범 (전 한겨레신문 논설주간), 이부영 (자유언론 실천재단 이사장), 이선종(원불교 교무·은덕문화원 교령), 정강자 (전 참여연대 공동대표), 조은 (동국대 명예교수)

2021.4.9.
https://www.facebook.com/paiknc/posts/3912468495455730